|
2023년 아산 UBF 특강 제 13 강 메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말씀 : 마태복음 12 : 1-21
요절 : 마태복음 12 :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전에는 성과를 중시하였습니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문제있다고 보았습니다. 요즘은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를 낼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것을 제거해주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서 기회를 줍니다. 성과보다 사람을 중히 여기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을 살펴주시고 연약한 우리 영혼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성전보다 더 큰 이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길가의 밀이삭을 손으로 따 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았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 39가지를 규례로 제정하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쉬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한 날입니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세부 규칙과 규정을 만들어서 추가하였습니다. 그들의 규칙과 규정에 제자들이 위반한 사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딴 것은 "추수"행위, 껍질을 까기 위해 손으로 밀 이삭을 비빈 것은 "방아찧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추수"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개 항목 중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3절에서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답해주십니다. 성전 제반 사무를 위해서 일하는 레위인들은 직업도 없고 땅도 없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을 도와서 성전에서 여러 일을 하도록 한 사람들입니다. 레위인들은 안식일에 양을 잡아도 예외요 불을 지펴도 예외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직업 없이 풀타임으로 예수님을 동역하고 보좌하며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전 사무, 성전 사무 보조에 종사하는 레위인들도 예외로 해주는데, 예수님을 섬기고 동역하는 제자들에게는 더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다윗왕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성전의 진설병(떡)을 배고파 찾아온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어겼다고 다윗과 아비아달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레위인들은 성전 섬기는 사람이라고 예외를 인정한다면 성전보다 더 위대하신 분, 성전의 주인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성전이 의미가 있는 것은 성전이 하나님께 나오는 통로이며, 오실 메시야를 예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구조와 기능들은 오실 메시야와 메시야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자체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대로 오시는 메시야 구속사역의 예표로 성막을 만들게 하셔서 세부 구조들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시기 전까지 불완전하나마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수 있도록 한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완전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성전은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성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 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규례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빠져있습니다. 세부조항에 집착하며 자비와 사랑을 잊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로와 배고픔에 지친 여행객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도록 낫을 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누구나 손으로 길옆의 곡식 이삭을 따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지친 우리가 쉼을 얻고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입니다. 율법도 안식일도 근본은 긍휼과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바리새인들은 나름의 열정과 열심은 있었으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을 창설하신 분이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회당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배우는 곳에 여전히 예수님을 감시하는 눈길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율법에 의하면 생명이 위중한 환자는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손 마른 사람은 당장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환자는 안식일에 고쳐도 되는가 아니면 다음 날로 치료를 미뤄야 하는가 묻습니다. 지금 이들은 한 손이 말라 일생 고통스럽게 사는 한 생명을 예수님 앞에 등장시켜 놓고는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서 시험을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음에 품은 생각을 아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는 고발하려는 유대인들 앞에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지적하시고 정면으로 부딪치셨습니다. 당시 안식일의 세부규정에는 안식일에 새알만한 돌보다 더 무거운 물건은 들거나 옮겨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좋아하여서 그들의 재산인 가축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그런 규정에 상관없이 가축의 몸무게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들어 올려도 된다고 예외 규정을 정해 놓았습니다. 짐승도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 올려주는데,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이 손이 말라 수치심과 열등감과 저주의식의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데, 끌어내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마른 손을 내밀은 그 사람의 손을 예수님께서 즉시로 회복하여 온전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릇된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규례보다 더 중요함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마른 손을 낫게 해주시고 이로부터 본격화된 종교지도자들의 흉계로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마가복음 3:8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한 사람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신 일을 일컬어 성경은 "큰 일"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사람 어린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2.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15-21)
종교지도자들이 실행 규칙에 집착하느라 핵심을 놓치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다 받아주시고 그들의 질병과 연약한 것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성경은 이렇게 풀어 기록하였습니다.
18절에서 21절 전반 절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1)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다투는 것은 욕심이 있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욕심이 많아서 남보다 더 가지려하고 남의 것도 빼앗으려 하는 곳에서 다툼이 납니다. 큰 소리가 나고 시끄러운 것은 자기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치유해주셨다고 해서 알아달라고 하지 않으셨으며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이용하여 땅위에 왕국을 세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늘 복종하시며 겸손과 온유함으로 섬기셨습니다. 다투지 않고 큰 소리가 나지 않아 길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얼마나 겸손하시고 부드러운지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고대에는 갈대로 피리를 만들었습니다. 양치는 목동들이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서 양칠 때 사용했는데, 상한 갈대는 피리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상한 갈대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등잔불을 사용할 때, 기름이 여유가 있을 때는 심지가 잘 타오르다가, 기름이 떨어져 가면 심지자체가 불에 타 그을음이 생기고 더 타들어 갑니다. 심지가 너무 많이 타들어 가면 등잔에 다시 기름을 부어도 심지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새로운 심지로 교체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미 꺾여 쓸모없는 갈대 같고 다시 재생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버린 심지 같은 인생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 인생은 상한 갈대와 같았습니다. 더 이상 재생 불가능한 심지와 같았습니다. 아무짝에 쓸모도 없고 다시 재생 할 수 없는 모습이 바로 나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아낌없이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자비와 긍휼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회당의 한 손 마른 사람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업적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에게 얼마나 이익을 가져다 줄 사람인지 생각하며 평가합니다. 사람이 변변치 못하여 주변사람에게 짐이 되고 폐가 되고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부담으로 느낍니다. 사업적인 사람들, 성과에 집착하는 사람, 이익중심적인 사람이라면 득은 주지 않고 부담을 주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마음에서 제외시킵니다.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며 예수님 앞에서 이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보이는 것입니까? 무슨 일에든 목표가 있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실행하여야 하는 실행 항목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안식일을 위한 실천항목을 실행하다가 그 와중에 얻는 것에 빠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근본 목표를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복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생활인으로써의 수고를 쉬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창설목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실행규칙과 실천항목을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실행규칙을 열심히 실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기의가 생겼습니다. 안식일 실행규칙을 철저하게 행하는 자신이 뿌듯하고 이렇게 실천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계도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행하나 행하지 않나 체크해야 겠다. 그러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안식일을 우리가 주관하여야겠다.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타인들을 향해서 눈을 고정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안식일 율법과 실천조항 준수하는 것을 안식일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안식일을 주관하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주관하고 자기들히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안식일을 예수님이 폐하려 한다고 여기고 예수님을 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이삭을 훑어 먹은 제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의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해하지 못할까요? 영어로 이해를 Understand라고 합니다. 이해는 아래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 오만하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인생 훈련 받아 본 적 없는 사람, 직장생활, 조직생활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아보지 않은 사람, 삶의 연단과 고난이 없는 사람이 노출하는 문제가 이해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관심 없고 연약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주변 사람이 무엇에 상처받는지, 주변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다른 사람이 나의 어떤 점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눈치도 없고 이해도 없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자기도 허물 많고 약점 많고 자기도 실수를 많이 하여 잘난 것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인생이 죄로 인하여 상한 갈대같이 되었고 꺼져가는 심지같이 된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해답을 듣고도 말씀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써 이런 것을 아지 못하느냐’는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38 년된 병자는 의존심에 누워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6명의 남자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세리 레위와 삭개오는 돈 버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삶의 목표가 잘못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또한 자기도 문제를 겪습니다. 우리 인생은 잘못된 습관 때문에 자신도 고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웁니다. 사람의 인정과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으려는 집착, 다른 인생을 가르치고 휘젓고 좌지우지 하려는 괴이한 열심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사람들에게 욕먹으며 삽니다.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인생은 상한 갈대 같은 인생, 꺼져가는 심지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이단 종파는 모든 문제를 귀신 탓으로 돌립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로서 어둠에 속하였습니다. 때때로 연약한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제어하여 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가 귀신 탓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의지가 있고 각자의 마음이 있고 내면에 감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계획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그 원죄가 인생을 타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인생을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이런 인생에게는 나쁜 열매가 나타납니다. 상처 주는 열매, 외면당하는 열매,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는 열매, 배신하는 열매, 배반당하는 나쁜 열매 이런 것들을 맺기에 우리 인생은 꺾어서 버려야 마땅한 것이 되고 꺼버려야 마땅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주장한대로 본인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율법으로 돌아와 율법을 지키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자기의가 생겨났습니다. 율법을 연구한 자신이 위대한 말씀의 종이라는 자부심이 솟아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오묘한 말씀의 세계를 맛보지 못한 채 어리석게 살고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겠지? 사람들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 조항을 앞세워 사람들을 누르고 통제하고 판단하는 괴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창설하신 목적과 목표가 있는데, 이런 것을 다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목적을 망각한 채, 실천조항을 실행하는 것에 대한 집착예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결국 죽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꺾어서 버려야 할 갈대 같이 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꺼버려야 하는 심지같이 된 우리 영혼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택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돈 좋아하기보다 다른 인생들에 관심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것만 사랑하지 말고 다른 영혼에게 관심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참고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편한 대로, 내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말하는 생활을 이제는 그만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헤아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의를 기울이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내가 좋을 대로 행동하는 것은 상한 갈대 같은 나를 사랑하시고 살아나게 해주신 예수님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 나, 내 말 그만하여야 합니다. 내가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누구를 만나든지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먼저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들, 주변 사람들을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사람들로 여기는 습관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주변 사람들의 벽이 되어주고 이제는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의 병풍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 중심, 자기 유익 중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중심, 자기 논리 중심입니다. 저 같은 586세대가 이전세대와 갈등을 벌이는 이슈는 우리는 이전세대가 성과중심, 일중심이라고 느끼는 것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하여야 할 시대 문제를 거론할 것이 있습니다. 2005년, 제가 대학에 와서 조심해야 했는데, 청년들 중에 나르시즘이 생각보다 많은 것입니다. 나르시즘은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자기의 중요성, 자기 업적, 자기 능력에 대한 과장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성공, 권력, 아름다움, 이상적 사랑에 대한 판타지에 몰두합니다.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과장하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요구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하고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동원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나 오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과거에 비하여 많아 보입니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정도차이는 있지만 이런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마다의 내면과 생활습관에 배어 있는 나르시즘을 극복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해주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 성과, 업적, 칭찬, 인정에 집착을 버리고 상처 많고 연약한 다른 영혼에 관심 가져야 합니다. 상처받고 연약하고 어려운 다른 영혼을 위한 치유와 변화를 위하여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주고 연약함을 감당해주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일보다 생명 중심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살펴주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내적 외적 치유의 역사,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풍성한 생명과 은혜의 역사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요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아산 UB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