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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아동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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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영상 스크랩 <인도, 네팔 여행> 세계문화유산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1>
덕암 이영호 추천 0 조회 12 11.07.02 11: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도, 네팔 여행>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1>

2007년 01월 06일 . 날씨 : 맑음

 

 

 

아잔타(Ajanta)는 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 속하며 데칸고원 북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에서 106km, 잘가온역에서 50km 지점에 있으며 남북 교역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있으므로 교통의 요지로 '데칸의 문'이라 불린다.

 

아잔타 석굴 입구에서
 
데칸고원의 숲을 지나며 흐르는 와고르강 계곡의 높이 70m 암벽에 BC 2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계곡의 만곡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29개의 석굴이 들어 서 있고 그 길이가 1.5km에 이른다.

  
카이티야(성소)와 비하라(수도원)의 두가지 유형으로 구성 된 이 아잔타 석굴은 1819년에 호랑이 사냥을 하던 영국군 존 스미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1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보물이 세계에 소개 되었다. 오늘날에는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하는 불교예술의 보고이자 건축, 미술,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1번 석굴 입구의 돌기둥 - 석굴에 들어가기 위해선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석굴 사이에 승려들이 거주하는 승원과 스투파(불탑)를 모신 당이 세워졌다. 당시 승려들은 부파불교(部派佛敎)를 신봉 하였으며 불상은 전혀 조각 되지 않았다.

2번 석굴의 입구
 
3세기 사타바하나 왕조가 붕괴한 후 잠시 석굴의 개굴이 중단 되었으나 5세기가 되자 바카타카 왕조 하에 대승불교 신도가 대규모의 승원과 스투파를 모시는 당을 개굴하였다. 이때는 불상예배가 성행했기 때문에 스투파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을 안치 하였고 승원의 내당에도 불상을 모셨으며 벽면에 많은 불상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들은 굽타양식이다.

 
석굴의 벽면에 그려진 회화는 불전(佛傳)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인도 회화 사상 유래가 없는 걸작으로 그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1983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다.

6번석굴의 입구
 
아잔타 석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인도 불교의 황금시기인 아쇼카 시대부터 시작하여 300년 역사의 굽타왕조를 거쳐 이후 6세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19세기 우연히 봉인이 드러나기 전까지 인도불교의 진수를 보여주는 여러 조상(彫像)과 벽화를 비밀스럽게 간직해 왔다.

9번석굴의 전면 모양
 
옛날 아잔타에 살면서 수도하던 승려들은 검소하거나 금욕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을 거라는 보고가 있다. 그것은 석굴에 새긴 글에서 나타 나는데 그들은 매 계절마다 안락함을 즐기려 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와고라강 암벽 위에 설치한 석굴공사에는 많은 돈과 인력이 들었는데 그 비용을 부담한 후원자들, 즉 왕과 왕자들... 그리고 부유한 상인들도 인생을 즐기려 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9번석굴 벽면의 조각들
 
그들은 돈 보따리를 풀어 26번 석굴에 새긴 글에서 보여 주듯이 영원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 이승에서 어떤이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생이 남아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극락에서 어떻게 사는 가가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비추듯이 그렇게 영속하는 기념비를 세우기에 열심이었을 것이다.

 
발견 당시 반달 모양으로 휜 강가의 100여개의 석굴들은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근처 농가의 몇 안되는 주민들과 금욕 고행을 하는 성자들인 몇몇 사두를 빼면 멋지게 장식 된 이 석굴에는 박쥐 들만이 기거하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사타바하나왕조(Satavahana dynasty)는 안드라왕조의 별칭으로 사타카르니왕조라고도 한다. BC 1세기 말(또는 BC 3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걸쳐 데칸고원을 지배하였다. 이 왕조는 푸라나에는 안드라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비문에는 사타바하나로 새겨져 있다. 푸라나의 왕조와 비문의 왕조가 동일한 것은 하나하나의 왕명이 일치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으나 《푸라나》 문헌의 사용방법에 따라서 초대왕 시무카는 BC 1세기 또는 BC 3세기로도 된다.
 

1819년 4월 28일, 석굴의 암벽 가운데에  '존 스미스,  제28 마드라스 기마대' 라고 하는 새로운 글자가 새겨졌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아잔타 석굴을 발견한 영국군 이었다. 스미스는 호랑이 사냥 중에 호랑이를 쫓아 왔다고도 하고, 호랑이에게 쫓겼다고도 한다. 어?든 그의 눈에는 호랑이 굴로 보였을지도 모를 석굴 하나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존 스미스라는 흔한 이름이 아잔타의 발굴자로 세계문화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으니..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이름을 세겨짐으로써 이 성소의 벽화와 조각품을 보존하는데는 최악의 사태를 맡게 되었다. 화려한 색상과 치밀한 섬세함으로 그린 그림들을 유럽의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지나친 열정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파괴만 일삼았다. 결과는 참담하게 파괴되고 그나마 이것만이 남게 되었다.

 
엘로라 석굴에서의 사진촬영은 자유로웠지만 이 곳 아잔타 석굴에서는 석굴 속에서 후라쉬의 사용을 금하였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일반 디카로 촬영은 불가능 하였고 그나마 관리인이 보지 않을때 슬쩍 찍은 것들이어서 상태도 불량하다.

 
후라쉬를 쓰지 못해 벽화를 촬영하지 못한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처음 만나는 제1굴은 비하라(Vihara Cave)로 6세기에 조성 된 승원인데 한복판에 20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홀이 있고 벽과 천정의 벽화가 뛰어 났다. 연꽃을 들고 명상에 잠긴 보살과 풍만한 육체미를 자랑하는 검은 빛깔의 공주 등 여성들의 곡선미와 하복부의 관능적인 표현이 압권이다.

 
벽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에는 다양한 얼굴 표정과 의복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은 부처의 전생을 비롯한 여러 생의 설화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또 그림에 그려지는 색채들은 이 지역의 광물에서 추출하여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푸른색만은 예외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청금석에서 얻은다고 한다.

 
1번 석굴 최고의 작품은 '보디사트바 파드마파니(Bodhisattva Padampan)' 라 불리는 보살 그림으로 오른 손에 한송이 연꽃을 들고 있다고 해서 "지연화보살화(持蓮花菩薩畵)'로 불린다. 이 벽화는 온갖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일본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빼닮았다고 하는데 맞지 않은 말이다.

 
법륭사 금당벽화는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라는 이름의 그림으로 한 벽면을 차지하는 그림이 4장, 그 위에 조금 작은 그림 8장이 한꺼번에 어우러진것을 금당벽화라고 말한다. 사불정토도에는 각각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협시보살들이 그려져 있는데 등장 이눔릉 약 200명에 가깝다.

 
아잔타의 그림들은 '프레스코 기법(fresco painting) 으로 그려 졌다고 한다. 이 기법은 회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물에 안료 가루를 개어서 그 벽에 그리는 방법으로 물감이 마르면서 회반죽과 함께 굳어 벽의 일부처럼 된다고 한다. 이 습식 프레스코 기법은 내구성이 좋아 우리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사용되었다.

 
팁(프레스코에 대한 상식) : 본래의 뜻은 회반죽 벽이 마르기 전, 즉 축축하고 '신선'(이탈리아어로 프레스코)할 때 물로 녹인 안료로 그리는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 및 그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기법을 세코(secco), 어느 정도 마른 벽에 그리는 것을 메초 프레스코(mezzo fresco)라고 부르지만 이들 기법이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아 확실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제작과정은 회반죽으로 미리 벽에 초벌질을 하고, 그 위에 시노피아(sinopia)라고 하는 실제치수의 소묘를 그린다. 시노피아를 그릴 수 없는 경우에는 인토나코(intonaco) 다음에 스폴베로(spolvero)나 카르퉁(판지) 방법을 쓴다. 채색할 때에는 아침에 완성 가능한 예정부분(조르나타:giornata)에만 마무리칠의 회반죽을 칠한다. 이어 내(耐)알칼리성 토성안료를 물에 개어 그림을 그린다. 정해진 시간에 조르나타가 다 채워질 수 없을 때에는 말라버리므로 그 부분의 회반죽을 긁어내고 다시 인토나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숙련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고대 로마의 벽화가 참다운 프레스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소규모 작품에서는 전체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지만, 규모가 큰 벽화에서는 프레스코와 세코기법이 함께 쓰인 경우가 많다. 13세기 후반에는 화면을 분할 채색하는 조르나타가 행해졌다. 참 프레스코의 등장은 13세기 말이며, 14~16세기를 프레스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조토·마사초·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미켈란젤로 등 많은 거장들이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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