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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이(李)씨 이억(李億)의妻
子
안헌(安獻)
1派13世-양공공파
성균생원(成均生員)
子
안처눌(安處訥)
1派14世-양공공파
선전관(宣傳官)
선전공 순흥안공 휘 처눌비문(宣傳官 順興安公 諱 處訥碑文)
위치 : 죽전리 3구 상성골
상대에 어진 선비가 있어 가풍을 굳건히 일으키고 후대에 슬기로운 자손들이 연달아 배출되어 스스로 몸을 세워 가문을 크게 현창한 집안을 세인들은 명문가라 이르나니 그러한 집안의 하나가 바로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가문이다.
고려의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를 시조로 모시는 이 순흥안씨는 동방유학(東邦儒學)의 태두로 만인이 추앙하여 성무(聖廡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사(配祀 배향)된 4세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빛났다.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이 가문에서 성균생원 휘 헌(憲)과 의인(宜人) 충주강씨(忠州康씨)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이곳 현도면에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육대조가 되시고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오대조가 되시며 사과(司果) 휘 우효(友孝)는 고조가 되시고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 철동(哲童)은 증조가 되시며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바로 조고가 되신다.
구차히 부귀공명을 좇지 않고 곧은 지조와 높은 풍도로써 명리를 초탈하면서 숭조돈종(崇祖敦宗 조상을 섬기고 문중을 돈독히 함)을 중히 여기는 가문에서 태어난 공은 일찍이 무과 선전관을 역임한 경력으로 보아 덕망과 곧은 행실로 후세에 수범(垂範)이 될 일이 많았을 터인데 그 공의 사행(事行 업적)이 세대가 멀고 잦은 병화로 증빙할 문헌이 흩어져 없어지고 묘갈마저 오랜 풍상으로 자형의 마륵(磨泐 마모)가 심하여 상고할 길이 없음이 안타깝다.
다만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고매한 성격과 두터운 우의(友誼)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면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 남) 후에는 향리에 은거하여 가통(家統)을 이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를 효즉(孝則 효성으로 본받음)한 자부(子婦) 공인(恭人) 오씨(吳氏)는 젊은 나이에 부군과 사별하는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당하매 가통의 계승과 자손의 보존에 대한 일념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남복(男服)으로 변장 족보를 품고 어린 세 자제들을 이끌어 선향(先鄕)인 소백산으로 들어가 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 왔으니 이 같은 공인 오씨의 행적으로 미루어 공이 가풍의 보존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위(配位) 영인(令人)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사이에는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지내고 요절한 효자 개(玠)가 있고 손에는 연경(延慶) 희경(希慶) 승경(承慶)의 삼형제가 있으며 양위(兩位)는 이곳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삼성동 안산(案山) 자구문(紫口門) 사좌(巳坐)에 합폄(合窆 합장)되어 있다.
위선지념(爲先之念)이 투철한 승봉(承鳳), 승진(承鎭) 양공이 나를 찾아와 이미 크기 마륵된 묘비를 새로이 세우기로 후손들이 뜻을 모았다는 전언과 함께 글을 청하매 그 간절한 정성을 내 어찌 거절하랴. 다면 내 거친 글이 그 내용을 헤아려 모두 담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사기 2007년 정해(丁亥)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子
안개(安玠)
1派15世-양공공파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효자(孝子)
공인(恭人) 낙안오씨 장덕비문(樂安吳氏 장덕碑文)
위치 : 우록1리 큰말
부인의 성은 오씨(吳氏)요 관은 낙안(樂安)이니 장사랑 산두(山斗)의 여(女)이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안공 휘 개(玠)의 처이다.
천성이 서일하고 깊고 고요하여 사람의 뜻을 거슬림이 없더니 슬프다!
부군이 불행이도 일찍 죽고 삼남은 다 어린고로 밤낮으로 무육하여 앞날의 가정사를 꾸려나가리라 기대 했더니 마침 선조조의 임진왜란을 만나 위난이 급한지라 남복을 입고 삼자를 소에 싣고 보첩을 품에 품고 소백산에 들어가 8년이 지나 돌아와 명철하게 보신하였으니 애라 공인의 심지가 광결하고 처리가 득당하니 마땅히 복록을 누려야할 것인데, 무슨 일로 나라의 운수가 불길하고 난리가 계속되여 부평같은 외로운 몸으로 이런 환경에 이르렀던가.
경남의 소백산은 순흥에 인접되고 뿌리가 굳은 발상지지이다. 어찌 다른데 구하리오. 시기를 보아 용단을 내려 급보로 70리를 걸어 인을 택하여 처신하고 의리를 잡아 행신하며 손수 나무하고 근근히 살아가도 태연히 자득하고 겸연히 스스로 다스려가며 깊이 감춰 들어나지 아니하니, 부인의 지감은 지면자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알만하다. 어쩌면 그의 신념이 이렇게 독실할 수 있으며 비록 대장부라도 처변지지에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같이 탁연자로 할 수 있을까.
얼마 후 천년으로 일생을 마치니 문의 서방 우록 명지묘산 임좌병향에 안장하니 공으로 더불어 상하분이다. 삼남에 장은 연경(延慶)이요, 차는 희경(希慶)이니 통정대부 증군자감정이요 이는 승경(承慶)이라. 내외손증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어느날 안군교갑이 그 사연을 초를 초잡아 가지고 나에게 수윤하기를 청하니 과감히 문졸로 사양치 못하고 삼가 그 원고에 의하여 대강 대요만 서술하고 장덕지문에는 다른 날에 알만한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
을유맹춘하한에 산양 오희국 지음
子
안희경(安希慶)
1派16世-양공공파
통정대부(通政大夫) 증 군자감정(贈 軍資監正)
통정대부 증 군자감정 순흥안공 휘 희경비문(通政大夫 贈 軍資監正 順興安公 諱 希慶碑文)
위치 : 우록 1리 큰말
고려의 상호군 휘 자미를 비조(鼻祖 시조)로 모시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이래 8백여 유년의 오랜세월에 수많은 명장현상(名將賢相)과 효자열부를 배출한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명족으로 면면한 전통을 이어 왔으매 어찌 그 가문이 빛나지 않으랴.
조선 선조조(宣祖朝)의 군자감정(軍資監正) 휘 희경(希慶)은 이 명가에서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휘 개(玠)와 공인 낙안오씨(樂安吳氏) 사이에 삼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동방유학(東邦儒學)의 태두로서 만인으로부터 추앙받은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은 12대조가 되시고 이곳 청원군 현도면에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8대조가 되시고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7대조가 되시며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 철동(哲童)은 5대조가 되시며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바로 고조가 되시고 성균생원 휘 헌(獻)은 증조가 되시며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바로 조고가 되신다.
공은 유년기에 선군 주부공을 여의고 임란(壬亂 임진왜란)의 참화를 몸소 겪는 낙척(落拓 불우함)한 삶을 살았다. 모부인(어머니) 공인 오씨는 젊은 나이에 부군과 사별하는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당하매 가통의 계승과 자손보존에 대한 일념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남복(男服)으로 변장, 족보를 품고 연경(延慶), 희경(希慶), 승경(承慶) 등 어린 세 자제들을 이끌어 선향(先鄕)인 소백산으로 들어가 난을 피했다.
피란 중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인고(忍苦)의 생활 속에서도 가문의 보존과 자손의 교육에만 심혈을 기울이다 난이 평정된 8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정착했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이 땅에서 번창해왔음은 실로 공인의 노고에서 말미암음이 아니겠는가.
유년부터 자품(姿稟 타고난 성품)이 높고 맑으며 성행이 효우인애(孝友仁愛)함을 지녔던 공은 이 어려운 과정에서 형제들과 합심하여 모부인을 극진히 도우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후에도 항상 기쁜 얼굴로 받들어서 양지(養志)와 양체(養體)의 봉양(奉養)을 고루 하였다.
말년에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군자감정(通政大夫 軍資監正)의 벼슬이 내려지는 은전을 입고 향년 82세로 타계하여 이곳 현도면 죽전리 자구문(紫口門) 조고조후 사좌(巳坐)에안장하고 배위 숙부인(淑夫人) 공주이씨(公州李氏)는 우록리 백자동(栢子洞) 간좌(艮坐)에 안장하였다.
슬하에는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극효(克孝) 통덕랑(通德郞) 극제(克悌)와 극렴(克廉)의 삼남이 있다. 당초에 공의 묘전에는 평생의 행적을 담은 묘갈이 있었고 집안에는 전해오는 문헌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묘갈은 이미 마륵(磨泐 마모)이 심하여 자형을 판독하기 어렵고 서책마저 잦은 병화(兵禍)로 인멸(湮滅)되어 고증할 길이 없어졌다.
후손들은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이 묘비를 세우기로 하고 문중을 대표하는 병훈(柄勳) 승보(承輔) 양공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매 그 위선지념(爲先之念)에 감복하여 내 거친 글이나마 전해오는 이야기를 대강 추려서 여기 몇자의 글을 엮는다
사기 2007년 정해(丁亥)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子
안극효(安極孝)
1派17世-양공공파
증 가선대부 공조참의(贈 嘉善大夫 工曹參議)
증 가선대부 공조참의 순흥안공 휘 극효비문(贈 嘉善大夫 工曹參議 順興安公 諱 極孝碑文)
위치 : 하석리 시항
공의 휘는 극효(極孝)요. 성은 안(安)이니 순흥인(順興人)이다. 시조는 고려 상호군(上護軍 ) 휘 자미(子美)요 그 증손자인 휘 향(珦)은 도학의 시조로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니 세칭 회헌선생(晦軒先生)이다. 이로부터 세분의 군(君)과 네분의 문(文)이 서로 이어 나타나 드디어 우리나라의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휘 조동(祖同)은 시호 양공공(良恭公)이요.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이니 고려가 망함을 당하여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순절하였다. 휘 세량(世良)은 호가 만희당(晩喜堂)이요. 관직은 천문학습독이니 목천으로부터 현도면 우록리로 이주하여 지정말(池亭村)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시와 책으로 스스로 즐기니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헌(獻)이니 성균생원이요 증조의 휘는 처눌(處訥)이니 무과로 선전관(宣傳官)이요. 조부의 휘는 개(玠)니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요. 조모는 공인(恭人)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소시 적에 남편을 잃고 세 아들을 기르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장을 하고 세 아들을 업고 족보를 품고서 소백산으로 들어가 8년 후에 돌아오니 자손들이 지금까지 여기에 사는 것이 실로 이 분의 노고를 꺼리지 않은 덕분이다. 부친 휘는 희경(希慶)이니 통정대부 증군자감정(通政大夫 贈軍資監正)이요. 모친은 숙부인 공주이씨(公州李氏)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염치있고 삼가며 공손하고 품위 있었다. 두 아우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주위에서 많은 칭송이 있었다. 수직으로 가선대부공조참의(贈嘉善大夫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장지는 현도면 하석리 대청호변 시항(矢項) 남쪽의 언덕이다. 부인은 셋이니 진천송씨(鎭川宋氏), 경주김씨(慶州金氏)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모두 부덕이 있어서 다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송씨와 광산김씨묘는 명지터(明池基) 남향에 있다고 하는데 표석이 없어 찾을 수 없고 경주김씨의 묘는 우록 백자동(栢子洞) 간원(艮原)에 상석이 있고 오직 송씨만 공에 부좌하였다.
6남 5녀를 두니 장남은 팽로(彭老)요 차남은 창로(昌老)요 명로(命老)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요 상로(尙老)는 증가선공참(贈嘉善工參)이요 삼로(三老) 원로(元老)이다. 딸은 김도신(金道信), 채진구(蔡振龜), 박세장(朴世章), 이팽로(李彭老), 오상국(吳尙國)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많아서 다 쓸 수 없다.
오호라 공이 태어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가르침을 잇고 익혀서 평생의 행적이 후대에 많이 전하는데 세월이 여러 번 변하여 문헌이 증명하지 못하고 묘소의 비석도 세월이 오래되어 닳고 갈라져 갈수록 더욱 송구하도다.
이때에 종중의 의논이 한가지가 되어 장차 돌을 준비하여 수리할 때 후손인 일호, 상선, 병옥이, 가장(집에 전해내려 오는 내력)을 가지고 나를 집으로 찾아와 비석에 기록할 것을 청하니 평소에 아는 것이 적어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종족간의 우의로 거절하기도 또한 어려우므로 가장에 의거하여 졸렬함을 잊고 대략 서술할 뿐이라.
세신사 복월 하완 족예 승춘 근찬 10대손 병훈근서 단기 4335년 임오2월 세움(歲辛巳 復月 下浣 族裔 承春 謹撰)
贈嘉善大夫工曹參議 順興安公極孝碑文
公의 諱는 極孝요. 姓은 安이니 順興人이라. 始祖는 高麗 上護軍 諱 子美요 三傳 諱 珦은 道學之祖로 聖廡에 配祀하니 世稱 晦軒先生이라. 自是로 三君四文이 相繼而作하야 遂爲東國著閥이라. 有諱 祖同은 諡良恭이요. 藝文館 副提學이니 當麗屋社하야 罔僕自靖하고 有諱 世良은 號 晩喜堂이요. 官天文學習讀이니 自木川으로 移居于賢都面 友鹿里하야 池亭村에 鑿池作亭하고 詩書自娛하니 寔公之五代祖也라. 高祖 諱는 獻이니 成均生員이요 曾祖 諱는 處訥이니 武科로 宣傳官이요. 祖 諱는 玠니 司饔院主簿요. 祖妣는 恭人 樂安 吳氏니 少時에 失所天하고 撫育三子라가 當壬辰亂하야 着男服하고 駄三子 懷家譜하고 入小白山하야 經八年而還하니 子孫之于今 奠居于斯者 實恭人不憚勞苦之力焉이라. 考 諱는 希慶이니 通政大夫 贈軍資監正이요. 妣는 淑夫人 公州 李氏라. 公이 生有異質하야 廉謹恭雅하고 與二弟로 湛樂怡怡하야 多有隣頌이라 壽職으로 贈 嘉善大夫 工曹參議하다. 葬于 賢都下石里 大淸湖邊 矢項負壬原하고 配는 有三하니 鎭川 宋氏 慶州 金氏 光山 金氏라. 皆有婦德하야 俱贈貞夫人하다. 宋氏 及光山金氏墓는 明池基壬坐云而 無表未尋하고 慶州 金氏墓는 友鹿栢子洞艮原에 有床石하고 惟 宋氏 祔壇公左하다. 有 六子五女하니 長은 彭老요 次는 昌老요 命老는 龍驤衛副護軍이요 尙老는 贈 嘉善工參이요 三老 元老며 女는 適 金道信 蔡振龜 朴世章 李彭老 吳尙國이요 餘는 不錄이라 噫라 公이 生質之美와 承習之訓으로 生平行績이 多有傳於后而 桑海累變에 文獻이 無徵하고 墓儀도 歲久磨泐하니 去而益悚이라. 於是에 宗議詢同하야 將伐石改修할새 後孫 一鎬相璇柄玉이 袖狀抄하고 訪余關寓하야 請記碑陰하니 素以識淺으로 不勘當이나 忝在族誼에 拒之亦難이라. 玆依狀而 忘拙略敍云爾라.
歲辛巳 復月 下浣 族裔 承春 謹撰 十代孫 柄勳謹書
檀紀 四三三五年 壬午二月日竪
弟
안극제(安極悌)
1派17世-양공공파
통덕랑(通德郞)
통덕랑 순흥안공 휘 극제비문(通德郞 順興安公 諱 克悌碑文)
우록1리 백자동(큰말)
부군의 휘는 극제(克悌)이고 호는 삼락재(三樂齋)이다. 성은 순흥 안씨이고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는데, 고려 상호군 휘 자미가 시조이시고 삼전하여 휘 향이 도학으로 공자의 사당에 제사로 모시게 되었으며 이어서 문순과 문숙과 문혜공이 세상에 빛났다.
휘 조동은 예문관 부제학으로 망복의 의리를 지켰으며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헌이 성균관 생원이었으니 이분이 부군의 고조이시다. 증조 휘 처눌은 선전관이시고 조부 휘 개는 사옹원 주부이시고 부친 휘 희겸은 통정대부 군자감정이시고 모친 숙부인 공주 이씨는 계공랑인 만춘이 그 부친이시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시다.
장남의 휘는 극표인데 공조참의이시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세상에 숨어사는 것을 즐겨하여 숲과 샘 사이에 자취를 감추시고 맑고 깨끗하며 욕심이 적으시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집안을 다스렸으며 집안에 전해오는 업을 잃지 않으셨다.
자식과 손자를 교육하며 시경과 예기에서 전하는 것을 삼가 지키고, 친척을 어루만져 그 화목함을 지극하게 하였으며, 벗들을 대접할 때 흡족하기를 힘썼다. 돌아가시자 고남산 아래 우록리 중촌 백자동(큰말) 오른쪽 기슭인 침자원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 공인 전주 이씨는 부덕이 순수하고 갖춰져 있어서 여사의 풍모가 있었는데 묘는 공의 묘소에 부좌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봉로인데 함양 이씨와 장수 황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둘째는 항로인데 남원 윤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셋째는 응로인데 진원 박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넷째는 붕로인데 전주 이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오호라 부군은 천성이 높은 관직으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다만 조상을 잇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을 힘써서 그 후예가 힘입어서 계단 아래에 거하는 자들이 부군이 내린 것이 아님이 없었다.
돌아가신 뒤 수 백년이 지나서 묘도가 오히려 없어졌으니 어질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다행이 금년 겨울에 종중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서 대략 의물을 갖추어서 그 내용을 기록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예를 갖출 것을 마련해 놓을 따름이다.
단기 4319년 병인 대한절에 9대손 기호는 삼가 짓고 9대손 준호는 삼가 쓴다
정묘 2월 일립
석인 찬조명단 경호 철호 의호 교연 승래 승빈 승철 승각 상필
通德郞順興安公諱克悌碑文
府君 諱 克悌 號三樂齋 姓安順興人 階通德郞 高麗上護軍諱子美 爲上祖 三傳 諱 珦 以道學腏祀聖廡 繼以文順 文淑 文惠 奕世蟬娟 有諱 祖同 官藝文館副提學 守罔僕義 入本朝 諱 獻 成均生員 寔府君之高祖也 曾祖 諱 處訥 宣傳官 祖 諱 玠 司饔院主簿 考 諱 希慶 通政大夫 軍資監正 妣 淑夫人 公州李氏 啓功郞 萬春 其考也 擧二男 公居二 長 諱 克孝 工曹參議 公性寬厚 遯世樂之 晦跡林泉 淸淨寡慾 不求名利 勤儉治家 不失箕裘之業 敎育兒孫 謹守詩禮之傳 撫親戚極其雍睦 接士友務盡款洽 及卒葬于高嵐山下 友鹿里 中村 栢子洞 右麓下 枕子原 配 恭人 公州李氏 婦德純備 有女史風 墓祔 生四男 長鳳老 娶咸陽李氏 長水黃氏 次鶴老 娶南原尹氏 次鷹老 娶珍原朴氏 次鵬老 娶全州李氏 嗚呼 府君之天性 不以顯爵 有干於心 只以承先貽 後爲務 孱裔之賴 居階下者 莫非府君之賜也 沒後數百稔 墓道尙闕 不仁孰甚 幸玆今冬 宗議齊發 略表儀物 而錄其梗槪 以備來人之矜式焉
檀紀 四千三百十九年 丙寅大寒節 九代孫 基鎬謹撰 九代孫 俊鎬謹書
丁卯 二月 日立
石人 贊助名單 京鎬 哲鎬 義鎬 敎淵 承來 承斌 承喆 承珏 相弼
子
안상로(安尙老)
1派18世-양공공파
증가선대부 공조참판오위도총부부총관부사(贈嘉善大夫 工曹參判五衛都摠府副摠管府使)
증가선대부 공조참판오위도총부부총관부사 순흥안공 상로비문
(贈嘉善大夫 工曹參判五衛都摠府副摠管府使 順興安公 尙老碑文)
위치: 죽전3리 삼성골
고려의 상호군 휘 자미를 비조(鼻祖 시조)로 모시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이래 8백여유년의 오랜 세월에 수많은 명유현상(名儒賢相)을 배출한 근역(槿域)의 명문거족으로 면면한 전통을 이어왔다.
이 가문에서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휘 상로(尙老)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휘 극효(克孝)와 증정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 태어났으니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으로 추앙받아 성무(聖廡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사(配祀)된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은 14대조가 되시고 고려의 찬성사(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진 시호 문순공(文順公) 휘 우기(于器)는 13대조가 되시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휘 목(牧)은 12대조가 되시고 이곳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10대조가 되시며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9대조가 되시고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6대조가 되시며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조고가 되시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휘 개(玠)는 증조가 되시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 휘 희경(希慶)은 바로 조부가 되신다.
곧은 지조와 높은 풍도로서 명리를 초월하면서 숭조돈종(崇祖敦宗 조상을 섬기고 종중을 돈독히 힘)을 중히 여기는 빛나는 가문에서 태어난 공에게는 후세에 길이 남길만한 훌륭한 덕행이 많았을 터인데 벼슬로 증가선대부공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부사(贈嘉善大夫工曹參判五衛都摠府副摠管府使)에 증직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져 올 뿐 이후 잦은 병선(兵燹 전쟁으로 인한 화재)으로 문헌이 인멸되고 묘갈마저 오랜 세월의 풍마세우(風磨洗雨 비바람에 마모됨)로 자형을 판독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안타깝다.
다만 공은 고매한 성품으로 수신제가하고 일생을 선영을 지키면서 독서에 전념하였다고 가문에 전해온다. 하지만 일우지전봉(一羽之知全鳳 깃털하나로 봉황을 미루어 짐작)이라는 옛말처럼 능히 공의 인품을 이로써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거 후에는 배위 증정부인 공주이씨(公州李氏)와 함께 이곳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삼성동 후록(後麓 뒤의 기슭) 장척(長脊 긴 줄기) 습독공(習讀公) 조하(兆下負) 묘좌원(卯坐原)에 합봉하였고 그 슬하에는 여천(如天)과 여수(如峀)와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同知中樞府使) 여순(如峋)의 삼남이녀가 있는데 그 아래 많은 내외손을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다.
위선지념(爲先之念)이 남다른 후손 성균관 전인(典仁) 병훈(柄勳)과 병찬(柄瓚)이 나를 찾아와 크게 마륵(磨泐 마모)된 묘비를 새로이 세우기로 자손들의 뜻을 모았다는 전언과 함께 글을 청하여 그 간절한 정성에 감복하여 내 거친 글로써 여기 몇 자를 적는다.
사기 2008년 무자(戊子)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子
안여순(安如峋)
1派19世-양공공파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 순흥안공 휘 여순비문(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 順興安公 諱 如峋碑文)
위치 : 죽전리 3구 삼성골
부군의 휘는 여순(如峋)이요 자는 여창(汝昴)이요 호는 녹헌(鹿軒)이시다. 우리 안씨 계파는 순흥에서 나와 고려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가 시조요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의 15대손이고 문과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 시호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의 11대손이고 천문학습독공(天文學習讀公) 호 만희당(晩喜堂) 휘 세량(世良)의 7대손이다.
여러 후대의 고조는 사옹원주부공(司饔院主簿公) 휘 개(玠)시고, 증조는 증 통종대부군자감정공(贈通政大夫 軍資監正公) 휘 희경(希慶)이시고, 조부는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공조참의공(工曹參議公) 휘 극효(克孝)시고, 부친은 증가선대부 공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영공(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 五衛都摠府 副總管公) 휘 상로(尙老)시고, 모친은 정부인으로 공주이씨(公州李氏) 광길(光吉)의 따님이신데 영조조 기묘에 아들을 낳으시니 벼슬은 정헌대부동지충추부사(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시고, 헌종 을해(憲宗己亥) 6월 14일 졸하시니 향년 81이다.
부인은 정부인인데 남원양씨(南原梁氏) 유하(遊河)의 따님이다. 장남 극검(克儉)은 덕을 감추어 빛나지 않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집안을 다스려 전하는 가업을 잃지 않았고 언양김씨(彦陽金氏) 원중(元重)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을 두니 사섬(思暹), 사철(思喆), 사홍(思弘), 사희(思禧)며 내외 증현은 다 쓸 수 없다.
오호라 부군은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과 법도가 정직하고 끊은 듯하여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며 도를 들음이 매우 빨라 직책에 나아감에 강직하고 과감하며 명석하고 민첩하여 정치를 함에 정밀하고 엄격하면서도 용서함이 있어 도리를 다하였다.
산소는 우록 안산(案山) 삼성동(三省洞) 뒷자락(後麓) 장등(長燈) 부친의 산소 아래 동쪽에 부좌하였다. 두 산소의 비석이 세월이 오래 되어 닳고 갈라져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행히 신미년 종계의 자리에서 종중의 의론이 일제히 나와 정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비석과 문관석상을 새로운 돌로 바꾸고 이에 금년 봄에 준공하여 대략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니 후손된 자들이 마땅히 이어야 할 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졸렬한 글과 난삽한 말로 선조의 덕을 서술하여 감히 기록하노라.
壬申 夬月 暮春 上澣
성균관전학 7대손 종호 근찬
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 順興安公如峋碑文
府君 諱는 如峋이요 字는 汝昴요 號는 鹿軒이시니 我安이 系出順興하여 高麗 上護軍 諱 子美 爲上祖也요 晦軒 文成公 諱珦之 十五代孫야요 文科至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諡良恭 諱 祖同之 十一代孫也요 天文學習讀公號晩喜堂 諱世良之七代孫也라. 累傳之하니 高祖 司饔院 主簿 公 諱 玠시고 曾祖 贈通政大夫 軍資監正 公 諱 希慶이시고 祖 贈嘉善大夫 工曹參議 公 諱 克孝시고 考贈嘉善大夫 工曹參判 兼 五衛都摠府 副總管公 諱尙老시고 妣 貞夫人 公州 李氏 光吉之女 男英祖朝己卯生이시고 官은 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시고 憲宗己亥 六月 十四日 卒하시니 享年이 八十一이라 配 貞夫人 南原 梁氏 遊河之女라. 男曰 克儉은 隱德不輝하여 勤儉治家하며 不失 箕裘之業하고 娶 彦陽 金氏 元重之女하여 生 四男하니 思暹 思喆 思弘 思禧며 內外曾玄은 繁不盡錄이라 嗚呼라 府君이 形貌美晳하고 性度直截하사 博學力行하고 聞道甚早하시니 莅職에 剛果明敏하고 爲政에 精密嚴恕하시어 務盡道理하시다 衣履之藏은 友鹿案山 三省洞 後麓 長燈考兆下에 負卯祔左 雙墳이 墓儀가 歲久澌泐하야 不可詳記故로 幸詣辛未宗契席에서 宗議齊發하니 殫誠合力하야 碑碣及文官石床을 改修新石하고 玆今春에 竣工하야 略表先祖懿德하니 爲后孫者 宜是繼述之事니 可不勉哉며 可不愼哉아 余以 拙文澁語로 敍述先德하야 敢爲之記焉하노라
壬申 夬月 暮春 上澣
천문학습독공묘소
세량공은 사직공의 손자 철동의 3남으로 산소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 3리 삼성골에 있으며 비는 천문학습독순흥안공휘세량지묘(天文學習讀順興安公諱世良之墓)로 쓰여 있고 정유년 (1957)에 13대손 교창(敎昌)이 글을 썼다. 배위는 임천조씨이다.
세량공은 우록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고려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연못을 파고, 매화나무를 심고, 정자를 짓고 사슴과 벗하며 노닐었다고 하여 살던 곳을 우록리(右鹿里)라고 하게 되었고 세현공이 만든 연못과 정자가 있던 곳은 지정말(池亭村), 매화나무를 심은 곳은 매차울(梅洞)이라고 하며 뒷산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명당자리가 있다. 세량공의 후손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1리에 세거하여 번성하였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1리
세량공이 살던 곳으로 왼쪽 끝이 매차울, 왼쪽 마을이 큰말, 오른쪽 마을이 지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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