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제에 대한 노함 - 마음의 살인과 같은 분노와 비방의 위험
본문 :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참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 법을 어긴 적도 없고, 경찰서 한 번 가본 적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다’,
‘나는 적어도 범죄자는 아니다’라고 위안을 삼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그 평안한 양심을 통째로 흔들어 놓으십니다.
뜬금없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살인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아니, 예수님, 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러십니까?
난 평생 칼 한 자루 쥐어본 적이 없는데요?”라며 억울해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마음’을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1. 분노, 마음속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살인
여기서 "노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오르기조(ὀργίζω)'입니다.
이 단어는 일시적으로 확 타올랐다가 꺼지는 홧김의 분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묵혀두고,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키워가는 '지속적이고 끓어오르는 적대감'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저 '사람의 목숨을 물리적으로 끊지 않는 것'으로만 제한해서 생각했습니다.
칼로 찌르지만 않으면 율법을 잘 지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을 꿰뚫어 보시며 하나님의 원래 뜻을 드러내십니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행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방치하고 키워온 미움이라는 불씨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가인을 보십시오.
그가 아벨을 쳐죽이기 전에 먼저 일어난 현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4장 5절을 보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방치했을 때, 그것이 결국 겉잡을 수 없는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분노의 공화국' 같습니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 창을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송곳 같은 말들을 사정없이 찔러댑니다.
심지어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너는 왜 모양이냐"며 마음의 칼을 휘두릅니다.
옛날 어른들이 쓰시던 놋그릇을 아십니까?
놋그릇은 닦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공기 중의 가스 때문에 서서히 시커멓게 변색이 됩니다.
우리 마음의 분노도 그렇습니다.
"저 인간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그 생각을 매일 밤 곱씹으면,
어느새 우리 영혼은 시커먼 독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을 향한 생각을 딱 한 가지만 내려놓아 보십시오.
주님께 그 마음을 그대로 맡겨 드려 보십시오.
우리가 분노로 얼룩져 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분노는 마음속에 지속적인 적대감을 품고 키워가는 영적인 살인 행위입니다.
2. 비방의 말, 사람의 존재 가치를 말살하는 무기
예수님은 분노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인 유대인들의 언어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첫째로 형제를 향해 '라가(ῥακά)'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간다고 하십니다.
'라가'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욕설로, "머리가 텅 빈 놈", "가치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지성과 인격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둘째로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모로스(μωρός)'인데, 단순히 미련하다는 뜻을 넘어
"도덕적으로 쓸모없는 놈", "하나님도 없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영혼과 존재 자체를 저주하는 가장 심각한 신앙적 욕설이었습니다.
주님은 처벌의 수위도 높이십니다.
동네 법정인 '심판'에서 시작해, 최고 법원인 '공회(산헤드린)', 그리고 결국엔 '지옥 불(게헨나)'까지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아닙니다.
말은 마음의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간 무시의 말, 비꼬는 말, 정죄하는 말은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흔히 "뒤끝은 없다"면서 할 말 안 할 말 다 쏟아붓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뱉어낸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박혀 영혼을 좀먹습니다.
어느 목재소에 한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매일 화를 내고 거친 말을 하니까,
아버지가 소년에게 못 한 자루를 주면서
"화가 날 때마다 마당의 나무 울타리에 못을 박으라"고 했습니다.
첫날에만 수십 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시간이 지나 소년은 화를 참는 법을 배웠고, 마침내 못을 다 뽑아냈습니다.
기뻐하는 소년에게 아버지가 울타리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못은 다 뽑았지만, 울타리에 남은 깊은 구멍들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우리가 뱉은 상처 주는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영혼에 이 울타리 구멍 같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기도 제목이 있어서 그런데..."라며 거룩한 포장지를 씌워 다른 사람을 은근히 깎아내리고 험담하곤 합니다.
주님은 그 은밀한 언어의 살인을 다 듣고 계십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직설적이야"라는 핑계 뒤에 숨어,
내 혀로 수많은 사람의 존재를 난도질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입술의 모든 말이 하나님 앞에 다 기록되고 있음을 무겁게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비꼬거나 평가하는 말 대신,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 보십시오.
우리의 입술을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숯불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언어는 살아납니다.
상대를 무시하고 저주하는 비방의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3. 복음의 능력, 우리 안의 분노를 녹이는 십자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
만약 이 설교가 여기서 끝난다면, 우리는 모두 절망한 채 이 예배당 문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입으로 사람을 깎아내려 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지옥 불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율법은 이처럼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복음이 개입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은 우리에게 "너희 스스로 분노를 참아내라"고 다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의 의지로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오직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며 원수 노릇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의 칼을 뽑아 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진노를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라가"라며 침을 뱉고, "미련한 자"라며 조롱했습니다.
온갖 멸시와 언어폭력, 그리고 살인의 분노가 예수님의 몸과 영혼을 짓찢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내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원수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만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나님께 지은 원수 된 죄가 훨씬 더 컸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은혜로 용서받았음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의 얼굴 대신,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오늘 먼저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굳은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분노와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화평을 선물하셨습니다.
4. 오늘 우리가 돌이켜야 할 화해의 걸음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서 1:20)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인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노의 문제를 다루시면서 아주 파격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제단 앞에 왔다가도, 누군가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
즉 내가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았거나 상처를 준 일이 생각나거든,
당장 예배를 멈추고 가서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피 흘리게 해놓고 와서 드리는 가식적인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관계의 회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관념적이어야 하지 않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오래 품은 미움의 독을 빼내야 합니다.
"저 인간은 절대 용서 못 해" 하며 마음에 품고 있는 송곳을 이제는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움을 붙들고 있는 동안, 영혼이 가장 먼저 망가지는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말의 습관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내 기분대로, 내 직성이 풀리는 대로 내뱉던 거친 언어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 입술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도록 성령의 다스림을 구해야 합니다.
거룩한 척 예배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내 삶의 자리에는 여전히 맺힌 관계들이 널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원인 제공을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내려놓고,
내 안의 성냄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당장 소원해진 가족이나 교우에게 "그동안 미안했다"는 짧은 문자 한 통, 혹은 따뜻한 안부 전화 한 통을 먼저 보내 보십시오.
우리가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구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삶의 현장에서 형제와 화목하기를 힘쓰며 말과 마음의 태도를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칼로만 죽지 않습니다.
싸늘한 눈빛으로도 죽고, 멸시하는 말 한마디로도 죽고,
철저하게 외면하는 침묵으로도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깨끗해 보이는 손만 보지 않으시고,
피비린내 나는 우리 마음의 골방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내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밤잠을 설치며 복수를 다짐하는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철저한 무능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정죄의 칼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찢으신 십자가였습니다.
그 과분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언제까지나 형제를 향해 칼을 품고 살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미움을 그럴듯한 핑계로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미움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용서를 배우고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결단은 작지만 주님의 은혜는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분노보다 강합니다.
그 십자가의 화평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입으로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에서는 살인의 피비린내 가 진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