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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생태학적 상상과 ‘꿈의 하늘’
고명수(시인, 동원대 교수)
1. 꿈의 하늘을 향한 기나긴 여행
「환상과 정신」이라는 시론에서 시인 박제천은 사람의 상상력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는 것이 서구의 예술에서 배운 것이라면, 사람의 세계와 사람이 없는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정신이라는 것을 동양에서 배웠다고 진술한 바가 있다(영혼의 날개, 1983). 초기의 시에서 상상력의 극한을 탐구하던 그는 이후의 시에서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기나긴 장정을 꾸준히 이어간다. 서양인들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과학문명을 발전시켜 온 데 비해, 인간조차 자연의 일부로 여겨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했던 동양인들의 태도와 정신세계가 시인 박제천의 생리에 더욱 잘 맞았을 것이다. 시론 「꿈의 하늘」에서 표명하듯 그는 “무작정 하늘로 올라가려고 떼를 지어 바벨탑을 쌓았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받았다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볼 때 용이며 봉황이며 붕새를 하늘에 노닐게 한 동양인의 의식구조”가 동양인인 그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크리드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과학정신은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현대의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켰으며, 회색빛 시공에 갇힌 현대인들은 ‘꿈의 하늘’을 잃어버린 채, 삭막한 삶을 살고 있다. 시인의 역할은 바로 분주한 일상 속에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의 하늘’을 되찾아주는 일이 아닐까? 시업 50년 동안 박제천 시인이 추구해 온 ‘꿈의 하늘’로의 여행은 이제 고대와 현대를, 문명과 자연을, 동과 서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양쪽을 신비적으로 융합하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2. 생태학적 상상과 신화로서의 몸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인의 의지로 인하여 다양한 몽상들이 형성된다. 이것은 강렬한 호기심으로부터 나오는 상상력이다. 이때의 상상력은 사물의 내부를 무한정 보려는 열렬한 소망으로 관음증적 호기심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특징 중 하나는 거리조절이나 경계의 두께를 넘어 무한히 확장된다는 점이다. 무한히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고[其大無限] 거리를 좁히다 못해 눈 속으로 사물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其小無內]. 외면 세계에서 내부세계로 경계를 넘어서면 내밀한 공간이 나오는데, 이 공간은 무한히 넓지만 낯섦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의 관계를 뒤집는 현상으로, 우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몸의 내부이지만, 그 내부를 향해 몰입해 들어가기 시작하면 우주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상상력의 구현 때문이다.
청나라 때 내경도內徑圖를 보면
내 안에
산과 강, 들과 숲, 바위가 있단다
생각해보니 산에는 산짐승, 강에는 물고기,
들과 숲에는 사슴도 있고, 늑대도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아침이며 밤도 있고
꽃 피고 지고 봄 가을이 찾아오는 계절도 있어
내 안의 산천경계를 유람하려면 꽤나 바쁠 것 같다
그래도 좋겠지, 그렇게 바쁜 날에도 한순간
회오리바람을 타고 내 안의 하늘로 올라가
구름 위에 벌러덩 누워 남명이나 다녀오면 더욱 좋겠다
어이, 친구들, 휴가는 없나
내 안에 사는 내게 카톡을 해보았더니
죽어서 영생 휴가를 받을 텐데
뭐 그리 급하시나, 실실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준다
저쪽 나라에서는 쉬고싶으면 로봇처럼
잠시 전지를 빼놓던데, 내 안의 붕새가 중얼거린다
회남자 가로대 새옹지마라 한다
이쪽 나라에서 바쁘게 사는 것도 복받은 인생일지니.
―「유람 천하」 전문
인체란 외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신비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아직 탐험할 곳이 많은 거대한 대륙(칼 짐머,기생충제국)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학적 상상’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상상하는 데 있어서, 생태계의 특징에 따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생태학적 상상은 인간의 ‘신체’와 관계 지을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체적 ‘체험’을 통해서 생태학적 합일을 몸소 실천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임현정,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도교의 신체관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미지화한 그림으로 중국의 청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경도」를 상상의 매개로 삼아 시상을 전개한다. 인간 신체의 내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마치 지도를 보는 것처럼, 신체를 이미지화 한 것이지만, 산, 들, 바위, 강 등 자연적 요소와 시인의 상상은 유비적 감응 관계에 있다. 화자는 산과 강, 들과 숲, 바위 등으로 이루어진 ‘내 안에 있는 산천경계’를 유람하려면 꽤나 바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내 안의 하늘’로 올라가 ‘남명’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한다. ‘남명’이란 익히 알고 있듯이 장자의 「소유유」편에 나오는 남쪽바다이다. 이 남쪽 바다에는 분명 붕새를 타고 갔을 터이다. 이러한 도가적 상상과 사유는 이윽고 현대문명의 이기를 상징하는 ‘카톡’이나 이모티콘 등의 수단을 통해 현실의 세계에 사는 내가 상상의 세계에 사는 나와 교신을 한다. 자유분방한 상상을 통해 화자는 ‘휴가’조차 없는 현실적 삶의 분주함의 노고조차도 뛰어넘어 “죽어서 영생 휴가를 받을 텐데 뭐 그리 급하시나”라는 위안에 가볍게 도달한다. 융 심리학의 용어로 말한다면 심층의 ‘자기self’가 현실의 ‘자아ego’에게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말미에는 한漢대의 도가사상가인 회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인생만사가 변화무쌍함을 ‘새옹지마’의 고사를 통해 설파한다. 화자는 그러한 고전적 사유를 통해 이승의 분주함조차도 ‘복받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의 동양학적 사유는 이제 자유자재의 경지로 육화되어 스스로 시상을 전개해나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사유와 상상은 다음의 시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체현한다.
술잔이 내게 말을 건다
이때쯤이면 술잔 속의 술도, 안주로 갖다놓은 튀각도,
엉덩이를 받쳐든 의자도,
턱을 괴는 팔까지도 모두들 말을 건넨다
이 모두가 혼자 사는 기쁨이다
달빛 별빛 말만 듣다가
나 역시 눈빛의 말을 건넨다
그럴 때 내 눈빛과 달빛, 눈빛과 별빛이
서로 만나 만드는 자미성의 오로라가
오늘의 주제다
나는 저 오로라의 운명에게 건배한다
이때쯤이면 외계인도 나타난다
점입가경이다
밤하늘도 별도 달도 내 마음을 읽고,
나 역시 저들의 마음을 읽는다
보기만 하면 술술 읽혀지는 마음.
엣다, 던져주는 달빛 별빛 눈빛들
오늘밤엔 술빛도 찰랑찰랑 달이 되고 별이 된다.
―「독심술」 전문
술잔, 술, 튀각, 팔과 같은 사물들이 화자에게 말을 걸어오면, ‘달빛 별빛’의 말만 듣던 화자도 ‘눈빛’의 말을 건넨다. 이러한 생태학적 상상은 ‘눈빛과 달빛’, ‘눈빛과 별빛’이 서로 만나 ‘자미성의 오로라’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응결된다. 자미성을 북극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혼자 사는 기쁨’이라는 데에 이 시의 예술적 감동이 있다. 화자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한 잔 술을 마시고, 그때, 밤하늘의 별도 달도 화자의 마음을 읽고 화자 역시 그들의 마음을 읽어 ‘보기만 하면 술술 읽혀지는’ 독심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사물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상상력의 전개는 존재의 슬픔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시인의 긍정적 세계관은 외계인까지 등장시키며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사라지는 ‘오로라의 운명’, 즉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며 사라질 인생을 위해 스스로를 격려한다.
3. 상관적 사유를 통한 고통의 예술적 승화
인간은 자연과 따로 떨어져 살 수 없으며 다른 개체와도 고립될 수 없다. 서로 연결되고 얽힌 관계에서 살아가야한다. 자연과 인간, 즉 ‘대우주와 소우주’의 이러한 상호연결적인 관계를 조셉 니담Josdph Needham은 ‘상관적 사유’라고 불렀다. 여기서 대우주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우주를 가리키며, 소우주인 우리의 몸은 거대한 대우주의 축소판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상관적 사유’는 우주의 모든 것은 코스모스로써,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중국 우주론의 핵심개념으로서, 우주와 인간을 관계의 그물망과 같은 구조로 서로 얽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관적 사유는 신화나 철학뿐만 아니라 의학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도교의 신체담론 또한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관적 사유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도교의 신체관을 한의학으로 계승하였다. 조선 전기, 허준 역시 도교의 내단학을 기본 입장으로 취하였는데, 동의보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자명하다.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다. 하늘에 팔풍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이 있다. 하늘에 구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아홉 구멍이 있다. 하늘에 12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12경맥이 있다. 하늘에 24절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유가 있다. 하늘에 365도수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이 있다. 땅에 지하수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 초목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모발이 있다. 땅에 돌과 쇠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이빨이 있다. 인간의 신체 속에는 자연이 존재하고, 자연 속에서 또 다시 인간이 존재하는 순환적인 구조를 이룬다. 즉, 자연과 인간은 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동중서도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하늘에 희로애락의 상이 있듯이 인체에는 춘하추동의 기가 있다. 기쁨과 노여움은 춥고 더움의 순환하는 기에 대응된다.” 라고 언급하면서 인간-우주 감응이라는 첫 번째 상관적 사유양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킨 바 있다. 그는 인체의 기관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도 계절과 같은 특정한 자연의 범주와 연관된다고 보아 하늘과 인간 사이의 유기적인 감응 관계를 말하고 있다. 다음의 시들에서도 상관적 사유양식, 즉 인간-우주감응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밤 새워 저 유리창에 눈으로 부항을 떴지요
뜸을 떴지요
어혈이 빠져나온 곳마다 문신을 했어요
문신한 자리마다 수를 놓았어요
지난밤엔 내 몸이 유리창같았어요
내장의 길이 다 보이고, 구절양장 길목마다
아픈 사랑, 죽은 그리움들이
핏덩이 섬처럼 둥둥 떠 있는 게 보여서
정말로 기분이 나빴어요
죽으면 얼굴화장을 하듯
밤새도록 유리창에, 눈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부항을, 뜸을, 문신을, 수를, 차례로 새겨넣었어요
부활한 이 아침, 저 예쁜 사각수틀,
유리창에 새겨진 고통의 수,
한 땀, 한 땀 꽃으로 피어난 백설,
저 눈을 보았어요.
내 몸을 투명창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눈,
당신의 눈을 보았어요.
―「눈의 변신술」 전문
화자는 눈 내린 날 유리창을 바라보며 삶에 찌든 자신의 몸을 느낀다. 한의학에서 쓰는 뜸과 부항의 흔적으로 남는 흉터를 문신과 수를 놓은 것으로 해석하고, 아픈 몸을 유리창에 비유하여, 그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몸의 ‘구절양장 길목마다’에는 ‘아픈 사랑’과 ‘죽은 그리움’들이 보여서 기분이 나빴다고 말한다. 삶이란 이별의 전말을 들려주는 시 「램프의 변신술」에서 보듯 ‘애별리고’로 가득한 고해가 아니던가. 그러나 화자는 그 고통을 승화시켜 예술로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한다. 흰 눈이 온 세계를 덮으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아침을 ‘부활한’ 아침으로 느끼며, 눈꽃이 핀 유리창을 ‘예쁜 사각수틀’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사각수틀의 유리창엔 한 땀, 한 땀 새겨진 고통의 수를 놓은 것처럼 하얀 눈이 피어난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비추어보도록 온 우주를 새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눈에서 화자는 거룩한 절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예술은 이처럼 사물을 인체와 결부된 상관적 사유를 통해 바라보게 함으로써 삶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4. 신화적 상상과 신비적 융합
흔히 신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고대에는 모든 사물이 확대된 자아로써 경험되던 시대였다. 이것을 프랑스 인류학자인 레비 브륄Lévy-Bruhl은 ‘신비적 융합’이라고 명명하였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이 낳은 것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것으로서 인류의 문학과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이기도 하다.
칼 구스타프 융C.G.Jung은 신화를 인류의 집단무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융에 따르면 인간에게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동시에 분비되는 데서 보듯이 인간을 양성적인 성질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수백만 년의 경험과 사회화를 통하여 남성은 여성적인 측면이, 여성은 남성적인 측면이 억압되고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만약 남성과 여성의 다른 성이 본성을 억압하고 경시하면 창조력과 전체성을 잃게 된다. 아니마anima란 남성에게서 발견되는 여성적인 면을 가리키고, 아니무스animus는 여성에게서 발견되는 남성적인 면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의 혼(넋, 심령)과 같은 것으로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내적 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며, 집단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 형성된 사회적 자아이자,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Persona의 이면에 대응하는 ‘무의식적인 인격’이며, 남성의 무의식적인 내적 인격인 아니마는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 속의 내적 인격인 아니무스는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의 꿈, 신화, 민담에 상징을 통해 나타나며 무의식의 원형 중에서도 특수한 원형으로서 자아와 의식의 심층이자 중심인 ‘자기(self)’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 또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이 아니마는 남성의 애욕eros이 성숙함에 따라 분화, 발달하는데, 하와Chawwa-헬렌Helene-마리아Maria-소피아Sophia의 네 단계가 그것이다.
다음의 시에서 나타나는 ‘여자’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시인의 아니마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에로스는 어떤 모습일까?
잇꽃에서는 노랑을, 지치에서는 보라를
물푸레나무에서는 잿빛을, 쪽에서는 쪽빛을 우려내듯
여자들은 제 안에 색색의 물감주머니를 가졌다
여자들은 또, 색에 따라 물맛도 달랐다
우수경칩에 만난 단풍나무 여자는 너무 물이 많아
껴안을수록 내가 물이 되었는데
곡우에 만난 박달나무 여자는 오래 안을수록
가슴 가득 시원한 물이 차올랐다
여자들은 또, 무림여자들처럼 변신술이니 경공술도 남달랐다
달나라로 날아간 항아처럼 밤이면 즈믄 가람에 나타나거나
내가 가는 곳마다 혹은 호깨나무, 혹은 머래덩굴,
혹은 금강초롱이 되어 나를 반겼다
마음에 봉황이 깃을 치면 닭도 봉황이 된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세상 두두물물이 모두 내 여자가 되고.
내 마음 속 색색의 보석함이 되었다.
―「천기누설」 전문
1연에서 시인의 에로스는 ‘색색의 물감주머니’를 지닌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생명을 낳는 생산성의 이미지로서 하와단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2연에서는 서로 다른 성적 매력을 지닌 ‘단풍나무 여자’와 ‘박달나무 여자’의 이미지로서 미적이고 낭만적인 수준의 헬렌 단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3연에서 그것은 변화무쌍한 현현을 보여주는 ‘무림여자’와 자유자재하게 삼라만상에 나타나는 ‘항아’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대극합일의 성숙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성모 마리아나 관음보살의 이미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단계에서 에로스는 영성화되어 종교적 헌신으로 드높여지게 된다. 4연에서는 모나리자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소피아의 단계로서, ‘마음에 봉황이 깃을 치는’ 지혜의 아니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이제 화자에게는 “이 세상 두두물물이 모두 내 여자가 되”는, 그리하여 ‘마음 속 색색함의 보석함’을 지닌다는 삶의 비밀, 즉 ‘천기누설’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시는 팍팍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삶의 지혜를 나누어주고 있다.
고전시학이론에서 흔히 쓰이는 신사神思란 용어는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적 사유능력을 의미한다. 즉 ‘서두르지 않아도 빨리 갈 수 있으며, 직접 가지 않아도 이를 수 있는’ 무궁무진한 형상적 예술 사유를 말한다. 이러한 신사의 구사에 있어 박제천 시인은 탁월하다. 그의 시 세계는 그야말로 화엄적 상상의 바다를 노니는 자유 자재함을 보여주는 신사의 시학으로서, 현 단계 한국 현대시의 깊이와 높이의 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고명수/ 1987년 《영혼과형식》, 1992년 《현대시》 신인상. 시집 『마스터키』 『금시조를 찾아서』 『브리스틀 콘 소나무』 외. 저서 『나의 꽃밭에 님의 꽃이 피었습니다』, 『시창작강의』 『어린이글쓰기치료』 외. 한국시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현재 동원대 복지학부 교수, 한국문학치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