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장을 자처하시는 두 분 시장님이 계십니다. 문화 관계 정책에도 소루(疏漏)가 많고 당신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남수각을 가로 지르는 오현교 다리 동쪽 좌측에 2000년 12월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을묘왜란(1555) 때 왜구를 물리쳤던 곳이라는 뜻인데 표석 위치가 세상에 없을 만한, 기가 막힌 자리입니다. 기록에는 남수각 동쪽 구릉(丘陵)이라고 돼있건만 다리 위에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92년에 세운 다리 위에서 1555년 왜란을 치렀다는 것인가요? 바른 위치는 운주당 쯤이라야 옳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바로 세웠는데 주민들이 점방 앞에 어지럽다고 밀리고 밀려 버리다가 그 낭떠러지 위로 내쫓겨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중문 열녀비동산의 어원이 된 중문동 2082-1번지의 ‘처사김공창은지처 효열경주김씨지려’라는 정려비(旌閭碑)로 향토유형유산제12-40호( 2013)입니다. 안내판도 없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데다 그 공간마저 양쪽 건물주들이 자기네 화물 적치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입구에는 페인트통이나 구정물통이 널려있습니다. 왜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문화융성의 시대에 상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시장님이 아직도 인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시장님이 알고 계시면서도 민원이 소소하다 하여 무시해 버리는 경우도 있겠지요. 다른 이유로는 담당직원이나 동사무소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경우, 또는 법대로 하려해도 공권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차일피일 관망하는 경우들입니다. 예산 드는 일도 아니고 의지만 있다면 금방 고칠 일인데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찾아보면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이 같은 경우를 견일지십(見一知十)이라고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의 을미왜란 승첩(勝捷)은 그해(명종 10) 6월 27일에 일어났습니다. 왜구 1000여 명이 선박 70여 척에 분승하여 전라남도 연해서 분탕질을 하다가 여의치 않자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아야겠다는 대담한 침공 계획을 세우고 이날 화북포에 상륙하여 제주성을 함락시켜 제주도를 온통 점령하려는 위계였습니다.
이 때 지인(知印)이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열혈청년 김성조(金成祖 1527~1575)가 분연히 “향토가 급란을 당하매 대장부 마땅히 신명(身命)을 바쳐 왜적을 격퇴하리라”하고 창의(倡義)하자 김수문은 김성조와 김직손·이희준·문시봉 등 치마(馳馬) 4명과 정병 김몽근 등의 돌격대를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이를 격퇴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자취를 내다버리려 할 것이 아니라 국가예산을 당겨 용사들의 동상을 세우던가 사적비도 닮음직하게 세워 이러한 사적과 인물들을 현창함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창은(金昌銀 1757~1788)의 처 경주김씨(1758~ 1788)는 나라에서 효열로 표창한 서귀포 여인입니다. 시부모를 잘 받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군의 병구완을 지성으로 하다가 부군과 함께 돌아가신 분입니다. 살아서 부군에게 순종하고 의를 위해 순절(殉節)하니 그 정절이 해와 달 같았습니다. 대정 현감이 제수를 내어 제사를 올렸고, 목사 이철운(李喆雲)은 민장(民狀)이 올라오자 1814년(순조 14) 복호(復戶)하였으며, 1794년(정조18) 어사 심낙수(沈樂洙)는 임금님께 계하여 정표(旌表)를 세우자 주민들이 이곳을 ‘열녀비동산’이라고 한 것입니다. 잊혀져가는 향토유산을 정비하고 향토문화를 책임있게 지켜야 할 분이 누구인지는 자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