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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 신춘문예 당선수필 비교 분석
1. 서론
문단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이며 은총의 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데뷔하여 문단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어떤 서클이나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과는 실상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고독한 창조과정의 길을 한 번에 끝내고 득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가 고뇌와 피나는 형상에의 가시밭 길 위를 걷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독자 앞에 내놓고 그때마다 데뷔하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가 순수문학을 위해 할애하는 부분 중에서 신춘문예만큼 전폭적인 것은 세계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 신춘문예라는 신인 등단 제도가 반드시 문학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제도인가 하는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그것이 수많은 문학가 지망생 또는 문학 향유층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비교분석해보는 일은 당대의 문학적 인식을 가늠하는 일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당대 수필문학사적 흐름을 조명하는 한 가지 방법도 될 수 있을 것이다.
2. 2005년도 신춘문예 당선작품
전남일보/창/송 명 화
창은 닫혀 있다. 난방 효율을 위해 이중창을 하고 거기다가 두터운 커튼까지 드리워져 나는 고립되어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잡다한 일들을 한다. 무료한 시간이 견딜 수 없어져 탈출하고 싶지만 정신의 공황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일까. 권태에 사로잡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어지면 잠을 청한다. 긴 잠이나 늘어져 빈둥거림으로 인한 피로는 풀기가 쉽지 않다. 나무늘보 꼴의 내가 한심해서 스트레스가 시루떡이 된다.
개방의 시대다. 공중에 높이 솟은 우리 아파트 앞에 두 배나 높은 빌딩이 떡하니 버티고 설 줄 누가 알았으랴. 번쩍이는 그 창을 통해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물고 늘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우리는 묶여있다. 누군가의 카메라에 소리 소문 없이 몰카의 모델로 찍혀 인터넷상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도 불순한 목적으로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는 나는 발가벗겨져 걷는 것처럼 위태하다.
자폐의 시대다. 여덟 살에 세 자리수 곱셈을 능숙하게 해내는 아이를 보고 엄마는 천재라고 기뻐하였다. 몇 년이 흐른 지금 아이는 말없이 숫자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나 숨고 싶어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사수하기 위해 덧창을 달고 커튼을 치며 블라인드를 내린다. 선글라스를 애용하고 차창을 짙게 코팅한다. 표정을 굳히고 목적지를 향해 한 번의 곁눈질도 없이 사람들은 바삐 길을 걷고, 혹시나 어슬렁거리게 될까봐 자신을 다그친다.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은 세계적인 연예인들조차도 엄청난 돈을 치르고 무인도나 외딴 곳으로 가재처럼 숨는다. 숨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그 순간에 삶의 무게는 우리를 짓누른다.
귀가할 때는 늘 눈을 든다. 거대한 아파트 한 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불 켜진 창들은 시집올 때 고모가 만들어 준 조각보처럼 화려하다. 집집마다 넘실대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혼자서 품평회를 한다. 붉은 빛 전등이 켜진 창은 폭 안기고 싶은 양털 담요처럼 따스하다. 식구들의 다정한 웃음과 칭찬이 넘치는 거실 창으로 언뜻 보이는 그림자가 정겹다. 푸른빛 형광등이 내뿜는 희망을 본다. 생동감 넘치는 저 집의 사람들은 활기찬 내일을 위해 오늘도 늦게까지 불을 켜 두리라. 두어 집은 신비한 보랏빛 불빛이 안방을 채우고 있다. 사랑으로 도배를 했을 것 같은 저 집은 혹 신혼의 젊은이들이 사는 집이 아닐는지. 불 꺼진 열 번째 층 우리 집 창에 나는 형광등으로 희망의 빛을 칠할까. 보랏빛 커튼을 드리워 신비함을 더해볼까. 아니면 노란 버티칼을 펼쳐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아파트 전체가 내 집 같은 착각을 한 연후라 창들은 모두 그리움의 울타리에 안긴다.
부엌 창은 온전히 내 차지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싱크대 앞 가득 들어찬 풍경에 가슴이 벅찼다. 강과 풀밭, 공원, 산, 나지막한 아파트들과 단독주택들, 도로와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들이며 기차, 그리고 하늘. 전에 살던 집에서는 벽을 보며 설거지를 해야 했지. 음식을 준비하고 그릇을 닦는 동안 내 눈은 온천천에 머문다. 운동을 하러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손놀림도 리듬을 탄다. 금정산 자락에 구름 걸리는 것을 보며 어줍잖은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자율 방학과제를 매일 온천천 달리기로 정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집에서 내려다보고 체크를 하겠노라고 큰 소리도 쳤다. 창을 통해 나는 자폐의 공간을 벗어나 사람과 자연을 불러들인다. 육중한 시간을 경쾌한 콧노래로 바꾸고 사람 사는 모습에 감동한다.
이웃집이 넘겨다보이는 나지막한 담,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 나무기둥으로 사람의 있고 없음을 표시만 하였던 제주도 지방의 정낭 등을 보면 이웃끼리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중시한 옛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일부분처럼 살아간 이들의 삶터는 더 열려있기 마련이다. 하긴 동시대의 집들이라 해도 가진 것이 많은 집에서는 소슬대문을 세우고 후세에 와서는 담을 높이고 그 위에 철조망을 감아 두거나 유리조각을 꽂아두기도 하였다. 이제는 방범전문회사에서 cctv를 설치해 놓고 스물네 시간 감시를 해주기도 하니 단단한 금고 안에 안전하게 들어앉아 한숨 놓고 있는 격이 된 셈인가.
窓(창) 내고쟈 창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쟈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배목걸새 크나큰 쟝도리로 둑닥 바가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할 제면 여다져 볼가 하노라.
화통하고 화끈하게 자신을 열어젖히고 싶은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청구영언에 실린 이름도 없고 연대도 없는 이 시조의 주인공은 아마 여자이리라. 인습에 얽매여 닫고 닫고 또 닫는 처신과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 속시원하게 신선한 공기를 맞아들일 창이 얼마나 절실했으랴. 수다스럽기까지 한 중장의 표현을 소리내어 읽다보면 비통한 눈빛으로 세설하는 아낙의 얼굴이 떠오른다.
창을 닦는다. 명경 같이 닦아 나를 내보이리라. 인위적으로 가리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누군가 내 창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다면 움직이는 내 그림자로 그도 이웃을 느끼고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으리라. 문득 놀라 손가락으로 퉁겨 본다. 닫혀 있어도 열려 있는 창, 그 곳을 통해 나는 인정을 받아들이고 자연을 호흡하며 온전한 나 자신을 만든다. 숨지도 고립되지도 않고 내가 있음을 알린다. 앞창과 뒤창을 함께 열어 설렁대는 바람 속에 나를 맡긴다. 내 가슴의 장지는 이미 활짝 열려있다.
부산일보/찔 레 /문계성
땀내 젖은 적삼으로 날 맞던 어머니 같은 찔레
꽃이 지면 그리움에 눈물짓던 날 추억하리라
나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세상이, 온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까맣게 탄 목을 간지럽히던 햇살처럼 정답고, 모래사장을 뒹굴며 깔깔거리던 웃음처럼 재미있고, 갈마산 위를 떠돌던 흰 구름처럼 한가롭던 때였습니다. 그때의 하루는, 학교에서는 그런 대로 놀고, 하교 후에는 본격적으로 노는 것이었는데, 하교 후 노는 장소는 땡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과 버드나무 잎이 피라미 등짝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그늘이었습니다.
그곳은, 작고 은밀한 생각들이 연못의 송어들처럼 한가롭게 헤엄치는 장소였습니다. 그 은밀하고 행복한 곳은, 흙탕물이 밴 좁은 진흙길을 지나 둑 너머에 있었고, 책가방을 벗어던진 나는 작은 풍뎅이처럼 그 별천지로 숨어들곤 하였는데, 흙탕물이 밴 진흙길 옆 언덕배기에는 찔레 덤불 하나가 있었습니다.
나는, 4월에는 겨드랑이에 신발을 끼고 서서 찔레순을 꺾어 먹었고,5월이 되면 무성한 찔레 덤불이 내뿜는 꽃내에 질려, 윙윙거리는 벌들을 고무신 코에 잡아넣어 빙빙 돌리다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이 찔레 덤불을 지나면, 길 위쪽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돌보는 이랑이 긴 우리 집 밭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빨리 그 은밀한 곳으로 가고 싶어, 학교에서 집으로 뛰다가 길바닥에 뒹구는 깨진 유리병을 발로 차,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정강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깜짝 놀라, 절룩거리며 집으로 뛰었는데, 집에는 축담에 배를 깔고 늘어져 한참 낮잠에 취해 있던 '삽살이'가 뛰어나와, 눈치 없이 사색이 된 어린 주인의 어깨에 발을 걸치고 얼굴을 핥아댈 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절룩거리며, 분명히 어머니가 있을 이랑이 긴 우리 밭으로 뛰었는데, 그 길은 참으로 긴 여정과 같았습니다. 이부잣집을 지나고 곰보아저씨 점방을 지나서, 다시 기와막을 지나 작년 봄 물방개가 헤엄치던 논을 지나서…,나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내가 상처를 보고 놀란 것보다도 훨씬 더 놀라며 상처를 싸매 줄 어머니를 상상하며, 절룩거리며 뛰고 또 뛰었습니다.
진흙길에 접어들면서, 찔레 덤불 뒤에 누워 있는 이랑이 긴 밭과, 흰 꽃이 만발한 찔레처럼 흰옷을 입은 어머니를 발견하고, 급한 마음에 신발을 벗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흙길에 뛰어 들었다가,한쪽 신발이 진흙에 빠져 신발을 빼지 못하게 되자, 한쪽 신발은 진흙 속에 버려두고 발만 빼서 더욱 절뚝거리며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상처를 본 어머니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놀라며, 치마를 찢어 피가 흐르는 나의 정강이를 둘러맸습니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여, 마치 전장에서 할 일을 다한 병정처럼 풀밭에 누워, 흰 구름이 나는 한가로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더욱 하얀 찔레 덤불을 보면서, 찔레가 모시적삼을 입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나는, 나프탈린 냄새와 찌들어 빠진 지린내가 범벅이 된 역한 냄새에 토악질을 하던 기억밖에 없던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도시는 불안하고 교만한 부유와 꾀죄죄하고 비겁한 가난이 물결치는 더러운 예배소 같았고, 하루하루 일을 팔아서 산 빠듯한 월급은 내게 한없는 서글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자기가 만든 욕망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돈을 모으는 노예들이었고, 나는 예배할 신조차 모호한 얼이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골짜기만 배회하는 깊은 산에 갇힌 사람처럼 길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5월 어느 날 암자로 가던 길에, 도랑 가 언덕배기에 앉아 있는 찔레 덤불 하나와 만났습니다. 찔레는 연년이 품어온 연정을 5월 햇살에 한꺼번에 토해내듯, 농익은 향기로 벌레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고, 진한 찔레 향기가 배어 있는 나의 기억은, 한 순간에 나를 일곱 살 저쪽 먼 세월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온종일 모래바닥을 파닥거리며 뛰놀다 지쳐 쓰러져 바라보던 장밋빛 황혼, 이랑이 긴 밭, 어머니 모습 같다고 생각하던 찔레….
나는 그 땡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에서도 너무 행복하였고, 그 신발이 빠지는 진흙길을 걸으면서도 새처럼 자유로웠고, 그 이랑이 긴 밭만으로도 굶주리지 않았음을 기억하였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삶의 질곡은 나의 욕망이 만든 덫이었음을, 찔레는 누구도 자리를 다투지 않을 언덕배기에 호젓이 앉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지치고 재미없는 뜀박질을 어서 끝내고, 하루빨리 이랑이 긴 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십을 훌쩍 넘겼습니다.
여류(如流)하는 세월은 나의 머리에 서리꽃을 뿌렸고, 나는 유년의 기억에는 없는, 철로를 따라난 작은 길을 매일 걷습니다.
5월 어느 날,철길 옆 언덕에서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찔레 덤불 하나와 만났습니다. 매일매일 같은 길을 걸었지만, 찔레가 거기 있은 줄은 몰랐습니다. 찔레는 남모르게 언덕배기에 홀로 앉아, 매일 이 길을 걷는 나를 지켜보다,5월이 되자 성장을 하고 수줍게 자기를 들어낸 것이었습니다.
반가움과 애잔한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한참 동안 그 슬픔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세월 저쪽의, 진흙길 옆 언덕배기에 있던 찔레는, 찔레순을 잘라 먹던 어린 친구가, 그 이랑이 긴 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못하자, 이 메마른 도시의 철둑길 위 버려진 언덕에 찾아와, 해후를 위하여 꽃으로 단장한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을, 나는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에야 알아챘습니다.
찔레는 속삭였습니다. '꼬마 친구! 참으로 오래간만이지?'
갑자기, 일곱 살 때 종일 나를 따라 다니면서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어머니의 땀내 젖은 적삼에 안기던 때의 만족감이 나의 전신을 감쌌습니다.
나는 일곱 살 때의 세월 속에 있었던, 그 아무 걱정이 없던 행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런저런 것들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봄비가 내리면 꽃을 옮겨 심던 꽃동산, 밀사리하던 동무들의 웃음소리, 임종을 맞아 갓 시집왔을 때의 남편의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이웃집 할머니의 쇠잔하던 모습, 벼랑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
그 세월 속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세월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꿈입니다.
찔레 꽃잎이 마르면, 나는 다시 찔레를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찔레는 세월 저쪽의 친구이고, 세월 저쪽 그때에도, 일 년에 한 번 꽃이 필 때면 모시적삼을 입은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나와 놀았고, 찔레꽃이 지면 곧 찔레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 세월이 지나면, 아마 나는 여기 이 철길 옆에 앉아 찔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다시 그리워할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가슴에 그려놓고, 그것이 잃어버린 자기라고 생각하여, 그리워하거나 연민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전북일보/네가 과메기로구나/김인호
너희들이 꽁치과메기였구나. 덕장에 주렁주렁 한 두름씩 걸려 짭조름한 바람 속을 유영하고 있구나. 청해를 누비며 군무를 추던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된 듯하구나. 너희들은 본디 날렵한 몸매에 감청색 양복,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깔끔한 신사가 아니더냐. 하지만 설한풍에 휘불리어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노숙자 같구나. 유리알 눈동자 납덩이가 되어 박혀 있구나. 살을 에는 추위에 악다물었던 입마저 벌어져 가늘고 긴 신음 토해내고 있구나.
나는 사열하듯 너희들을 둘러보고 있다. 획일적인 표정, 허망한 눈동자 흙투성이 어설픈 훈련병 같구나. 가스실로 열 지어 들어가는 벌거벗은 유대인들 같구나. 대열 사이로 넘실되는 너희들의 푸른 고향이 보이는데, 맑은 눈물이 보이는데.
한때 너희들은 해풍 속을 훨훨 나는 갈매기가 되는 것이 꿈이었을 게다. 가끔 갈매기의 흉내를 내며 물위로 튀어 올랐겠지. 하지만 지금 공중에 매달린 기분이 어떠니. 바람을 타는 기분이 어떠니. 모두가 고개를 떨어뜨리는구나. 이제 풍경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는 슬픈 운명이구나. 물결을 힘차게 거스르던 지느러미는 무용지물이 되었구나.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니. 노아가 방주를 띄울 때 내렸던 그 엄청난 비, 그 혁명의 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냐. 물결이 내 몸에 조금만 닫기만 한다면 다시 한 번 온몸을 비틀어 바다로 뛰어들 수 있을 텐데. 새로운 삶을 살 것 같은데. 너희들은 잊지 않고 있겠지. 청해를 노닐던 그 때를 그 자유를 그리고 느닷없이 검은 그물에 걸려 박재가 된 그 날을. 그 방심의 날을.
나는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있다. 또다시 하나, 둘 만나는 과메기 덕장. 점차 뻗두룩해지는 몸을 풀기위한 안간힘인가. 멀리서도 너희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해안가 선술집에 들렸다. 누른 종이에 “과메기 있습니다.”라고 적인 문구가 견장처럼 붙어 있다. 하얀 접시에 대가리와 내장과 뼈가 추려진 얼 말린 과메기 몇 마리가 올려져 나왔다. 참으로 다행이다. 검게 탄 눈과 내장이 함께 담겨져 왔다면 그 절망의 덩어리를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이제 모든 애착을 버리고 누운 진갈색 살점들이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나는 꾸덕꾸덕한 과메기 한 점을 생미역에 싸서 초고추장에 꾹 찍어 입에 넣었다. 쫀득쫀득한 과메기는 유연한 몸짓으로 목구멍을 타고 헤엄쳐 들어갔다. 전혀 걸림이 없다. 얼마나 깔끔한 보시인가. 내 배 속이 무덤이다. 방형도 장방형무덤도 아니다. 자궁 같은, 고향 같은 무덤이다. 잔에 바다처럼 맑은 소주를 한잔 따라 마신다. 그리고 염원한다. 이 길이 환생의 길이 되라고, 이 세상에서 과메기가 된 것을 서러워 말라고, 어차피 인간도 죽으면 어두운 땅 속에서 얼리고 풀리는 영원한 과메기가 된다고.
인간 세상은 잡고 잡히는 살벌한 곳이다. 나는 졸지에 떼송장이 되어 걸려있는 너희들의 천편일률적인 표정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한결같이 황금을 좇는 개성이 말살된 인간들의 박제된 군상을 보았다. 너희들이 느닷없이 그물에 걸려 과메기가 되었듯이 인간도 어느 순간에 땅 속 과메기가 될지 모르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지금도 현실의 그물에 걸려 찬바람 부는 어느 지하도 구석진 곳에서 얄팍한 박스를 깔고 누워 꾸덕꾸덕한 과메기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너희들이 청해가 그립듯이 인간도 돌아가지 못할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을 꿈꾸고 있단다.
매운 업보를 치른 과메기들아. 주검이 되어서도 떤 눈으로 용맹정진 하였고, 육신을 버리고 정신을 구하는 수도승처럼 온몸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았으니 좋은 인연으로 다시 태여 나길 기원한다. 나는 젓가락으로 또 한 조각의 살점을 집어 입에 넣는다. 부디 내 속에 들어가서 절집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내가 방일하고 나태할 때 댕그랑댕그랑 맑은 소리로 나의 가슴을 깨워 주길 바란다.
덕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과메기들아. 선술집 앞 붉은 가로등 위에 너희들의 꿈이었던 갈매기가 솟대처럼 서서 밤하늘의 먼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구나. 과메기야. 꽁치과메기야. 공덕과메기야.
3. 신춘문예 당선 작품 분석
가. 주제별 분석
1) 전남일보가 뽑은 송명화의 `창'은 문학적 표현, 구성, 주제 등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또한 이 작가가 함께 응모한 다른 세 작품들에서도 같은 수준의 문학성을 견지하고 있어서 그 역량을 인정받기에 충분했다는 평을 받았다.
많은 신문들이 대상의 관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캐는 작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신춘작품들이 주로 다루는 것은 삶의 소중함이다. 작품마다 가치 있는 삶과 그에 따른 자신의 생각들이 배어있다. 개개의 작품들에 나타난 삶과 사유들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소중함의 정도가 글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필이란 형상과 인식들의 유기적 결합이 전제된 "조화" 속에서 문학적 가치를 드러내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2) 부산일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주목받는 작품을 선정하지 못했다. 작년에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제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작품 /이장/이 당선되었다. 소재의 새로움에 비해 작가의 가치관이 우리 사회의 정서와 공감되지 못했고, 표현 또한 서툴러 비문이 많았다. 한마디로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었다. 이번 작품도 주제 지향적 측면에서 신선함은 없었다. 모성적 그리움의 실체를 찔레꽃에 견주어 풀어내는 발상은 무난하나, 대상과 제재간의 관계성이 너무 진부해서 참신성이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체는 주제로서 신선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여타 다른 작품에서도 그리움이란 많이 다루어지는 것이어서 모정에의 그리움은 흔한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3) 전북일보는 삶과 죽음, 인간과 과메기의 관계를 새로운 형식으로 전개한 작품에 주목했다. /과메기로구나/는 주제적 측면에서도 인간주의가 물씬 풍긴다. 대상을 보는 관조의 시선이 인생론적 주제와 만나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 전개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숙명적 관계를 통해 인간사의 순리를 긍정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인생의 과제이기도 한 삶과 꿈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작품이다.
나. 배경 공간 분석
1) 전남일보가 뽑은 송명화의 /창/은 사유가 빛나는 수필인데, 집 안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현실적 공간이다. 집 안에서도 방 안, 부엌 안이다. 집은 관점에 따라 아주 다른 상징으로 나타난다. 여성 정체성 인식에 소극적인 사람은 안식의 공간으로, 여성 정체성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억압의 공간으로 비치기도 한다. 송명화의 공간 인식은 닫혀 있음에서 열림에로 나아가는 특성을 보인다. 안에서 밖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공간 이동을 통해 창을 열린 공간으로 인식한다. 창의 긍정적 바라봄은 현실 세계의 바람직한 상황을 암시한다.
2) 부산일보의 경우에는 시공이 인생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성장기에 따라 공간이 이동하는데, 회상적 공간에서 현실적 공간 그리고 다시 회상적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공간 이동으로 보면 작가가 과거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년기의 공간은 도시와 대칭되는 시골이며, 주로 모래사장과 느티나무 그늘 그리고 이랑이 긴 우리 집 밭이다. 청년기의 공간은 도시이며, 이 시점에서부터 회상적 공간이 지배한다. 과거 공간에 대한 회귀를 통한 현실공간에 대한 부적응을 나타내며, 찔레꽃의 추억과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 있는 그리움의 공간인 언덕배기는 회상적 공간으로서 작품의 후반부를 지배하는데, 작가 의식의 흐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장년기에 접어들면서 공간은 현실적 공간인 철로로 이동된다. 여기서부터는 철로라는 현실적 공간과 언덕배기라는 회상적 공간이 양립한다.
3) 전북신문 당선수필의 경우 여전히 주제면에서 사회 현실성을 밑받침하는 사회적 배경의 수필이다. 해안도로, 선술집이라는 특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수필로 분류되고 있어, 역시 사회성 짙은 주제를 부각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수필적 배경은 그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해안 도로를 경계로 대상의 운명은 극과 극이다. 해안도로 밑은 바다로서 대상의 삶이 존재하고, 해안의 위쪽은 죽음이 존재하는 등 양극화를 보여준다. 선술집의 풍경은 약자와 강자가 마주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먹고 먹히는 강육강식의 사회상이 상징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인간과 과메기가 비교되고, 이로써 인간 세상의 어지러움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있다. 묘사된 세계가 인간의 보편적 삶의 조건들을 의미하고 있다. 남의 슬픔에 무관심한 인간들 속에서도 작가만은 생물에의 냉혹함을 순리로 풀어 필연적 관계로 풀어내려 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 당선작 비교 분석
신춘 수필 당선이라면 고급 내지는 본격수필이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춘수필은 문학성과 미학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른 글이어야 한다. “바로 이거다” 하고 결정하는 데 갈등이 없어야 한다. 기성 문인과는 다른 시선한 느낌, 자신만의 새로운 문장력, 소재의 참신함, 독자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있는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도 완성도가 있어야 하며 평범한 소재라도 신선한 감각이 번득여야 한다. 지성과 감성이 동시에 빛나는 글이어야 하고, 단 한 줄의 달고 차디찬 샘물 같은 글로서 1년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 당선수필은 어떤 경우든 이 시점의 한계 아래 놓인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미학성과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성을, 글이라는 측면에서 문법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 수필은 당선수필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신춘문예 당선 수필의 경우에는 문학 본질의 차원에서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인가를 고려해야 하며, 수필문학의 특성상 주제가 간접화되어 있는가, 미적 구조와 인식구조의 차원에서 쾌락성과 교훈성을 주고 있는가, 지성, 정서, 상상의 측면이 고루 충족되고 있는가, 언어예술이라는 차원에서 참신성, 함축성, 형상성, 탄력성의 네 가지 속성을 작품이 가지고 있는가, 작품의 가치 평가에서 수필이 가지는 6가지 구성 성분, 구성과 형식적 측면 등 일곱 분야 차원에서 다양하게 그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1) 삶에 대한 통찰력, 2) 사물을 보는 안목, 3)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 4)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감성, 5) 평이하지만 신선한 문체, 6) 개성 있는 시각, 7) 미의식 등이 녹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격조 있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위의 측면에서 당선작의 가치를 따져 보면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신문사별로 보면 전남일보, 전북신문 당선 수필이 대체적으로 합격점을 능가하는 문학성을 보이고 있다면, 부산일보는 좀 부족하다는 점이다. 세 작품 모두 언어 구사 면에서는 남다른 감수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문학성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구성 면에서 두 작품이 무난했다면, 부산일보는 너무 단순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일보나 전남일보 당선작은 주제지향성 측면에서 너무 평범했다면, 전북신문은 이 두 신문보다 주제 면에서 참신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언어예술로서 가지야 하는 문법성 측면에서 전남일보 /창/이 단연 낫다.
전남일보 /창/은 전체가 탄탄한 문장력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글이다.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또는 독자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압축적인 단문을 단락의 첫 문장으로 배치해서 강한 인상을 풍긴 구성적인 기교나 문단의 중심 사상을 정확하게 뽑아서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전개 방식이 깔끔하고, 그것을 연결시키는 수법이 수준급이다.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위해 고시조를 인용 처리한 것도 매우 적절했고, 실제로 작품성을 드높이는 데 이것이 기여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글의 분위기가 단조롭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아쉽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나 반전이나 역행성의 묘미를 불러올 전환 구조나 파격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재미란 읽는 즐거움과 보람이다. 주제의식이 압축적으로 드러난 단문을 읽어나가는 즐거움에 더하여지는 보람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위트 넘치는 재치로 글 읽는 마음을 시종 넉넉하게 하거나, 지성과 감성에 빛나는 사유가 긴장감을 주면서 독자의 시선을 흡입하는 문장에 힘과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밖이 보이는 창의 특성을 활용해 자연과 이웃을 불러들인다고 하는 건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한 좋은 전제다. 이미 서두에서 작가는 자폐 시대 숨어야 할 필요를 느낄 때면 삶의 무게를 경험하는 것으로써 전제와 결론의 인과성을 확보한다. 도시 생활 속에서 보통의 주부라면 블라인드를 내리거나 창을 닫으면서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서 작가의 반응은 정반대다. 창을 열어 보면, 무엇 하나 온전할 수 없는 도시 환경인데 작가는 세계와의 소통을 꿈꾼다. 이것은 남다른 관점이요, 이 작품을 작품이게 하는 단초다. 이 단초를 기초로 작가는 닫힘과 열림을 반복하는 구조로 나가면서, 안과 밖의 대비, 벽과 창의 대비,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의 대비, 과거와 현대의 대비 구도를 통해 주제 구체화를 완벽하게 구축한다. 그리고 작가는 닫힘과 열림의 모순에서-열림에의 의지-사고의 전환-벗어남의 시도-열림으로의 실천을 통해 상승구조를 구축한다. 닫힌 창 안은 자폐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공간을 탈출하고 보니 다른 집들의 모습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일체유심조의 철학이 꽃피운 것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바로 이거다”라고 하는 데 갈등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소재나 주제의식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다. 소재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의미나 해석이 /과메기로구나/보다는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당선 작품으로 선정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중심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탄탄한 문장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질서 정연한 구성의 체계성과 주제 전개의 논리성이다. 그 다음 이 수필의 강점은 주제의식의 상상화가 빛났다는 데 있다. 이는 “창을 닦는다” “닫혀 있어도 열려 있는 창” 등의 문장과 문구로 함축되고 암시된다. “창을 퉁겨본다”는 문장은 실감을 주면서 리얼리티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송명화의 작품은 앞에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관점 중 어느 하나 소홀히 한 것이 없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 이 작품 역시 인식의 측면에서는 발상이 평범을 못 벗어났다는 것이다.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 소주제들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 정작 주제의 의미화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다른 두 작품에 비해 글의 구성에서부터 전개 과정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하고도 인과적인 연결성이 가장 나았다. 세 번째 단락의 첫 문장은 그 단락의 마지막에 두었다면 더 좋을 뻔했다. 한마디로 본격수필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문장력, 구성력, 주제의식의 형상화 능력이 탁월한 데서 평론가이자 국어 전공 교수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부산일보의 /찔레꽃/은 작년에 이은 올해의 당선작도 많은 수필인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추억을 아름답게 잘 회상하거나 사물의 감상을 잘 묘사하기만 해서 좋은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자신만의 철학적 사고와 깊이 있는 생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독창성도 없고 문제 제기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수필이 당선된 것은 의외다. 이 수필의 장점은 간절함으로 씌어졌다는 데서 오는 감동뿐이다. 이는 자칫 감상으로 흐를 위험이 큰 소재다. 아니나 다를까 감상으로 흘렀고 감정 절제가 안 된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머물지 않고 어머니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민과 이해로 나아가야 했다. '습니다'스타일의 과거 회고형의 종결어미와 전통 모성 원리로 전개되는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에 기대어 값싼 공감을 요구하고 있지만, 주제의식이 과거를 감싸는 복고적 지향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시 참신성이 떨어지는 글이다. 찔레꽃 회상을 통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유년 시절의 추억을 수놓던 모래사장의 회고를 통해 가난한 시절의 순수를 퍼 올리고 있지만, 평면적인 구도 역시 구성의 묘미를 느끼게 하지 못하고, 읽는 보람이 될 카타르시스도 없다. 장면 장면의 스토리 전개가 너무 익숙한 경험 세계의 범주 안에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런 평범한 세트 설정은 가치 있는 체험일 수가 없다.
신춘문예 당선작품이라면 무엇보다도 작가의 의식이나 작품의 주제가 참신해야 하며, 문제의식이 표출되어야 한다. 작품의 출발선이 인식에 닿아 있어야 한다. 문단 전개의 기본 원리는 최소한 지켜져야 한다. 찔레와 모정의 그리움은 상관성이 매우 깊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진부하다. 신춘 작품이라면 구성이나 표현 면에 있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지만 이 작품의 구성은 시공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단순 구성을 취하고 있고, 표현은 현대적이지 못하다. 복합적 통일성이란 미학의 관점에서 구성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고, 단락 전개도 비문법적인 데가 많다. 너무 안이하게 조직을 꾀했던 것이다. 주제가 당연한 것이고 보니 읽는 보람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종결어미가 '습니다'체라서 복합적 통일미나 무질서 속의 질서, 탄력성이 다른 작품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 문체의 단순, 건조함은 읽는 데 지루함을 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문학의 주요 속성인 독창성이 없고, 주제도, 제재를 보는 관점도 표현도 평범한 작가의 선을 못 벗어나고 있다. 메이저 신문이라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투고되었을 것 같은데, 한마디로 좋은 작품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목을 간질이는 햇살’이란 표현은 전반, 중반, 두 번이나 나왔으며,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찔레꽃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주제 지향성이 희미해진다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다. 전체적으로 “나‘라는 말이 30번을 넘게 나오고, ”그“라는 말도 10번 이상이 나온다. 감정이 절제되지 못한 탓이다. 찔레꽃에 담긴 사연과 어머니에의 그리움을 접목시키는 발상은 지극히 평범한 차원이다. 수필은 인식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찔레꽃과 어머니의 관계성과 인과성마저도 작가는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인간이란 누구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존재다‘라는 말로 뭉개버린다. 신춘 작품은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주제 중심의 문학인 수필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주제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표상화해서 그것에다 주제를 담아야 하는 데도 이 작가는 찔레꽃에 어머니의 기억과 유년의 추억까지 함께 담아내려 하다 보니, 주제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인지 고향에 대한 추억인지 어느 하나로 집약되지 않는다.
잘된 글은 결속성의 원리에 지배되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여러 가지 문학성을 주는 요인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포크스가 분산되면서 제일 중요한 주제 결속성이 깨어졌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럴 때 고급독자는 가장 혼란을 겪는다. 그러면 이 글은 사람은 누구나 늙어 가면 추억과도 관계없이 과거적 그리움에 젖는 존재라는 것을 주제화한 글인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탄력성의 측면에서 문제 제기를 해보면, 앞서 지적했지만 종결어미가 너무 단순하다는 점이다. 새로움은 문체에서, 표현에서, 소재를 보는 눈에서 다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란 주제와 ‘습니다’체가 어울린다고 보겠지만, ‘습니다’는 수필 문체와 어울리지도 않고, 시대적 공간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문체임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제재나 주제의식의 형상화가 현대적 감각으로 뒷받침된 본격수필이 당선작으로 뽑힐 날을 기대해 본다.
첫댓글 우리 지역신문인 부산일보가 뽑은 신춘문예 작품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