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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와 世界歷史, 人物史 스크랩 중미(멕시코/콰테말라/벨리즈(=영연방온두라스)/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코스타리카/파나마
sooaram 추천 0 조회 262 11.12.06 2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라틴아메리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멕시코> 스페인의 식민지

 

 

공식명칭 : 멕시코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
인구 : 104,038,000
면적 : 1,964,375
수도 : 멕시코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0. 9. 16
화폐단위 : 멕시코페소(Mexican peso/Mex$)
국가(國歌) : Mexicanos, al grito de guerra" ("Mexicans, to the cry of war")

(스) M?xico. 공식 이름은 멕시코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Estados Unidos Mexicanos). M?jico라고도 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 3번째로 큰 국가.

수도인 멕시코 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북아메리카 본토의 남서부에 있고 대체로 삼각형 모양이다. 북서쪽으로부터 남동쪽을 향해 3,000km 이상 뻗어 있다.

 

너비는 북부지역이 1,900km 이상이고 테우안테펙 지협(地峽)이 215km 미만으로 변화가 심하다.

북쪽으로는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미국과 경계를 이루고, 남동쪽으로는 벨리즈·과테말라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멕시코 만, 카리브 해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한다. 면적 1,964,375㎢, 인구 107,551,000(2009 추계).

 

멕시코 인구의 3/5 이상은 메스티소이고 약 1/5은 아메리카 인디언, 나머지는 대부분 유럽인의 후손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50가지 이상의 인디언 언어가 사용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다.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개신교도 포함된다. 화폐단위는 멕시코페소(Mexican Peso/Mex$)이다.

 

멕시코에는 2개의 중요한 반도가 있는데, 남동쪽의 유카탄 반도와 북서쪽의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이다.

 

멕시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앙의 고원지대는 마드레옥시덴탈 산맥, 마드레오리엔탈 산맥, 네오볼카니카 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네오볼카니카 산맥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시틀랄테페틀 봉이 있다. 이 봉우리의 높이는 5,610m에 달한다.

 

멕시코의 경제는 농업과 제조업, 석유 및 천연가스 추출 등에 기반을 둔 혼합경제를 이루고 있다. 국토의 약 1/8이 경작 가능한 땅이다.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 밀, 쌀, 콩, 커피, 과일, 채소가 있다.

 

멕시코는 은, 비스무트, 천청석의 세계 최대 주산지이며,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제조업으로는 가공음식, 화학제품, 운송수단, 전기기기가 발달했다. 정치체제는 양원제를 토대로 한 공화국으로,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은 대통령이다.

 

멕시코에는 최소 2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다고 추정되며, 이 지역에서 올멕, 톨텍, 마야 같은 훌륭한 초기 문명들이 연이어 탄생했다.

 

멕시코에서 일어났던 또 하나의 중요한 문명인 아스텍 제국은 1521년 스페인 탐험가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정복되었다. 그는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츠티틀란 자리에 멕시코시티를 세웠다.

 

1526년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가 마야 문명의 잔존자들을 정복했고, 멕시코는 뉴스페인 총독의 관할령에 편입되었다.

 

1821년 반란군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협상을 벌였고, 1823년에는 새 의회가 멕시코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병합할 것을 결의하여 멕시코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에 의거하여, 멕시코는 현재 미국 서부와 남서부가 된 광대한 영토를 양도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멕시코 정부는 여러 차례 반란과 내전을 겪었다(→ 멕시코 혁명 ).

제2차 세계대전(1939~45) 중에 멕시코는 추축국 편에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 후에는 국제연합(1945), 미주기구(1948)의 회원국이 되었다. 1993년에는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승인했다. 2000년 비센테 폭스 케사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71년간 지속됐던 제도혁명당 정권을 종식시켰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 3번째로 큰 국가.

 

2만 년 전 멕시코에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촌락 단위로 농경을 시작한 것은 BC 1500∼900년으로 확인되었다. 보다 종합적인 문화는 BC 900∼300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문화들은 AD 100∼900년에 올멕·톨텍·마야·아스텍 문화로 꽃피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했을 때는 1200년경에 급속도로 세력을 키운 아스텍 사람들이 대다수의 멕시코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디에고 델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는 그전에 쿠바를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밖에도 그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를 보내 유카탄 해안을 탐험하도록 하는 한편, 멕시코를 탐험하도록 에르난 코르테스를 파견했다. 2년 동안 계속된 전투 끝에 코르테스는 1521년 아스텍족을 정복했고, 수도인 테노츠티틀란을 함락시켰다. 코르테스는 아스텍족의 수도가 있던 곳에 멕시코 시를 세웠다. 그후 1526년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가 마야 문명의 잔존자들을 정복했다.

 

스페인이 정복했을 때부터 1821년 독립이 선포될 때까지 멕시코는 뉴스페인 총독의 관할지역이었다.

 

1701∼13년에 일어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르면서 식민지인 멕시코의 상황도 달라졌다. 부르봉 왕가는 식민지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득을 늘리기 위해 프랑스식 체제를 근간으로 한 여러 가지 행정개혁을 실시했다. 독재적인 지배와 무거운 세금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에는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

 

1810∼11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주도한 반란과 1814∼15년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이 파본이 이끈 반란은 모두 좌절되었다. 그후 독립운동은 비센테 게레로의 지휘에 따라 게릴라전으로 전개되었다.

 

1821년 게레로와 크레올인 지주이자 전(前) 스페인 군대의 장교였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협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얻어냈고, 이어 의회를 구성했다.

 

1823년 군사반란이 일어나 이투르비데는 멕시코를 떠나게 되었고 의회는 멕시코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824년 미국 헌법에 기초해서 만든 연방헌법이 채택되었다. 과달루페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누엘 펠릭스 페르난데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집권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계속해서 여러 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45년 미국 정부는 텍사스를 병합할 것을 결의했다. 그결과 멕시코 전쟁이 일어났고, 산타 안나의 군대가 패했다. 미국은 멕시코 시를 점령했다. 1848년 2월 2일에 체결된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에 따라 미국은 현재 애리조나 주, 콜로라도 주 서부, 네바다·유타·텍사스·캘리포니아·뉴멕시코 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할양받았다.

 

1857년 베니토 후아레스는 식민지 잔재를 없애기 위해 '라 레포르마'(La Reforma)라는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의 기초로서 그해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1857년 만들어진 새 헌법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과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내란이 발생해 1858∼61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가 멕시코에 군주정부를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내란은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어 후아레스는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1876년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반란을 주도해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11년에 이르러서야 대통령직에서 밀려났다. 그는 1880∼84년에는 관직에서 떠나 있기도 했지만, 독재정치를 통해 질서를 잡았고 실천력있는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디아스의 집권기 후반에는 불평등한 분배구조 심화와 소규모 농장주 및 농업 노동자들의 처지 악화로 인해 힘이 약화되었다.

 

1911년에 역시 혁명가 출신인 프란시스코 I.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기 시작할 때부터, 농민과 노동자들이 더 많은 개혁을 요구하며 계속 혁명을 일으켰다. 계속해서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나다가, 1929년에 북부 멕시코 출신의 혁명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로 구성된 민족혁명당(PNR)이 세워졌다. 이 정당은 20세기에 계속 멕시코를 지배했다. 1938년 PNR은 멕시코 혁명당(PRM)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6년에는 제도혁명당(PRI)으로 바꾸었다.

 

1920∼40년대에 이르기까지 PRI와 당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에 능력과 결단력을 갖춘 대통령들이 나와 그 지도력 아래 개혁이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말에 집권했던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은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각 노동조합들로 구성된 '멕시코 노동연합'(Confederaci?n de Trabajadores de M?xico)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는 경제성장에 주력했다.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대통령이 집권했던 1970년대 중반에 멕시코는 주요산유국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티요의 임기가 끝날 때쯤엔 엄청난 외채가 쌓였다. 정부는 석유에서 얻는 수입을 믿고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계속 외채를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에 계속해서 세계 유가가 떨어지면서 멕시코는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어 집권한 대통령들은 정부가 처한 재정적 위기상황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1980, 1990년대에 행해진 몇몇 국영기업에 대한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를 들 수 있다.

 

<과테말라> 스페인의 식민지

 

 

공식명칭 : 과테말라공화국(Republic of Guatemala)
인구 : 13,019,000
면적 : 109,117
수도 : 과테말라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1. 9. 15
화폐단위 : 케찰(quetzal/Q)
국가(國歌) : Guatemala! Feliz!("Happy Guatemala")

공식 이름은 과테말라 공화국(Rep?blica de Guatemala/Republic of Guatemala).

중앙 아메리카에서 3번째로 큰 나라.

파나마 지협의 북서부 가장 안쪽에 있다.

 

북쪽과 서쪽은 멕시코와, 동쪽은 벨리즈, 온두라스 만의 카리브 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남쪽으로는 240km 길이의 해안선이 태평양과 접해 있다. 면적 109,117㎢, 인구 14,027,000(2009 추계).

 

과테말라 내륙 고지 안에 존재하는 인디언 문화는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인접국들과 과테말라를 뚜렷하게 구분 짓는다.

 

국명 과테말라는 인도어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의 원형이 '나무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Quauhtemallan'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어의 기원은 마야어보다는 아스텍 쪽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은 '분출하는 물의 산'이라는 의미의 'Guhatezmalha'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 단어는 그 지역에서 발생했던 화산 폭발과 관련한 것이다.

 

오늘날 안티과과테말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산티아고데로스카바예로스테과테말라의 붕괴 원인이 화산 폭발이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데로스카바예로스테과테말라는 그 지역 식민지 사령관령에 의해 설치된 최초의 스페인 식민정부 소재지였다.

 

과테말라의 현재 수도는 과테말라시티로, 주요 대도시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부 고지에 있는 케트살테낭고는 인디언 원주민들이 밀집해 사는 도시이다.

 

1820년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과테말라는 1985년 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오랜 권위주의적 지배와 군사정권의 통치를 겪었다. 과테말라의 역대 정권들은 1954년에 시작된 강력한 게릴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이러한 게릴라 활동은 그 후 36년간 지속된 내란의 불씨가 되었고, 1996년에 이르러서야 평화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전쟁 기간에 과테말라 인디언들의 투쟁은 리고베르타 멘추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녀는 키체 마야족으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사는 원주민들을 대변해왔다.

 

과테말라의 더딘 정치적·경제적 회복은 21세기 들어서까지 계속되었다.

 

 1996년 이후부터 정기적으로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정당 수가 대단히 많은 반면 작고 단명했기 때문에 정치적 해결책을 통한 통합은 거의 불가능했다. 21세기 초 몇 년간 유권자들 사이에는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했다.

 

과테말라 및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은 BC 2500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단순한 농경촌락에서 시작해 AD 10세기까지 번성한 강렬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마야 문명의 중심은 과테말라 북부에 있는 페텐 북부로, 가장 오래된 마야족의 돌기둥(조각된 기둥 또는 석판)과 티칼의 거대한 종교 의식지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은 900년 이후 쇠퇴했으며, 스페인의 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1523년 마야족의 후손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수도는 안티과과테말라였으나 1773년 지진으로 거의 파괴되어 과테말라 시로 옮겼다. 식민지 상태에서 상업은 널리 발달하지 못했으며, 카카오·콩과 같은 농작물이 주로 인디언과 흑인 노동력으로만 재배되었다.

 

1821년 중앙아메리카 식민지들이 과테말라 시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과테말라는 당시 멕시코 제국에 합병되었다.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합주가 형성되어 멕시코 제국은 붕괴되었고, 연합은 1839년까지 지속되었다. 과테말라는 라파엘 카레라의 지휘로 이 연합에 저항했으나 그의 독재는 1865년까지 계속되었다. 1871년 혁명으로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민간에서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경제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많은 개혁조치를 시행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계속해서 개발정책을 시행했으나 대통령제에 의한 지배체제는 점차 독재정치로 변했고 정치적 자유가 줄어들었다.

 

1944년에는 총파업으로 혁명임시정부가 통치하게 되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고 처음으로 공산당이 주위의 방해없이 세력을 키우는 기회를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54년 또다른 쿠데타를 야기시켰으며 정치적 불안을 초래했다.

 

1970년대에 정부가 좌익·우익 과격파들을 제거하려 하자 폭력사태는 더 가속화되었다. 숙청작업은 잠시 평정을 가져오긴 했지만 1974년 정부가 선거 결과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곧 깨어졌다.

 

더구나 1974년의 화산폭발과 1976년의 지진이 과테말라를 황폐화시키면서 이러한 정치상황은 새로운 폭력을 촉발시켰다. 정치 테러리즘이 계속되었고 1980년대 초반에는 쿠데타가 더 심해졌다. 민간인 통치는 1986년에 다시 확립되었다.

 

<벨리즈> 영국의 식민지(영국령 온두라스)

 

공식명칭 : 벨리즈(Belize)
인구 : 301,000
면적 : 22,965
수도 : 벨모판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영국 국왕/ 총리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81. 9. 21
화폐단위 : 벨리즈달러(Belize dollar/BZ$)
국가(國歌) : O. Land of the Free

(스) Belice.

중앙 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나라.

수도는 벨모판이다. 북쪽과 북서쪽으로 멕시코, 남쪽과 서쪽으로 과테말라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280km의 해안선을 따라 카리브 해에 접해 있다. 면적 22,965㎢, 인구 269,000(2003 추계).

 

벨리즈에는 BC 300경∼AD 900년 마야 문명이 번영했다. 카라콜과 수난투니치의 유적을 비롯해서 마야의 의식이 행해지던 터가 아직 남아 있다. 마야인들의 사회가 최대로 팽창했던 6세기 이후 얼마 동안은 인구가 2만 5,000명가량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명목상 주권을 쥐고 있기는 했으나 벨리즈를 식민지화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이곳에 정착한 영국인들을 불법침입자로 여겼다. 17세기 중반 대부분이 해적단과 모험가였던 영국 선원들이 세인트조지스케이에 정착해 염료원료인 로그 우드(logwood)를 베어갔다. 이 로그우드는 한동안 벨리즈 제1의 수출품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마호가니가 주종을 이루었다(→ 색인 : 대영제국).

 

영국의 식민이 여러 조약에서 인정받았고, 스페인은 무력으로 영국 점령지를 차지하려 했으나 1798년 싸움서 패배해 물러났다. 영국인 개척자들은 해안의 목재가 고갈되자 내륙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인디언들의 저항으로 19세기에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노예들은 벌목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카리브 해의 설탕농장 노예들에 비해 좋은 조건에 있었는데 1838년에 해방되었다.

 

1862년 당시 벨리즈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서 영국령 온두라스라고 불렸다. 1859년 영국과 과테말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규정이 이행되지 않자 과테말라는 영국령 온두라스를 요구했고, 1981년 영국이 벨리즈의 독립을 승인했을 때에도 여전히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벨리즈는 영연방에 가입했으나, 미주기구(OAS)에는 들지 못했다.

 

<엘살바도르>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엘살바도르공화국(Republic of El Salvador)
인구 : 6,991,000
면적 : 21,041
수도 : 산살바도르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1. 9. 15
화폐단위 : 미국달러(U. S. dollar/U.S.$)
국가(國歌) : Saludemos la patria orgullosos("We proudly salute the Fatherland")

공식 이름은 엘살바도르 공화국(Rep?blica de El Salvador/Republic of El Salvador).

중앙 아메리카 7개국 중 가장 작은 나라.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산살바도르이다. 남쪽으로 335km에 걸쳐 태평양 쪽에 맞닿아 있고 북서쪽으로 과테말라, 북동쪽과 동쪽으로 온두라스에 접해 있다. 인구밀도는 256명/㎢으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면적 21,041㎢, 인구 6,515,000(2003 추계).

 

중앙 아메리카 7개국 중 가장 작은 나라.

1524년 스페인인들이 엘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피필 인디언들이 이 나라 서부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에 쿠스카틀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피필족은 나우아족의 후예로 11세기에 이곳에 도착한 듯하다. 1539년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피필족을 정복했고, 스페인은 엘살바도르를 산살바도르손소나테라는 2개의 과테말라 총독관할구(alcaldias mayor)로 나누었다. 1786년에 산살바도르는 상급 행정구(inten-dencia)로 승격되었지만 여전히 과테말라 총독령의 하급단위였다.

1811년 산살바도르에서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가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독립문제를 제기했고, 1821년 산살바도르는 독립되어 멕시코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823년 제국은 붕괴되고 중앙 아메리카 연방(United Provinces of Central America)이 탄생했으며, 손소나테와 산살바도르는 합쳐져 엘살바도르라는 새로운 주(州)를 형성했다가 1840년 최후로 연방에서 탈퇴했다.

 

국가 설립 당시부터 엘살바도르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지만 권력은 대개 부자들이 장악했고, 대통령이 그들의 후임자를 직접 선택했다. 1931년 군사정부가 수립되면서 다소 줄어든 정치적 폭력은 이후 군부독재가 계속되면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좌·우익 양측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1979년 극악무도했던 정권은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고, 임시정부는 개혁·질서·자유선거를 약속했다. 1982년 보통선거로 구성된 입법부를 중심으로 새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새 입법부에는 새 헌법의 초안작성·제정 등의 권한이 주어졌다. 1983년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1984년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기독교민주당의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미국은 새 정부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온두라스>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온두라스공화국(Republic of Honduras)
인구 : 7,329,000
면적 : 112,492
수도 : 테구시갈파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38. 11. 5
화폐단위 : 온두라스렘피라(Honduran lempira/L)
국가(國歌) : Tu bander("Thy banner")

공식 이름은 온두라스 공화국(Republic of Honduras/Rep?blica de Honduras).

중앙 아메리카에서 2번째로 큰 나라.

수도는 테구시갈파이다. 북쪽으로 카리브 해, 남쪽과 동쪽으로 니카라과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72km의 태평양 쪽 해안선이 폰세카 만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에 접한다. 면적 112,492㎢, 인구 6,803,000(2003 추계).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시대의 온두라스는 1000년에 번영했던 마야 문명에 속했다. 코판 시에 있는 신전은 465년부터 마야 인구가 갑자기 감소한 800년까지 사용되었다.

 

1502년 콜럼버스가 온두라스에 도착했으며, 1522년 유럽인들의 영구정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경쟁 관계에 있던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으나, 1526년 최초의 군주가 임명되고 잠시 안정을 찾았다(→ 색인 : 콩키스타도르).

 

1537년 스페인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에 주요전쟁이 발생했다. 렘피라라는 이름의 족장이 3만 명이나 되는 인디언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인에게 저항했으나, 1539년 그가 죽음으로써 전쟁이 종결되었다. 인디언들은 계속해서 질병과 노예생활로 목숨을 잃었다.

 

온두라스는 독립된 식민지가 아니었다. 1570년 이후 과테말라 총사령관령의 일부가 되었다.

 

1570년대 은이 발견되면서 투기자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증가했다. 17세기에는 전시에 적선을 나포(拿捕)할 수 있는 면허를 가진 영국 민간무장선의 침입을 계속해서 받았다. 멕시코 독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1821년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주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1823년 중앙 아메리카의 주들이 중앙 아메리카 연방을 만들었다.

 

온두라스의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모라산이 연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온두라스는 연방을 탈퇴하여 1838년 독립을 선언했다. 보수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1876년 이후부터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새 헌법을 공포했다.

 

20세기초 정치는 불안정했으며, 이웃나라인 니카라과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바나나 생산에 투자한 미국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온두라스에 해군을 파견했다.

 

 온두라스는 1932년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정세가 계속 불안정했다. 그는 사실상 독재자로서 1949년까지의 통치기간 동안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카리아스 이후 정권교체가 잦았다. 1957년에 채택된 헌법은 온건사회개혁 계획을 제도화했다. 1975년 토지개혁을 확대 실시했으나, 소수 농민에게만 이익이 돌아가 농민연맹의 항거가 계속되고 있다.

 

민간 정부가 선출된 1982년 1번을 제외하고 군부지도자가 계속 통치해왔다. 좌익 게릴라들의 활동이 활발해져 군대는 1982년 이후에도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니카라과>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니카라과공화국(Republic of Nicaragua)
인구 : 5,233,000
면적 : 130,373
수도 : 마나과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1. 9. 15
화폐단위 : 코르도바(cordoba oro/C$)
국가(國歌) : Salve a ti, Nicaragua("Hail to thee, Nicaragua")

공식 이름은 니카라과 공화국(Rep?blica de Nicaragua/Republic of Nicaragua).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

수도는 마나과이다. 영토는 남북으로 최대 440㎞, 동서로 최대 450㎞에 이른다.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카리브 해와 태평양에 접하고 남쪽으로 코스타리카, 북쪽으로 온두라스와 국경을 접한다. 면적 130,373㎢, 인구 5,482,000(2003 추계).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

 

고대에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니카라과 서부의 태평양 연안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10세기에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은 이들 부족 가운데 유력한 한 부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이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0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니카라과 동부의 카리브 해 연안에 상륙한 데 이어 1522년 스페인 정복자 힐 곤살레스 다빌라에 의해 이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약 3만 명의 인디언을 개종시키고 9만 페소 어치의 금을 가져 왔으며 지협을 횡단할 수 있는 수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성난 원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때 니카라과 호 주변 지역의 원주민을 이끈 부족장의 이름이 니카라오인데, 니카라과라는 국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항구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된 것은 1524년 스페인 탐험가이자 군인인 헤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서였다.

 

스페인의 니카라과 정복은 니카라과 태평양 연안 지역의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재앙이었다. 100만 명 가량이었던 인구가 30년 만에 불과 수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의 절반은 구대륙의 전염병에 휩쓸려 죽고, 그나마 살아 남은 인구의 대다수는 신대륙의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 노예로 팔려 갔다.

 

이처럼 인구가 격감한 후 니카라과는 스페인 제국의 눈길에서 벗어난 변경지대로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부 내륙의 식민 도시 그라나다레온이 권력과 명성의 맞수로 떠올랐다. 그라나다는 농업과 산 후안 강을 통한 스페인과의 무역에 의존했고, 레온은 태평양 연안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과의 교역에 의존했다. 그라나다가 보수적인 귀족 지주들이 득세하는 농업 중심지로 발전한 반면, 레온은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이 작은 두 식민지 변경 도시는 해적들로부터 빈번히 공격을 받았다.

 

17세기 말에는 영국이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미스키토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곳에는 이미 블루필즈 정착촌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모스키토 해안에 정착해 한동안(1740∼86) 이곳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11년, 멕시코·엘살바도르의 반(反)스페인 투쟁에 고무된 혁명가들이 니카라과 통치를 담당하는 행정관을 몰아냈다. 그러나 레온은 왕당파로 돌아섰고 그라나다는 불충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821년 중앙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때에도 레온은 거부하고 그라나다는 동의했다.

 

두 도시는 멕시코와의 합병(1822∼23)에 대해서는 함께 받아들였지만 내내 티격태격하다 1826년에 중앙아메리카연방에 가입했다. 니카라과는 1838년에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했다. 그후 레온과 그라나다는 각각 자유당·보수당의 거점으로서 경쟁을 계속했다.

 

스페인이 물러간 다음 모스키토 해안의 '왕'은 영국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 블루필즈에 영국 관리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형국이 되었다.

 

 1848년 영국인들은 카리브 해 연안의 작은 항구인 산 후안 델 노르테를 점령하고 이곳을 그레이타운이라고 개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횡단로로서의 니카라과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증기선회사는 산후안 강과 니카라과 호 항로에 증기선을 띄워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실어날랐다.

 

1855년 보수당과 내전 중이던 자유당의 요청으로 미국인 윌리엄 워커가 용병들을 이끌고 니카라과에 잠입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1956년 니카라과 대통령직에 올지만 이듬해에 중앙아메리카의 5개 공화국과 밴더빌트 증기선회사의 연합세력에게 패주했다.

 

1857∼93년에는 보수당이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보수당 정권하에서 니카라과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렸으나 민주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1857년 자유당·보수당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레온과 그라나다로 여러 차례 옮겨졌던 수도가 두 도시의 합의로 중간 지점인 마나과로 정해졌다.

 

1860년 니카라과와 영국은 동부 연안 지역을 니카라과에 재편입시키되 자치 보호구역의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동부의 모스키토족에 대한 관할권은 호세 산토스 셀라야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1893∼1909)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셀라야 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확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중앙 아메리카의 재통합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운하건설권의 미국 양여를 거부해 미국은 운하 건설지로 파나마에 눈을 돌려야 했다. 게다가 셀라야 대통령이 일본을 끌여들여 미국이 건설할 운하와 경쟁할 운하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미국은 보수당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 반란에 가담한 미국인 용병 2명이 처형되자 미국은 블루필즈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자유당의 승리를 차단했다.

 

결국 셀라야는 사임했지만 미국은 새로 들어선 호세 마드리스 정부(1909∼10)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내전이 계속된 끝에 1911년 아돌포 디아즈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1911∼17)가 들어섰고,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은 1912년 해병대를 파견했다. 미국 대사관에 주둔한 100명의 해병 수비대는 보수당의 에밀리아차모로 바르가스 대통령(1917∼21)과 그의 삼촌 디에고 마누엘 차모로 대통령(1921∼23)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미국은 브라이언-차모로 조약(1914 서명, 1916 비준)에 따라 운하 독점권을 확보했고, 1925∼26년의 9개월을 제외하고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1925년 미국 해병대가 일시 철수하자 쿠데타로 정권을 재장악한 에밀리아노 차모로 바르가스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가 미국과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물러가고 아돌포 디아즈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926∼28). 자유당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몬카다와 후안 바우티스타 사사카,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 는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은 아돌포 디아즈 대통령의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27년 해병대 2,000명을 파견했다. 반란 지도자 몬카다와 사사카는 6개월 후 미국의 내전 종식 협상을 받아들여 1928년과 1932년에 미국 후견하에 치러진 2차례의 선거에서 차례대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각각 1928∼33년과 1933∼36년에 집권했다. 그러나 산디노는 1933년 1월 미국 해병대가 철수하고 사사카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반미(反美) 투쟁을 계속했다.

 

미국 해병대가 철수한 후 미국 해병대로부터 훈련받은 과르디아 나시오날(국민방위군)이 니카라과의 질서유지를 떠맡았다. 1934년 국민방위군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 휘하의 장교들이 모의해 자유당 반군 지도자 산디노를 암살했다. 이어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유당·보수당내 파벌세력들의 후원을 받으며 사카사 대통령을 축출(1936)하고 1937년 1월 선거에 단독 출마해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소모사 가르시아는 헌법을 개정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20년 동안 대통령 또는 총사령관으로서 철권을 휘둘렀다. 1930년대부터 수출이 줄곧 늘었지만, 국가 수입의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라 소모사가 (家)와 추종세력들이었다(→ 색인 : 소모사가).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신이 이끄는 민족자유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다음 날인 1956년 9월 21일에 시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게 저격당해 8일 후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큰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1957년 2월에 실시된 산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루이스 소모사는 아버지보다 온건하게 통치하는 한편 1960년에는 온두라스와의 오랜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보책을 수용하고 1961년 미국의 쿠바 피그스 만 침공 에 협력했다.

 

1962년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실비아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게 모르티네스가 소모사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무장조직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결성했다. 1934년에 암살된 혁명 영웅 산디노의 이름을 딴 FSLN은 곧 노동자·농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소모사가는 1963년 레네 구티에레스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데 이어 1966년 그가 죽자 로렌소 구에레로 구티에레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경제는 성장했으나 국민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1967년 초 루이스 소모사가 죽자 그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수개월 후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1972년 5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정치를 3두체제에 맡기는 한편 국민방위대 총사령관직만 유지했다.

 

1972년 12월 마나과에 지진이 일어나 6,000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에 오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자국 국민을 돕기 위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횡령했다. 그는 1974년 니카라과 역사상 10번째의 헌법을 제정해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해 말이 되기 전에 널리 관심을 끈 2개의 진정한 반대세력인 FSLN와 일간지 〈프렌사〉의 편집인 겸 발행인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가 결성한 조직이 민주자유연합(UDEL)을 소집했다. 1974년 12월 FSLN은 소모사 진영의 주요 인물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정치범 석방이라는 대가를 얻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는 2년 6개월 동안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다. 이때 FSLN 지도자 카를로스 폰세카와 수천 명의 무고한 농민이 살해되었다. 1977년에는 로스 도스(12의 뜻)라는 조직이 UDEL과 FSLN 및 기타 조직을 포괄하는 반(反)소모사 연대를 도모했다. 1978년 1월 〈프렌사〉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가 암살되자 동맹파업과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그해 8월 FSLN은 마나과의 국립궁전을 공격해 1,000명이 넘는 인질을 붙잡고 정부군과 2일간 대치하면서 자신의 요구의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국민방위대가 부분적으로 사태를 다시 장악한 가운데 동맹파업이 다시 일어나고 몇몇 주요도시가 FSLN에 함락되는 등 봉기가 확산되었으나 결국 진압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7월 FSLN은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도시들이 연이어 FSLN의 수중에 떨어졌다.

 

마침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7월 1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이틀 후 FSLN이 마나과에 입성해 국민방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46년간에 걸친 권력을 휘둘러 온 소모사 체제가 마침내 종식되었다.

 

FSLN은 소모사 체제로부터 피폐한 나라를 넘겨받았다.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국민이 약 50만에 이르고 장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3만 명이 넘었다. 경제는 파산 상태였다. 1979년 7월 FSLN은 국가재건 임시정부(혁명위원회)를 수립한 데 이어 이듬해 5월에는 과도의회의 역할을 하게 될 국가회의를 구성했다.

 

1979∼80년 산디니스타 정부는 소모사가와 그 일당 및 지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 은행과 보험회사, 광물·임업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식료품 수출입을 통제했다. 한편 개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망명 중이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1980년 9월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암살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기도 했으나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이를 서반구에서의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부터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게릴라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1981년에 미국은 니카라과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그해 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른바 '콘트라 반군'의 선발·훈련·무장을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승인했다. 콘트라 반군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하에 온두라드·코스타리카 접경지역에 기지를 만들고 오지를 무대로 지구전을 펼쳤다.

 

1984년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FSLN의 대통령 후보 다니엘 오르테가 사베드라가 65%의 득표로 압승했다. 이듬해 1월에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헌법 마련을 위한 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국제감시단으로부터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를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미 1982년부터 국제부흥개발은행(World Bank)과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들에 대한 니카라과의 지원 요청을 대부분 봉쇄해 온 데 이어, 1985년에는 대(對)니카라과 금수조치를 내렸다. 콘드타 반군의 병력도 1980년대 중엽에 약 15,000명으로 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격용 헬리콥터 등의 주요 장비를 구입해 반군 소탕에 나섰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무디어졌다. 미국의 이러한 적대적 조치와 내전에 따른 손실 및 경제적 혼란, 산디니스타 정부의 정책적 오류가 맞물려 니카라과 경제는 1985년부터 곤두박질했다.

 

1987년 1월 산디니스타 정부는 자유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그해에 미국 의회는 미국 정부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해 8월부터 니카라과 내전은 군사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옮겨갔다.

 

1988년 인플레이션이 30,000%를 넘자 산디니스타 정부는 이듬해에 인기 없는 긴축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이에 따라 보건·교육·주택·영양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 2월 25일에 역사적인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중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지와 자금지원을 받는 국민야당연합(UNO)과 UNO의 대통령 후보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암살당한 〈프렌사〉 전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의 아내)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해 4월 25일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차모로 정부는 산디니스타 정부가 실시하던 많은 정책을 폐기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따라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공공부문 지출은 삭감되었으며 소농에 의한 내수식량의 생산보다는 수출을 위한 대규모 농업이 강조되었다. 주권 쟁취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강조한 산디니스타 집권기의 교과서들이 사라지고 미국국제개발기구(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기금으로 구입한 '정치색이 덜한' 교과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차모로 정부는 비록 보수적이었으나 국민화해에 관심을 가졌다. 1990년 6월 콘트라 반군을 공식적으로 해산시키고 8만 명이 넘는 군 병력을 1만 5,000명 미만으로 감축했다. UNO 지도부의 정치 보복 유혹을을 뿌리치고 의회에서 FSLN 및 일단의 UNO 온건파와 암묵적으로 연대했다.

 

1990년대 초는 어려운 시기였다. 경제는 침체했다. 긴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실업과 대다수 가난한 국민의 고통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사회가 점차 양극화하고, 불만을 품은 옛 콘트라 반군세력과 전역군인들이 재무장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차모로 대통령은 약 7년의 재임 기간 동안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 경제안정, 공기업 사유화, 인권향상 등에서 괄목한 발전을 이룩했다. 1994년에 제정된 군법에 따라 1995년 산디니스타인민군 사령관 움베르토 오르테가 장군이 물러나고 군대 이름도 니카라과 국군으로 바뀌었다. 1996년 의회가 새로운 경찰조직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경찰에 대한 민간의 지배도 한층 강화되었다.

 

1996년 10월 대통령 선거와 총선, 시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제감시단과 첫발을 내디딘 니카라과의 선거감시단 '에티카 이 트란스파렌시아'(윤리와 투명)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에서 니카라과 국민은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연합(Liberal Alliance) 후보인 아르놀도 알레만 전(前) 마나과 시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97년 1월 10일 알레만 대통령의 취임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 간의 정권 이양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코스타리카> 스페인의 식민지

 

공식명칭 : 코스타리카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
인구 : 4,274,000
면적 : 51,100
수도 : 산호세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1. 9.15
화폐단위 : 코스타리카콜론(Costa Rican col?n/¢)
국가(國歌) : Noble patria, tu hermosa bandera("Noble Fatherland, thy beautiful banner")

공식 이름은 코스타리카 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Republica de Costa Rica).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

수도는 산호세이며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니카라과와 경계를 이루며, 300km의 북동 해안선이 카리브 해에 맞닿아 있다. 남동쪽으로 파나마에 접해 있고, 1,015km에 이르는 남서 해안선이 태평양에 면해 있다. 면적 51,100㎢, 인구 4,171,000(2003 추계).

 

코스타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1502년 지금의 리몬(푸에르토리몬)에 상륙했다. 당시 이곳에는 보루카·카리브·초로테가·코로비시·나우아 등 소규모의 독립적인 인디언 부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곳 원주민들은 쉽게 점령되지 않았으며, 스페인인들이 영구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거의 60년이나 걸렸다.

 

코스타리카는 매우 천천히 발전했다. 원주민 노동력이 부족하여 격리된 농장들이 소규모로 만들어졌다.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제도는 발달하지 못했다. 가난하고 광물자원이 빈약했기 때문에 스페인 왕은 코스타리카를 소홀히 다루었다. 18세기말 스페인이 다른 중앙 아메리카 식민지를 인텐덴시아(intendencias)로 승격시켰을 때 코스타리카는 니카라과에 복속되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을 때 코스타리카는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단명한 멕시코 제국에 합병되었다. 1823년에는 중앙 아메리카 연방의 창설을 도왔으나 다른 네 나라 사이의 불화로 1838년 관계를 단절했다. 이즈음 코스타리카의 고립주의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19세기 코스타리카의 경제는 커피 수출에 많은 힘을 입었다. 19세기말 카르타고와 리몬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그때까지 바나나 재배에만 사용되었던 토지들이 개발되었다. 1886년 의무교육이 시작되었으며 1871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1890년 호세 호아킨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자유롭고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로서, 민주주의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스타리카는 이 선거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명해졌다.

 

1948년 혁명이 일어났으나 1917년에 일어났던 혁명과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군대는 축출되고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코스타리카는 평화상태를 유지했으며, 1980, 1990년대에는 이웃하는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사이의 내전을 중재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런 노력으로 1987년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파나마>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파나마공화국(Republic of Panama)
인구 : 3,191,000
면적 : 75,040
수도 : 파나마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903. 11. 3
화폐단위 : 발보아(balboa/B)
국가(國歌) : Alcanzamos por fin la victoria("We achieve victory in the end")

공식 이름은 파나마 공화국(Republic of Panama/Rep?blica de Panam?).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

남아메리카의 북서쪽 끝부분에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의 남쪽 끝부분 연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파나마시티이며 긴 S자 모양의 나라이다.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1,160km의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콜롬비아에 접해 있다. 남쪽 태평양 쪽으로 1,690km의 험준한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 접해 있다. 면적 74,979㎢, 인구 3,116,000(2003 추계).

 

1501년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포르토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타페데보고타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 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퍼져나갔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는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으로 파나마가 예전의 미국 운하지대에 대한 사법권을 맡게 되었으나, 운하 자체의 운용권은 1999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다.

 

20세기말 경제침체와 심각한 정치변동은 1989년 12월 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국방부 총사령관이자 파나마의 실권자인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물러나게 했다(→ 색인 : 저스트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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