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球植 국회의원
김제동 방송인
하형주 동아大 교수
崔鉉萬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부회장
이대영 극작가·중앙大 교수
장광효 디자이너
蔡明錫 TV 매니아 대표
해이수 소설가
바보 누이
누이 앞에서는 한없이 이기적이기만 한 나는 언젠가부터 누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곤 한다. 실은 그 누이가 나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孫宅洙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과 「목련 전차」가 있다. 신동엽 창작상, 이수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등 수상. 현재 실천문학사 근무.
늘 양보만 하던 아이
꽃으로 치면 이파리 뒤에 숨어 핀 꽃망울쯤이나 되겠다. 화사한 봄볕 아래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돋아나는 꽃잎들 사이에서 이제야 간신히 개화를 준비하는 여린 꽃, 그런 꽃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새 둥지로 치면 그 둥지에서 가장 힘없는 새가 아닐까. 어미가 물어 나르는 모이를 받아먹기 위해 다른 형제들이 그악스레 입을 벌리고 뒷다리에 힘을 주며 어미 품을 파고들 때, 저만치 밀려나서 얌전히 자기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 새 말이다.
나의 누이 손수연은 집안에서는 바보로 통한다. 유년시절부터 워낙에 존재감이 희박한 위인이었지만, 지금 이날까지 무엇 하나 주장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유년시절 아버지가 어쩌다 붕어빵을 사들고 왔을 때도 그것은 막내나 나의 차지가 되기 일쑤였다. 손님이 와서 과자종합선물세트 같은 뜻밖의 횡재가 주어졌을 때도 분배에서 늘 가장 뒤로 밀려나 있었다.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빠가 물려준 옷을 입고 다니느라 사내아이로 종종 오해를 받던 아이. 오빠가 싫증이 나서 버린 몽당연필과 쓰다 만 노트를 갖고서도 군말 없이 묵묵히 책가방을 챙기던 아이. 어린이날 어머니가 주신 용돈을 못된 오라비가 슬쩍 훔쳐간 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짐짓 시키지 않은 거짓말을 하던 아이.
『우리 수연이는 착해 빠지기만 해서 어떻게 할까. 사람이 좀 모진 구석도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말마따나 누이는 천성이 착한 아이였다. 군복무를 하던 30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통씩 100통이 넘는 위문편지를 보낸 누이였고, 여상을 졸업하자마자 조그마한 해운회사의 경리일을 보면서 번 돈으로 암담한 문청시절을 보내고 있던 오라비의 용돈을 챙겨준 누이였다.
내 가슴을 울리던 한마디
나의 누이 손수연. |
내가 스물다섯 늦은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 누이는 말없이 수년 동안 준비해 온 대학의 꿈을 접었다.
『나까지 같이 다니면 부모님께 짐만 되니까 나는 나중에 갈게. 오빠는 장남이잖아』
TV 드라마나 신파 영화 같은 데서 본 이야기가 나의 일이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신파가 아니었다. 이별 뒤에 값싼 유행가 한 소절이 더러는 어떤 고급스러운 음악보다 더 효과적으로 아픈 심중을 달래 주듯이, 삶에서 솟는 신파는 더러 가슴을 울리는 강력한 파문이 된다. 그때, 누이의 한마디 말이 그랬다.
그런 누이가 시집을 가겠다고 남자친구를 데려온 게 8년 전인가 보다. 어떤 사람일까. 모두들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여러 좋은 혼처를 정중히 물리쳐 온 뒤라 그 궁금증이 더 컸다.
『바보 신부의 신랑이니 당연히 바보 신랑이겠지』
가벼운 농을 섞어 가며 아침부터 어머니는 집단장을 했고, 아버지 역시 이발소를 다녀오며 상기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날 밤 아버지는 옥상 위에 올라 줄담배를 피웠고, 어머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나 역시 착잡한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성한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장애인이니? 악수를 하고 싶어도 손가락이 없으니 악수를 할 수 없잖아, 바보야』
남의 집 자식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부모님 대신 나는 누이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평소에 제 뜻을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는 아이이니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회유를 하고 협박을 해보았지만 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설득되고 말았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누이는 내가 알고 있던 그 바보 같은 누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물러설 수 없는 당당함이 있었다.
신혼방에 시부모님까지 모셔
그 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누이의 신혼방을 찾게 되었다. 아마 사돈댁에 세배를 드리러 갔을 때였나 보다. 본의 아니게 누이의 신혼방을 엿보게 된 셈인데, 화장대 하나 놓을 공간이 없는 좁은 방 안이 신혼방 치곤 너무 궁색하다 싶었다.
『이 바보야, 그러기에 내 말을 좀 듣지? 요즘 세상에 이 좁은 방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 젊은 애가 어디 있냐! 첫째도 아니고 둘짼데』
화가 나서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신히 꾹 눌러 참고 있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눈치를 살피던 누이는 좁아도 아늑해서 좋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주워섬기며 마냥 허둥거렸다. 제 딴엔 모처럼 들른 오라비 앞에서 행복해 보이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모습이 마음 한쪽을 더 무겁게 했다. 그날 나는 결국 이 바보 멍충아, 하고 참던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누이를 생각하면 가슴부터 아려 온다. 그런데 누이 앞에서는 한없이 이기적이기만 한 나는 언젠가부터 누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곤 한다. 누이가 아기를 갖고 나서부터는 아기를 안고 버스를 타는 엄마들이 남같지 않아 보이고, 누이가 분윳값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일하는 여성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배경처럼 서 있는 누이, 실은 그 누이가 나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
초등학교만 마치고 나를 키워 준 큰누나
가난한 시골 출신 사춘기 소녀가 교복 입은 또래 여학생을 쳐다보면서 얼마나 슬펐을까.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崔球植 국회의원
1960년 경남 산청 출생. 서울大 외교학과 졸업, 英 뉴캐슬大 대학원 정치학과 수학. 朝鮮日報 기자,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 한나라당 원내 부대표,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역임. 現 제17대 국회의원.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 살림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둘, 나 이렇게 다섯이었다. 큰누나 위로 세 분 형님이 계셨는데 형님들은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다.
큰누나 최수임은 1954년생인데, 덕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편이 됐더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옷보따리 행상을 다니느라 닷새 만에 한 번 정도밖에 집에 들르지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집안일은 큰누나 몫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부터 행상을 다녔다. 진주 중앙시장에 있는 옷가게에서 옷을 사서는 보따리에 이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집집마다 들러 옷을 팔았다. 덕산 장날이 4일장이었기 때문에 4일 혹은 9일 전후로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초겨울, 집에서 김장하는 날 저녁 무렵 태어났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김장을 담근 후 태어났다고 들었다. 누나는 당시 여섯 살이었는데 다른 일은 기억이 없고, 막냇동생인 내가 태어나던 장면만 기억이 뚜렷하다고 한다.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등에 업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녀야 했다. 젖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 지리산은 매우 추웠다. 옛날에는 어디고 할 것 없이 추웠지만 지리산 칼바람은 살을 뚫고 뼈에 사무쳤다. 덕천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방 안에 물그릇은 쩍쩍 얼어 터졌다.
어머니는 어느 한 곳 추위를 피할 곳 없는 칼바람 속에서 하루 종일 나를 업은 채 지리산 골짜기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저녁 무렵 어느 집에 도착해 포대기를 풀고 나를 눕혀 놓으면 나는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얼굴은 새빨갛고 온몸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그러면 어머니는 울면서 내 온몸을 주물렀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 품을 알지 못한다. 그 때 이후로는 어머니 품에 안겨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아버지 품과 누나 등에서 자랐다. 여섯 살 차이인 데도 불구하고 큰누나가 어머니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데싱 스로 더 스노~』
중학교 졸업식에서. 왼쪽이 큰누나 최수임, 가장 오른쪽이 필자. |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살던 우리 일가족은 1969년 1월 경남 진주로 이사했다. 달동네에 방 두 칸을 얻어 살았다.
당시 큰누나는 사춘기였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큰누나가 한글로 「데싱 스로 더 스노, 이너완 오픈스 레. 오더 빌리고. 라핑 올더 웨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한참 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중학교에 입학해 영어를 배우고 나서야 그것이 『Dashing through the snow/in a one-horse open sleigh/ Over the fields we go/ laughing all the way~』로 시작하는 크리스마스캐롤 「징글벨」인 줄 알게 됐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우리집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발음대로 적자면 「대싱 스로 더 스노/인어 원 호스 오픈 슬레이/오버 더 필스 위 고우/래핑 올 더 웨이」일 것이다.
마침 집이 진주여중고 가는 길목에 있었다. 등하굣길 까맣고 멋진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집 앞을 웃고 재잘대며 끊임없이 지나다녔다. 가난한 시골 출신 사춘기 소녀가 교복 입은 또래 여학생을 쳐다보면서 얼마나 슬펐을까.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큰누나는 자존심이 강하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감내했다. 큰누나가 학교 보내 주지 않는다고 부모님께 대드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누나는 미장원 일을 배웠다.
내가 초·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부모 역할은 큰누나 몫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 갈 시간이 없었고, 아버지는 그런 일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은사들은 큰누나를 잘 안다.
차비가 없어 누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큰누나는 1978년에 결혼했다. 나는 그해 대학입시에 실패해 서울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차비가 없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누이의 情(정), 결혼의 중요성 등을 따지기에는 집안의 힘이 너무 약했다. 큰누나는 결혼사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없는 데 대해 오래 서운해 했다.
큰누나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방송통신大에 들어갔다. 지금은 경상大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방송통신大는 4년 만에 졸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누나는 4년 한 학기 만에 졸업했다. 그 한 학기는 동생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돕느라 밀린 것이다. 큰누나는 방송통신大를 4년 만에 마치지 못한 것을 매우 자존심 상해하고 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나보다 더 머리가 좋고 말도 잘하고 똑똑하다.
물론, 누나의 사춘기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힘이 많이 들었다. 자라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가까이서 조언해 줄 이른바 멘토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겪고 극복해야 했다.
夢精(몽정)을 性病(성병)으로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한동안 고민했고, 결벽증 때문에 하루에 손을 수백 번씩 씻었다. 누나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체력이 약한 탓인지 끊임없이 잡념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찌 누나들에 비하겠는가. 아버지,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누나들이다.●
공장에 다니며 나를 키워 준 다섯 누나들
그런데 지금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내게 새 옷을 입히던 그때 누나들이 입고 있었던 낡고 해진 옷들입니다. 이제야 철이 드나 봅니다.
김제동 방송인
1974년 경북 영천 출생. 계명문화大 관광과 졸업. 대구 MBC 여행프로그램 강사, 삼성 라이온즈, 동양 오리온즈 이벤트 MC 역임. SBS 「야심만만」, KBS 「해피투게더」 등 다수의 쇼 오락프로 진행. 현재 KBS 「연예가 중계」, 「환상의 짝궁」, 「스타 골든벨」,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진행 중이며, 계명문화大 관광레저학부 특임교수로 출강 중.
누나들의 척추가 나의 고향
『슈파 슈파 슈파 슈파~~~』
누구든 이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들으면, 다섯 명이 힘을 모아 지구를 지키고 악당을 물리치던 「독수리 5형제」가 떠오르겠지만, 나는 나의 다섯 누나, 일명 「독수리 5누나」가 생각납니다.
나는 5녀1남 중 막내입니다. 딸딸딸딸딸 다음에 아들인 나였죠. 흔히, 누나들이 남동생을 업어 키웠다고 하죠. 나 역시 다섯 누나의 등을 옮겨 다니며 자랐습니다. 누나들은 어린 나를 서로 옆에 재우겠다고 실랑이까지 벌이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나를 업고 교실까지 갔다니까 내 고향 주소는 누나들 척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가끔은 야단맞은 기억도 납니다. 다들 일하러 나간 사이에 누나들이 아끼는 분첩의 분을 바르고, 양지바른 담 밑에 앉아 있었으니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방송 출연 때문에 분장을 할 때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피식 웃곤 합니다. 여자들 틈에서만 자라 걱정이라며, 웃으면서도 근심하던 누나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듯 억척스러운 우리 누나들이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집을 지키고 일궈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작지만 나에게는 전 세계이자 우주였던 나의 가족과 집을 지켰던 것은, 만화영화 속에 나오던 「독수리 5형제」도, 「태권브이」도, 「슈퍼맨」도, 엄마가 그렇게도 부러워했던 옆집의 형들도 아닌 다섯 누나들이었습니다. 돈과 가난, 불안한 현실과 미래 앞에서,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끈과 희망의 끈을 씨줄과 날줄로 이어 온 다섯 누나들이야말로, 나에겐 누구보다 위대하고 믿음직한 영웅이었죠.
꿈의 나이키 양면 점퍼
대구 FC 장내 중계 MC인 방우정(사진 맨왼쪽)과 함께한 방송인 김제동(오른쪽). |
중학교 때부터 대구로 나와 공장에서 일하는 누나들과 단칸방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아니, 누나들에 대한 기억은, 바위에 새겨진 듯 또렷하죠. 가끔씩 먹을거리를 나눠 주곤 했던 발그레한 얼굴의 주인집 딸(내 또래였는데 아직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리고 처음 올라간 도시에서 길을 잃고 전봇대 앞에 서 있을 때 다섯째 누나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집을 찾아준 일(누나의 친구들은 나를 그날 처음 봤는데, 누나의 동생인 걸 확신했답니다. 나와 막내누나는 머리모양만 다를 뿐, 똑같이 생겼거든요) 등.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미아 되었다고 울고불고 하던 누나는 내가 돌아온 걸 반가워하면서도, 너무 닮아서 동생인지 척 보고 알았다는 친구들의 말에 내심 불쾌해했죠(막내누나는 늘 나에게 「밤새 두드린 꽹과리같이 생겼다」고 놀렸거든요).
누나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후다닥 밥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척했던 일, 옷 사달라고 철없이 졸라대던 나를 위해 누나들이 작은 월급을 모아 「꿈의 나이키 양면 점퍼」를 사들고 들어와서 입히고는, 나보다 더 즐거워하던 모습들이 아직까지 또렷합니다. 그런데 지금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내게 새 옷을 입히던 그때 누나들이 입고 있었던 낡고 해진 옷들입니다. 이제야 철이 드나 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드디어 우리 집에도 남자 어른이 생겼다고 참 서럽게 웃고 울던 누나들이었습니다.
그런 누나들이 이제 다 시집을 갔습니다. 아직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홀로 있는 나를 위해 김치와 밑반찬을 보내 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는 매일,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귀한 반찬을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룬 가족이 모두 이제 나의 가장 든든한 「독수리 5누나」 부대가 되어(조카들까지 합치면 웬만한 게시판은 도배할 수 있어요) 적어도 우리 집에서만 조사하면 시청률 100%를 자랑하는, 국민 사회자는 아니지만 가족 사회자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걸 포함해서, 지금 내 모습의 한 획 한 획마다 누나들의 눈물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2006년 대상 트로피를 들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을 때 돌아가면서 산소에 기대 눈물을 쏟던 누나들의 어깨에서, 나는 그 사랑과 恨(한)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방송 소재 제공
동생이 자랑스럽다 하면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 전화하기가 부담스럽다며 가끔은 고개를 숙이는 참 못났지만 자랑스러운 누나들. 그런 누나들에게 아직도 한없이 무뚝뚝한 나는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누나들이 내 누나여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못 배우고 가난한 것이 한이라며 눈물지을 때마다 모두 내 탓인 줄 알면서 아무 위로의 말도 못 해주어서 참 미안했습니다. 가끔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지만, 누나들이 있어서 단 한순간도 기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변함 없이 방송 소재를 제공해 주는 누나들의 입담이 한없이 고맙습니다. 드라마에서 바람 피우는 여배우 한 명 매장시키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누나들의 그 놀라운 문학적(?) 통찰력을 보면, 나 때문에 학교만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문화부 장관쯤은 하고 있을 거라고 이 동생은 확신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경상도 남자인 나에게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아껴 두겠습니다.
아직도 아이들 키우고 뒷바라지하면서 내게 바친 세월만큼이나 힘겨운 시절을 몸으로 부딪혀 가는 누나들. 그 누나들에게 기껏 이 다섯 글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 글 솜씨가 미워집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누나에게 맞은 회초리 50대
『고생을 잠시 피해 보고자 잔꾀를 부리거나 비굴해지면 이런 어렵고 곤란한 환경은 네 곁에서 오래 머물러 있게 마련이니 절대로 당당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형주 동아大 교수
1962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체고·동아大 체육학과 졸업. 성균관大 대학원 스포츠심리학 박사. 1984년 LA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체육최고훈장 청룡장 수상. 부산광역시 시의회 시의원. 제17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중앙상임위원회 특별보좌역.
나의 정신적 지주
유도를 내 삶의 종교로 여기며 살아가던 나의 그 첫 번째 길에서부터 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 주었던,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정신적 지주는 하외숙이라는 분이다. 그분은 1994년 41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난 나의 큰누나이다.
약사셨던 아버지께서는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형편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큰누나의 존재는 동생들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큰누나는 어릴 때부터 영남 일대의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빠짐없이 참가해 장원 아니면 차석을 하던 文才(문재)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달한 성품이었으며, 용모 또한 고왔다.
진주대아중학교를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다녔고, 그 후 진주여고를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하지만 집한 형편이 어려운 이유로 서울에서 하고 싶었을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진주교대 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누나는 본인의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을 잃지 않다.
그런 누나의 영향과 꾸준한 관리 속에서 나 역시 초등학교·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곧잘 하는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었다.
중3 때 어느 날의 일이다. 운동에 좀 열중한 탓이었는지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그때 나는 너무도 무서운 누나의 모습에 꼼짝할 수 없었다. 50대 정도의 회초리 체벌을 받기로 했는데, 단 한 대의 에누리 없이 고스란히 내 종아리가 터지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나는 체벌 전 변명하는 나를 향해 『변명하지 마라! 변명하는 사람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 없다. 나는 네가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고 있다. 내 말이 맞다면 약속된 체벌을 변명하지 말고 받고, 같은 일을 두 번 겪지 마라』며 체벌을 시작했다. 나는 그 후 누나로부터 꾸지람이나 체벌을 받은 기억이 없다.
나는 다소의 곡절을 겪으며 고1 때 부산체고로 전학하며 정식으로 유도를 하게 되었다.
내가 고1 때는 학교에 기숙사가 없었고, 또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이유로 자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영남극장 영사실 모퉁이에 붙어 있는 방 비슷한 곳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환경이 상당히 열악해 잠잘 때 쥐들이 들어와서 자다가 놀라서 깨는 일이 일상의 작은 사건이었다.
누나의 충고와 편지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누나가 찾아와서 그 열악한 환경을 보게 되었다. 누나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네가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하면서 이렇게 당부하고 떠났다.
『고생스러운 상황에서도 당당함과 의연함을 지켜 나가면 멀지 않아 이런 고생은 겨울 잔설이 봄볕을 만나 녹아 없어지듯이 네 주변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고생을 잠시 피해 보고자 잔꾀를 부리거나 비굴해지면 이런 어렵고 곤란한 환경은 네 곁에서 오래 머물러 있게 마련이니 절대로 당당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후 누나는 내게 자주 편지를 보내 주었고, 글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주었다. 나 역시 그런 누나의 편지에 거르지 않고 답장을 보내었다. 그때 나는 운동에 열중하던 시절이었기에 문장, 맞춤법 등이 틀린 편지를 보내었는데, 누나는 어김없이 붉은 펜으로 교정과 첨삭을 해서 누나의 편지와 함께 수정된 나의 편지를 돌려보내 주었다.
누나는 편지 속에 『형주야, 너는 머리도 우수하니 운동만 잘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문장을 지을 줄 아는 사람,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독서를 권했다. 그때부터 나는 독서를 꽤 많이 했고, 그 후 선수촌에서는 책을 많이 읽는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누나는 내게 늘 매섭고 엄격한 존재였지만, 또한 내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중학 시절 나는 발이 너무 커서 맞는 신발이 없었다. 운동화를 꺾어 신고 다녔지만 발은 언제나 아팠다. 이런 모습을 본 누나는 부산 시장을 다 뒤져서 290mm 크기의 미군용 가죽 운동화 두 켤레를 구해 온 적이 있다. 발에 맞는 운동화를 착용한 그때의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나는 내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왔고, 나는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누나는 다음에 내가 유명해져서 인터뷰하게 될 때 「생애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으면 『오늘 이 순간』이라고 말하라면서 함께 웃은 기억이 난다. 그 후 갖게 된 인터뷰에서 나는 한 번도 이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무릎 인대에 심각한 부상 입어
LA올림픽이 열릴 때의 일이다.
시합 당일 연습 도중 잡고 던진 연습 파트너가 하필이면 내 무릎에 떨어지고 말았다. 「뻑」 소리와 함께 무릎 인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현장을 지켜보던 우리나라 대회 관계자들의 얼굴에 걱정과 실망의 빛이 역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시합이 어렵겠다는 판단이 서면서 낙담이 컸다.
잠시 후 나는 모든 관계자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묵주를 손에 쥔 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철심이 박힌 보호대를 무릎에 감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나는 다리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전 시합에서 모두 가볍게 이겼던 상대 선수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1, 2회전을 통과했다. 선수 대기실로 돌아가서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다른 선수들처럼 나도 올림픽의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긴 시간을 자신과 싸우고 인내하며 보냈던가. 「오늘 시합에서 최선을 다하고 설령 불구가 된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 철심이 박힌 보호대를 풀고 가벼운 보호대만 착용한 채 3회전에 임했다. 그런데 그때 한국에 계실 누나가 나의 명상 속에 함께 와 있었다. 누나는 조용히 내게 다가와 『형주야,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너를 지켜 주실 거다! 그러니 의연한 자세로 시합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2회전까지 어렵게 진행되던 시합은 그 후 3회전부터 강력한 라이벌이던 일본의 미하라 선수를 상대로 나의 주특기인 다리 기술을 사용해 한판승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과 함께 강렬히 솟아오르는 용기로 충만해 있었다. 이후 나머지 시합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승리로 마무리하고 한국 유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마음속에 살아 있는 누나
누나는 나의 인생 전반에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누나가 내게 가르친 당당함과 의연함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난 후 쇄도한 수많은 CF, TV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을 모두 거절하는 계기가 되었고, 억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 소망처럼 학자가 되고자 월 13만5000원의 대학조교로 나의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늘 공부하고 노력하던 누나가 나의 우상이었고, 공부하는 학자가 내 일생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함께할 것 같았던 누나가 이 세상을 떠날 무렵은 나도 누나도 무척 바쁘게 살고 있을 때였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누나가 이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너무 큰 충격으로 넋 나간 사람이 되어 몇날 며칠을 울고 또 울었다.
언제나 누나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명료해지고 차분해진다. 누나와 한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끝까지 누나처럼 당당하고 고결한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민들레 같은 누나
늘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누나는 방송통신大를 졸업하고, 남몰래 서울 모 명문대 영문과에 편입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하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편입을 포기해야 했다.
崔鉉萬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부회장
1961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高·전남大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원증권 서초지점 지점장,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미래에셋증권 총괄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재직 중.
어렵고 힘들어도 당당한 누나
나라 전체가 어렵던 시절, 그때는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러울 이유가 못 되는 시기였다. 그 시절에 여덟 자식 중 막내로 태어난 나에게는 누나들이 부모나 다름없었다. 특히 세 살 위 누나는 내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내가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보살피고 돌봐준 고마운 사람이다.
평범한 농촌의 그리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일곱째로 태어난 누나는 어려서부터 참 당찼다. 부모님께서는 여섯째까지 키우고 일곱째가 태어날 즈음 되어 지치신 탓인지, 자식 키우는 것은 이미 세월의 몫이란 것을 깨달으셨던 것 같다. 어려서 내가 본 누이는 어린 나이에도 자기 앞가림을 척척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고교 시절 광주에서 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할 때 누나는 마치 오래도록 익숙해 있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家長(가장) 역할을 해냈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않은 살림에 낯선 도시에서 단 둘이 자취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정말 가진 것 하나 없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워도 누나는 항상 당당했고, 그런 누나 덕분에 나는 낯설고 물선 타향살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누나에게는 말없이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가 있었다.
에너지라 부르는 것이 적합할지 모르나, 그 바지런한 성품과 누나가 내뿜는 생생한 기운은 주변을 활기차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실한 신앙인 가톨릭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힘인지, 아니면 본래 타고난 기운인지 모르겠으나 그 힘은 주변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는 영양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 나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고 있는 종교는 누나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별히 강요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누나를 따라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누나 따라 신앙심이 커졌다.
晝耕夜讀하며 뒷바라지
내가 누나를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에너지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다. 그 당시 누나는 생활비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쁜 회사 일 중에 틈틈이 공부해 방송통신大에 진학한 누나는 본업이 학생이던 내게 귀감이 되었다.
누나가 평소 보여 주는 끊임없는 도전과 철저한 자기관리는 마치 습관처럼 내 생활 속으로 녹아들었다. 누나는 휴일에도 단 한 번 늦잠을 자는 일이 없이 시간 관리에 충실했다. 자신이 스스로 하고자 세웠던 목표를 이뤄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시절 누나를 통해 얻은 습관에 시간의 무게가 얹히면서 이제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해 10월로 기억한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진 나는 병석에 있으면서 누이의 보살핌을 받았다.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던 시기였지만 그 기간 내 정신은 훌쩍 성장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학업에 열중할 수는 없었지만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 쓴 일기들이 사고의 폭을 넓히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병마와 싸우던 그 시절, 누나는 내 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누나와 함께 보낸 그 시절이 나로서는 정신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한번은 이렇게 밝고 당찬 누나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된 누나는 출판사에 다니면서 내 학비를 댔다. 늘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누나는 방송통신大를 졸업하고, 남몰래 서울 모 명문대 영문과에 편입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하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편입을 포기해야 했다. 나도 억울해서 화가 나는데 누나는 한바탕 크게 울고 이내 훌훌 털어 버렸다. 내 맘속에는 아직까지 이 일이 응어리로 남아 있지만 누나는 다 잊었다는 듯 그 이후로 이 일을 내색한 적이 없다.
이런 걸 보면 누나는 참 속도 좋다 싶고, 도통 그 속을 모를 때가 많다. 옛말에 오십이면 「지천명」이라고 해서 하늘의 뜻을 알아 갈 나이라고 하는데, 이제 불혹을 훨씬 지나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평생을 같이했던 누이의 속 깊이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메일에 담긴 동생 사랑
요즘 들어 누나는 전화 대신 장문의 이메일로 인사를 대신한다. 처음에는 그냥 새로운 취미가 생겼나 싶었는데, 단순히 취미생활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사뭇 진지하다. 시사·경제에 대한 견해부터 일상의 소소한 깨달음까지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종종 날아온다. 때로는 언론에서 접하는 나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고, 때로는 꾸중이기도 하다. 누나의 이메일이 오는 날은 자세를 고쳐 잡고 마우스를 움켜쥐게 된다. 누나의 당찬 목소리를 전화기로라도 들을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메일로 접하는 누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는 자식들이 다 커서 대학에 다니는 만큼 여유 있게 생활할 만한데, 그 바지런함은 아직도 누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어느새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광주에 있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소장을 하고 있다.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누나의 소식은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한다.
미당 서정주 詩人이 국화를 삶의 질곡을 무던히 참고 묵묵히 견뎌낸 누이의 이미지로 그려 냈다면, 내 누나는 어려운 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삶을 일구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생활력 있는 민들레, 질경이 같은 사람이다.
창 밖에는 제법 겨울다운 눈이 소복소복 내린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못질을 하다 다친 어깨 탈골은 다 나았는지… 문득 어디선가 다른 누구에게 그 생생한 기운으로 기분 좋은 선물을 주고 있을 누나가 보고 싶어진다.●
침묵하는 법 가르쳐 준 큰 느티나무
『어떡하든 참고 졸업해야 돼. 공부 계속해야 돼. 알지? 내일부터 다시 학교 나가거라. 그래도 그분은 네 선생님이니까, 네가 참아. 힘들어도 참아』
이대영 극작가·중앙大 교수
1961년 서울 출생. 중앙大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大 대학원 연극학과 석사, 문예창작과 박사.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영화사 「백두대간」 이사, 극단 「그리고」 대표, 자유주의연대 문화위원장,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회 위원. 저서로 「이대영 희곡집」, 「이대영 드라마 작품집」. 게임 시나리오 「네오이아」 등.
왕십리 산동네 판잣집의 흥부네 가족
참 바보 같은 일이다. 이런 슬픈 가족사는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내 글을 읽는다면 누님은 아픈 추억에 눈물을 흘리실지 모른다.
나는 어느 가족이든 필히 겪게 될 사랑과 이별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누님에게는 감추고 싶은 아픈 추억이었을지 모른다. 이 글이 다시금 누님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게 될까 두렵다. 아니다. 이제는 아픔이 아니라 누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누님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셨고,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이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것이니까.
나는 3남2녀 중 막내다. 형님 두 분에 누님 두 분이 계시다. 막내인 내가 1961년생이니 형님과 누님들은 195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셨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절이니 그때 우리나라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로 가야 성공한다는 부모님의 강박 때문에 부랴부랴 서울 변두리에 정착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흥부네 가족처럼 왕십리 산동네 판잣집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산동네 판잣집에는 수도가 제대로 없었다. 아, 있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수도관을 배설하고 수도료를 낼 수 있는 집에만 수도를 연결시켜 주었다. 물론 우리는 수돗물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요즘이야 수돗물 대신에 생수를 먹지만, 당시 수돗물은 빈부를 가르는 척도의 하나였다. 우리는 산 아래 공동우물가에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물을 길어 본 사람은 안다. 삶의 고통만큼이나 지겹게 무겁다는 것을. 그 물이 가득 담긴 다라를 머리에 이고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휘청거리며 산꼭대기까지 오르던 키 작은 어머니와 어린 큰누님의 희망 없는 세월을.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大 대신 서울敎大 진학
두 분 형님과 작은누님도 뼈가 빠지는 큰 고생을 했지만, 나와 일곱 살 차이가 나는 큰누님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민하고 똑똑한 큰누님은 집안의 복덩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워낙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은 경기여중에 보내라고 권유했지만 우리 집은 맏딸에게 공부를 시킬 만한 그런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위로 오빠가 있고, 아래로는 동생이 셋이나 딸려 있었다.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술을 자주 드셨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큰누님이 선택한 것이 야간중학교였다. 큰누님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한창 발랄해야 할 나이에 가정형편에 주눅 들고, 또 그렇게 주눅 든 만큼 사춘기 소녀의 꿈의 크기도 낮아져야 했다.
몇 해 뒤에, 다행히 아버지 사업이 잘 풀려서인지 숙명여고에 진학하게 되었지만, 대학 입학을 앞두고 큰누님은 또 다시 가정형편에 굴복해야 했다. 누님은 서울大 문리대에 가고 싶었고,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서울敎大였다. 당시 교육대학은 2년제였다. 누님으로 하여금 대학생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었다. 일찍 사회에 진출해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렇게 큰누님이 서울敎大에 입학했다.
큰누님이 막 교대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때에는 부잣집 아이들끼리 모여 담임선생님께 과외를 받고 있었다. 물론 정말 그런 것인지 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불시에 숙제 검사를 했다. 숙제하지 않은 학생들을 일일이 몽둥이로 심하게 때리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나도 숙제를 하지 못해서 맞았고, 따라서 내 짝도 곧 맞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노트는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상하게 생각돼 말했다.
『제 짝도 숙제 안 했는데요?』
그러자 교실 안은 술렁거렸다. 선생님은 낯빛이 벌게지며 내 짝을 향해 호통을 쳤다.
『진짜 너도 안 했어?』
선생님의 부당한 체벌
2004년 8월28일 전남 곡성군 봉조리마을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 중인 나경원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
친구는 모기만 한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짝꿍도 엉덩짝에 불이 나면 그만이다. 아무리 선생님께 과외지도를 받는다고 해도 公(공)과 私(사)는 분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화가 난 얼굴로 나와 짝꿍을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내게 몽둥이를 내밀며, 『네가 발견했으니 네가 때려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어떻게 친구를 때리는가. 내가 주저하자, 선생님께서는 『친구를 고자질하는 너같이 나쁜 놈은 가르칠 필요도, 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다』면서 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는 기절하다시피 맞았고 그날 이후 학교 가는 것이 무서웠다.
며칠 뒤, 머리통이 크게 부어오른 내 손을 끌고 학교로 따지러 가신 분이 큰누님이었다. 『도대체 이 애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짐승 패듯이 때릴 수 있느냐』고 따지셨다. 그런 뒤, 내 손을 다시 붙잡고 나와 운동장을 말없이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누님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어떡하든 참고 졸업해야 돼. 공부 계속해야 돼, 알지? 내일부터 다시 학교 나가거라. 그래도 그분은 네 선생님이니까, 네가 참아. 힘들어도 참아』
누님은 또 말이 없으셨다. 긴 한숨만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 누님의 긴 침묵과 한숨이 나를 구원했다. 지나 보면 내 인생에 큰 고비가 몇 차례 있었는데, 내 기억의 첫 번째 고비가 바로 그 사건이었다. 나는 정말 그때 학교를 때려치우고 내 멋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홉 살에 학교에 들어갔고, 또 매번 나이와 집안 형편에 대해 시시콜콜 공개적으로 손을 들게 하는 그런 야만적인 학교에 어지간히 자존심을 상한 터였다. 배우지 않고도 인생을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학교에 절대로 미련이 없었다. 그러나 누님의 눈물과 한숨이 나를 구원한 것이다. 나는 다시 공부했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큰누님은 무던히도 집안을 위해 희생했다. 내게 막내 외삼촌이 계신데, 큰누님보다 한 살 정도 어렸다. 일찍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누님은 가끔 외삼촌에게 몰래 용돈을 쥐어 주었다. 또한 오빠의 결혼을 챙겨야 했고, 동생들의 학비와 용돈까지 챙겨야 했다. 누님이 없었다면 나는 대학에 갈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누님, 힘내세요
내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앙大 문예창작과에 합격했을 때, 당시 형님들도 야간 대학에 다니며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나선 것은 퍽이나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그 이기심마저 묵묵히 응원해 주신 분이 큰누님이다. 그런 만큼 가족 간의 애증이 교차해 죽음까지 내몰리게 되는 나의 연극 「바다를 향하는 사람들」이나 「박무근 일가」를 보고 괜히 아픈 추억이 떠올라 쓸쓸히 객석을 나서는 누님의 심정을 나는 능히 이해할 수 있다.
부모로부터 한창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 오히려 앞장서서 가족을 지켜야 했던 누님. 저보다 못난 친구들이 좋은 대학에 유학까지 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야 했던 누님. 그래서 한때 꿈에 목말라 하며 괴로운 시절을 보내야 했던 누님. 그런 시련을 안겨 준 가족들에게 단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은 누님. 그런 만큼 가장 빛나게 축복받고 행복해야 할 이 시절에,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세상 어느 고통보다 더 참혹한 고통을 겪고 계시는 가여운 우리 누님.
불손하게 누님에 대한 글을 쓰게 된 막냇동생이 또 한 번 누님께 상처를 안겨드릴지 모르지만,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면 곧 누님의 고통이 나비처럼 가벼워질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때까지, 지금껏 그래왔듯이 선생님으로서 어린 초등생 제자들에게 누님의 삶과 사랑과 열정을 가르쳐 주기 바란다. 또한 우리 누님을 늘 곁에서 사랑으로 지켜 주는 매형께 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
아내에게「고맙게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단 한 사람
누나, 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애틋하다. 누나의 사랑은 바로 곁에서 나를 잔잔하게 감싸 주는 실체적 사랑이었다.
장광효 디자이너
1956년 전남 강진 출생. 국민大 산업미술과·홍익大 산업미술대학원을 거쳐 프랑스 FOUNTAIN BLUE 예술학교 졸업. 삼성 제일모직 캠브리지 수석 디자이너 역임. 한국 섬유 패션 대상 수상. 현재 경희大, 한성大, 국민大 겸임교수이면서 「카루소」 대표로 있다.
털스웨터와 봉선화물
3남2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자란 나에게는 일곱 살 터울의 큰누나가 있다. 누나, 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애틋하고 고마운 존재인 누나의 사랑은, 부모님의 엄숙하고 큰 사랑과 달리 바로 곁에서 잔잔하게 감싸 주는 실체적 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나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는지는 몰라도 누나는 유달리 나를 아꼈다. 공부를 잘해서 상을 타오면 아버지, 어머니보다 더 기뻐하며 업어 주었다. 찬바람이 불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위해 스웨터와 장갑, 모자, 머플러, 양말까지 모두 털실로 짜서 안겨 주었다. 밤늦게 공부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제철과일을 내밀며 말없이 응원해 주던 누나였다.
언젠가 누나는 집 앞 화단에서 봉선화 꽃을 따 치마폭에 한가득 담아 왔다.
『광효야, 봉선화물 들여 보지 않을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바라보며 누나는 싱긋 웃었다. 왜였을까. 그때 나는 봉선화 꽃과 백반을 빻아 내 열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포도잎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싸주는 누나가 봉선화 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들인 봉선화물은 손톱에 깊고 예쁘게 스며들었고, 한동안 『계집애 같다』며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나는 다홍색의 손톱을 볼 때마다 누나의 따뜻한 마음을 떠올렸다.
꽃물이 없어지면 누나의 마음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서 오래오래 남겨 두려는 마음에 손톱이 길어도 잘라내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즈음, 우리 집안의 대소사를 일일이 챙기고, 궂은 살림을 도맡아 하던 누나는 집을 떠나 여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꾸리게 되었다.
시집가던 날, 하얀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누나의 온몸에서는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수수하고 무던했던 누나가 그렇게 아름다운 적은 그 이후로 없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식장을 걸어 들어가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격스러움과 연민, 끝 모를 서운함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던 누나
디자이너 장광효의 남성복 브랜드「카루소」의 패션쇼 모습(사진·CJ39쇼핑 제공). |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60년대, 나는 부모님 잘 만나 「부잣집 도령」으로 자란 덕에 남들보다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시절, 학교에 가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고, 도시락이라고 해봤자 보리밥과 고추장이 고작이었다. 배를 곯고 있는 급우들 앞에서 흰쌀밥에 장조림, 달걀 반찬이 빠지지 않는 도시락을 먹는 일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일이 미안하다 못해 죄스러워 점심을 거른 적이 숱했다. 내게 부유함은 또 다른 소외감을 안겨 주었다 .
지주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해서 똑똑했고, 이육사 시인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을 만큼 감성이 풍부한 분이셨다. 인덕이 많아 주변은 늘 친구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주 잠시 관직에 계셨을 뿐 이렇다 할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으셨고,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에서 책을 읽고, 자식들에게 기쁨을 얻으며 소시민적 삶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런 아버지의 무기력함이 왠지 미웠다. 내가 처한 많은 상황들이 먹고사는 걱정 없이 넉넉하기만 한 집안 환경 탓인 것만 같아 답답했다.
지금은 도리어 아버지의 이상과 꿈이 너무 커서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을 비워 냈던 거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그런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건 내가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학업을 위해 등록금을 내야 했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생활비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형들이 힘을 모아 광효를 돌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정작 나의 학비와 생활비를 묵묵히 대주고 한결같이 나를 지켜봐 준 사람은 시집간 누나밖에 없었다.
『광효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어릴 때부터 예술적 감수성이 넘쳤던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 푸른 하늘, 넓은 바다를 내다보며 밀레나 고흐같이 자연과 인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를 꿈꾸었다.
입시를 앞두고 미대에 진학하려는 나에게 부모님은 『왜 배고픈 길을 가려 하느냐』는 말씀으로 강한 불만을 드러내셨다. 공부 잘하는 막내아들이 의대나 법대에 진학해 별 무리 없이 순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당신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품어온 내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온 가족의 반대와 비난 속에 괴로워하던 나에게 누나만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서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누구보다 나의 소질과 적성을 잘 알고 있었던 누나는 내가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모습이 부럽다고 했다. 누나 자신의 삶보다는 부모형제, 남편과 자식의 삶에 치우쳐 희생해 온 때문이었을까. 『어떤 것이든 네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며,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해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저하는 내게 『무조건 해 봐. 광효 넌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돌이켜 보면 누나는 내게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부정적인 말 대신 『해 봐』, 『잘될 거야』 라는 말로 언제나 동생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었다.
읍내 시장에 가서 예쁜 옷을 보고 사달라고 조르면 군말 없이 지갑을 털어 내게 옷을 입혀 주고, 『예쁘다』 하고 환하게 웃어 주던 누나. 공부하기가 싫어져 놀고 싶다고 떼쓰면 『그래, 좀 놀면 어때? 맘껏 놀아!』 하며 등을 두드려 주던 누나. 그런 긍정의 힘이 지금의 나를 이끌어 준 원동력이고 자양분임을 잘 알고 있다.
「누나에게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아직 내가 미혼이었을 때,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는 자리에서 나는 누나가 평생 내 은인임을 함께 고백했다.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누나는 부모님만큼이나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내가 누나에게 진 마음의 빚이 너무 크니, 마음으로라도 고맙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당부했을 정도다.
어느덧 누나는 환갑 나이가 되어 할머니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고, 다섯 명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누나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나는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유학까지 다녀와 20여 년 동안 남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누나의 아름다운 심성과 성실함은 가족들의 행복을 만드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말 많고 탈 많은 패션계에 종사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고 건강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누나의 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혹에 흔들리거나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 때마다 누나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나곤 했으니까.
이제는 고생 없이 편하게 잘 살고 있을 누나인데, 여전히 누나를 생각하면 주책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날이 시큰거린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누나에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전화통화도 잘 하지 않는다. 누나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늘 고마운 마음은 어리석게도 마음속에만 담겨 있다.
오늘도 나는 「한평생 이 못난 동생에게 참사랑을 나눠 준 누나 앞에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만 할 뿐이다. 결국 누나가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오직 내가 바르게 잘 사는 것, 그거 하나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
내 인생의 나침반
누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곤 했다. 그때 먹은 도시락처럼 맛있는 밥을 나는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蔡明錫 TV 매니아 대표
1963년 전북 전주 출생. 성균관大 신문방송 대학원 석사. 경원大 신문방송학과 겸임 교수. 현재 mbc 「톡톡톡 오후 2시」·「생방송 오늘 아침」, sbs 「행복 발전소」, 환경 콘서트, 마약 퇴치 콘서트 등을 제작한 독립 프로덕션 TV 매니아 대표로 있다.
혹독한 영어 수업
나에겐 힘든 세상사와 맞서야 할 때마다 큰 격려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자신과 싸워 이긴 한 노인의 투지와 용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이다. 읽고 또 읽어 겉표지가 나달나달해진 이 책은 큰누나의 분신과 같다.
결혼 후 매형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던 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눈물을 글썽이던 누나는 조막만 한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가슴에 바다처럼 넓고 푸른 꿈을 품고 살라』며 이 책을 가슴에 꼭 안겨 주었다. 누나가 떠난 후, 나는 누나가 그립고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
누나는 3남2녀 중 맏이였고, 나는 열두 살 아래 막내였다. 갓난아기 때부터 나를 업어 키우다시피 했던 누나는 어머니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꼈다. 그렇다고 마냥 따뜻하고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서늘할 정도로 엄하고 혹독하게 나를 지도했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 이민을 준비하던 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내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어른이 될 즈음에는 영어가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던 나는 건성으로 따라할 뿐 집중하지 않았다.
매일 혼나 가면서 영어 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누나는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는 물론 필기체까지 모두 외우라고 했는데, 어린 마음에 꾀를 부렸다. 화가 난 누나는 입고 있던 옷을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게 한 후 폭설이 내린 눈밭으로 나를 내쫓았다.
얼마나 추웠던지 그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발바닥과 귓불이 얼얼한 것 같다. 그렇게 호되게 혼이 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알파벳을 외웠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누나가 밉고 야속했다.
누나가 떠난 후 나는 더 이상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다. 누나가 심어 준 영어의 약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알파벳이 바로 어제 외운 것인 양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오랐다. 그래서인지 영어공부가 즐거웠다. 당연히 영어 성적이 좋았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알파벳을 익혔다는 것이 그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선물로 받은 낡은 자동차
영어에 자신이 붙어서일까. 고등학교 때부터는 막연하지만 「누나가 있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구체화되었고, 마침내 그리운 누나가 있는 곳으로 MBA 과정을 밟으러 갔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음에도 두렵지 않았다. 내겐 가장 든든한 백그라운드인 누나가 있는 곳이었으므로.
누나가 떠난 지 15년이 되던 해 마침내 나는 낯선 미국 땅에서 누나와 상봉했다. 집 나간 자식 돌아온 듯 맨발로 뛰어나온 누나는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다며 차고로 안내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선물인 듯해 여간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선물이라며 내게 보여 준 것은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차체가 이지러진 낡은 자동차였다. 누나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구입한 1974년산 도요타였다.
기대한 만큼 실망이 컸다. 도대체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선물이라고 내놓는 이유가 뭘까.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소중한 보물을 건네듯 자동차 키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15년 전 누나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시동이나 걸릴까」라며 혼자서 속으로 빈정댔다.
낡은 자동차를 선물한 누나의 깊은 뜻을 안 것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 나는 길에다 버려도 주워 가지 않을 자동차를 선물로 주었다고 툴툴거린 나 자신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던지….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다 보니 자동차 없이는 다닐 곳이 많지 않았다. 학교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 낡은 자동차는 요긴했다. 그래서 열심히 타고 다녔는데 낡고 오래된 차이다 보니 중간중간 퍼지는 경우가 많았다. 인가 없는 고속도로 중간에 서는 바람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위기를 나 혼자서 어떻게 하든 극복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지나가는 자동차를 붙들어 도움을 요청했고, 혼자서 정비소까지 끌고 가 자동차가 서게 된 경위를 짧은 영어 실력으로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내 영어 실력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긴장하거나 겁먹는 일이 없어졌고, 현지인 친구와 쉽게 사귀었다. 낡은 자동차가 나를 어떤 환경에서든지 쉽게 적응하는 인간으로 단련시킨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피하지 않고 일단 몸으로 부딪히며 풀어 나가는 습관은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마음이 담긴 도시락
미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할 즈음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는 마켓에서 일하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고된 일과의 연속이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던 그때 누나는 『몸 상하니 되도록 밥을 먹으라』며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었다. 힘든 노동 끝에 먹는 누나의 도시락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때 먹은 도시락처럼 맛있는 밥은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 준 인생의 나침반 같은 분이었다.
미국에 가신 지 벌써 30년째. 해드린 것 없이 받기만 한 고마움을 언제 쯤 갚을 수 있을지…. 몸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자주 뵙지 못하지만 큰누나가 가르쳐 준 지혜는 늘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준다.●
비밀의 방
어느덧 나는 어린 검열관이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는 누나의 일기장을 몰래 통독했고, 교회의 중고등부 형들에게서 날아들기 시작한 연애편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해이수 소설가
1973년 경기도 수원 출생. 단국大 국문과 졸업. 호주 시드니大 대학원 언어학과 졸업. 2000년 「현대문학」 중편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작품집으로 「캥거루가 있는 사막」이 있다. 2004년 제8회 심훈문학상 수상.
누나 앞에선 언제나 수줍은 소년
누나! 하고 소리 내어 부르면 어디선가 꽃냄새가 난다. 10대의 누나에게서는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20대의 누나에게서는 농밀한 라일락 향이, 30대의 누나에게서는 수수한 수선화 향이 풍겼다. 어느덧 마흔이 넘은 누나에게서는 원숙한 국향이 느껴진다.
누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주름이 늘어도 여전히 꽃처럼 환하다. 나는 아무리 힘이 세지고 목소리가 커지더라도 누나 앞에서는 영원히 수줍은 소년에 불과하다. 누나의 향기 속에는 내 유년의 설렘과 아늑함 그리고 내 문학의 씨앗이 숨어 있다.
내게는 일곱 살이나 터울이 지는 누나가 한 명 있다. 어릴 적 방이 일곱 개나 딸린 한옥에 살았을 때, 누나의 방은 마당과 떨어진 부엌 옆에 위치해 있었다. 누나에게 가려면 일단 어머니가 상주하는 부엌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곳은 외부로부터 한 겹 밀봉된 세계였다. 자질구레한 심부름 외에 처음 누나의 방에 들어간 까닭은 딱지를 접기 위해서였다. 쉽게 뒤집히지 않는 빳빳한 종이가 절실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 애초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곳은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게 충분히 신비로운 장소였다.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운 책들과 창에 드리운 꽃무늬 커튼, 불을 끄면 초록색으로 빛나던 야광 십자가, 그 옆에 베드로처럼 거꾸로 매달려 향기를 증발시키던 붉은 장미, 「못난이 삼형제」 인형, 대형 카세트플레이어 등은 어린 내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누나가 교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등교를 하면 나는 곧잘 누나의 방으로 잠입했다.
문학소녀였던 누나는 만년필로 정성스레 베낀 詩를 한쪽 벽에 셀로판테이프로 붙여 놓고 읽는 습관이 있었다. 조병화의 「공존의 이유」, 서정주의 「푸르른 날」, 윤동주의 「십자가」, 서정윤의 「홀로서기」 등이었는데, 어린 나는 한 손에 라면땅 봉지를 들고, 뜻도 모른 채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때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 시편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외울 수 있다.
그리운 삼중당 문고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접어들수록 누나의 방에서 가장 탐이 났던 물건은 책상이었다. 앉은뱅이인 내 것과는 달리 서랍이 다섯 개나 달린 철제 책상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해 보였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스탠드 불빛의 조도를 높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처마 밑에 듣는 낙숫물 소리가 아늑하게 들려 운치가 그만이었다.
또한 서랍이 다섯 개나 되는 누나의 책상을 뒤지는 일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어느덧 나는 어린 검열관이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는 누나의 일기장을 몰래 통독했고, 교회의 중고등부 형들에게서 날아들기 시작한 연애편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사춘기 소녀가 또래의 동성에게 갖는 질투와 부러움, 이성에게 갖는 동경과 두려움 등을 때로는 끄덕거리고 때로는 갸우뚱하며 속속들이 공감할 수 있었다.
더욱이 누나의 책장은 감당할 수 없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책꽂이에는 아버지가 읽던 전기문과 전쟁서를 비롯해 누나가 용돈을 아껴 구입한 문학 서적으로 가득했다. 책을 한 권 빼들어 읽고 있노라면 야릇한 분위기와 사건으로 가득 찬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나 자신을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었다.
김동인의 단편 「광염 소나타」를 읽고 한동안 이 사실을 누구에게 어떻게 말할까, 몹시 괴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문학의 허구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이여서 나는 책에 수록된 내용이 누나의 일기장처럼 어느 사내의 실제 기록쯤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 시절 접했던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바스콘 셀로스의「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서」 그리고 삼중당 문고 시리즈는 꺼지지 않는 유년의 촛불처럼 여전히 내 가슴에 오롯이 타오르고 있다.
내 문학적 공간의 원형
대형 카세트플레이어는 책상 다음으로 흥미로운 물건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삼촌이 선물한 그 오디오는 조정버튼과 레버가 다양해서 심심풀이로는 제격이었다.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나는 당시 누나가 즐겨 듣던 노래를 듣곤 했다. 김정호, 「노고지리」, 「둘 다섯」, 「산울림」, 「해바라기」, 「시인과 촌장」, 조동진을 알고 난 뒤 음악시간에 풍금에 맞춰 동요를 따라 부르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유치했다.
「카펜터스」의 낭랑한 보컬, 칸소네 명곡집에서 느껴지던 장중함, 조르주 무스타키의 꿈을 꾸게 하는 읊조림과 선율,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받았던 서정적 정조 등은 외국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만들었다. 나는 엉터리로 가사의 발음을 따라 불렀지만 그 뜻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스무 살 중반에 유독 심했던 「딕셔너리 홀릭(사전 중독증)」 증세는 그 시절부터 이미 징후가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누나에게 받은 졸업선물은 잊을 수 없다. 누나는 어느덧 대학교 1학년생이었고, 장학금을 받으며 이런저런 일로 용돈을 버는 눈치였다. 당시에는 꽤 귀했던 독일제 「로트링」 샤프펜슬이었는데, 무광블랙의 메탈 소재에 하얀색으로 브랜드 명이 새겨 있었다. 샤프심의 마모 정도에 따라 촉 부위가 안으로 접히는 스페셜 슬라이드 방식으로, 중량감이 상당해서 또래들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사프펜슬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로트링이 독일어로 「빨간 원」을 뜻한다는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이가 돋아나서 어딘가를 갉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생쥐처럼 나는 그 샤프펜슬로 중학 시절 내내 뭔가를 끄적거려야만 했다. 때마침 어머니는 내게 서랍이 네 개 달린 보루네오 원목 책상을 사줘서 나는 매일 일기를 두 세 페이지씩 썼고, 당시 알고 지내던 소녀에게 열병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누나는 하필 열두 살의 소년에게 왜 그토록 과분한 필기구를 선물로 줘서 사춘기 시절 내내 그리운 편지를 쓰게 하고 하루를 돌이키는 일로 소비하게 만들었을까. 차라리 농구공을 사주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키가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누나의 방은 내게 비밀스러운 문학적 공간의 원형인 셈이다. 유년 시절부터 책과 음악을 가지고 방 안에서 혼자 놀던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의 삶을 누리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일기쓰기는 소설로 바뀌었고 내 연서의 대상은 미지의 독자로 확장되었을 따름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시집을 간 누나는, 군복무를 마칠 무렵 남반구의 따뜻한 나라로 이민을 갔다. 쉽게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누나」라는 호칭이 더욱 큰 그리움의 향기로 짙어지는 시기였다. 누나에게서 날아온 편지를 읽어 보니 그곳은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10℃ 안팎이라 했고, 이웃 중에는 평생 눈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서울이 겨울일 때 계절이 여름인 남반구의 해안가를 상상하며 나는 누나에게 답장을 썼다. 그리고 오래 전 그녀가 그랬듯, 詩 한 편을 만년필로 또박또박 옮겨 적어 동봉했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