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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동안의 도보 여행
늦가을. 주말을 이용하여 고향 바닷가와 산길과 들녘을 하루 종일 걸으려고 군화끈을 졸라맨 뒤 서해안 충남 보령시 웅천읍 무챙이(무창포 武昌浦 *)로 향했다.
길섶에는 낙엽이 뒹굴고, 들국화도 메말라서 향기를 잃고 있었고, 겨울철이 다가오는 절기라서 쌀쌀했다.
서낭댕이(城隍堂)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인 진등을 지났다. 무창포로 직접 가지 않고 海松이 빼곡히 찬 오른쪽 샛길로 들어섰다. 에둘러 내려간 산 아래 마을 관당리는 몇 채의 貧農인가. 듬성듬성 촌락을 이룬 갯마을은 해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빈농을 숨긴 야산은 제법 넓었다.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臨海를 낀 충남도립수산양식연구소의 낮은 건물이 점차 또렷이 보였으며, 많은 유리창이 아침햇살에 반사되었다.
무창포 어항. 등대가 있는 방파제 위에서 바라본 바닷물은 수평선 쪽으로 멀리 물러나 있었다. 가장 많이 갯물이 쓰는 7몰-사리* 때. 사리를 며칠을 지난 10몰(10매)이라도 갯물은 무척이나 많이 멀리 빠졌다. 여름철에는 시퍼렇게 가득 차던 바닷물이었다. 겨울철에는 갯물이 더 많이 써서 뒤로 물러난다.
갯물이 안창 깊숙이 물러난 뒤끝이라서 갯바닥은 속속들이 본래의 모습을 내보였다. 평소에는 바닷물로 갇혔던 갯바위들과 돌너덜이 검으죽죽하게 속살을 들어냈다. 이백 명쯤의 사람들이 안창까지 들어 가 갯것을 잡고 있었다. 일행도 없는 나는 혼자서 안목쟁이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거니와 생명이 있는 남의 목숨을 재미로 잡고 싶지도 않았다. 먼발치에서 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에 해변가를 이내 벗어났다.
남쪽으로 향했다.
軍 海岸砲臺가 보이는 초소를 지나자 독산(홀뫼) 앞바다가 이내 펼쳐졌다. 독산 앞바다도 바닷물이 바짝 말랐다. 드러난 모새(표준어는 모래)바닥에는 수백 명의 갯꾼들이 조개 등 해산물을 잡으려고 무더기로 엉겨 있었고, 이십여 대의 경운기도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다. 이들이 조개(바지락, 모시조개, 동죽), 굴, 갯고동류의 해산물을 잡아가면 種貝 종자조차 씨가 마를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사리 때가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면 종패인들 온전하게 남아 있기 힘이 들겠다.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씁쓸했다.
다행스럽게도 경운기들은 약간의 염치는 남았는지 속속들이 이내 갯바닥을 벗어나 철수했다. 민물이 들어오려면 한참을 더 충그리어도 될 것 같은 시각인데도 갯마을 남정네들은 조금이나마 지각과 양심을 지녔다.
석재 집하장은 바지선이 정박하는 곳.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돌덩어리는 웅천읍 수부리의 石山에서 캐내서 운반해 온 오석(烏石)의 일종이다. 돌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여 碑石用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방파제 석재로 분류된 뒤 바지선에 실려서 멀리 전북 옥구군 ‘새만금 간척사업단지’의 바다를 메꾸는 데에 사용한단다. 채석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약으로 돌을 잘라내고, 해안가 석재 집하장으로 운반하고, 바지船에 싣고, 바닷속으로 던져도 깨지지 않는단다. 돌멩이가 워낙 단단하여서 갯뚝을 막는 데에는 최고로 친단다.
계속 남하하여 독산 갯마을로 향했고, 독산해수욕장을 지나쳤다.
낮은 砂丘의 백사장 가생이에는 열댓 명의 군인(병사)이 모래 위에 철부덕 앉아서 쉬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온 부유물(쓰레기)를 수거하여 한켵에 듬성듬성 쌓아 두었다. 쓰레기 수거차량과 화물차가 갯물이 빠진 백사장으로 천천히 달려왔으며, 군인들이 어울러서 부유물을 차량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청소한 바닷가는 한결 깨끗해져서 보기에도 좋았다. 쓰레기가 없는 곳은 참으로 고즈넉했고, 기분도 산뜻했다.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잔잔한 갯사장. 해안선을 따라 길게 쳐진 군사지역의 철망, 녹슨 철조망 너머로 공군사격장이 보였다. 철조망을 아무리 높이 쳐도 바람은 빠져나갔고, 시야도 빠져나갔다. 사격장 인근에서 바라보는 앞바다에는 아무런 시설물이 없었고, 인적도 없는 툭 터진 빈 공간이었다.
한없이 펼쳐지는 갯장불(바닷물과 접한 곳)에는 수천을 헤아리는 갈매기가 몰려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로 갯뻘 속에 서식하는 조개류(맛조개, 동죽류)를 쪼아먹거나 잔챙이 어류를 낚아채어 잡아먹기 위해서일까?
미세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쌓여 올려진 모래언덕의 방풍림은 海松.
수많은 조개껍질류가 파도에 밀려와서 직선의 띠를 길게 이루었으며, 갯물이 조개껍질을 마지막으로 내팽개친 흔적이다. 생명과 혼이 빠져나간 빈 껍질이 잘게 부서지면 패사(貝沙)가 되고, 패사로 이루어진 백사장과 조개껍질 더미에는 이따금 덩어리 진 홍합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살아 있었다. 갯물이 완전히 빠져나간 뒤 오랫동안 햇볕에 완전히 노출되어도 목이 말라도 바닷물이 밀려오면 생명을 다시 이어가겠지.
혼자 걷는 해변가는 쓸쓸해서 좋다
외로워서 좋다
외줄기로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끊임없이 남겼다
패사를 밟으면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났고, 그래서 덜 심심했다
내가 외로운가, 바다가 외로운가?
외로운 바닷가
뒤축이 두툼한 군화를 신은 것이 화근이었다. 길들지 않는 새 군화는 골칫거리가 됐다.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발뒤꿈치가 아팠으며 물집이 생기고 허물이 벗겨졌다. 손수건을 양말 속에 넣어서 오른쪽 발목을 감싸니 덜 아팠다. 왼쪽 발뒤꿈치도 아팠으나 여분의 손수건이 없었으므로 그저 꾹 참아야 했다. 또 왼쪽 새끼발이 아프고 쓰라려도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걸었다. 두 발을 끌면서 부사지구(방파제)에 다달았으니 시간이 무척이나 더 걸렸다.
광활한 갯벌(간석지
길목에 앉아 있던 갯마을 할머니 서너 분이 일제히 '맛조개를 사시구랴’ 소리지르며 끈질기게 강요했다.
'아저씨, 이거 떨이하고 가, 자동차에 싣고 가. 그러면 복 받을 겨, 한 바구리에 만 원씩 해.”
아들뻘 되는 사람에게 아저씨라니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손사례를 쳤다. 당장 살 수가 없었다. 맛조개를 담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계속 바닷가를 걸어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점심 이전인 시각부터 거추장스러운 비닐봉다리를 들고서 오후 내내 걷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살게요. 우선 점심밥부터 먹고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산모퉁이에 붙은 장안마을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갔다.
지난해 12월 초. 입대 직전의 큰아들과 작은아들과 함께 바닷가를 걸은 뒤 점심 요기로 조개구이 맛을 보았던 간이업소. 번개탄 화덕 위에 생굴과 조개류를 올려놓고 구워 먹은 객손이 제법 있었다. 조개구이를 사 먹고 싶었으나 산너머에 혼자 남겨진 어머니가 생각났다. 혼자서 무슨 초친-맛이랴. 대신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메뉴표에 삼천 원이라고 써붙였어도 수더분한 안주인은 조개를 흥건히 넣어서 끓였다.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진득한 맛과 양이었다.
안주인은 오십 대의 곱상한 여자, 혼자서 장사한단다. 큰오라버니가 사는 바닷가에 와서 음식장사를 하나 돈은 조금만 벌어도 된다고 말했다. 두 딸이 모두 출가하여 서울 근교에서 산다고 했다. 비닐천막 안의 한켠에서 굴과 조개를 구워 먹는 부부가 수원 사는 큰딸과 사위. 어렸을 적에는 형제자매가 많은 막내로 귀엽게 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무용을 잘했으며, 대전과 서울 정능에서도 몇 해씩 살았다고 한다. 민박도 겸하여 장사를 한다며 외간 남자에게 자랑-자랑 이야기하는 장사꾼 아줌마한테 나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며 귀동냥했다.
점심 뒤에도 부사방조제 뚝을 따라 서천군 비인만(庇仁灣)을 향하여 남하했다.
방조제 왼쪽은 부사湖(웅천川이 흐르는 강물을 가둬 둔 곳), 오른쪽은 망망대해.
갯바람이 차가웠다. 추운 계절 탓이었을까. 4km의 제방뚝 위로 걷은 사람은 없었다.
서천군 비인면과 맞닿은 곳. 방조제 끝머리 춘장대해수욕장 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가물거렸고, 멀리서 보니 사람이 벌레인 듯 무척이나 작았다.
귀가 길의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서 제방뚝을 조금만 걸었다. 아픈 다리를 쉬고 싶었다. 바위에 걸터앉아서 해풍을 피하고 싶었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 뒤에 바다를 향한 방파제 아래로 내려섰다. 육중한 바위로 쌓아올려서 만든 제방뚝의 돌더미는 모서리가 날카로웠고, 바윗돌 위에 넘어지면 손바닥을 크게 다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무료한 시간. 텅 빈 공간. 두 손 모아 귀에 대면 쏴아 갯바람소리 철썩 파도소리가 웅얼거렸고, 방파제 바로 아래에서는 싯누런 파도가 넘실거렸다. 갯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소리는 싸우는 소리다. 바닷물도 바위도 본래는 혼자였으리라. 태초에 이 둘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간척지(干拓地*)의 제방뚝을 이룬 수많은 바윗덩어리는 도도히 흐르는 바닷물의 길목을 막았다. 길목을 막은 바위와 길목을 뚫고 넘치려는 바닷물은 서로 힘 겨루기를 했고, 부딪칠수록 파도소리는 분노했다. 인간이 바닷길을 가로막은 뒤로부터는 바다는 더욱 으르렁거렸다. 먼산에서 옮겨와 바닷속에 내던져진 바윗돌도 밤낮없이 가슴을 후려쳤다. 흰 포말이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처얼썩 철썩!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소리는 이내 잠잠했다.
'외롭다. 심심하다. 그래 너한테는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었어, 이제 너조차 잊어버려. 홀로 소리 질러도 아무것도 남지 있지 않아. 흔적조차 기억하지 않는 것을 너는 왜 애닳아 하는가?’
파도는 수억 겁의 파랑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서서히 밀려오는 만조(滿潮). 회색 갈매기가 흙빛 도는 바닷물에 둥둥 떠 다녔다. 새들은 이따금 하늘을 향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 끝자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맞붙었다.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은 곳은 은빛바다. 오후 무렵의 햇볕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윤슬이 되어 출렁거렸다.
남녘은 눈이 부시게 출렁거렸다. 북편을 바라보니 조금만한 섬들이 희미했고, 그 섬 너머에 있는 대천해수욕장은 굴곡이 심한 해안선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지척인 서천 방향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면, 기역자(ㄱ)의 방파제를 거진 지나갈 무렵에 뒤돌아 서서 북녘을 바라보면, 그제서야 대천해수욕장이 아스란히 보일 것 같았다.
오후의 늦은 시각이었기에 더 걷기를 포기하고 뒤돌아서 귀로에 올랐다. 맛조개 두 비닐봉다리를 사서 양손으로 들었다.
이번에는 갯바다가 아닌 공군사격장이 있는 통달산의 뒷편을 빙돌아서 황교리 내륙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옛날 넘실거리던 천혜의 갯펄(웅천川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된 곳)를 막았던 산자락 하단은 아스팔트 신작로가 되어서 자동차들이 질주했다. 강줄기와 바다를 막아 만들기 시작한 논에는 추수가 끝난 흔적들이 드넓게 남아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이다. 아직도 갯흙이 쌓여 있는 간사지에서는 포클레인 중장비가 새 논을 만드려고 경지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통달산 뒤편 황교리의 비포장 산길을 호젓하게 지나쳤다. 갯마을 뒷편은 뱀꼬리(사형蛇形)의 논, 경지정리되어 길게 꼬리를 이어 물었다. 가을추수가 끝난 들길을 걸었다. 소리를 내질러도 심심했다.
이모네는 감나무골. 九龍2里(장마부락)에 사는 이모를 만났다. 머리를 좌우로 쉴사이 없이 흔드는 이모는 여든여덟 살. 종아리가 아파서 잘 걷지 못한다면서 당신의 종아리를 쓰다듬어 보이셨다.
'네 어머니는 걸어서 장에 왔다고 남들이 말하더라. 십리길 걸어서 장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다 한 번 농협農協에 다녀왔을 뿐이어요.'
이모보다 네 살이나 적은 노모는 장딴지가 조금 더 성할까? 이모에게 맛조개 봉다리 하나를 드리니 ‘이빨이 없어서 전혀 먹지 못혀어’ 하며 이종형수에게 건네셨다.
예순일곱 살의 이종큰형이 채전밭에서 배추를 거두고 계셨다. 읍내로 제금 난 셋째아들네의 김장용으로 줄 배추이란다. 마당가에는 소금에 절인 배추 무우 파가 그득히 있었으니 겨우내 김치만 퍼 먹으려나.
이종형네의 큰집은 빈 집. 의외롭게도 이종형네의 사촌 큰형님을 오랜만에 뵈었다. 깡마른 체구로 늙은 얼굴은 더욱 작아 보였다. 전직이 고교 국어교사였던 형님은 빈 집을 둘러보고, 또 무우 배추를 조금 얻고자 천안에서 내려왔다며 자가용 뒷 트렁크에 배추를 싣고 있었다. 큰집의 채전밭을 짓는 이종형님은 밭 임대료의 형식으로 무우* 배추를 조금 드렸단다.
남은 무우를 밭의 땅속에 묻어 두었으니 겨우내 보관할 모양이다. 흙더미로 도툼하고 낮게 쌓아 올려진 무우 구덩이를 오랜만에 보았다. 내가 객지로 떠난 뒤로는 무우 배추를 땅에 묻어서 갈무리하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삼십 년이 가까운 세월을 쉽게 잃어버렸다.
큰집 남일이 형님의 어린 손자가 샘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마당가에 있었던 샘은 흙으로 메꾸어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샘터자리 부근의 어덕 위에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었다. 고목이라서 굵은 줄기조차도 뚝뚝 부러지고 또 바람에 나무둥치가 부러질까 봐 미리 톱으로 잘라낸 흔적들이 역력했다. 말라죽기 직전의 상태인데도 덜 늙은 가지에는 잘디잘은 홍시(감)가 수십 개쯤 매달렸다.
'고목에 올라갈 수 없어서 홍시를 따지 못혀어’ 아쉬워하는 큰집 형님.
'까치밥 하면 더욱 좋겠지요'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2002. 11. 26. 화요일.
* 무창포(武昌浦) : 옛지명은 무챙이. 서해안에서 가장 먼저 해수욕장 개장(일제시대인 1928년). '신비의 바닷길'로 알려짐
* 사리 :
* 무우 : 지방방언. 무수(무시) → 무우 → 무(표준어)
후기 :
일곱시간 반이 넘도록 걸었다. 발뒷금치와 새끼발톱 부근의 허물(피부)이 벗겨지고 물집이 생긴 탓으로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2주일이 넘도록 앓았다. 아픈 생치기를 혹시라도 모서리에 부딛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20일이 지난 뒤에야 생살은 단단하게 굳을 정도로 깊은 상흔이 되었고, 새로 돋아난 살(맨살)은 아직도 간질거렸다. 덜 나았다는 증거. 새 신을 신은 날에는 오랫동안 걷는 게 아닌데... 바보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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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보다는 산문일기에 가깝기에
편집 순서에 관계하지 마시고, 맨 뒷에라도 넣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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