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카피하는 내 시마저 두렵다. 누가 그것을 읽기 때문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카피, 라이터
임채성
광고회사 신입 시절 광고주 인사 갔죠
갓 찍은 명함 주며 카피라이터라 했어요
남의 글 베껴 쓰는 일?
복사기냐며 웃대요
식은 커피 다시 끓어도 웃으며 대답하길
코피를 쏟을 때까지 문안 뽑는 일이라고,
오늘도 문안 여쭈러
잠시잠깐 들렀다고
살다보니 복사기가 도처에 있더군요
TV에도 신문에도 서점과 인터넷에도
거리엔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
붕어 살 한 점도 없는
붕어빵도 그러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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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서 남긴 말과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발언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대사는 시대를 아우르는 ‘카피’copy 다. 수백 년 넘게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흔들고 역사를 이끄는 ‘카피’는 이 밖에도 수없이 나왔고 쓰였고 입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문안’에 존재하지도 않는 “태양”을 “새롭게” 끄집어내고,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내일”을 한 번 더 언급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 압권이다. 카피의 태생적 본능이다.
시인은 카피 copy라는 단어가 복사로, 베끼는 것으로 읽히던 시절의 몰지각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허들을 뛰어넘었을까? 예전엔 ‘커피’를 ‘코피’로 부르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커피 맛은 똑같았다. 스페인에 수십 년째 사는 지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어느 까페에서 주문받고 “까페 café 주세요” 했더니 웃으면서 “예?”라고 하며 되물었다고 한다. 커피 coffee를 까페 café로 말했다가 괜히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로 커피가 까페다.
광고주, 갑을 찾아 ‘문안’을 여쭈러 들렀던 그때나 지금이나 카피가 없는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문안을 넘어서 세상의 표현들을 어둠에서 지하에서 편견에서 꺼내어 드러내는 일이 고통이므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로 면죄부를 받고 있을 뿐.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 시인은 묻지만 누가 이 물음에 “정답”을 말할 수 있을까? 공범이라고 스스로 자책할 이유도 없다. 정도의 차이라고 위안할 이유도 없다. 또 인공지능 AI이 ‘시인’이라는 “직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나쁜” 발표가 있었다. 그의 카피 능력을 넘어설 시인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카피하는 내 시마저 두렵다. 누가 그것을 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