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계보 미상의 인물 등장
1290년 전후로 해서 박사공 증손자들이 태어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고려는 본격적인 원 간섭기에 있었다. 이때 강문에서는 계보를 알 수 없는 1289년(충렬왕 15) 강취(姜就)가 안렴사(按廉使), 1294년에 총랑(摠郞) 강용정(姜用丁)이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지방 관직을 맡은 사실이 고려사에 나타난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인물들이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이중 계보가 확실한 인물들은 1328년(충숙왕 15)에 강원길(姜元吉) 중추밀직부사(中樞密直副使; 정3품)가 있다. 또 1335년(충숙왕 복위 4년) 12월에 만호(萬戶) 강호례(姜好禮)가 원나라에 신년을 축하하러 갔다가 왕을 보호하기 위해 창에 맞고도 대항하여 돌아와 이듬해 사공(司空)이 되어 국정에 참의하였다. 1339년(충숙왕 후 8년)에는 강군보(姜君寶)가 전법사(典法司) 정랑(正郞)으로 재직 중이었고 1344년에는 강군보가 문과에 급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除外)하면 계보를 알 수 없는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13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경공 군보(君寶)의 직계 후손들이 역사 전면에 나서게 된다. 1382년(우왕 8) 4월 전 밀직부사 강서(姜筮) 등을 보내어 경상도 영해군에 침입한 화척(禾尺)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1385년(우왕 11년) 2월 밀직부사(密直副使) 강회백(姜淮伯)을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내었다.
1388년(우왕 14년 창왕 즉위년) 5월에 이성계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다. 강인유(姜仁裕) 등 비(妃)의 아버지들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우왕이 폐위될 때 유배되었다가 창왕의 즉위 뒤에 방면되었다. 11월에 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과 부사(副使) 이방우(李芳雨)를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내어 조견(朝見)하고 이듬해 3월에 경사(京師) 명경(明京)으로부터 돌아왔다. 1388년(우왕 14년 창왕 즉위년) 5월에 이성계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禑)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웠다. 이어서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1월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공신호를 내리고 고공좌랑(考功佐郞) 강회계(姜淮季)로 세자시학(世子侍學)을 삼았다. 2월에 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8월 고공좌랑(考功佐郞) 강회계(姜淮季)를 진원군(晉原君)으로 봉해졌다. 9월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은(姜隱)을 경사에 보내어 종마(種馬)를 바쳤다. 12월 강회중(姜淮仲)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올렸다. 이듬해 5월에 찬성사 강인유(姜仁裕) 이임(李任) 등을 다시 풍주(豊州)로 유배당했다. 12월에 밀직사 강회백(姜淮伯)을 정당문학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은(姜隱)을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로 나아갔다. 1392년(공양왕 4)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다음 <표 3>은 계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표 3> 고려사에 등장하는 계보를 알 수 없는 고려 및 조선 초 인물
년도 | 휘 | 약 력 |
998 | 주재(周載) | 문과에 급제. 1010년(현종 1) 기거랑 |
998 | 현(顯) | 문과에 급제, 기거랑 |
1097 | 증(拯) | 판관(判官) |
1102 | 척(滌) | 급제 |
1174 | 우문(遇文) | 안주도령(安州都領) |
1190 | 순의(純義) | 남로착적사(南路捉賊使) |
1211 | 彰瑞(昌瑞) | 문과 장원, 한림학사 |
1218 | 문준(文俊) | 전중(殿中)감흥위위집 상장군, 태자우청도수 부수 |
1245 | 빈(份) | 박주수(博州守) |
1259 | 도(度) | 문과에 급제, 보문각 교감(校勘) |
1262 | 위보(渭輔) | 대장군(大將軍) |
위찬(渭贊) | 대부 주부(大府 主簿) |
년도 | 휘 | 약 력 |
1270 | 천(闡) | 연주수(延州守)를 역임 |
1278 | 훤(暄) | 10월 과거에 급제 |
1288 | 거실(居實) | 판사(判事) |
1289 | 취(就) | 안렴사(按廉使) |
1298 | 보(保) | 1352년(공민왕 1)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
1307 | 습(褶) | 낭장(郎將) |
1308 | 미(美) | 죽은 찬성사 오윤부(伍允孚)의 사위 |
헌(軒) | 밀직부사(密直副使) |
1309 | 용정(用丁) | 경상도 안렴사 |
1311 | 원(瑗) | 경상도제찰사로 재직 중 파직당했다. |
1314 | 방언(邦彦) | 좌상시(左常侍) 곧바로 상호군(上護軍)으로 원나라 절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
1330 | 언(彦) | 안동목사(安東牧使) |
1344 | 우(祐) | 참리(參理) |
1352 | 보(保) |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
중경(仲卿) | 상호군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2등이 되었다. 1354년 밀직부사가 되고 곧이어 동지밀지사사(同知密直司事)에 승진하고, 1356년(공민왕 5년) 5월에는 상호군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신순, 유홍, 최영(崔瑩), 최부개를 부사(副使)로 삼아 압록강 이남의 8참(站)을 공격케 하였다. 반역을 꾀한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할 때 다시 공을 세웠다. 평리(評理) 印璫(인당)과 함께 서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압록강 서쪽 원나라 소속 여덟 곳의 역(站)을 공격할 때 인당보다 뒤에 도착하여 인당의 부사(副使)인 사윤(司尹) 신순(辛珣)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1359년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을 정할 때 녹권(錄券)을 받고 그 부모도 작위를 받았으며 자손에게는 음직이 수여되었다. |
1354
1354 | 중상(仲祥)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평리(僉議評理), 진원군(晉原君) |
석(碩) | 1352년(공민왕 1) 상장군(上將軍)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이때 지본주척(紙本周尺)을 갖고 왔다. 135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같은 해 7월에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1361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피해 공민왕이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남행(南幸)할 때 교주 강릉도 도순문사겸 병마사(交州江陵道 都巡問使 兼 兵馬使)가 되어 적을 방어하였으며, 신돈(辛旽)집권 때 삼재(三宰:左參贊)를 지냈다. |
| 인백(仁伯) | 내성부원군(奈城府院君), 판삼사사(判三司事) |
1360 | 천수(天守) | 전서(典書) |
1361 | 중상(仲祥)
| 5월에는 전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강중상(姜仲祥)을 경상도도순문진변사(慶尙道都巡問鎭邊使)로 삼았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1371년(공민왕 20) 6월에 강중상(姜仲祥)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고,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강중상(姜仲祥)을 경사(京師) 명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1373년 8월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 취임했다. |
1365 | 중서(仲瑞) | 5월에는 강중서(姜仲瑞)를 진령군(晋寧君)에 봉했다. |
수(裋) | 상장군(上將軍) |
1367 | 원보(元甫) | 상호군(上護軍), 11월 외지에 유배갔다. |
1370 | 사찬(師贊) | 7월 삼사좌사(三司左使)로 경사(京師) 명경(明京)에 보냈다. |
1371 | 성을(成乙) | 판사(判事) 신돈(辛旽)의 이부제(異父弟)로 참살되었다 |
1372 | 인유(仁裕)
| 찬성사(贊成事)로 명경에 다녀왔다. 1373년(공민왕 22) 7월에 찬성사 강인유(姜仁裕), 서장관(書狀官) 정몽주(鄭夢周) 등이 명(明)나라 서울로부터 돌아와 사은의 표문(表文)과 공헌한 방물인 마필을 임금이 받았다. 1374년 찬성사로 계품사(啓稟使)로 북원(北元)에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1377년 8월 계품사(啓稟使) 진천군(晉川君)으로 북원(北元)에 보냈다. |
1377 | 유(楺) | 5월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여 이듬해 임지로 떠났다. |
1377 | 거정(居正) | 충목왕 때 신예가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유점도감(楡岾都監)을 관장할 당시 강거정(姜居正)과 윤형(尹衡)이 유비창(有備倉) 관리로서 왕명을 받아 사원전(寺院田)을 환수했다. 유점사(楡岾寺)의 토지도 환수당하자 유점도감이 유비창에 공문을 보내 토지를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강거정 등은, 사찰의 토지는 왕명으로 유비창에 속하게 된 것이니 함부로 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도감이 신예에게 고자질하자 강거정을 체포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공술(供述)을 받으려 하니 윤형은 반환을 승낙하였으나 강거정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신예가 더욱 노하여 강거정을 행성의 감옥에 가두었다. 1377년 판사를 지냈다. |
계보를 알 수 없는 인물 중에는 조(祖)ㆍ부(父)ㆍ자(子)의 관계로 혈연이 이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활동 사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260년대에 활동한 인물로 위보(渭輔)ㆍ위찬(渭贊)을 형제로 볼 수 있다. 이 두 분의 후손이 있었다면, 1290년 대 이후 활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1320년대 그리고 그 후손들이 1350년대로 이어졌다 할 수 있다. 1352년 활동한 중상(仲祥)ㆍ중서(仲瑞ㆍ중경(仲卿)과 인백(仁伯)ㆍ인유(仁裕)를 각각 형제로 볼 수도 있는데 누구의 후손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이들의 후손들이 조선조에서 적지 않을 터인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