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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질적인 면에서 기쁨과 슬픔의 교차점에 서 있는(탄젠트 포인트)의 존재입니다.
전3:2-8절(참조)에 이를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날 때의 기쁨이 있고 죽을 때의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심을 때의 기쁨이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의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일 때의 슬픔이 있고 치료시킬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헐 때의 아픔이 있는가 하면 세울 때의 기쁨이 있습니다.
슬퍼할 때가 있고 춤 출 때가 있습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읽은 것을 찾는 기쁨의 때가 있고 가진 것을 잃는 슬픔의 때가 있습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의 기쁨이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할 때가 있고 평회할 때가 있습니다.
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 ‘형통한 날’의 ‘형통한’(히:토브)는
‘선한’ ‘아름다움’ ‘자비로움’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히:투바)는 ‘좋게되라’ ‘행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은
좋은 날에는 선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시절에는 행복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만사 형통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인생 찬가를 부릅니다.
성경은 인생의 환회의 국면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에게 찾아오는 환회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시절이 좋을 때 행복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주의 할 점은 행복의 범주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잘 나가는 인생 찬가는
하나님 밖의 시간속에서가 아나라
철저히 하나님 안에서 갖는 삶의 형통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권고가 13절의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라는
구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
인생 찬가의 깃발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 문제는 신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역사상에서 기독교적 행보r론을 체계화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주후 386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주후 386년 11월 13-16일 어간에 「복된 삶」이란 책을 쓰는데,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와
‘하나님을 소유하는 자’를 구분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되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복된것은,
그 시람의 추구가 하나님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내적인 빛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참 행복은 지혜이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이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구원의 진리 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행복론의 정수는 ‘그리스도안에서의 행복’입니다.
어거스틴의 행복론은 감각적이며 쾌락적인 당시의 행복관을 넘어서서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서적이고
기독교적l인 행복관을 정립했다는 점에 그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적처럼 참 행복은 하나님안에서 주님을 소유하는 행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 종 좋은 시절에 그 좋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보존하지 못한 채방종하여 게으르며,
교만하며, 불신앙의 죄를 자꾸 저지릅니다.
믿음 안에 섰던 자가 왜 망합니까?
이는 그들이 자가들의 좋은 시절에 자가들의 육체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적 순결과 믿음의 절개를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닥친 좋은 시절이 오히려 믿지 않고 좋은 시절을 당한 때보다
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시절을 살고 있으면
언제든지 좋지 못한 시절이 올 것을 대비하여 견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절이 좋을수록 더욱 신앙생활에 힘을 쏟아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잘 나갈 때 진정으로 섬길 자를 잘 섬기십시오.
안락하다고 나태하여 신앙의 경건함을 잃으면 안됩니다.
「사무엘」은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고
믿는 자들을 향하여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진실로 감사하며
형통한 날의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복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좋은 날에 있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함’으로 번역된 ‘라’(히)는
‘악한’ ‘고난’‘해로운’ ‘슬픔’ 등의 의미를 포함한 ‘역경’ ‘고난’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라’는 말은 ‘문제의 근원을 세밀하게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
우리 인생은 고난과 역경의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한 상황에서 현대인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스트레스’라는 말입니다.
‘스트레스’란 말은
캐나다의 내분비학자「셀리에」가
인체에 해로운 ‘인자’나 ‘자극’에 의해 발생한 긴장상태를 명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는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그것은 ‘황수정 스트레스’입니다.
드라마 「허준」이 한참 인기가 있을 때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왔는데,
사고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병원에 도착하여 전전긍긍할 때
이 환자가 눈을 뜨고는 뭔가를 말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더랍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귀를 기울였는데,
그 환자가 “허준” 녹 화 해” 하더랍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고
황수정은 ‘예진 아씨’로 많은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런 황수정이 마약혐의로 구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신자’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연예인도 인간인 이상 일탈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는 접어둡니다.
그럼에도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은
그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이처럼 사회적 스트레스의 파장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 속에는
개인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스트레스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적 경제 상황에서 오는 ‘국가적 스트레스 증후군’도 있습니다.
이름하여 .아르헨티나의 눈물‘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엘도라도(황금의 나라)’입니다.
한반도의 14배나 되는 광활한 대지와 풍부한 자원을 가졌기에
라틴권 유럽인들이 꿈꾸는 이민 선호 1순위 국가였고,
196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 7대 경제국까지 올랐던 나라입니다.
덕분에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남미의 파리’로 이름을 날렸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우리 한국에서도 이민 붐이 일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불과 수 십여 년만에 ‘패국망신’한 것은 불가사의입니다.
세게의 전문가들은 ‘페론니즘’,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정책 실패를 아르헨티나의 눈물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아르헤니나 사람들은 극심한 경제적 환난에 처해있기에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성 고난에서 생각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곤고한 날에 곤고함에 처한 사람이 생각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전도서 기자에 따르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휘어지게도 하시고
똑바로 곧게도 하시는 분입니다.(13절)
더불어서 우리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곤고한 날에 생각해야 할 대상은,
우리 인생사를 주관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인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각종 운세를 점치는 집이 아주 성황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보다 사람의 경험과 통계를 더 믿는 어리서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시는 전도서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장래 일을 모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에서 내일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느 면에서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확실성이 하나님의 확실성 안에서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만 믿게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미래 일이 좋아질 것을 알게 되면,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미래 일이 불행하게 될 것을 알면,
그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 때문에 인간적 지헤를 다 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흔들림 없이 확실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인생의 곤고함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모든 부분을 깊은 통찰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곤고함을 당해 보아야 자기의 연약을 알게 됩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때에야 비가 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몸이 아파 봐야 내가 얼마나 무절제하게 살았는가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 요인을 내 밖에서 찾는 것보다
내안에서 찾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 불어서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신앙적 경건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펑안할 때에는 남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잘 나갈 때에는 교만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모습들을 돌이켜
경건한 신앙의 자세를 회복하는 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곤고한 날에는 주님과 함께 거하는 신앙적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는 매일 당하는 그 날을
우리 인생의 최후의 날처럼 여겨야 된다’고 권고 합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종말론적 삶을 살라는 당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
미래의 일들 또한 결과적인 면에서 유익하게 되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바라보는 자는
위로부터 오는 한없는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용기와 미래를 위한 계획들을 실행할 힘과,
그것을 이룰 지혜를 얻게 되어질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생애 가운데서 형통할 때에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면서
승리하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귀한 음식 잘먹었습니다.
형통할때나 곤고할때나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시지요...
우리가 힘들어해서 그런거지요...오늘의양식 마음밭에 새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