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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20 여름호]
작품을 분석하는 논증의 가면 그리고 시대정신이란 허구
과거의 시대란 우리들에게 일곱 번이나 봉인을 한 책이다.
당신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 시대와 그 시대를 반영시키는 당신들 자신의 정신일 뿐이다.
-괴테, 『파우스트』 575-79중에서
1. 주유 & 작동
작가·시인으로부터 생산되는 문학작품이란 비평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평은 문학작품을 전제로 하며, 심지어 그것을 먹이로 하여 생존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심하게 말한다면 문학비평은 작품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은 비평가의 해석과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비평은 다만 비평자의 몫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은 비평으로부터 독립적 관계에 놓인다. 비평이 간섭을 하건, 하지 않건 작품은 하나의 ‘격(格)’을 갖추고 지상(紙上)에 존재하는 이유에서이다. 이에 반해, 비평은 작품에 대해 지극히 의존적이다. 작품이 아니고선 ‘비평’이란 장르를 부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비평을 위한 비평도 있지만, 그것도 작품비평이 이루진 이후에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지 비평의 조건이 독단으로 성립하는 건 아니다. 한 작품이 비평에게 객체화되고 텍스트로서의 희생을 용인했을 때 비평은 바야흐로 논증을 진행할 수 있다.
비평의 핵심은 ‘신비평(new criticism)’처럼 결코 작품의 질만 살펴보는 눈에 있지 않다. 뚜렷한 비평적 주관이나 합리적 기준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게 비평의 최선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비평자의 정신과 품격이 더 의미 있게 작용한다. 하지만 비평자가 어떤 시각에 의해 작품을 해석·비평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따지기란 단순하지가 않다. 상황과 조건, 시기에 따라 비평의 수준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작품비평의 시작을 연 옥스퍼드대학교 시학(詩學) 교수인 아널드 매슈(Matthew Arnold,1822~1888)의 비평관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는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1869)란 저서를 통하여,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문학인과 지식인이 자행한 독선과 금전 숭배주의의 부조리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적이 있다. 사실 그의 이 같은 문학비평에 대한 이론적 핵심은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취임식 특강 때부터 나타난 바 있다. 즉 「문학에 있어 근대적 요소에 대하여」라는 주제가 그것인데, 그는 이 자리에서 비평 정신이란 ‘인생의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세계에 대하여 숙고하며 나아가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유를 발산하는 통합된 의지’가 있느냐의 여부가 바로 ‘비평의 정신’과 연관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비평 정신이란 ‘작품을 통하여 나타난 시대와 그 요청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영구한 방식이 아니며, 비평가가 의도한 사조적(思潮的) 경향으로 작동될 수 없다고 본 것인데, 이는 투시적이고 예언자적인 비평관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비평의 흐름은 고전주의나 감정·감상주의를 출발로 하여 전기주의적(傳記主義的) 입장, 그리고 작품에 대한 환경주의적(環境主義的) 입장을 거쳐왔다. 전후(戰後) 구조주의 시대를 건너와, 1930~1950년대의 신비평주의 이후 심리비평이 대세를 누리기도 한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예를 들어 그리예스 M. 바하, E. 슈타이거, E. 후설 등으로 이어져 연계되는 이른바 ‘현상학적 비평’의 시기와 ‘실존주의의 문학’이 함께해 온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라캉, 자크 데리다, 푸코와 같은 ‘반심리 비평주의’가 등장하고, 이어서 이른바 ‘해체 비평’, 그리고 비평의 비평인 ‘메타비평’ 등이 등장해 젊은 비평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이는 ‘비평의 맛’이라기보다는 어떤 ‘비평의 멋’을 위해 행세한다고 보아진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비평문학사’는 더욱 다양하게 발전한다. 개인의 심리주의와 생태주의적 입장, 그리고 이른바 젠더, 또 다문화주의에 대한 대응방법 또한 만만치가 않다. 이와 동시에 ‘하이퍼이론’, ‘생체윤리주의’ 등은 작품해석을 함에 철저히 개인주의 방식이거나 ‘신심리주의’에 의탁하여 진행하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아널드 매슈나 허쉬의 예견대로 비평가의 주관인 ‘시대정신’에 근거하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작품의 해석과 비평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해서, 결국 비평은 어떤 영구적인 사조(思潮)나 주의(主義)로 결정될 일은 아닌 듯하다.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일에 대하여 에릭 허쉬(Eric Donald Hirsch)는 그가 공들여 쓴 『문학의 해석론』(1976)에서 시인이 쓴 ‘작품의 본래적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비평가가 작품을 해석함에 대하여, 비평가의 삶에 따른 정신적 방법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품의 진정한 해석은 점차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해서, 비평은 무릇 독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평가에 따라 작품의 존재적 의의가 사뭇 달라지는 사례가 그러하다. 에릭 허쉬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시인과 비평가가 몸담은 각자의 토양과 정신을 통과하면서, 비평은 한 흐름을 유지해 간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명확한 작품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작업이란 곧 포기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인의 체험적 환경이 빚어내는 작품으로부터 이어받은 생태적 비평체제는 곧 주유(注油)된 자동차처럼 작동을 계속해 간다. 즉 위에 말한 〈선 작품-후 비평〉 그것이다. 선 주유, 후 작동처럼 말이다.
2. 배설 & 소통
에릭 허쉬는 ‘문학작품의 해석을 또 하나의 가상적 작품’이라고 말한 ‘라캉·데리다·푸코의 주장’에 대해 서슴없이 반기를 든다. 아니, 그들의 철학이론을 추종하며 문학작품을 이론적 도마에 올려놓은 비평가들을 비판하고, 다시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평한다. 그것은 한때 유행했듯이, 작품해석 자체를 창작의 한 장르로 보려던 비평가들에게 ‘터무니없이 그들 철학에 경도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비평에 대한 비판적 매질인 셈이다. 그는 ‘라캉·데리다식 철학’을 추종하는 그 비평가들의 득세가 오늘날 ‘비평의 무질서’를 가져왔다고도 말한다. 해서, 문학작품의 위상은 비평 행위와 독립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며, 작품과 비평을 따로 보게 된다. 즉 양자의 관계성을 무시한 결과로부터 나오는 비평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비평가와 시인의 의도를 재현해 보이는 일은 소통과정에서나 윤리적 관점에서 옳을지는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그건 그 시대가 지나면 마땅히 어떤 한계성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한다. 일부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라캉, 데리다, 푸코의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의 법칙’(어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일) 앞에 놓인다.
매슈나 허쉬에 의하면, 필자의 이와 같은 ‘비평마당’도 지나가는 한 척의 낡은 배에 불과할 것이다. 함에도, 이 시간 작품 읽기에 정성을 기울이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필자가 평설의 마당에서 자주 언급한 ‘작품격’, ‘시격’, ‘시조격’에 대한 그 존엄성 유지 때문이다. 그리고 찜찜하지만 작품의 소이에 대한 토로와 소통의 마당이 스스로에게도 요하는 까닭이겠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시조는 시대 속에 있다. 시대를 표현하거나 시대를 떠나거나, 시대를 대변하거나 시대를 타고 넘나들지만, 어차피 그는 시대의 담 안에 꽃피어 있다. 이제 그 꽃을 딴다. 꺾지 않고 딴다는 건 줄기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해묵은 살림 따라 몸도 슬슬 닳아가고
된바람 맞바람에 눈물마저 말라붙어
이따금 따끔한 눈을 꼭 감고 견디는 너
시드는 저 꽃잎도 아끼며 바라보는
촉촉한 눈길만은 잃지 말자, 잊지 말자
네 눈물 대신하고픈 눈시울이 뜨겁다
-이광 「안에게」 전문
이 시조는 밖에서 ‘안’으로 유연하게 흘러들어가는 특징을 보인다. 사실은 흐름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의미적 연결과 시차적(時差的) 장면에 무리가 없다는 그것이다. 여기서 “안”은 곧 내면이다. 나이가 들면 “해묵은 살림”처럼 “몸은 슬슬 닳아”져 간다. 그래서 자주 아프고 힘도 빠진다. 화자가 살아온 세월은 “된바람”과 “맞바람”을 맞아온 그야말로 풍파의 상처로 얼룩져 있다. 이런 난관을 지나오며 그는 “눈물마저 말라붙”었을 지경이다. 아니, 차분히 눈물을 흘리며 울 시간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들수록 자신에 향하는 마음은 익숙해지지만 “시드는” 세월로부터는 낯설어지기 마련이다. 몸이 약해지는 건 물론이고 아픈 데는 더 자주 생긴다. 그건 화자가 말한 것처럼 “따끔한 눈을 꼭 감고 견디”어 낼 사연이 많아지는 일로부터이겠다. 젊은 시절엔 꽃이 피고 지는 강산에 대해 무심하거나 압무에 바빠 거들떠 볼 참이 없었지만, 이제는 꽃이 시들어가는 동산도 “아끼며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속이, 그 철이 들었다는 얘기이다. 자연의 생성과 소멸 앞에서 자아 성찰의 회한이란 하나의 일과가 되는 프로그램이다. “네 눈물을 대신하고” 싶은 그 “안”으로 향하는 화자는 잔잔해지는 반면, 그의 “눈시울”은 울컥 뜨거워지고 있다. ‘눈과 눈시울과 눈물’로 ‘너’라는 “안에게” 닿고자 하는 간절함이 두 수의 가지[枝]에 묻어난다. 그런 서정은 “촉촉한 눈길만은 잃지 말자 잊지 말자”라는 다짐으로부터 더 압득해 오기도 한다. 해묵은 살림과 시드는 꽃잎, 그리고 눈물도 말라붙은 “맞바람”의 세상을 지나오며, 화자는 ‘나’란 존재에 대하여 관수(灌水)하듯 감정의 수분을 주사한다.
이 시조를 두고, 화자와 대상의 감정적 교호작용을 도해(圖解)한 브룩스와 워렌(Cleanth Brooks,1906~1994. & Robert Penn Warren,1905~1989)의 〈유기적 구조(organic struction)〉의 식을 표면상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즉 〈화자〉와 〈청자〉 사이는 사유가 〈유기적 구조〉를 유지하며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내(화자)가 “안”으로 보내는 신호(메시지)이고, 그는 “눈을 감고 견디는 자”(청자)는 곧 “너”에 해당한다. 내 안의 ‘나’는 ‘너’에 대해, “촉촉한 눈길만을 잃(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때, 너의 “눈물을 대신하고픈” 나의 “눈시울”은 뜨거워지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내 안의 심리적 보호막은 ‘너의 눈물’이 되고, 그건 ‘나의 눈시울’로 옮아오는 것이다. 이는 힘든 과거의 내적 과정을 소리 없이 밟고 와 오늘의 ‘눈시울’에 이르게 한 ‘성장시조’격의 작품이다. 다소 이설이 있겠으나, 신심리주의적 관점에서 본 시조미학을 이리 한번 적용해도 본다.
너를 가만 들여다보면 산 있고 계곡 있고
숨가쁘게 내달리던 원시의 소리 있고
긴 어둠 강을 건너던 부르튼 뗏목 있다
험한 길 걷는 동안 못 박히고 뒤틀렸지만
속울음을 삼키며 순종해온 너를 향해
수많은 길이 다투어 걸어오는 걸 보았다
새벽녘 경쾌하게 내딛는 너에게서
잠이 든 빌딩 숲을 깨우는 실로폰 소리
절망도 가볍게 넘을 날개 돋는 소리가 난다
-김강호 「발」 전문
발은 개인이 밟아온 역사 즉 답사(踏史)를 주도한다. 발품을 들여 답사(踏査)하듯 첫수는 발을 “산”과 “계곡”으로 “내달리던 원시”에, 그리고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고 항해하듯 해 “부르튼 뗏목”이 되었음을 개괄해 보인다. 둘째 수는 과거 고난을 극복해온 발의 행적에 대해 다 발설하지 못하는 이픔을 “속울음”에 저장하듯 자의식화 한다. 이처럼 오늘의 발은 온갖 험로에 내몰리고 “못 박히고 뒤틀린” 지금의 모습이다. 그러나 생의 가시밭길을 쉬지 않고 “순종해온” 발이 아닌가. 그래, “수많은 길이 다투어 걸어”와 투혼한 결과인 환희에 바야흐로 이르게 된다. 셋째 수는 오늘의 삶을 열어가는 “새벽녘”에 들리는 “경쾌”한 걸음과 더불어 오는 의욕을 전한다. 그건 “빌딩 숲을 깨우”고 “실로폰 소리” 같이 내딛음으로써 어떤 “절망도 가볍게 넘을” 그러니까 “날개 돋는 소리”와 같이 미화된다.
이와 관련하여, 현상학적 비평을 체계화한 폴란드의 비평가 로만·인가르텐(Roman Ingarden)은, 한 편의 시는 ‘화자가 지나온 이력’ 즉 ‘성층’의 체계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즉 (1)‘소리의 성층(成層)’, (2)‘의미의 성층’ (3)‘양층의 중첩적 성층’으로 이미지의 층위를 설정함이 그것이다. 이를 「발」에 나타난 이미지에 대입하면 (1′)[소리 성층] 〈산, 계곡, 원시, 뗏목〉과 (2′)[의미 성층] 〈속울음, 순종, 길〉로 나타나고, 다시 (3′)[양층(중첩) 성층] 〈경쾌한 너, 실로폰 소리, 날개 돋는 소리〉로 각각 연몌(連袂) 지을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시조도 역시 신심리주의 시학의 한 소산으로 기대어 볼 만하다. 우리는 개인적인 발을 통하여 시대와 역사의 질곡들을 견뎌왔다. 거친 땅을 밟아온 고난·고통·고생의 이력을 우리의 발은 묵묵히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고도 지금 화자의 발은 건강하고도 희망적이다. 구장(球場)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처럼 발로 뛰어 승리를 구하기도 하고, 고공 탑 위의 노동자처럼 허공과 빌딩 벽을 걸으며 가족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생사를 걸기도 한다. 저임금에 투쟁하랴, 공기(工期)에 맞추랴, 해고되지 않으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발에 굳은살을 덧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아, 군홧발로 민중을 진흙길처럼 짓밟았던 사람도 있었지 아니한가. 하므로, 우리의 역사는 발로부터 일으킨 고통과 참사를 이겨 낸 혹사의 과정일지 모른다. 이제 사람들은 어떤 절망도 가볍게 넘을 듯 “날개 돋는 소리”를 내는 소소한 일상과 그 보람의 발을 갖고자 하는 게 소망이다.
앞에 든 이광 시인의 「안에게」는 ‘내적인 자의식 심리’에, 김강호의 「발」은 ‘내·외적인 역동의 심리’에 의해 유발된 작품들로 신심리주의적 경향의 하나라 예거해 본다. 아니면 또 어떠랴.
돌로만 쌓아올려야 탑이라고 이를까
울통불통 모난 구석 얼기설기 귀를 맞춰
반백 년 뒤채다보면 탑신으로도 앉으려니.
가풀막 거친 숨결 다스리던 바람 같은
속울음 긴 자락을 감아올린 향불 같은
에둘러 돌아온 길목 이끼 옷이 축축하다.
-윤현자 「탑을 쌓다」 전문
사람이 쌓는 탑엔 “돌로만 쌓아올”리는 흔한 그 ‘돌탑’만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날마다 돌 하나씩 쌓아 올린다’고 말하면 하면 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뻔한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조는 아이러니하게도 ‘몸탑’을 노래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모난 구석”을 “얼기설기 귀를 맞”추고 “반백 년” 동안 뒤채이면서 단련과 정성으로 빚어내는 세월 탑신의 그 ‘몸탑’ 말이다. 그런 착상은 다른 ‘탑’류 시조와는 분명 차별화의 깃발을 꽂는 일이다. 첫수와 둘째 수의 호응이 짝을 짓는 특징도 있다. 그 구성법에서 미적 열거가 있어서 읽을수록 입에 운(韻)을 단다. 화자는 설법을 하듯 “가풀막 거친 숨결”을 “다스리던 바람”과, “속울음 긴 자락”을 “감아올린 향불 같은” 그 내면의 전아(典雅)한 ‘몸탑’을 위해 흐르는 세월에 순종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적층(積層)한 스펙들은 “에둘러 돌아온 길목”의 세월처럼 구불구불하면서도 깊다. 그 노고의 땀과 시간의 더께가 마치 “이끼”를 입은 듯도 하다. 그래서 옷은 두꺼워지고 “축축하”게 젖었다. 이처럼 물질적인 탑의 이미지를 역사적인 신체로 변환시켜 증언하는 시조란 그리 흔치 않다. 이를 앞서 말한 로만 인가르덴의 ‘성층설’에 의하여 구성해 볼 수 있겠다. 즉 ①〈언어 발음의 성층〉으로서 첫수 “돌로만 쌓아올려야 탑이라고 이를까/울통불통 모난 구석 얼기설기 귀를 맞춰”를 배치하고, ②〈의미의 성층〉으로서 “반백 년 뒤채다 보면 탑신으로 앉으려니”를 놓고, 그리고 ③〈표현의 대상성〉으로서 “가풀막 거친 숨결 다스리던 바람 같은/속울음 긴 자락을 감아올린 향불 같은”을 놓고, ④〈과정 안출의 성층〉으로서 “에둘러 돌아온 길목 이끼 옷이 축축한” 탑의 존재를 놓아 그렇듯 연결시켜 본다. 하면, 역시 이 시조 또한 신심리주의의 반열에다 자리매김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3. 통 & 꽃
점심이라도 자유롭게 먹자고 메뉴 따라 장소를 바꾸던 때가 필자에게도 있었다. ‘그거에 그맛’인 듯한 직장 내 구내식당의 식상하고 고착된 맛을 좀 탈피할 속셈이던 때 말이다. 다음 시조에서처럼 “태산도 눈에 들고 장강도 품에 든 듯” 하려면 역시 점심쯤은 든든해야 할 것 같다. 메뉴로써의 ‘짜장면’ 뿐만 아니라 청춘 시절의 내기 당구나 축구로 연결되는 ‘짜장면’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만리장성’이라는 중국 요릿집에서 먹는 짜장면은 점심때 허기의 허리춤을 당겨 올리듯 한 끼를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한 식사일 것이다.
무너진 만리장성에서 짜장면을 먹는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멸망하지 않으려고
면발을 걷어올리며 사태지지 않으려고
허리춤 끌어올리듯 한끼를 끌어올리면
태산도 눈에 들고 장강도 품에 든 듯
무너진 만리장성 위로 하루가 후꾼해진다
-박명숙 「점심시간이다」 전문
첫수에선 “무너진 만리장성”처럼 구풋해진 배를 채우게 된다. 하지만, 둘째 수의 “무너진 만리장성”을 다시 언급한 건 첫수와 같이 배고픈 상황을 상징한 것과 조금은 다르다. 하면, 화자의 허술한 일상을 하나의 겸손법으로 운위한 듯하다. 첫수는 먹는 짜장면 양태가 실감 나게 묘사된다. 즉 “무너진 만리장성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그리고 “멸망하지 않으려고”, 나아가 “사태지지 않으려고”하며 “면발을 걷어 올리”는 모습에서 그런 실감을 감각적으로 싣는다. 대저, 짜장면 점심은 먹방이 아니어도 다소 먹방다워진다. 그러니 태산도 장강도 ‘짜장면 식후경’일 듯하다. 짜장면 후의 식효(食效)로 ‘눈’에 든 ‘산’과 ‘품’에 든 ‘강’이 되는 것이다. 시조의 효과는 종장의 “하루가 후꾼해진다”는 데 모인다. ‘후꾼해진다’는 말의 정감을 앞의 ‘태산’과 ‘장강’의 비유로부터 연유해낸바 여유와 기지가 넘치게 한다. 더욱이 허기를 단박 구하듯 걸치게도 만든다. 모락모락 김 나는 ‘짜장면’ 한입 문 후의 면발처럼, “그게 사태지지 않”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연신 “걷어 올려”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는, 말하자면 그 언어 유희의 재치와 순간에의 위트를 걷어내는 면발처럼 형성해낸 구절이 여간 맛깔지고도 찰진 게 아니다.
방전을 목전에 둔 만개한 시간처럼
꽃이어도 좋고 벗이어도 좋을 만남
배터리 충전도 없이 한시적인 번개팅
벗보다 벚꽃이 먼저 와 보채는 길
온천천 양 갈래 벗과 벚들 팔짱 끼고
뭉쳐둔 분첩 속 분말들 쏟아진 환한 수다
-이희정 「벚꽃 만남」 전문
고대하다 벚꽃이 만개한 날을 잡아 번개팅하는 수가 있다. 그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특별한 만남이기도 하다. 한데, 이를 “방전”, “배터리 충전” 등의 전기류로 비유하거나, “분첩 속 분말들”이란 화장품류로 재해석한 시어는 조금은 차별적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낡은 시에서처럼 벚꽃에 ‘팝콘’이나 ‘펑 튀기’로 비유하는 아속(啞俗)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벚꽃’은 ‘벗’과 동음어적(同音語的)인 연계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한시적 번개팅”으로 ‘벚’과 ‘벗’의 만남을 추동한 것도 〈언어적 펀(lingustic pun, or fun)〉을 적소에 활용한 셈이다. 그건 “온천천 양 갈래”로 늘어선 벚꽃과 벗들은 터널이 되어 “팔짱을 끼고” 가며 수다를 나누는 대목에서 극점을 이룬다. 그게 벚꽃들의 수다, 또는 벚꽃과 벗들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아수라의 세상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나들이는 마치 “뭉쳐둔 분첩 속의 분말들”처럼 해방되고 “환한 수다”의 꽃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조가 하나의 감각적 미학으로 정의될 때, 빚어지는 화려한 비유를 작품 마당에 동반시키는 이 같은 탐미주의는 유머보다도 유쾌한 매력을 낳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조는 그걸 보여준다.
그 겨울 묵정밭에
밟힌 자국 선명한
냉이 꽃 하얀 웃음에
가슴 철렁 내려앉는다
아프다
말을 못하고
떠난 엄마 데려온 봄
-오영민 「냉이꽃」 전문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화자가 전하는 마음은 마냥 애달프다. 땅에 자란 납작한 냉이를 보니, 엄마가 고생하며 가꾸다 가신 “묵정밭”에 생각이 “밟힌”다. 그건 아직도 남아 있는 어머니 발자국처럼 선명하다. 이제 엄마가 없어 가꾸지 못할 밭이지만 그 자국들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벌써 다 지워져 있겠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눈엔 어머니 자국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김매며 딛는 발자국 곳곳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어났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런 느낌으로 어머니를 불러온다. “아프다”라고 말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난 엄마”를 “데려온 봄”날처럼 냉이꽃은 화자 앞에 그리 피었다. 종장에선 반전된 압축과 함축으로 “엄마 데려온 봄”을 요약해 보인다. 또 중장에서, 화자는 다시 “냉이꽃 하얀 웃음”을 빌려오는데, 그만 “가슴 철령 내려 앉는”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서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오영민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엄마, 어머니’란 말은 화자의 정표대로 쓰인 게 많다. 예컨대 201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품 「찔레의 방」에서, “병원 문을 나서다 하늘 올려다본다/아기인 듯 품에 안긴 찔레 같은 어머니/기억의 매듭을 풀며 꽃잎 툭툭, 떨어지고”와 같은 대목이다. 그 ‘어머니’의 상은 유년 때부터 형성된 상을 작품에 옮겨온 듯 하다. 그래 어머니의 정서에 관한 시인의 뿌리가 깊어져 보인다. 그가 등단한 후에 노래하는 ‘어머니’ 상은 주로 ‘엄마’상으로 화했다. ‘엄마’ 호칭 시대가 더 그리운 일로 바뀐다. 시는 시인과 화자의 내면을 고백하며 소통하는 장르이지만 고백 자체는 아니다. 고백이 화자나 시인의 공력으로 만들어진 예술품일 때 시는 더 읽히는 법이다. 이 시조는 엄마의 과거를 반추하지만 봄이면 세상을 떠난 엄마를 ‘냉이’와 함께 모셔오는 그 소통의 상(床) 앞에 놓는다. 그게 ‘눈물꽃’으로서의 “냉이꽃”이라는데 더 여운을 얻는다.
곡기를 끊더라도 헛가지는 쳐내야지
된바람 회초리에 어둠도 털지 못해
굵고 긴 신음소리가 새벽 숲에 홍건하다
헐벗은 이력이야 나이테에 새기겠지만
험지, 그 어디쯤서 별빛이나 우러를까
언 뿌리 서로 달래며 닦고 있는 빈자리
-안주봉 「나목」 전문
‘나목’에서 풍기는 이미지란 쓸쓸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새벽 숲”에서는 “홍건”한 신음을 푸는데 그건 나목들이 부르짖는 “굵고 긴” 슬픈 소리이다. “언 뿌리”를 “서로 달래”거나 외롭게 “빈자리”를 지키며 내는 울음이니 더 융숭 깊을 수밖에 없다. 화자의 간절한 바람은 나목이 감당하는 한계를 초월하란 듯 극기의 힘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첫수에 “곡기를 끊더라도”, “된바람 회초리에”, “굵고 긴 신음소리”, 그리고 둘째 수에 “헐벗은 이력”, “험지 그 어디쯤에서”, “언 뿌리 서로 달래며”와 같은 극한 상황으로 제시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힘을 일으킨다. 시조의 겉 ‘의미’에 속 ‘형식’으로 역술되어 색다른 특징도 있다. 예컨대 “헛가지는 쳐내야”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 “된바람 회초리에”도 “어둠을 털지 못”한 점 등에서 그런 의지를 읽는다. 각 장은 음보별로 응답 관계적 구성을 해 시조 체재가 도드라져 보이기도 한다. 그건 각 초·중장에서 나타난바 즉 (1)〈조건에 대한 불이행〉으로, ①“곡기는 끊더라도/헛가지는 쳐내야지”, ②“된바람 회초리에/어둠도 털지 못해”, (2)〈최소조건에 대한 부분 이행〉으로, ①“헐벗은 이력이야/나이테에 새기겠지만”, ②“험지, 그 어디쯤서/별빛이나 우러를까”가 그런 사례이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는 그의 저서 『공기와 꿈』을 통해 구름, 연기, 바람, 나무 등,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은 그 움직임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더욱 선명해지고 내면의 울림을 함께 얻게 된다고 했다. 예전에 혼란스러웠던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정복을 통해, 움직이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고 했다. 이 시조에, 나목이 된 나무도, 바람 회초리, 털어야 할 어둠, 나무의 신음, 헐벗은 나이테를 우러르는 별빛, 언 뿌리를 달래는 빈자리 등, 바슐라르의 설명대로 이미지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그 서정적 역동력이 크게 작용된다. 나목과 더불어 사물의 내면세계를 읽을 수 있는 시가 요즘 드문 편인데, 이의 한 전기(轉機)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논밭도 젊어야 기운 펄철 난다는데
진기가 다 빠져 뼛속까지 허한 나달
오래된 문풍지 닮은 등가죽이 시리다
거름 걸게 내면 땅심 더 깊어질까
속 끓인 마음 밭을 김매고 북돋워도
저 슬픈 저승꽃들만 비름처럼 질기고
주름살 고랑마다 거뭇한 눈물 자국
구붓한 그림자는 어스름에 묻히는데
어릴 적 놓친 꿈 하나 사금파리로 반짝인다
-손증호 「아버지의 등, 그 어스름」 전문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위해 자존(自尊)의 등을 굽힌다. 이 시조엔 진기가 다 빠져 뼛속까지 허한 아버지의 삶이 궁핍한 비극으로 나타난다. 그의 등에 비친 어스름은 “오래된 문풍지”를 닮아있다. 하지만 낡아서 제대로 구실하지 못한다. 찬바람이 들어와 “등가죽이 시리”지만 이를 막아내는 데 역부족이다. 그건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의 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화자가 느끼는 그 아버지에 대한 허전한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둘째 수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더 극심하게 가난하고 늙어가며 쪼그라들고 있다. “땅심”을 “더 깊게” 하려고 “김매고 북돋워도” 피부에 돋는 저승꽃들은 “비름처럼 질기”게도 달려드는듯 말이다. 아버지의 노동은 이렇듯 갈수록 가팔라지기만 한다. 물론 소득 또한 보잘것없다. 병고로 만신창이가 되어 육신 사방으로 “슬픈 저승꽃”이 무성히 피었다. 오랜 이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구붓한 그림자”로 오지만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후회는 깊어진다. 그에게 “어릴 적 놓친 꿈”은 이 같은 파편으로 남아 지금도 “사금파리”처럼 찔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겪어온 한국적 정서는 이 ‘아버지’의 생과 밀접하다. 가난이라는 정한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나라처럼 부모에 대한 문학작품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4. 장르적이냐 & 기능적이냐
시조는 시대의 ‘산물’이자 메시지의 ‘형식’이며 상황에 대한 ‘담화’이다. 시조시인은 유한한 시대에 존재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시대상을 시조로 반영해 낸다. 시인이 의도한 바를 현재의 독자나 비평가가 임의대로 시조를 집약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시인과 독자 또는 비평가가 존재하는 연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상옥의 「봉선화」는 1974년 시조집 『초적(草笛)』에 실린 작품이다. 그런데 이를 지금의 20~50대의 독자가 감상할 경우, 70년대의 ‘봉선화’와 같은 정서와 환경을 온전히 읽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아널드 매슈(Matthew Arnold)가 언급한 조건과 같이 ‘시대의 요구’라는 고려 사항은, 이미 시인과 독자가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에 반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시⇄독자〉가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한 텍스트엔 완벽한 해석이나 객관적인 비평의 진행에 한계가 있다. 같은 논리로 비평가들이 이런 작품을 두고 ‘시대정신’ 운운하는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건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시대정신을 설정하고 그를 좇으려는 일이나 진배없다. 역사는 ‘시대’의 것이지 ‘시대정신’의 것은 될 수 없음이다. 어떤 한 시대가 지나감으로써 그 시대정신은 파생된다. 하지만 비평가가 즐겨 떠드는 ‘시대정신’은 위에 든 괴테의 말처럼 자신의 ‘말’로 부리는 그 자신의 정신적 궤변일 뿐이다. 더 비판적으로 말하면 비평가가 살고 있는 시대를 영위해온 방식대로의 흐름을 자기 취향대로 정의해 버리는 일이다. 예컨대, 이미 악행 사실로 판명 난 ‘친일’이나 ‘친 신군부’를 두고 시대정신 운운하며, 정의롭지 않게 이미 기울어진 한쪽 날을 추켜 보려는 책략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대정신’이란 비평가들의 자기 귀환적 아류에 불과하다. 그건 뚜렷한 사실, 진실, 정의만큼 설득적이지 못하다. 흔히 아는 것처럼 문학은 시대의 〈말로 된 예술품〉(정신)이 아니라, 시대의 〈말로 된 담화〉(사실)라는 사실을 에릭 D.헛쉬를 통해 인정한다면 적어도 그렇다. ‘정신’ 자체를 담아내는 게 아니라 ‘사실’을 담아냄으로써 ‘정신’을 일으키는 게 문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떤 작품은 정신만 강조되어 있어 마치 도덕교과서의 한 제재와 같은 것도 있다. 시조 작품이 인간의 정신과 행태를 통과하는 ‘예술품’으로 보는 시각은 다소 ‘장르적’이고 정신적이다. 그러나 작품을 독자와의 ‘담화’로 보는 건 소통 역할에 중점을 둔 다소 ‘기능적’이고 현실적이다. 예술로서 형식인 〈장르 기능〉보다는 〈담화 기능〉을 더 열어 놓게 되는 건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현대시조도 그렇다. 또 앞으로 그러할 것으로 예측한다.
5. 비문 & 구애
이제, 시와 시조 앞에 더욱 진솔할 필요를, 겸손의 조건과 함께 놓아둘 지점에 이른다. 핵심을 놓친, 그러니까 ‘바쁘다 바쁘다’며 비문(非文)을 내놓는 글, 또는 ‘좋다 좋다’며 너를 부르는 구애(求愛)의 글로부터 탈출할 지점의 문 앞이다. 현대의 시를 풍자적으로 말한다면 ‘비문(非文)’씨와 ‘구애(求愛)’양이다. 이 두 사람의 ‘아양’으로 독자가 진절머리를 앓게 되는 모습을 이 평설에서 간혹 하소연해 본 적도 있다. 주·객·서술의 관계가 모호한 평문, 엿가락문장으로 길어져 호흡이 없는 빈사 상태의 글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글은 메이저 문예지에 더 많이 목격된다.
앞서 언급한바, 에릭 허쉬의 비판적 예측과는 달리 우리는 당대의 비평 마당엔 지금도 데리다, 푸코, 라캉이 제 시대를 맞이한 듯하다. 알 듯 모를 듯, 비평가들이 다투어 그들의 글을 인용해 보이기 때문이다. 논증이 불충분한 초현실주의나 젠더류 같은 작품을 사례로 들며 중앙문단적 권위를 새삼 부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객기일 뿐이다. 마치 그런 시대정신을 이끄는 위인처럼, 또는 당자자들의 변호사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뭐 아쉬운 점을 하나 더 들겠다. 시와 시조를 비평을 할 때, 대상 작품을 예시로 보이는 건 상례이다. 이때, 어떠한 식으로든 전체 작품을 보여야 옳을 일이다. 함에도 문단권력을 쥔 비평가들에게서 공통된 건, 길지도 않은 작품 인용을 잘라먹는다는 데 있다. 해서 그 작품을 찾으려면 온갖 시집과 잡지를 다 열람하고 섭렵해야 한다. 그건, 대부분 독자가 읽지 않았다는 사실(설사 읽었다 해도 망각하는 수도 있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서지학적으로도 온당치 않다. 말하자면 자기 글에 대한 외면적 권위를 보일 의도로 인용을 잘라 먹는다는 그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해서, 전모를 파악하려는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고, 나아가 비평과 해석에 유리한 부분만 발췌하여 자기 합리화나, ‘시대정신’으로 써먹는다는 그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설이나 수필의 경우 긴 인용은 불가능하겠지만 논의의 핵심을 이루는 인용에 객관성과 타당성을 유지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자신의 비평의 관점에 유리한 대목, 진술한 주제와는 다른 각도의 문장을 인용하여 비평하는 건 평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게 뭐 틀린 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당하여 독해의 진행에 방해를 받는 건 사실이다.
즈음해, 비평가들이 새길 일은, 작품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진행함에 ‘주관의 보편타당성’을 말함으로써 비평가가 ‘자아몰입적 주관’이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건 당연히 ‘보편타당한 주관’이어야 하는 ‘주관의 객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비평에 객관성이 유지·확립되려면 ‘비평의 정당화’ 즉 논증의 근거인 인용부터 충실해야 할 일이다. 불성실한 논증이란 ‘가면’은 자칫 위악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
6. 수저 & 시조
어느덧 ‘코로나19’가 생활 속 큰 근심으로 등장한 오늘날, 시조 작품에 대한 비평의 밥상 앞에 필자는 겸허의 수저를 놓으며 헌사(獻詞)한다. 앞서 언급한바 진정한 작품의 생명체가 논증적인 비평의 수반을 불러올 수 있음에서다.
내 밥상(床)에 놓는 〈수저〉와, 스마트 폰에 넣는 〈시조〉가 있어 오늘도 밥을 먹는다. 이름도 비슷한 ‘수저’가 아니, ‘시조’가 그렇다. ‘수’와 ‘저’가 분리되듯 ‘시’와 ‘조’도 마찬가지다. ‘숟가락’을 들 때와 반찬을 앞에 두고 ‘젓가락’으로 키를 맞추며 딴딴 리듬을 탄다. 그래 무엇을 집을 것인가. 아, 아버지 앞에 놓인 생선을 피해 묵은김치 가닥을 건져오던 때, 정직하지 못하지만 겸손의 시조가 생각났었다. 마찬가지로 ‘時’(때)를 맞춰 들판의 곡식을 거둬오면서 ‘調’(운)를 고르는 몸짓과 소리를 한다. 보리를 수확하는 때(‘시’)도 그렇다. 유월이면, 베고 묶은 보리 뭇을 마당으로 나른다. 이후 타작하는 도리깨를 휘두르며 어떻게 ‘조(調)’ 즉 흥을 돋구어 땀을 식히고 힘을 낼 것인가, 그 힘의 기량이 서투르지만 소리로 재보던 때가 있었다. 어른들의 익숙한 도리깨질은 ‘타닥 탁’ 내리치며 ‘어여 어여’ 소리를 맞추는 건 저절로였다. 나는 서두르다 서툴러 발을 다치는가 하면 내 소리는 부끄러워 자꾸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용을 쓰며 ‘조’를 가다듬었다. 아버지들이 아쉬운 대로 ‘좋다’ 했다. 이 땀의 과정과 ‘추임새’가 곧 ‘시조’를 이루었다. ‘수저’의 밥상과 ‘시조’의 마당은 스케일은 다르지만 형태는 이리 같다. 숟가락질을 따라 반찬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 마찬가지로, 곡식을 타작하고, 일렁이는 바다에 멸치를 잡거나 그물을 끌때에 무슨 소리를 내야 피로를 잊고 풍요의 힘을 돋울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밥상과 마당과 바다를 깨우는 건 역시 소리이겠다. 오랜 노동 후 비로소 놓이게 되는 바와 같다. 이게 나의 ‘시조격’이자 당신의 밥상과 그 마당에 헌사(獻詞)할 그런 ‘작품격’이다. 그러므로 〈시조〉는 〈수저〉처럼 배고픈 삶을 결코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