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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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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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편영수 옮김, 민음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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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이든지 이제 막 떠나는 길이든지 길은 어디까지나 어딘가로 간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이 길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이 여러 갈래라면 어느 갈래의 길을 갈지, 새로 만드는 길이라면 어느 쪽으로 향하는 길일지 정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길을 선택하려면 물론 깊이 생각하고 잘 살피는 것이 필수입니다. 길의 끝에서 번번이 낭패를 당하는 것은 길을 잘못 선택해서일 겁니다. 애초에 맥락을 무시했거나 깊은 생각 없이 결정해서일 겁니다. 그러니 “목표는 있”어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마침내 “길이라고 부르”려면 이 제대로 된 “망설임” 이후가 될 것이고, 그러니 “망설임”이 곧 “길”일 겁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길이든지 새로 만드는 길이든지 일단은 가야, 떠나야 길입니다. 가거나 떠나지 않으면 길은 길로 불릴 수도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정치라는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실험이어야 해요.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그 결과를 아직 알 수 없어요. 비전Vision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니라 시간 지체가 필요합니다.” (한병철(1959-),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4, 148쪽)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의 말처럼 “정치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실험”입니다. 그러니 모험이, “실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 모험을, “실험”을 앞장서서 할 사람을 선정해야 합니다. 이 선정은 길이 가야만, 떠나야만 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떠나는 것’”이 “목표”이듯이 모험과 “실험”을 앞장서서 할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 일단은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의 선거판을 보자면 이런 점에서 “목표”가 없습니다. 어떤 후보들의 배제와 회피의 과정은 “비전”의 “실현” 이전에 애초에 그 정당의 “비전”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하게 합니다. 길은 길 자체로 길이 아닙니다. 가야만, 떠나야만 길입니다. 이것은 정치 또한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그러니 “단지 여기에서” “끊임없이 여기에서” 우리도 물론이지만, 정치 또한 “떠나”야 합니다.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떠나기도 전, “비전”은커녕 “‘여기-에서-떠나는’” “목표”마저 상실한 정치를 보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덤불은/옛날부터 길을 막아 왔다./네가 계속 나아가려면,/가시나무 덤불은 불태워져야 한다”(프란츠 카프카 위 시전집 68). 이런 정치를 끝내려면 준엄한 심판이 필요합니다.
민음사에서는 프란츠 카프카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카프카의 드로잉 60점을 포함한 시전집을 발간했습니다. 카프카는 『변신』, 『심판』, 『성』 등의 소설을 쓴 실존주의 작가로 익히 알려졌습니다. 시를 쓴 사실에 대해서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자면 카프카는 14세부터 생의 마지막 해까지 꾸준히 시를 썼다고 합니다. 다만 그의 시는 주목을 받지 못한 데다가 일기, 편지, 살아 있을 때 출판한 인쇄물, 유고 등에 시를 잘 숨겼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더욱 더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해서 이번에 발간된 시전집에 수록된 시는 일반적인 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카프카가 직접 행과 연을 구분한 텍스트 외에도 산문, 일기, ‘팔절판 노트’, ‘공책과 철하지 않은 종이 묶음’, 편지, 마지막 임종의 침상에서 작성한 메모 용지 등에서 시이거나 시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추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비교해서 보니 산문집 『관찰』에 수록된 짧은 산문 「인디언이 되고 싶은 소망」은 이번 시전집에 행을 나눈 시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산문은 한 편의 산문시로, 행을 나눈 시는 일반적인 시로 읽으니 각각 나름대로 읽히는 맛이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 소개한 시는 표제시가 된 시와 마지막에 수록된 시입니다. 옮긴 것처럼 대부분의 시가 제목 없이 일련번호 순으로 실려 있습니다. 번역된 시 텍스트는 일기, 편지, 노트 등에서 추려낸 것이 다수이지만 산문이나 소설에서 찾아낸 것도 꽤 있어 카프카의 작품에서 시 또는 시적인 것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새로운 카프카 읽기의 한 재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240320)
첫댓글 카프카도 드러내지 않고 시를 꾸준히 썼네요!
“가시나무 덤불은/옛날부터 길을 막아 왔다./네가 계속 나아가려면,/가시나무 덤불은 불태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