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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리즈의 세 번째 글... 역시 날림입니다.
말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는가를 다룬 글인데,
중언부언이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디디님께 일독을 권하고 싶네요^^;
이 시대에 말러는 어떤 존재인가? 달리 말해 말러의 음악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물론 어지간한 음악 애호가조차도 이 질문에 황당해 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음직한 일이지만, 한국에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그 가운데 말러를 좋아하는 이는…?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오늘날 말러의 위상이라는 주제는 논할 거리조차 없어 보인다. 한데 서양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미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지은 〈왜 말러인가?〉라는 책 1장을 읽어보면, 고르바초프부터 9.11 테러 직후의 어느 학교 선생에 이르기까지 말러에 '감화된' 사람들의 증언이 다수 나온다. 그것을 여기에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문장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1990년 이후로 제작된 영화 중 적어도 스무 편의 작품이 말러의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쓰고 있다. …"나는 말러화되었다"(I've Been Mahlered)라는 슬로건이 찍힌 티셔츠가 길거리에서 팔리고 있고, …2007년 10월의 어느 아침, 출근을 서두르던 토론토 시민들은 퀸 스트리트 다리 위에 적힌 “구스타프 말러”라는 낙서를 목격했다.' 이 인용문을 읽고 실소를 터뜨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용케 그러지 않은 분들을 위해, 바로 내가 저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그 티셔츠를 구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나 역시 그런 낙서를 여기저기(?) 남겼었다는 데 일말의 동질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어쨌든 좋다, 모두가 웃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의 인용문 중 마지막 문장에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느 인터넷 매체의 기자는 "우리 중에 있는 이 미스터리한 말러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화두를 던졌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 이 기자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하려는 것이 바로 이번 글의 목적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단 100년 전의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말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당대의 분위기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알고 그것을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 예상외로 얼마나 많은 유사점이 있는가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며, 그런 토양에서 나온 말러의 음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도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러 시대의 빈과 프란츠 요제프 황제
100년 전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빈에 가면 말러 시대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빈 특유의 원형 거리인 링슈트라쎄(Ringstrasse, 말러가 태어날 무렵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그가 빈에 진출할 즈음에 완성되었다)와 그 주변의 기념비적인(혹은 그런 인상을 주도록 의도된) 건축물들 어딘가에 그 시대의 공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건물들 중 상당수는, 적어도 지어질 당시에는 관공서를 비롯한 공공건축이었고 그 안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관료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제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또한 각종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이자 최고의 소비도시이기도 했으며, 또한 환락의 도시이기도 했으니 특히 밤에 그러했다. 각종 공식적인 연회와 사적인 파티, 발레와 오페라 공연이 끊이지 않았고(빈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였던 말러의 시즌 중 스케줄은 거의 살인적이었다), 도시 전체가 샴페인 거품과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선율 속에 흥청거렸다. 이른바 '빈 기질'이라 불리는, 표면적인 화려함과 넓지만 가벼운 인간관계를 지향하고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내는 성향이 제국의 수도를, 아니 제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거의 종말로 치닫던 시절, 서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독일 측에서는 상황을 ‘심각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파악한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절망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보았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기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로 흔히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또한 이 시대의 기초를 이루는 많은 변혁이 예술과 사상 면에서 이루어졌다.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지크문트 프로이트, 현상학의 완성자인 에드문트 후설, 경제사의 대가였으며 미국 내 이른바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였던 조세프(요제프) 슘페터, 말이 필요 없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이 사상계를 이루었고, 소설가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형제, 로베르트 무질,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시인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위해 많은 대본을 쓴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의 작가와 말러, 쇤베르크, 쳄린스키 그리고 젊은 베르크와 베베른 등의 작곡가, 클림트와 코코슈카, 에곤 쉴레 등의 화가, 오토 바그너와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전에 말했듯이 알마 말러의 정부였다가 후에 남편이 된) 발터 그로피우스 등의 건축가가 예술계를 대표했다. (이들을 비롯해 제국에서 활동했던 더 많은 인물들과 그들이 오늘날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윌리엄 존스턴이 지은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에서, 이들의 활동과 당시 빈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칼 쇼르스케 저, <세기말 비엔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들이 각계에서 벌인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당시의 제국, 정확히 말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라는 나라의 체제 자체가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마자르) 대지주 계급 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던 이 제국은 그 구성 민족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붕괴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은 제국의 수장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라는 인물 덕이 컸다.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합스부르크, 그는 그 시대를 이끌어갔던('그 시대에 잠겨 있던'이라고 해야 더 옳을지도 모르지만) 인물이자 많은 면에서 말러만큼이나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전형적인 계몽군주 유형이었던 그는 역사상 보기 드물게 지적이고 높은 교양과 심미안을 지녔으며 관대한 인물이면서 또한 보수적이고 우유부단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제국 내 유대인의 지위는 꾸준히 상승했는데(말러의 빈 궁정 가극장 입성도 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그의 재위 중반 이후부터는 황제의 비호 하에 제국의 상류층에 진입한 많은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빈 시장 카를 뤼거(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던 그는 간접적으로 히틀러의 스승 노릇을 했다고 할 수 있다)를 중심으로 결집한 급진 공화주의자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온건 부르주아지와 대치하는 기괴한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기존에 보수적인 황제와 투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 줄다리기를 거쳐 제국의 정치적 자유를 신장시켜 온 자유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 운동에 가담하느냐, 아니면 황제 편으로 돌아서느냐 하는 기괴한 딜레마에 빠졌다(사실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고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지만,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혼란과 무력감에 빠진 많은 지식인은 자신의 혼란과 절망감을 예술로 구현하거나 아니면 아예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어느 정치 진영도 이런 움직임을 막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은 일종의 문화적 과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로베르트 무질이 훗날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프란츠 요제프의 제국은 "천재를 위한 제국이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멸망했다". 황제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 내부의 모순이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아마 황제 자신도 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절망감이 황제의 죽음을 재촉한 것일 수도 있다.
이상의 설명에서 오늘날의 우리와 공통되는 요소를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까? 발달되고 경직된 관료제도, 특정 공간에서의 사무근무라는 생활 패턴, 표면적인 인간관계, 깊이 있는 성찰을 거부하는 태도, 점점 심화되는 빈부격차,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이념적 대립과 혼란, 인종차별, 참여와 순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이라는 요소들은 현대 사회에서 더 심화되면 되었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구스타프 말러는 당대의 모순을 (이성과 본능 양면에서) 가장 민감하게 파악하게, 이를 음악으로 구현한 예술가였다.
말러의 삶과 음악, 그리고 오늘의 우리
말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변방의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이 인종차별을 뚫고 제국 수도 제일의, 더구나 궁정 직할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라는 예술계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것은 오로지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이것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와 다른 점으로, 생전의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심부름꾼 내지는 하청업자, 잘해야 프리랜서로 사회적 신분도 낮았다. 그런데 말러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가이면서 행정가(실제로 말러는 자신이 '출퇴근'하던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을 '관청'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으로 부르곤 했다)로서 독자적인 예술성의 추구와 관료적인 일상의 행정이라는 모순을 감당해야 했다.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그의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풍부한 감수성과 인정 많은 성품을 가리기 일쑤였고, 이런 그의 태도와 예술상의 굳은 신념은 예찬자만큼이나 적도 많이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좋든 싫든 팬과 '안티'를 동시에 거느리고 다닌 스타였으며(그가 다소 신경질적인 활기로 빈 시내를 거닐 때면 마부들까지도 옆 사람에게 '저 사람이 말러예요'라고 수군댔다고 한다), 복잡하고 소모적인 생활에서 오는 긴장과 피로를 풀기 위해 정기적으로 전원을 찾았던 도시인이기도 했다. 또 그는 수영과 사이클링, 등산, 트레킹 등 온갖 스포츠에 탐닉했었고, 건강 문제에 대단히 민감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근대적인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에게서) 받았던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하다(여담이지만, 훗날 프로이트가 말한 바에 따르면 말러가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정신분석이론을 대단히 명철하게 파악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많이 던진 데 대해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하다못해 (빈에서는)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까지도 이 시대의 삶을 연상케 한다. 어떤가, 이만하면 여러분 주위의 누군가와 이미지가 겹쳐 보이지는 않는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이라도 말이다.
이러한 환경, 이러한 인물에게서 나온 음악이 우리에게 호소력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권위와 도그마에 대한 거부는 말러의 삶과 음악을 일관하는 특징이었다. 말러는 교향곡 2~4번처럼 종교와 관련된 곡에서도 기존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인 의혹과 해답을 제시한다. ‘심판은 없고 구원이 있을 뿐’이라는 교향곡 2번의 논리와 마지막 악장에서 모든 존재가 신의 사랑(혹은 신격화된 사랑) 속에서 용해되는 교향곡 3번, 유쾌하지만 잔혹하게 일그러진 천국을 의도적으로 천진하게 그려낸 교향곡 4번 모두 기존 종교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리고 말러 이전에는 비극이나 파멸을 그려낸 작곡가는 많았지만 그가 '대지의 노래'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인생무상의 느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또한 모든 감정의 극단을 자유롭게 오갔던 그의 정신 상태는 템포와 다이내믹의 극단적인 대비와 때로 곡의 통일성을 해치는 갑작스런 에피소드의 출현이라는 형태로 음악에 투영되고 있다.
한편으로 말러의 음악은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후기 교향곡의 춤곡 선율은 극도로 화려하고 방탕했던 당대 현실에 대한 풍자이자 조롱이면서 또한 그 반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교향곡 9번의 2악장을 들어보라. 투박한 렌틀러와 세련되면서도 냉소적인 왈츠가 교차하는 가운데 템포가 점차 빨라지면서 폭력적인 요소가 점증하는 분위기는 마치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파국으로 치달았던 '벨 에포크'('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1차 대전 직전의 시대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의 기만적인 화려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러한 화려함을 마무리하는 씁쓸한 허무는 또 어떠한가. 대체 이것이 백 년 전의 음악이란 말인가? 말러가 "내 작품은 저주받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 곡이 50년 뒤에 초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탄식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말러의 음악은 작곡가 자신이 시대의 산물이었으며 또한 그 자체로도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그 시대와 얽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당대의 사람 대부분은 말러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그들은 '숲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한 걸음 떨어져서 숲의 전체상을 조망할 수 있었던 인물은 극소수였던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 자신과 시대의 불안을 덮어줄 수 있는 두 슈트라우스, 즉 요한과 리하르트의 외적인 화려함이었으며, 악구 하나하나마다 행간에 의혹과 고뇌, 진지한 탐구를 새겨 넣은 말러의 음악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태도는 오늘날의 일부 음악 애호가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말러의 음악은 그 자체로도 현대적인 요소를 다수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관현악법은 전례 없이 방대하면서 극도로 실내악적이며, 각자 자신의 성부를 독자적인 음색으로 연주하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짜임새에 충실히 기여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성격은 각자 자신의 가치관과 개성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지만 결국 현대 사회라는 전체적인 시스템에 나름대로 참여하는 현대인의 삶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물론 이에 맞서는 일탈 역시 말러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관현악법은 모든 악기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는 달리, 통상적인 음역을 벗어나거나 연주 기법 면에서 대단히 까다로워 고도의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 전체가 망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치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무질서이지만, 모두가 원치 않는 자리에 있을 경우 그것은 질서이다"라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경구처럼 말이다. (힘들여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삶도, 진정한 예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러의 굳은 신념 가운데 하나였고, 이와 같은 창작 과정에서의 강한 자의식은 현대로 갈수록 예술가 공통의 특징이 되고 있다.
결론을 내보자. 말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위안은 최종적인 구원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전과 다른 무엇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오히려 말러와 그의 음악이 우리에게 말하는, 혹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는 바는 이런 것이다. "나는 당신의 불안과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잘 이해합니다. 당신이 걷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할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이 길을 함께 가봅시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왜 말러인가> 읽다가 티셔츠 사고싶다고 생각했는데 ㅋㅋ 말러 음악을 들으면서 이해받는 느낌... 더 나아가서 항상 불화였던 내 자신과 화해하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도리안님의 글을 읽고보니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제가 이 글을 올린 이유가 정당화되는 거죠^^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순서가 뒤바뀐것 같은데 빨리 두번째와 첫번째 연재 보러 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덕분에 잘 읽었어요~감사합니다.**역시 도리안님글은 제스타일~~귀에 쏙쏙~!!ㅎㅎ
역시 사랑이님 칭찬은 제스타일... 맘에 쏙쏙~!! ㅎㅎ
어머, 도리안님, 저 칭찬에 능하지 않아요~ㅎㅎ은근히 냉정한 편이랍니다.특히 글에는 사정없이 빨간펜으로~^.~
세기말 빈 혹은 벨 에포크라 불리우는 그 시기가 지금의 시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라는 도리안님의 의견에 큰 공감이 갑니다. 특히 21세기초의 서울은 유독 그러한 것 같습니다. 정치를 비롯해서 예술,대중문화 등이 과거와 미래로 뒤섞여 성장과 지체의 용광로에서 활활 불타오르는 느낌입니다. 이후의 시기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정리될지는 더 두고볼 일이지만 21세기초의 서울은 훗날의 지성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로 기록될 겁니다.
명철하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말러가 어느 자리에서(뉴욕에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내일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빈으로 돌아갈 겁니다. 왜냐면 거기선 모든 일이 20년 늦게 일어나거든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말러 특유의 냉소가 무척 마음에 들면서도, 바로 이 점에서 21세기의 서울과 19세기의 빈은 다르지 않나 생각했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역시 이 점에서도 그 시대의 빈과 오늘날의 서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20년 늦게 일어나는..."
암튼 두고두고 연구해봐야 할 주제이고, 좋은 글입니다.
어찌보면 말러에 대한 도리안님의 애정고백과도 같은 글이네요. 동감이라고 할 밖에요.
아무래도 그렇게 읽히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