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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사성제
일묵 지음
2566.11.22
2장 법이란 무엇인가?
1 법이란 무엇인가?
3) 존재의 실상은 물질과 정신의 법이다
정신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상을 알고 분별할 수 있는 정신 [nāma, 名)이 있는 것이다. 또 존재는 정신을 통해서 괴로움과 행복을 경험하므로 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 그러면 정신에 대하여 살펴보자.
정신은 나마nāma의 번역인데 nāma는 문자적으로 '이름' 또는 '명칭'을 뜻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정신은 형체나 모양은 없지만, 대상으로 '기울면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정신은 대상에 '기울면서 작용하는 [namana]' 특성이 있는 모든 현상을 가리키는 법이다. 예를 들어 느낌, 인식, 접촉, 의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지혜, 자비, 마음, 의식 등이 정신의 법들이다. 이들은 형체는 없지만, 대상과 접촉할 때 대상을 느끼고, 인식하고, 접촉하고, 의도하고, 집착하고, 싫어하고, 잘못 알고,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고, 꿰뚫어 알고, 행복하게 하고,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고, 알고, 분별하는데 이들은 모두 대상에 '기울면서 작용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정신 중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마음 [citta, 心]이라할 수 있다. 찟따 citta는 √cit (to know)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citta는 문자적으로는 주로 심장(9)을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대상을 아는 정신 현상을 뜻한다. 그래서 '대상을 아는' 특성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법으로는 마음이라 한다. 다시 말해 존재들이 살아가면서 대상을 아는 중심적인 작용을 하는 것을 마음이라 부른다. 그래서 정신 작용이 일어날 때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정신의 법들은 모두 마음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 가고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행복이 저절로 따르리라.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_ 『담마빠다』(2)
마음과 동의어로 마노mano[意] 와 의식[識]이 있다. 마음은 대상을 알 때 아는 작용의 '주도자', '선도자'라는(10) 측면에서 주로 언급된다. 이에 비해 마노는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 장소[處]'(11) 라는 측면에서 쓰인다. 의식은 앞서 설명했듯이 '분별해서 앎'이라는 뜻을 지닌다. 다섯 무더기 중의 의식 무더기를 말할 때나 여섯 가지 의식, 즉 눈 의식, 귀 의식, 코 의식, 혀 의식, 몸 의식, 마노 의식[意識]으로 주로 언급된다. 이렇게 마음, 마노, 의식 이 세 가지는 쓰이는 용례는 다르지만 모두 '대상을 아는' 특성은 같으므로 법으로는 같다. 그래서 앞으로 때로는 마노를 마음으로 번역하여 쓰기로 하겠다.
“그와 같이 마음이라고도 마노라고도 의식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
_「배우지 못한 자경」(S12:61)
마음을 제외한 정신의 법들을 모두 심리 현상 [cetasika, 心所]이라고 한다. 쩨따시까cetasika는 cetas(마음에)+ika(속한)으로 분해되므로 '마음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마음 부수' 또는 '심리 현상'이라고 번역한다. 심리 현상들은 마음에 속하면서 마음을 도와주는 것인데 이는 크게 느낌, 인식 그리고 형성[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때 형성은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 현상들을 말하는데 접촉, 의도, 마음 기울임 등과 같이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들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해로운 법[不善法]들, 그리고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 자비 등의 유익한 법[善法]들이 포함된다. 이 중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하는 법들은 자신은 유익한 법도 해로운 법도 아니지만, 유익한 법과 결합하면 유익한 법이 되고, 해로운 법과 결합하면 해로운 법이 되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심리 현상은 마음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에 마음과 분리될 수 없으며 마음과 한 몸으로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한다. 다만 마음과 심리 현상들은 특징과 역할이 다르므로 그에 따라 분류한 것일 뿐이다. 비유하면 마음은 왕에, 심리 현상들은 신하에 비유할 수 있다. 왕과 신하가 함께 힘을 합쳐 국사를 처리하듯이 마음과 심리현상이 결합하여 대상을 분별해 아는 것이다. 정리하면 정신은 마음과 심리 현상들로 나눌 수 있고, 심리 현상들은 느낌, 인식, 형성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때 마음은 의식과 동의어이고, 심리 현상들은 느낌, 인식, 형성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므로 정신은 느낌[受], 인식[想], 형성[行] 의식[識]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도반이여, 그런데 느낌과 인식과 의식(12)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하여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느끼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그것을 분별하여 압니다."
_「교리문답의 긴 경」(M43)
정신 중에 앞서 마음 또는 의식은 설명했으므로 이제부터 느낌, 인식, 형성에 관하여 차례대로 알아보자. 먼저 느낌은 마음 또는 의식이 일어날 때 항상 함께 일어나는 심리 현상으로, 느낌의 본래 의미는 '몸으로 경험해서 생생하게 알다', '몸으로 경험해서 생생하게 느낀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느끼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느낌'이라 한다. 세속에서의 느낌은 탐욕, 성냄 등의 형성에 속하는 심리 현상도 내포한 개념으로 쓰인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느낌은 탐욕과 성냄 등의 거친 감정으로 발전하기 전에 생기는 '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럽다', '그저 그렇다' 등의 단순한 기분을 의미한다. 그래서 느낌은 단지 행복[樂], 괴로움[苦]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고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한다.”
_「삼켜버림 경」(S22:79)
느낌은 좀 더 세분화하여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육체적 행복[sukha]과 정신적 행복[somanassa]으로 나눌 수 있고, 괴로움은 육체적 괴로움[dukkha]과 정신적 괴로움[domanassa]으로 나눌 수 있다. 느낌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현상이지만, 몸 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통증은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이고, 몸의 편안함은 육체적인 행복한 느낌이다. 마음 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느낌은 정신적인 느낌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예를 들어 불만족은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이고, 선정의 행복은 정신적인 행복한 느낌이다. 종합하면 느낌은 육체적인 행복한 느낌과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 정신적인 행복한 느낌,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온[upekkhā]한 느낌의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의식이 일어날 때 느낌과 더불어 인식도 함께 일어난다. 인식은 앞서 설명했듯이 대상의 표상을 만들거나 이름을 붙여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식하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인식이라 한다. 예를 들어 노란색 계열의 색깔을 가진 모든 것을 ‘노랗다.’라고 인식하면 다음에 노란색 계열의 색깔을 보게 될 때 ‘노랗다.’라고 인식할 수 있다. 또 대상을 싫어하는 특성이 있는 모든 정신 현상을 보고 ‘성냄’이라고 인식하면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지 대상을 싫어하는 특성이 있는 정신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즉시 ‘성냄’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사람들은 대상에서 공통된 특성 등을 추출하여 같은 명칭을 붙임으로써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인식이라고 부르는가?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푸른 것도 인식하고 노란 것도 인식하고 빨간 것도 인식하고 흰 것도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한다.”
_「삼켜버림 경」(S22:79)
대상을 인지하는 역할의 정신의 법은 인식[saññā, 想], 의식[viññāṇa, 識], 지혜 [paññā, 慧]의 세 가지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산냐saññā는 saṁ(함께)+√jñā(to know)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고, 윈냐냐viññāṇa는 vi(분별해서)+√jñā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그리고 빤냐paññā는 pa(앞으로)+√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이렇게 이들은 모두 √jñā(to know)에서 파생된 명사들이지만 대상을 인지하는 깊이나 역할에 있어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뭉뚱그려 함께(saṁ) 아는 것을, ‘의식’은 분별해서(vi) 아는 것을, ‘지혜’는 좀 더 깊이 나아가서(pa) 아는 정신 현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인식과 의식과 지혜는 모두 현상을 인지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식은 현상을 개념으로 단순하게 아는 것이고, 의식은 그 개념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대상에 관해 자세히 아는 것이며, 지혜는 현상의 실상에 대해 통찰하여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꿰뚫어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식은 자신의 몸을 볼 때 ‘내 몸’, ‘남자의 몸’, ‘여자의 몸’, ‘뚱뚱한 몸’, ‘날씬한 몸’이라는 정도로만 몸을 안다. 그렇지만 몸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한다. 의식은 몸의 상태는 어떤지, 몸은 몇 개의 뼈와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몸에는 어떤 장기들이 있는지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분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괴로움을 소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몸의 실상인 법을 꿰뚫어 알지는 못한다. 지혜는 몸의 실상이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의 결합이고, 그것들의 특성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있는 그대로 깊이 꿰뚫어 알아 번뇌를 소멸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 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느낌과 인식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형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앞서 형성은 느낌과 인식과 더불어 접촉, 의도 등과 같이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과 괴로움의 소멸에 방해가 되는 ‘해로운 법들’,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법들’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접촉, 의도, 마음 기울임 등의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들에 관하여 차례로 살펴보자. 마음 또는 의식과 느낌, 인식은 분리할 수 없이 함께 일어나는데 이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과의 접촉[phassa, 觸]이 필요하다. 팟사phassa 는 베다어 spṛé(to touch)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인데 접촉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눈과 형색이 만나서 눈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 접촉이다. 마찬가지로 귀, 코, 혀, 몸, 마음[mano]의 감각 기능[根]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대상[境]이 만나 귀 의식, 코 의식, 혀 의식, 몸 의식, 마음 의식이 일어나게 하는 특성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접촉이라 한다. 그래서 접촉은 ‘접촉하는’ 특징이 있는 법이고, 접촉을 조건으로 마음 또는 의식이 일어날 수 있다. 수많은 대상이 있지만, 그중에 접촉이 일어나는 대상만 알고 분별할 수 있지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대상은 알 수도, 분별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눈에 부딪히지 않는 형색을 볼 수는 없다.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 의식이 …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 의식이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 의식이 …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 의식이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 의식이 … 마음과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 의식[意識]이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니 접촉이다.”
_「여섯씩 여섯 경」(M18)
접촉을 통해 대상을 느끼고, 인식하고, 분별할 때 의도〔cetanā, 思]도 함께 일어난다. 쩨따나cetanā는 √cet (to know)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또 √cet(to know)에서 파생된 동사인 찐떼띠cinteti는 '의도하다', '계획하다', '생각하다' 등의 뜻을 지니므로 cetanā는 ‘의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의도하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의도라고 한다. 의도는 함께 일어난 심리 현상들과 더불어 마음이 의도하는 대로 대상을 알고 분별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 비유하면 마음 또는 의식이 왕이라면 의도는 총사령관과 같다. 이렇게 의도는 총사령관처럼 마음을 도와 정신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므로 의도가 정신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의도를 업이라 하신 것이며 의도를 통해서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을 짓는다고 하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음과 대상이 접촉할 때 대상에 대하여 행복이나 괴로움을 느끼고 표상이나 이름을 붙여 인식하고, 그것을 알고 분별한다. 이때 대상에 대하여 어떤 의도가 일어나느냐에 따라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적 행위가 일어난다. 때로는 나쁜 의도가 일어나서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거친 말을 하고, 집착하고, 화내고, 사견을 가지는 등의 해로운 행위가 일어난다. 때로는 좋은 의도가 일어나서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거짓말을 삼가고, 거친 말을 삼가고, 집착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바른 견해를 가지는 등의 유익한 행위가 일어난다. 이같이 의도한대로 느끼고 인식하고 분별하면서 몸과 말과 마음을 통해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유익한 의도는 유익한 업이 되어 이생에서 행복하게 살고, 내생에서도 천상이나 인간과 같은 선처에 태어나는 조건일 뿐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괴로움을 소멸하는 조건이 된다. 반면에 해로운 의도는 해로운 업이 되어 이생에서 괴롭게 살다가 내생에서도 지옥이나 축생, 아귀(13)와 같은 악처에 태어나는 조건이 된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을 통해 업을 짓는다.”
_「꿰뚫음 경」(A663)
의도가 유익한지 해로운지는 대상에 어떻게 마음을 기울이는지와 관련이 있다. 이때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게 하거나 향하게 하는’ 실상을 지닌 정신 현상들을 마음 기울임[manasikāra, 作意](14)이라 한다. 마음 기울임은 대상이 나타날 때 그 대상으로 마음이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비유하면 배를 목적지로 향하게 하는 방향키와 같다. 그래서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느냐에 따라 유익한 법이나 해로운 법이 일어난다. 대상에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면(15) 유익한 법이 일어나고, 어리석게 마음을 기울이면(16) 해로운 법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몸은 영원한 것이라고 몸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이면 몸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반면에 몸은 무상한 것이라고 몸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이면 몸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어리석게 마음을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들은 버려진다."
_「열심히 정진함 등의 품」(A17:7-8)
이상으로 형성 중에 접촉, 의도, 마음 기울임 등의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들은 마음이 대상을 분별하여 알 때 기본이 되는 심리 현상들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과 대상이 '접촉'할 때 대상을 분별하려는 '의도',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마음 기울임', 대상에 대한 행복이나 괴로움 등을 느끼는 '느낌', 대상의 표상이나 이름을 붙이는 '인식' 등의 도움 없이는 대상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해서 형성 중에 해로운 법이나 유익한 법들은 마음이 대상을 분별할 때 기본이 되는 심리 현상들이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법은 일어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괴로움의 소멸에 방해가 되는 해로운 법은 사라지는 것이 좋다. 따라서 해로운 법과 유익한 법을 구분하는 지혜는 불교의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를 바른 견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정신현상이 해로운 법인지, 유익한 법인지를 분명히 꿰뚫어 알아야 해로운 법들은 버리고 유익한 법들은 계발하는 바른정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께서 해로운 법은 '버려야 할 진리'인 집성제, 유익한 법은 '계발해야 할 진리'인 도성제로 정리하여 설하신 것이다. 그러면 형성 중에 해로운 법과 유익한 법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해로운 법 [akusala dhamma, 不善法]은 아꾸살라akusala 담마dhamma의 번역이다. 이때 꾸살라kusala는 kusa+√la(to cut)로 분해할 수 있다. 문자적으로 kusa는 '꾸사'라는 풀을 의미하고 la는 '자르다', '베다'라는 뜻을 지닌다. 꾸사 풀은 거칠고 날카로워 잘못 만지면 손을 다치게 되는 위험하고 해로운 풀이다. 이런 꾸사 풀을 베어 버리는 것이 kusala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kusala는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없애 버리는 '유익한[善]'을 의미한다. 한편 akusala는 부정 접두어인 a와 kusala의 결합이므로 괴로움의 소멸에 방해가 되는 '해로운[不善]'을 의미한다. 그래서 akusala dhamma는 괴로움의 소멸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해로운 법'을 의미한다.
해로운 법들의 뿌리는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擬]이다. 탐욕은 대상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이고, 성냄은 대상을 싫어하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이며, 어리석음은 '현상의 실상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존재의 실상이 물질과 정신의 법들이고,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진리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탐욕이다. 원하는 대상에 대한 탐욕이 있는데 그것이 얻지 못할 때 싫어하는 마음이 성냄이다. 이와 같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기반으로 다른 해로운 법들이 분화되어 생겨나므로 이들을 해로운 법들의 뿌리라고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해로운 법 중에서 탐욕을 뿌리로 하는 법들은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 견해인 '사견과 나를 내세우는 '자만'이 있다. 또 성냄을 뿌리로 하는 법들은 남의 성공을 싫어하는 '질투'. 자신의 성공을 나누기 싫어하는 '인색', 과거의 잘못을 싫어하는 '후회'가 있다. 탐욕과 성냄을 모두 뿌리로 하는 법은 게으르고 무기력한 마음인 '해태와 혼침'이다. 어리석음을 뿌리로 하는 법들은 악행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 없음', 악행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는 '수치심 없음',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마음인 '들뜸', 진리의 법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4장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인 집성제에 대한 설명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해로움의 뿌리입니까? 탐욕이 해로움의 뿌리입니다. 성냄이 해로움의 뿌리입니다. 어리석음이 해로움의 뿌리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를 일러 해로움의 뿌리라 합니다.”
_「바른 견해 경」(M9)
유익한 법[kusala dhamma, 善法]은 꾸살라kusala 담마dhamma의 번역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kusala dhamma는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법'을 의미한다. 유익한 법들의 뿌리는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이다. 탐욕 없음은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특징이 있는 신 현상들이고, 성냄 없음은 대상을 싫어하지 않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이고, 어리석음 없음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방향에서 '현상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특징이 있는 정신 현상들을 말한다. 어리석음 없음이나 지혜는 둘 다 '현상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특징이 있으므로 명칭은 다르지만 법으로는 같다.
예를 들어 존재의 실상이 물질과 정신의 법들이고,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 어리석음 없음 또는 지혜이다. 지혜로 인해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 탐욕 없음이다. 원하는 대상에 대한 탐욕이 없으므로 그것이 얻지 못할 때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성냄 없음이다. 이와 같은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을 기반으로 다른 유익한 법들이 분화되어 생겨나므로 이들을 유익한 법들의 뿌리라고 하는 것이다. 유익한 법들은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을 주므로 수행자가 반드시 계발해야 할 법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인 도성제, 즉 팔정도에 대한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유익함의 뿌리입니까? 탐욕 없음이 유익함의 뿌리입니다. 성내지 않음이 유익함의 뿌리입니다. 어리석음 없음이 유익함의 뿌리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를 일러 유익함의 뿌리라 합니다.”
_「바른 견해 경」(M9)
지금까지 형성을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 해로운 법, 유익한 법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사실 마음과 더불어 의도, 접촉, 느낌, 인식, 마음 기울임 등은 인지 과정에서 기본적인 법이지만, 유익한 법도 아니고 해로운 법도 아니다. 이들이 유익한 법이 되는지 해로운 법이 되는지는 이들이 유익한 법과 함께하는지 해로운 법과 함께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여서 의도가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 등의 유익한 법들과 함께하면 그 의도는 유익한 의도가 되고, 유익한 업을 짓는 것이다. 반면에 어리석게 마음을 기울여서 의도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해로운 법들과 함께하면 그 의도는 해로운 의도가 되고, 해로운 업을 짓는 것이다. 이는 마치 왕이 충신을 만나면 성군이 되고, 간신을 만나면 폭군이 되는 것과 같다.
정리해 보면 붓다께서는 정신을 느낌, 인식, 형성, 의식의 네 가지 무더기로 나누었고, 형성들은 접촉, 의도, 마음 기울임 등의 다른 것과 함께하는 법들과 해로운 법들, 유익한 법들의 세 가지로 구분하셨다. 이렇게 붓다께서 모든 정신 현상들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분류하신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희유한 일이다. 현대의 자연 과학은 물질세계의 구조를 발견하거나 물질세계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주된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물질세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제한된 물질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소수의 천재 과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존재에게 일어나는 정신 현상들은 물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함에도 붓다께서는 존재를 이루는 모든 정신 현상을 유한한 법들로 분류하고, 그것 중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유익한 법과 해로운 법을 명확하게 구분하셨다. 비유하자면 바닷물을 컵에 떠서 '이것은 한강에서 온 물이고, 이것은 낙동강에서 온 물이고, 이것은 금강에서 온 물이다.'라고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붓다께서 최상의 지혜로 이런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존재들은 해로운 법은 버리고 유익한 법은 계발하는 바른 정진을 함으로써 괴로움을 완전하게 소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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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런 의미를 살려 중국에서는 심으로 번역했다.
10 이런 측면에서 마음을 '왕'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11 눈은 형색, 귀는 소리,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마노는 법을 감지하는 센서라는 의미에서 감각 장소라고 한다.
12 의식은 마음과 동의어이다.
13 항상 배고픔이나 갈증에 시달리며 고통 받는 존재들을 말한다.
14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마나시까로띠manasikaroti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manasi는 manas(마음)의 처소격이고, karoti는 '행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의 √kṛ(to do)dp서 파생된 동사이므로 manasikaroti는 '마음에 두다', '마음을 짓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manasikāra는 '마음 기울임' 또는 '주의'를 의미한다.
15 요니소yoniso 마나시까라manasikāra의 번역이다.
16 아요니소ayoniso 마나시까라manasikāra의 번역이다.
종진 옮겨 적고 두 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