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
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수도, 천도교회의 근본적 핵심이다”
- 한순회와 후손들의 삶(1)
탁암 심국보
제암 한순회(1885-1961)는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출신으로
3.1운동, 신간회, 무인독립운동 등에 간여한
천도교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의 한 분이다.
제암의 독립운동의 이력과 후손들의 삶을 살펴본다.
제암(霽菴)은 포덕47년(1906)년 입교했다.
제암이 교화원장을 지낼 때
‘나는 천도교를 왜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교화원장은 한국전쟁 후 혼란스러웠을 때
천도교단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지금의 교령 격이었다.
“스승 말씀에
착한 운수 둘러놓고 포태지수 다시정해
사람이 곧 한울이란 종지로서 참된 도를 가르쳐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한다기에 입도하였고,
자부(自負)의 천직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의는
확고부동이다.”/ 교화원장 한순회,
「제세안민하다기에」, 『신인간199호』(1953.8.)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천도교가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기에
‘입도’한 스무살 무렵 제암의 결의도,
그러한 결의로 살아온 제암의 한생도
확고부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래 제암의 글에는 도와 세상사를 보는
제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왜 우리가 천도교를 하는지,
천도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제암의 고민은 지금 우리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고
지엽문제를 타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나무 본체는 그대로 두고
그림자만 없애려고 하는
치(痴, 어리석다, 미치광이)자와 같습니다.
우리 천도교회에서
시급을 요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누누이 말할 필요도 없이 수도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근본적 핵심이 되는 수도는 아니하고,
교회운영의 만전과 교회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산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장로 한순회,
「수도에 힘쓰자」 『신인간205호』(1955.11속간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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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참여하다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백여 년 전 광주군 돌마면의 3.1운동은
1919년 3월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다. 현재 성남 분당의 율동공원에는
성남 3.1운동 기념비가 서 있고,
한순회, 한백봉의 묘가 있다.
한백봉은 제암보다 4살 위의 집안 종친으로
역시 성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성남시 역사를 기록한
‘한권으로 보는 성남의 기록’에는
제암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한순회는 35세, 한백봉은 39세로,
1919년 2월 말경에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상경하였다가
만세시위를 보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집안 어른들과 면내의 유지들을 모아 함께 의논하였다.
이 모임에서 이웃 낙생면장
남태희와도 함께 거사하기로 계획을 했다.
3월 27일 분당 장날을 시위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했다.
태극기를 만들고 먼저 그날의 거사를 위하여
핵심 운동가들이 모여서 새벽에 율리 부근 뒷산과
고갯마루에 올라 봉기를 예고하는 봉화를 올렸다.
이 봉화 사건에 참여한 사람은
동네 사람 50여 명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봉화를 올린 다음 각기 집으로 흩어져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쯤에 장터에 모였다.
장꾼들이 오기 시작하자 한백봉은 한순회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돌마면과 낙생면의 연합 시위 군중은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성남(광주)은 서울과 가까워도
산이 험준하고 철도가 지나지 않아서
정보 전달이 뒤지는 곳이었다.
실제로 개화기에 근대식 학교, 우편, 도로, 교통 등
근대 시설이 별반 이루어지지 못한 지역으로
사회 문화적 변화나 발전이 비교적 늦었다.
돌마면과 낙생면의 연합 시위 군중이
3천 명을 넘은 것은 대단한 숫자였다.
한순회와 한백봉은 율리에서
누대를 살아온 지방 유지였기 때문에
문중의 어른들과 인근의 뜻있는 지사들을
독립운동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성남 지역에 해당하는
돌마면에서는 한순회·한백봉,
낙생면에서는 남태희,
대왕면에서는 이시종·이제순 등이 시위를 이끌었다.
돌마면 시위 과정에서 한백봉 등 수십 명이 피검되어
판교헌병주재소에 연행되었다.
그들은 남한산성 용인헌병분대 광주분견소로 이송되어
4일간에 걸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한순회 등 대부분의 인사는 방면되었으나,
한백봉은 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으로 이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송치 이감되었다.
당시 한순회는 천도교 광주교구장으로
지역의 3.1만세운동을 이끈 것으로,
이후 이천, 여주, 강원도 원주,
충북 지역 등지의 만세운동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운동을 모아 수감된 유가족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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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회와 신간회 광주지회
한순회의 이력에서 또 주목할 것은 신간회 활동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 성남 지역은
광주중앙청년회, 송파광주청년회, 광명청년회,
진흥청년회, 노동공제회, 조선일보 지국,
중외일보 지국, 조선농민사 지국 등이 설치되어
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어갔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협동전선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신간회광주지회가 설립되었다.
1927년 8월 24일 송파광주청년회 주도로
신간회 광주지회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지회장에 한순회가 선임되었다.
간사는 한백봉, 한백호, 이대헌, 유인목, 박기환,
한용회 등 돌마면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광주지회의 천도교인은
한순회를 비롯하여 한철기, 황추호, 이용호, 박태원,
한진회(한순회의 동생), 김정은 등이 참여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경성지회가 6월 10일에 설치된 점을 감안하면
그 시기가 비교적 이른 것이었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아래 표와 같이 조직 개편을 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8년 12월 석혜환이 지회장에 선출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에게 점차 지도권이 넘어갔고, 1929년 8월의 제4회 임시대회에서
유인목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것은
집단지도체제로의 변화와 함께
변중희, 김세풍 등 사회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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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활동을 통한 천도교의 세력 확장
한순회의 신간회 활동에서 유의할 것은
신간회 활동을 통한 천도교의 세력 변화다.
즉 신간회 활동을 통한 천도교청년동맹의
조직확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지금 2021년의 상황에서 천도교가
세상과의 교류에서 어떻게 힘을 모아갈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순회는 청년동맹 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
신간회 활동을 통한
천도교청년동맹의 변화를 살펴본다.
신간회에는 천도교 구파
즉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해 주로 참여하였고
신파세력도 일부 참여하였다.
천도교청년동맹의 주도인물은
기호지역과 호남지역 출신들이었다.
이 지역은 동학혁명 때 처절한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서북지역 출신에 비해서 반일감정이 한층 강하였다.
천도교청년동맹은
포덕67년(1926) 4월3일 조직되었지만
각 지부 조직은 6.10만세운동으로 간부들이 피검되고
또 일제의 감시가 심한 까닭으로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청년동맹도
각 지방에 집중적으로 지부를 설립해 나갔다.
1927년부터 1929년에 이르는 기간에
지부가 속속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신간회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28년에만 14곳의 지부가 설치되어
동맹 지부수가 12% 증가하고
동맹회원수는 18% 증가하였다.
그러나 신간회 해소 논의로 논쟁이 비등하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맹지부가 설립된 곳은 5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천도교청년동맹이
신간회 활동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으로
천도교청년동맹의 조직과 활동이
신간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30년 현재 39개에 달하는 지부가 설립되었고
동맹원 수도 1,300여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천도교청년동맹은
천도교 구파의 전위조직으로서
민족운동 세력의 비타협적 인사들을 견인하여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청년동맹의 지역적 분포를 살펴보면,
남한 21곳, 북한 15곳이었고,
지역별로는 전라도가 9곳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 평안도와 황해도가 각각 7곳이었으며,
충청지역은 6곳 이었다.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1927~28년 경에 설립된 곳이 많았고,
충청과 경상 및 삼남지방은
1928, 1929년 경에 설립된 곳이 많았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신간회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자
조직 체계를 변경하였다.
1928년 4월 6일
천도교청년총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중앙집권적 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지방조직도 확대되었는데,
중앙과 지방 조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지방조직을 통일하여 관리하기 위해
1929년 2월24일에 황해도연맹을 시작으로
각도 연맹을 조직하였고,
경기도연맹(1929.5.30.),
전남연맹(1929.7.18.),
평북연맹(1929.8.11.),
충북연맹(1929.5.2.) 등이 결성되었다.
천도교구파는
신간회 활동을 통해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1927년 9월 육임파가 분립하였을 때
구파의 교인 수는 6천명에 불과하였으나
1930년 12월경에는 1만 8천명으로 증가하였다.
청년동맹의 지부 수도
1927년에는 8개 정도에서
1930년에는 약 50개 지회에
동맹원 1천 3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증가로 청년동맹은
1928년에는 청년총동맹으로 체제를 개편하여
각도 연맹을 조직하는 등 체제를 강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천도교구파는 신간회 운동을 통해
청년동맹의 체제를 강화하는 교세를 신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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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청년동맹, 신간회 지회 설립에 적극 참여
앞서 신간회 광주지회 활동에서 보듯
신간회지회 설립 준비는
대체로 천도교청년동맹과 같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천도교는 본부뿐만 아니라
각 지회 조직과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특히 경성지회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신간회에 참여한 천도교 세력은
경기(경성·경서·강화·광주·수원),
호남(강진·병영·광양·영암·완도·장흥·정읍·남원),
충청(당진·서산·예산·홍성·음성),
강원·경상(양구·통영·영천·대구·진주·부산),
북한(선천·용천·신의주·철산·구성·북청·이원·
단천·함흥·홍원·성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30년 9월 이후 좌익계에서는
천도교 일부와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로 규정,
신간회 해소론이 본격화 되고
1931년 4월 14일 경성지회 해소안이 가결되었고,
1931년 5월15일 신간회는
처음으로 열린 전체회의에서
신간회는 해소 즉 해산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