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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국회의사당> 1835년 챨스 배리 & 오거스터스 웰비 & 노스모어 퓨진作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뜨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건축에서 잘 드러났다. 즉 견실한 장인 기술의 결여는 ‘양식’과 ‘미’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함께 이 시기의 건축을 거의 말살시켰다. 사업가나 시의원들은 새 공장이나 기차역, 학교나 박물관을 세우는 데 있어 자기 자신의 취향을 고집했다. 예를 들어 문은 고딕양식으로 건물은 노르만 성이나 르네상스 궁전 혹은 오리엔트 회교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몇몇 19세기 건축가들은 위와 같은 딜레마를 극복하고, 엉터리 고대 양식도 아니고 어설픈 창작도 아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런던의 국회 의사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34년 옛 의사당이 불타 없어지자 새로운 설계가 공모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인 찰스 배리 경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시민적 자유는 중세 시대에 쟁취되었으므로 자유의 상징인 의사당도 중세 고딕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배리경은 고딕식 세부양식 전문가인 퓨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배리는 건물의 전체 골격과 배치를 맡고 정면과 내부의 장식은 퓨진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듯 설립 과정에서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
19세기 회화사를 살펴본다면 이전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는 기량이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문 제작을 받아서 유명해진 미술가들이 그 시대의 지도적인 대가들이었다. 조토나 미켈란젤로, 홀바인, 루벤스, 심지어 고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화가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식의 비극적 상황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대개는 미술가들과 그들의 애호가들 사이에 서로 공유하는 통념 같은 것이 있었고 따라서 명작에 대한 기준에도 의견이 일치했었다.
성공한 화가들-소위 관전파官展波 화가들- 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들 사이의 구별은 19세기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이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의 피렌체, 17세기의 로마를 거쳐 19세기에는 파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미술가들이 당대의 지도적인 미술가들에게 배우기 위해, 또 무엇보다도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미술의 본질에 대한 토론과 함께 하기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장 오귀스트 앵그르(1780~1867 프랑스)는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앵그르는 인상적인 공간과 형태의 왜곡으로 현대 예술의 주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수줍게 뒤돌아 앉은 누드, 그녀의 머리에서 등으로 흘러 내리는 빛은 그 변화가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마치 빛이 그녀의 피부로 스며든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아름다움은 주위의 모든 소음마저 침묵시키며 영원한 미의 정적으로 이어질 듯하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앵그르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랑드 오달리스크>이지만, 1819년 파리에서 발표되었을 때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선 이여성은 허리가 이상하게 길고, 마치 뼈와 근육이 없는 것처럼 굽어있다. 엉덩이는 지나치리만큼 풍만하다. 등이 정면을 향하도록 자세를 잡고 있고, 뒤돌아 보는 얼굴의 각도도 실제로 무리인 자세다. 그로인해 “이 여성은 척추뼈가 세 개나 더많다”는 비평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의 형태적 구성능력은 관람자들이 볼 때 이러한 왜곡을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신체는 리듬감있는 인체표현을 위해서 앵그르가 의도적으로 변형을 가한 것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앵그르의 그림은 추상화에 익숙해진 현대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독특한 화풍으로 인정받는다.
<샘> 1820년~1856년 앵그르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미술관
<샘>은 당대의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평론가들은 그림 속 여인의 포즈와 표정이 정숙한 여성상을 잘 표현해냈다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뿐만 아니라 여인이 들고있는 물병에서 떨어져 내리는 맑은 물줄기, 그리고 모습이 비칠 정도로 깨끗한 샘이 인물의 순수함을 부각시켜 준다는 사실에 배가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처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20년 ‘앵그르’가 40살 때 ‘피렌체’에서였으며, 완성된 것은 1856년 파리, 즉 36년이라는 상당한 시간 간격이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작업을 도와주던 두 제자, ‘폴 발즈’와 ‘알렉상드르 데코프’가 이 작품을 손보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터키 목욕탕> 1863년 앵그르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박물관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 오른쪽에 어색할 정도로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이 앵그르의 두 번째 부인 델핀이다. 앵그르는 그녀를 티치아노의 ‘안드리아의 바커스 축제’에 나오는 쾌락을 상징하는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어 표현했다. 그녀 뒤에서 서로 가슴을 만지고 있는 두 명의 여인은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으며 그 옆에 몸종에게 머리 손질을 맡기고 있는 여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수 십여명의 나체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육감적이고 풍만한 여체의 관능미를 한곳에 모아 표현함으로서 다양한 여ㅈ인의 아름다움을 넉넉하게 보여준다. 원래는 사각형이었는데 구멍을 통해 훔쳐보는 관음적 요소를 위하여 둥글게 그렸다고 한다.
<단테의 배> 1822년 외젠 들라크루아作 캔버스 유채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의 반대자(낭만주의)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프랑스)였다. 그는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 그리스, 로마 시대 조상彫像의 끝없는 모사를 거부하였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림의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버질(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사공 플레기아스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버질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버질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이만이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키오스 섬의 학살> 1824년 들라크루아作 캔버스에 유화
1822년 1월, 그리스는 독립선언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던 작은 나라 그리스의 무력은,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맞서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전성기를 한참 지난 상태였지만, 그리스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스 독립을 부르짖던 세력들은 이내 진압되었고, 오스만 투르크는 철저하게 응징한다. 1822년에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참극도 그 중 하나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들라크루아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1830년 7월 28일(7월혁명)의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서 국민군으로 참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 오른쪽 모자를 쓰고 정장을 입은 채 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인이 민중들과 다르게 옷을 벗고 있는데 여인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을 상징한다. 자유의 여신은 고대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 바르비종파는 1800년대 초중반에 프랑스 파리 교외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실적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화가들의 그룹을 지칭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가 있다. 주변에 퐁텐블로 숲이 있고, 숲 풍경을 자주 그렸다고 하여 퐁텐블로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르비종파의 사실주의적 풍경화는 점점 유명해져 미국에까지 그 말이 전해졌으며 여타 풍경화가나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밀레는 숲이나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농민의 풍경에 사실적 묘사와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독특한 화풍을 추구하였다.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장 프랑수아 밀레作 캔버스에 유채 미국 보스턴 미술관
<수레 끄는 농부> 1852년 밀레作 캔버스에 유채,
미니애폴리스 미술 박물관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 1850~1853년 밀레 작캔버스에 유채 미국 보스턴 미술관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밀레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만종> 1857~1859년 밀레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854년 귀스타브 쿠르베作 캔버스에 유채,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이 그림에는 우아한 포즈도, 유려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다. 쿠르베(1819~1877)는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그의 화가로서의 특징은 철저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누군가의 요청에 '천사를 데려오면 그려주겠다'라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래서 사실주의를 무척 싫어하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는 쿠르베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래서 어쩌라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면 될 거 아냐?"라는 비아냥을 쏟았는데 당연히 쿠르베와 드가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화가의 작업실> 1855년 쿠르베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59년에는 국제박람회에 점잖은 그림을 낸다는 조건으로(지금도 공개적으로 보기 민망한 그림들이 있음)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보라는 정부미술관장의 권유가 있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박람회장 정면으로 자리를 마련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중 유명한 작품이 <화가의 아틀리에>였다. 다만 관람객이 없어서 실패...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년 에두아르 마네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전에 출품했다. 이 그림은 살롱전에서 낙선하여 살롱 낙선전(살롱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전시한 전시회)에 걸렸는데, 제도권에 의해 강하게 거부되고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가혹할 정도로 조롱을 받았던 그의 그림은 이후 미술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두 젊은 남자 앞에 수치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알몸의 여자가 물끄러미 관람자를 응시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상황 자체의 외설스러움만으로도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심지어 이 그림은 미술학원에 가면 기본으로 배우는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 사이의 단계적 명암 변화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명암을 단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곧 대상의 양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림은 비록 2차원의 평면이지만 그 안에 그려진 것들에 입체감을 입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마네의 옷 벗은 여인은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처럼 납작하게 그려졌다. 이는 사실상 ‘시선의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실제로 햇빛이 가득한 곳에서 대상을 볼 때는 전문 화가들이 정확하게 그려내는 은근한 명암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립만 볼 뿐이다. 전통적인 그림은 여인의 누드에 드리운 세세한 명암의 변화를 꼼꼼하게 잡아내지만, 자연광이나 강하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벗은 여인을 본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빛에 훤하게 드러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대조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네는 대부분 사람들이 보는대로 그린 것이다.
<롱샹의 경마> 1865년경 마네作 석판화
위 그림은 얼핏 보면 혼란스러운 낙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경마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마네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시한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만 해줌으로써 빛과 속도와 운동감의 인상들을 포착하길 원했다.
말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질주하고 스탠드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그가 그린 말들 중 어느 것도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장면을 순간적으로 힐끗 볼 때 네 개의 다리가 다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관중의 세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각은 한 순간에 오직 한 장소에 초점이 맞추어질 뿐이다. 나머지 광경들은 모두 연결되지 않는 형태들의 혼합물로 남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들을 보지는 못한다. 이 작품은 화가가 목격했고 그 순간 보았던 사실을 보증할 수 있는 만큼만 기록한 것으로 그 장면의 부산함과 흥분의 순간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올랭피아> 1863년 마네作 캔버스에 유화 파리 오르세 미술관
미술사를 통틀어 <올랭피아>만큼 물의와 소동을 일으킨 작품도 찾기 힘들다. <올랭피아>가 전시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파괴 하려했고 이에 두 명의 경찰을 배치해 작품을 보호해 야 했다.
당시 사람들이 <올랭피아>를 보고 기겁을 한 것은 현실의 매춘부를 너무도 솔직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누드화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미술의 주제였다. 그러나 비현실적이요, 비인격화된 누드화를 그려야한다는 사회적인 전제가 있었다. 마네는 이런 작가들과 귀족사회의 사회적 약속을 과감하게 도전적으로 깨버린 것이다. 올랭피아의 머리를 장식한 꽃, 흑인 하녀가 들고있는 꽃다발(고객의 선물)은 그녀가 현실 속의 창녀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 고양이도 발기한 남성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이는 마네가 천박한 매춘부를 찾아 인간시장을 기웃거리는 추악한 남성의 세계를 폭로한 죄로 그토록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던 것이다.
<피리부는 소년>1866년 마네作 캔버스에 유화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강조하고, 일본 판화처럼 검은색, 붉은 색, 흰색의 한결같은 색조로 인물의 실루엣을 처리하였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화가들이 그렇게나 공들여 찾던 공간의 깊이를 주기 위한 원근법을 포기하고, 완전히 2차원의 캔버스에 평면화 시킨 작품. 1866년 살롱의 심사 위원들이 혹평을 가하지만, 당시 예술의 변화를 예감했던 ‘에밀 졸라’는 이 작품을 변호한다. “그와 같이 단순한 방식으로 이런 큰 효과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배에서 그림그리는 모네> 1874년 마네作 캔버스에 유화,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마네가 그린 이 작품은 모네에 의해 주장된 새로운 방법의 실험작이기도 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안이한 제작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혹은 ‘모티브’는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수면에 파장을 일으킬 때 시시각각 변화한다.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색채들을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하여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 방식이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19세기 프랑스의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 인상주의
모네 주변의 젊은 풍경 화가들의 비전통적인 회화는 ‘살롱 전’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1874년 함께 모여 어느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전시회에는 <인상:해돋이>라는 제목이 달린 모네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침 안개를 통해 드러나는 항구 풍경을 그린 것이다. 비평가들 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특히 우습다고 생각하여 그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이라고 조롱섞인 어투로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롱의 의미도 잊혀지게 되었고 이 무리의 화가들도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 그런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원리를 풍경화에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이는 고갱과 고흐, 세잔 등의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져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 등 현대 미술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상:해돋이> 1872년 모네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모네가 아침 안개 속 항구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장면을 포착해 그렸다. 검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둠을 표현했고 사물의 형상대신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풍경을 나타냈다.
<생라자르 역> 1877년 모네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모네는 생라자르 역(파리 북역)의 역장을 찾아가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한 뒤 기차를 그리고 싶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역장은 모네가 집중해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기차를 플랫폼에 멈춰 세우고 계속 증기를 품도록 지시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뿌연 증기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파리의 풍경까지 나타낸 이 작품은 당시 모네를 비난하던 평론가에게 던진 ‘한 방’이었다. 모네는 이 역을 배경으로 12점의 그림을 그렸다.
<파라솔을 든 여인- 모네 부인과 아들>1875년 모네作 캔버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미술관
모네의 첫 번째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렸다. 카미유는 4년 뒤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 속에 비친 카미유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빛에 곧 사라져 버릴듯한 모습은 환영같이 보인다. 마치 죽음을 암시하기라도 한 듯 슬픔이 배어있다.
<수련 1906년> 캔버스에 유화 모네作 2014년
약550억원에 낙찰
<수련 1919년> 캔버스에 유화 모네作 2008년
약910억원에 낙찰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시절에는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서 자살까지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인상파의 작풍이 인정받기 시작함에 따라서 그 역시도 정원이 딸린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그의 유명한 수련 연작도 지베르니에 있는 자택 정원에서 그린 것이다. 이 수련 연작은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수련의 빛과 색채를 1926년 죽을 때까지 27년에 걸쳐 무려 300여 점의 작품으로 그린 것이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화가라 불리었으며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났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으로 가득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언제나 밝고 환하고 즐거운 세상을 꿈꾸며 그림을 그렸던 르누아르… 그는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그림을 사랑했던 열정적인 화가 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1876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댄스 홀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누구하나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람들 위로 기분 좋게 일렁거린다. 사람들의 신체는 일부분이라도 타인과 닿아있어 그림 전체가 매우 촉각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림의 외각은 인물이 잘려지게 처리하여 화폭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 하고, 그림을 보는 우리도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한다. 르누아르의 초기 인상주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래트>는 정확한 형태와 묘사보다는 빛에 의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체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그림이며,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을 다녀가지만,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 현장을 찾아서 식사를 즐기는 우리나라 관광객은 거의 없다. 아마도 이 그림의 소재가 된 ‘물랭 드 라 갈렛트’가 아직도 몽마르트르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들> 1878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샤르팡티에의 부인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했던 여인이다. 예술가들을 무척 좋아했던 이 부부는 가난에 시달리던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사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두 자매> 1881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Art Institute of Chicago
이 작품에서는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보이도록 시도를 하였다. 인물 뒤의 잎사귀들도 소녀들의 빨간 모자에 있는 조화 못지않게 잘 드러나 있고,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실꾸러미로 된 공 또한 그 색깔이 놀랍다.
<시골의 무도회> 1883년 르누아르作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인상주의에서 사실주의 필치의 고전주의 화풍으로 전환을 시도한 대표작이다. 친구 폴 로트와 춤을 추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델 알린 샤리고를 화려한 색조와 산뜻한 구도로 그려냈다. 윤곽선과 소묘가 훨씬 명확해지고 빛의 표현도 본래의 형상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활용했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샤리고는 화려한 드레스보다 더 눈부신 미소로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퐁투아즈의 외딴집> 1868년 카미유 피사로作 구겐하임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1830~1903 프랑스)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초기의 농원(農園)의 연작(連作)도 또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피사로의 리얼리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피사로 부인> 1878년 피사로作 캔버스에 유채
피사로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일하던 하녀인 줄리아 벨레(1839~1926)와 결혼한다. 그는 고단한 일상에 파묻혀 사는 부인을 자주 그렸는데 여기는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내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도 감지된다.
<파리의 이탈리아 대로, 아침 햇살> 1897년 카미유 피사로作 워싱턴 국립박물관
인상주의 운동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1830~1903)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묻곤 했다. “만일 내가 이 거리를 걷고 있다면 나도 이렇게 보이는가? 두 다리는 물론이고 눈, 코가 없어지고 형태도 알 수 없는 작은 점들로 보인단 말인가?”라고. 실제로 그들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에 대한 판단을 방해한 것은 인체에는 어떠어떠한 부분들이 ‘속해 있다’고 하는 기존의 지식이었던 것이다.
<몽마르트 대로, 밤의 효과> 1897년 피사로作 런던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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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도와준 두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인상주의자들의 승리가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회화는 저명인사의 초상이나 시골 저택의 기록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기계 장치가 더 훌륭하고 값싸게 잘 해낼 수 있게 된 마당에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사실상 근대 미술은 이런 발명의 충격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우키요에)였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지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반성도 하게 하였다.
*일본의 채색 목판화(우키요에)
일본의 17세기에서 20세기초 에도 시대에 유행한, 당대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풍속화의 형태를 말한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우키요에'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힌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絵)를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육필화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였기에 원화를 고가에 구입할 수 없었던 도회지의 서민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다. 우키요에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사진, 기계인쇄 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주목을 받아, 특히 프랑스의 인상파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표현이 없는 것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 가스시카 호쿠사이(1760~1849)作 목판화
<붉은 후지산>
가나가와 호쿠사이作 목판화
<우물 청소>
가나가와 호쿠사이作 목판화
* 에드가 드가
(1834~1917프랑스)는 마네와 동년배였고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였지만 그 그룹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열렬히 관심을 가졌고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국화 옆의 여인> 1865년
에드가 드가作 유화, 뉴욕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작품의 구도는 꽃병의 풍성한 꽃과 사색에 잠긴 여인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병렬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만약 이 작품의 주제라면 그녀는 작품의 중앙에 놓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 잘 보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드가는 그녀를 끝 쪽에 그려 넣었고, 그녀의 모습은 화면 밖으로 잘려져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구도는 근대적 미술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레 수업> 1873~1876년 드가作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사선으로 이어지는 넓은 실내에 등을 보인 무용수를 전면에 클로즈업하는 특이한 구도로 그려졌다. 인물들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단단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무용수들의 반투명한 옷은 그가 조심스레 찍어낸 붓길 끝에서 하늘하늘 촉감을 자극한다.
<스타> 1876~1877년 드가作 종이에 파스텔,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놀라우리만큼 새롭고 낯선 시점으로 그려졌다. 대상과 비슷한 눈높이에 캔버스를 두고 그린 것이 아니다. 이 특이함은 그가 카메라로 대상을 촬영한 뒤 캔버스에 옮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카메라는 사실상 당대 화가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드가의 경우처럼 ‘더 새롭고 신선한 시선’을 창조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출연 대기> 1879년 드가作 종이에 파스텔, 개인소장
얼핏 보기에도 구도가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무희들 중 몇몇은 다리만 보이고 또 다른 몇몇은 몸만 보인다. 오직 한 인물만이 완전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지만 그 포즈 또한 미묘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단지 인상주의자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객관성을 갖고 그녀들을 관찰할 뿐이었다.
<경마장, 마차곁에 있는 기수들> 1877~1880년 드가作 유화,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중심을 비우거나 주제가 중앙에서 벗어난 비대칭 구도, 위에서 내려다 본 구도 등 다양한 시점과 극단적인 원근법을 활용해 움직이는 대상이 순간적으로 멈춰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드가는 야외에서 스케치를 마친 뒤 나머지는 모두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림의 구상은 여러 스케치들의 조합으로 작품 속 장면은 엄밀히 말하면 현실 포착이 아닌 화가의 상상으로 구성된 허구이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마치 스냅 사진을 보는 듯 경마장의 역동적인 장면들이 말의 빠른 움직임과 함께 감각적으로 담겨져 있다. 이것은 표현하기 매우 힘든 주제였지만 워낙 뛰어난 감각과 기량을 가지고 있던 드가였기에 관객들은 생생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고전기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으므로 그와 전통 미술 간의 근본적인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비평가들에게는 인상주의 반항아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그도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다. 로댕도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위해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주장했던 램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신의 손>
1898년 오귀스트 로댕作 대리석 파리 로댕 박물관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 덩어리에서 돌연 나타난 듯한 커다란 오른손은 대지의 일부를 손에 들고 있다. 그 안에 아담과 이브가 조각되어 있다.
<지옥문> 파리 로댕 박물관
단테 ‘신곡’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기 시작한 로댕의 <지옥문>은 각각의 개별 작품으로도 유명한 로댕 작품들의 집대성이다. 단테의 지옥편에서 영감을 받아 수 백개의 드로잉과 습작들을 만들어내고 조각 하나 하나를 완성해 덧붙여 나간 지옥문은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신축 장식 미술관 입구 대형 청동문 제작 의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였다. 미완성 석고 모형으로 남아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1938년에 주조되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