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통권 650호 포덕 145(2004)년 10월
동학 초기의 사적 편찬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머리말
포덕 20년(1879)에 이르면
동학의 조직은 비로소 자리를 잡아갔다.
해월신사는
오랫동안 과제로 삼아 왔던
동학의 사적 편찬(事蹟編纂) 사업과
경전 간행 사업을 착수하기로 하였다.
이해 11월에
정선군 남면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대선생수단소(大先生修單所)를 마련하고
2개월 후에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도 간행하게 되었다.
곧이어 포덕 21년(1880년) 6월에는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金顯洙)의 집에서
한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포덕 22년(1881) 5월에는
단양군 대강면(大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국문경전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동학의 교화 기능을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
이후 충청도로 도세(道勢)가 뻗어나가자
포덕 24년(1883)에는
목천(木川) 구계리(九溪里) 김은경(金殷卿)의 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중간(重刊) 보급하게 되었다.
또 이 해 여름에 공주접이 주동이 되어
뜻깊은 경주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기본적인 편찬 사업은 이것으로 일단 마친 셈이다.
이번 호에서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을 편찬하게 된 연유와
『수운문집』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편찬
해월신사의 뜻에 따라
유시헌, 신시일, 홍석범 등 약 20여 명의 정선도인들은
비용을 모으고 힘을 합해 뜻있는 사적 편찬 사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1879년(己卯) 11월 1일에
일단 정선군 남면 방시학의 집에다 대선생수단소를 차렸다.
그리고 11월 10일부터는
도차주 강시원(姜時元)이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포덕 4년(1863) 4월에 입도한 이후의 행적을 기술하는 데
별다른 애로는 없었다.
그러나 대신사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득도와 초기 포덕에 대한 행적은 자신이 없었다.
단편적인 기록들을 모아 검토했으나 확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강시원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발문을 남겼다.
자료상 무척 고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기묘년 가을에 주인과 나는 선생의 사적을 수찬(修撰)키로 하였다.
〔
막상 집필코자 하니〕 시작과 끝이 뒤섞여지고 앞뒤가 어지러워 〔
정리하기에〕 어려웠다.
혹시 잘못 범필(犯筆)할까 두려워서 그 근원을 밝혀보고자 하나
확연하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뿌리를 찾아 근원을 주워 모아 보았으나
사리가 모두 확연치 않았다(探其根而採源 則事不偕於不然).”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생(대신사)의 도원을 이어보고자 하여
(欲有繼先生之道源)”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미 어떤 도원기(道源記)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물론 도원(道源)이란 말을 도의 근원이라 해석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도원을 이미 만들어진 기록으로 본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즉 “이미 도원기가 있었던 것을 계속시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필자는 완벽한 사적은 아니더라도 어떤 기록이 있었다고 본다.
강시원은 집필한 지 2개월 만인 1880년 1월에
지금의 200자 원고지로 치면 225쪽 분량을 탈고하였다.
이 초고를 동면 전세인(全世仁)이 다시 정서(精書)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그 이름을 『최선생문집도원기서』라 하였다.
집필자 강시원은 물론이요,
정선 도인들은
모두가 도의 근원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공개하지 않기로
정선 접주 유시헌(劉時憲)은 편말(編末) 발문에서
“오늘 정선주인(旌善主人, 해월신사)과
차주(강사원)의 공력으로 사적을 출간하게 되었으니
뒤따라 오는 학도들이 쉬이 보게 되어
어찌 자연스럽지 않으며 스승님의 성덕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수단소(修單所) 임원은 다음과 같다.
道布德主 崔時亨, 道次主 姜時元, 道接主 劉時憲,
修正有司 辛時永, 辛時一 都所主人 房時學,
監有司 崔箕東, 安敎一, 書有司 全世仁, 筆有司 安敎常,
紙有司 金源仲, 接有司 尹宗賢, 收有司 洪時來,
崔昌植, 冊有司 辛潤漢, 安敎伯, 輪通有司 洪錫道, 安敎綱.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내용은
①수운의 생애,
②득도와 포덕,
③탄압과 남원행,
④접주 임명과 북도중주인 선정,
⑤수운의 체포경위
⑥순도 이후 해월의 활동,
⑦영해교조신원운동,
⑧조직의 재건,
⑨의례의 정립,
⑩사적 편찬과 동경대전 간행 경위 등
1880년 이전의 사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자세하게 소개된 것을 가지고 논의하게 되었다.
해월신사는 결국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발표하지 않기로 하였다.
만일 세상에 이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동학이 반란의 무리로 오해받을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영해 부사를 살해하는 변란을 스스로 밝히면
그 결과는 엄청난 지목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여겼다.
『시천교종역사』에는
“길이 전하려 했으나
날인견봉(捺印堅封)하여 유시헌이 간수하도록 했다.”고 하였고
『천도교회사초고』에는
“탈고됨에 급하여 견봉날인하사 유시헌에게 임치(任置)하시고
밀촉(密囑)하사
왈 「차고(此稿)는
인안(人眼)에 경괘(輕掛)함이 불가라」 하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모처럼 공들여 편찬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가
이런 사유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원본 김연국이 가져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가 처음 햇빛을 본 것은
25년 후인 1906년경이라 한다.
유시헌의 증손인 유돈격(劉敦格)의 증언에 의하면
여러 사람들이 이때부터 찾아와 열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에는 시천교 측에서 필사해 갔다고 한다.
시천교는 이를 바탕으로 1915년에 『시천교종역사』를 출판했다.
한편 시천교의 내분으로
송병준과 헤어진 김연국은 1913년에 가회동에 시천교총부를 만들었다.
김연국은
시천교총부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해
1918년에 최유현(崔琉鉉)에게 『시천교역사』를 집필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시헌의 아들 유택하(劉澤夏)로부터 원본을 가져갔다.
이 원본은 김연국의 후손이 간직하고 있다가
60년이 지난 1978년 4월 4일에
김덕경(金德卿)에 의해 신문보도(중앙일보)로 공개되었다.
『대선생주문집』 발간
해월신사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견봉하고 나서
대신사의 창도부분만 따로 떼어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규장각 소장 『동학문서』 중에 그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대선생주문집』은
평남 용강군 대접주 홍기조(洪基兆) 등이
포덕 37년(189 6)에 상주군 은척원(銀尺院)으로 해월신사를 찾아갔다가 필사본 한 권을 얻어왔다고 여겨진다.
『신인간』 통권 29호(1928년 11월호)에 의하면
1896년 11월에 평남 용강 대접주 홍기조(洪基兆), 홍기억(洪基億)과
임복언(林復彦) 3인이 해월신사를 만나보려고 길을 떠났다.
일단 이종훈(正菴 李鍾勳)이 있는 경기 광주까지 와서 며칠 쉬었다가
정암의 안내로 은척원(于基里)으로 갔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 필사된 『대선생주문집』 한 권을 얻어왔는데
1900년 1월에 임중칠(林仲七)이 다시 필사했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00년 12월에 관이 몰수해 갔으며 후일 규장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수운문집』의 정체
현재 대신사 사적으로
『대선생주문집』 외에 『수운문집(水雲文集)』이 하나 있다.
이 『수운문집』은
최수정(丹谷 崔守正)에 의해 1960년경에 발굴되었다.
이때 세 가지 기록을 발굴하였다.
공주 계룡리에서 계룡본(鷄龍本)을 입수했고
논산 도곡리에서 도곡본(道谷本)을 입수했다.
그리고 영주 단곡리에서 단곡본(丹谷本)을 입수했다.
천도교인인 단곡은
동학 계통의 종단 지도자들과 연합해 보려는 생각으로
이 계통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였다.
그래서 이런 기록들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계룡본 『수운문집』과 도곡본 『수운문집』은 오자가 많았다.
이 중 단곡본 『수운문집』이 비교적 온전하다.
공주 계룡면 경천리(敬天里)에 살던 김옥희(金玉熙)는
1898년에 영주군 단산면(丹山面) 단곡리(丹谷里)로 피신 갔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나
공주 경천리에서 가지고 온 원본을 다시 쓴 것이라 한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문장 구조가 거의 같다.
다만 해월신사와 박하선(朴夏善)에 관한 부분이 차이가 있다.
차이점은 네 곳이다.
첫째, 포덕 3년(1862)에 대신사가 남원에서 경주로 돌아와
서면 박대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대선생주문집』에는 최경상이 혼자 찾아갔다고 하였고
『수운문집』에는 박하선 등 여러 명이 갔다고 하였다.
둘째, 포덕 4년 7월 23일 파접(罷接)하고 난 다음에 있는 기록이 다르다.
『대선생주문집』에는
해월신사를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차정(差定)했다고 하였으나 『수운문집』에는 기사 자체가 빠져 있다.
셋째, 포덕 4년 8월 13일에
용담으로 대신사를 찾아갔을 때의 기록도 다르다.
즉 『대선생주문집』에는
해월신사가 혼자 찾아가
14일에 대신사가 해월신사의 수족을
임의로 굴신하지 못하게 하는 체험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수운문집』에는 박하선 등 6∼7인이
같이 그런 체험을 했다고 되어 있다.
넷째, 포덕 5년 3월에
대구장대에서 순도한 대신사의 시신을 용담으로 운구할 때
참여한 인물도 다르다.
『대선생주문집』에는
시신 운구에 박하선이 보이지 않으나
『수운문집』에는 박하선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자인(慈仁) 주막집 주인이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대선생주문집』에는
대신사의 아들 세정이 “대구로부터 온다.”고 대답했다 하였다.
그러나 『수운문집』에는
박하선이 “대구로부터 온다.”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은 날짜와 장소와 내용 등이 같고 문장 구성도 같다.
다만 해월신사의 정통성과 관련된 대목에 이르면
어김없이 박하선(朴夏善)을 등장시킨다.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 중 어느 하나는 잘못된 기록이다.
그런데 『수운문집』에는 고친 흔적이 보인다.
포덕 4년 8월에 용담으로 대신사를 찾아갔을 때의 기사에
고친 흔적이 있다.
즉 ‘자네들은’이라고 해야 할 대목에
‘자네’라고 기록한 대목이 그것이다.
‘자네들’이라면 여러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자네’라면 일인칭이다.
그런데 “자네들은 왜 이러는가.”라고 해야 할 대목에서
“자네는 왜 이러는가(謂曰君何如是耶).”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자네들의 몸과 손발’이라 해야 할 대목에는
‘자네의 몸과 손발(君之身與手足)’이라고 했다.
추측하건대 원래 기록인 『대선생주문집』에는
해월신사가 혼자 갔으므로 일인칭인 ‘자네’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수운문집』에서는
해월신사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자네’라고 한 부분을 ‘자네들’로 고쳐 버렸다.
그런데 고치다가 실수로 ‘자네’라는 표현을 놓쳐 버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수운문집』은
『대선생주문집』을 가필하여 꾸며낸 문건이라 여겨진다.
결론
동학혁명 후
관의 탄압으로 동학활동은 지하에 숨어 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도인들 중 몇몇이 여러 형태의 교를 만들었다.
그 중 주목되는 교는 김주희(金周熙)가 세운 경천교(敬天敎)이다.
김주희는
공주군 신상면(新上面) 달동(達洞)에서
1860년 10월에 동학도인 김윤집(金允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5세에 동학혁명군으로 참여했다가 관의 지목을 받고
계룡산으로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900년경부터 김시종(金時宗)이란 가공 인물을 내세워
경천교를 만들었다.
경천교는
동학의 남접(南接) 청림(靑林) 연원이라 하였다.
동학에는 북접과 남접이 있는데
대신사의 가르침으로
북접은 해월신사가 연원의 맥을 잇고
가공 인물 김시종은 남접의 맥을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水雲大先生 … 得道於庚申 布以敎之 先定南接靑林 次定北接法軒].
여기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 필요했다.
앞으로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런 사유로 누군가 『대선생주문집』을 『수운문집』으로 바꾸면서
해월신사의 정통성을 기록한 부분에 가필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론적으로 대신사의 역사 기록은
『대선생주문집』이 최초였다.
따라서 『수운문집』은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이본(異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