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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오온설 - 오온의 자양분이 되는 것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나와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이 어떻게 촉에서 생기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촉에서 생긴 허망한 생각들이 어떻게 오온의 질료가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촉에서 생긴 허망한 의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알아봅시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팔계 속에 있는 우리의 허망한 의식들은 육촉이 발생함으로써 존재로 느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십팔계가 촉을 통해서 물질과 의식으로 느껴지는데, 육계(六界)는 이같은 물질과 의식이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계역을 이루고 있는것을 의미합니다. 육계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입니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물질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물질은 지, 수, 화, 풍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은 공간속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공간도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정신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 수, 화, 풍, 공, 식이라고 하는 육계는 이렇게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존재의 종류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물질은 160여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현대인을 상대로 말했다면 육계라고 하지 않고 160계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아무튼 육계는 이렇게 사람들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구성하는 질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육계는 십팔계에¼ 촉이 발생하여 십팔계를 존재로 느낌으로써 우리가 갖게 된 존재의 세계입니다. 십팔계가 의식의 세계라면 육계는 존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촉은 십팔계라는 의식의 세계를 육계라는 존재의 세계로 느끼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촉을 통해 이렇게 의식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로 느껴지면, 그 존재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게 되고, 그 존재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고, 그 존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촉을 연하여 수(受), 상(想), 사(思)가 함께 생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온은 촉을 통해 존재로 느껴진 육계와 촉에서 새롭게 발생한 수, 상, 사를 질료로 하여 구체적인 존재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온의 질료는 육계와 촉에서 생긴 수, 상, 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의 색은 육계의 지수화풍이 질료가 되어 존재È한 것이고, 오온의 수, 상, 행은 촉에서 발생한 수, 상, 사가 존재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촉을 통해 생긴 육계와 수, 상, 사라는 의식이 어떻게 오온이라는 존재의 질료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육계와 수, 상, 사라고 하는 의식이 어떻게 오온의 질료가 되어 오온으로 성립되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오온의 순서를 잘 보아야 합니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의 순서로 설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오온의 순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온의 순서가 식. 색, 상, 수, 행 이건 색, 수, 상, 행, 식 이건 오온이 다섯 가지 존재를 의미하는데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온의 순서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순서는 육계와 수, 상, 사라고 하는 오온의 질료가 오온으로 성립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온의 순서를 보면 식이 맨 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 의하면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은 촉을 통해 새롭게 발생한 수, 상, 사를 의미하는 오온의 수. 상. 행 보다 먼저 생긴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온이 생긴 순서대로 오온의 순서가 정해졌다고 한다면 오온의 순서는 식, 색, 수, 상 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온에서 식은 맨 나중에 위치하고 있겠습니까?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한 분별심입니다.
촉을 통해서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의 세계를 육계라고 하는 존재의 세계로 인식하는 것도 사실은 식입니다. 그리고 촉을 통해서 새롭게 발생한 수, 상, 사라는 의식을 오온의 수, 상, 행이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식입니다. 이렇게 식은 우리의 의식현상을 존재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도 인식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하는 자신도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이 자신을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다른 것들을 존재로 인식한 후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의 식은 이렇게 식에 의해서 존재로 인식된 식입니다. 그러므로 식이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맨 마지막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잡아함 374경]은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지 자양분이 있어서 중생이 되도록 돕고,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자양분인가?
첫째는 단식(團食)이고,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고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만약 비구가 이 자양분을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면 식이 머물면서 커간다. 식이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에 명색이 나타난다. 명색(名色)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행(行)이 커가고, 행이 커가기 때문에 다음 세상의 나의 존재가 커간다. 다음 세상의 나의 존재가 커가기 때문에 생로병사와 같은 괴로움이 모인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명색(名色)이란 존재로 인식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에 책상의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책상을 존재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무지개를 처음 본 사람이 무지개를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나, 책상을 모르는 부시맨과 같은 사람이 책상을 본다고 해도 그것을 책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긴 나무 덩어리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마음 속에 무지개라고 하는 이름과 책상이라고 하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존재로 인색된 것의 이름과 모습, 즉 명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에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같은 명색이 나타나는 까닭은 우리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이것을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 즉 희탐을 가질 때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될 나의 존재가 자라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경은 이렇게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경전입니다. 우리가 생사의 세계에 윤회하는 것은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감으로써 거짓된 나라고 하는 존재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식은 이렇게 생사윤회의 근본입니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식이라는 존재가 본래부터 있어서 죽지 않고 생사윤회를 거듭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불교를 오해하는 것은 식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에서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네 가지 자양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단식(團食), 촉식(觸食), 의사식(意思識), 식식(識識)이라고 하는 네가지 자양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단식은 팔리어 원어로는 kabalnkara-ahara인데 kabalinkara는 ‘덩어리로 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ahara는 영양분 또는 자양분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덩어리로 된 자양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모두 덩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밥 덩어리, 떡 덩어리, 사과 덩어리, 무 덩어리, 고기 덩어리, 이런 것들이 음식입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음식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유지되고 자라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몸이라고 하는 나의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에서는 단식이 중생이 되게 하고,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식물은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음식물은 지, 수, 화, 풍 사대가 모여 있는 것입니다. 연기설의 입장에서 보면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촉을 통해 존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들로 이루어진 음식을 먹음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몸도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몸을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식은 육계 가운데 지. 수. 화. 풍 네가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자양분인 촉식은 팔리어로는 phassa-ahara인데, phassa(산스크리트어:sparsa)는 십팔계를 인연으로 생긴 촉입니다. 그러니까 촉식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 즉 촉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자양분인 의사식은 팔리어로는 ‘manosan-cetana-ahara'인데, manosancetana는 마음, 즉 육입처의 의를 의미하는 mano(산스크리트어:mana)와 생각, 사유, 지각, 의도를 의미하는 sancetana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사식은 중생의 마음, 즉 의로 행하는 지각과 사유, 의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부처님은 지각, 사유, 의도를 촉에서 발생한 수, 상, 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식은 수, 상, 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자양분인 식식은 팔리어로 'vinnana-ahara'인데 ‘vinnana(산스크리트어:vijnana)’는 지, 수, 화,푸, 공, 식이라는 육계 가운데 맨 마지막인 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식식은 육계의 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네가지 자양분은 육계의 지, 수, 화, 풍과, 촉과, 촉에서 생긴 수. 상. 사와, 육계의 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음식, 즉 자양분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 즉 오온입니다. 우리는 육체,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다섯 가지를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나의 존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라고 여기는 오온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촉에서 생긴 육계와 수, 상, 사를 취하여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음식물을 계속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이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촉에서 생긴 수. 상. 사를 계속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의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생기는 식을 끊임없이 취하여, 그것을 존재하는 나의 의식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오온은 촉에서 생긴 오온의 질료를 취한 결과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무가 수분이나 자양분을 취하여 존재하고 자라나듯이 오온은 육계와 수, 상, 사를 자양분으로 취하여 존재하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들 네 가지 자양분, 즉 오온의 질료가 어떻게 오온으로 성립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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