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현대사에는 우리나라를 바꾼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 가운데 1987년만큼 일년내내 일이 있었던 때는 없었다. 1월 박종철열사 고문치사사건을 시작으로 대통령직선제로 상징되는 민주화운동,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이한열열사의 죽음, 6월항쟁, 노태우의 6.29선언, 7-9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그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의 소위 구로항쟁이다.
이 싸움은 부정투표함의 반출을 발견한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며 부정투표함의 공개개봉 등 선거무효를 주장하며 구로구청에서 농성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3일만에 4천여 명의 무장경찰의 무차별 진압으로 인하여 2시간여 동안의 아비규환 끝에 1,034명이 연행되고 그중 208명을 대통령 선거법위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방화 등으로 구속되면서 끝이 났다.
1987년 대통령선거 구로구청 부정선거 사건ⓒ자료사진
1,034명 연행 208명 구속...1987년 12월 구로구청
당시를 되새겨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국민이 6월 항쟁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가 몇몇 정치인의 개인적 욕심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구로항쟁에서 보여지 듯 부정선거의 징후가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의 패배의 원인이 후보단일화의 실패에 초점이 맞춰지며 소위 야권 및 민주세력의 패배의식에 의해 끝이 난 것이다. 그때 20대였던 우리는 나름 치열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직선제 쟁취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 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국민과 함께 국민을 믿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신뢰도 부족했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렇듯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시작된 민주화는 지난 26년 동안 많은 변절자(?)를 낳았고 그보다 더 많은 정치꾼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87년의 망령이 되살아나 ‘당선 가능성’ 내지는 ‘사표 방지’라는 이름으로 타협을 일삼아왔다. 그리고 그런 타협을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왔다. 그런 타협이 거듭되면서 어느새 우리는 길들여졌고 언제나 스스로 먼저 깃발을 내리는 일들도 빈번해졌다. 현장에서의 싸움은 어느새 제도권에서의 활동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리고 지금 2013년 우리는 우리의 그 비겁함의 결과를 보고 있다.
국내에서 선거의 결과에 망연자실하고 ‘레미제라블’영화로 힐링(?)을 하고 있을 때 멀리 미국에서 교포들이 먼저 부정선거에 대한 문제제기에 나섰고 이는 곧 유엔청원 접수로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국내 정치가 불안할 때 곧잘 쓰는 비책인 남북 긴장관계와 그로 인한 전쟁위협은 우리에게 부정선거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주지 않았던 탓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지금의 부정선거를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며 그런 변명으로 우리의 비겁함을 가릴 수도 없다.
국정원으로부터 고발당한 정수연 통합진보당 학생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를 규탄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정수연 학생위원장은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 앞에서 국정원의 반값등록금 정치공작과 관련 대국민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 바 있다.ⓒ이승빈 기자
대학생 시국선언이 일깨운 꿈
사실 공직선거법을 놓고 볼 때 이번 대통령선거는 어느 하나 법 위반이 아닌 것이 없다. 공무원이 선거에 개입한 것을 비롯하여 전자개표만으로 진행되어 선관위원이 하도록 되어 있는 실제 검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선거법 위반에 대한 그 어떠한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아 헌법에 의해 독립기관으로 인정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정을 국민들이 외치는데도 명색이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그 어떤 발언조차 하지 않음에 대한 부끄러움, 26년의 세월이 무디게 만든 정의감 상실에 따른 비겁함으로 인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무릅쓰고 고백하건대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20대의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되기도 한다. 어제 오늘 사이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부정선거를 바로잡고자 하는 시국선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87년 구로항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우리 세대가 이렇게 물러서 있다면 우리는 결국 87년의 상황에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정말 만들고 싶었던 나라에 대한 꿈, 희망을 다시 되살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