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실크로드 다녀와서 이번 우리 대학 신문에 쓴글 올립니다,
몇번 구룡리 들러보니 하 조용하여 올렸으니 탓하지 마시고 멘트 주시면
다음에도 ,,,
실크로드에서 만난 천마
텔레비전에서는 내일 낮 최고기온이 섭씨 40°c가 넘을 것이라고 예보한다. 돈황과 트루판 지역은 43°c라는 TV화면의 자막에 사뭇 긴장한다. 다시 한번 마스크, 장갑. 안경, 목도리까지 체크한다.
황하를 끼고 난주를 거쳐 무위에 도착하였을 때 일행들의 기색은 지난 5일간의 여정에 비하여 믿기지 않을 만큼 변해있었다.
하루에도 수백 Km 넘게 달리기도 했으므로 유적들을 보는 시간보다 냉방시설이 잘된 버스 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서회랑 대협곡의 위용에 압도되었고 지금까지 가졌던 사막과 오아시스에 대한 나의 지식이 얼마나 감상적이고 잘못 되었던가 깨닫게 되었다.
만년설로 덮여있는 멀리 남쪽의 기련산맥 봉우리만 계속될 뿐 사방은 오아시스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광활한 평원이 계속된다. 잘 정비된 도로와 수로 사이로 가로수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데 누런 먼지가 여러 겹 쌓여 이곳의 황사가 예사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시가지 군데군데에 “天馬之鄕”이라는 표어와 간판이 많이 보이고 우리가 도착한 숙소 또한 天馬빈관이었다. 우리 대학의 상징이 천마임을 알고 있는 일행 중 여럿이 필자를 보고 제대로 왔다고 한마디씩 한다.
무위시는 기원전 121년 한나라의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전에는 오손, 월지, 흉노 등이 할거하고 있었다. 하서회랑 지대의 흉노를 몰아낸 후 돈황, 주천, 장액 등지와 함께 한나라가 설치한 하서4군의 하나로 그 당시는 양주였다.
이 일대의 흉노족들은 그들이 타고 기른 말들의 살이 통통하게 찐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면 남쪽의 한족들을 공략하여 그들의 혹독한 겨울나기에 대비하였다.
한나라 고조는 이 흉노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흉노에 잡혀 십여년 포로생활을 마친 후 돌아온 장건은 유럽을 중국에 알리고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흉노의 기마전에 속수무책이었던 한나라는 페르가나(우즈베키스탄)지역의 준마를 수입하여 더욱 무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한무제가 서역의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난주에서 장액에 이르기까지 1000여 km에 걸쳐 축조한 장성과, 200개소의 봉화대 흔적이 우리가 달리는 312번 국도옆으로 끊겼다가 이어지고 괴물처럼 다가선다.
무위에서 멀지 않은 산단에는 중국 최대의 목마장이 있다고 한다. “凉州畜牧甲天下”라 하였듯이 이 곳의 천마와 광활한 오아시스를 둘러싼 장성은 무위가 하서4군의 중심지였으며 서역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 현존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왕과 천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68년 우리 대학의 새로운 출발로 교명의 변경과 함께 천마를 상징 동물로 삼았다. 1973년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출토되어 신라 건국 신화를 입증하였을 뿐 아니라 인당문 사이로 서기를 뿜으며 비상하는 천마의 신비한 위용은 도약의 발판을 새롭게 한 우리 온 천마가족들을 다시 한 번 “새 역사의 창조자”임을 다짐하게 하였다.
한편 무위가 더욱 유명하게 된것은 1969년 12월 무위시의 뇌대(雷台)라는 사당 밑에서 동분마(銅奔馬)가 발견되어 천마고향의 실제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뇌대는 무위시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1km쯤 떨어져 있으며 일찍부터 벼락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농민들이 창고로 사용하던 동굴을 따라 약 20m쯤 들어가면 천장과 벽을 모두 벽돌로 만든 전, 중, 후 세 개의 정방형 묘실과 아치형 문으로 연결된 좌우로 모두 일곱 개의 묘실 구조를 하고 있다. 약 1800년전 동한 말기 장씨 성을 가졌던 한 장수의 무덤으로 각 묘실에는 지하 박물관이라 부를 만큼 금, 은, 동. 철. 골, 석, 동전, 도기 등 약 3만 점에 가까운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중에서도 정교하게 주조된 무사 45인과 말 39필, 마차 14량 등 99점의 유물 중 천마로 알려진 동분마가 최고의 걸작으로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이다.
이 조각은 높이가 34.5cm, 길이가 45cm로 힘차게 치켜든 목이나 뒤로 세운 꼬리, 하늘 향해 힘차게 도약하는 네 개의 다리 모양이 경주의 천마도와 너무도 흡사하다. 우리의 천마가 구름 속에서 신기를 뿜고 말갈기를 날리며 여유있게 움직이는 데 비하여 이 곳의 천마는 오른쪽 뒷발을 가볍게 날으는 제비의 등에 올려 훨씬 역동감을 보여준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곤륜산과 서역의 타크라마칸 사막을 넘어 온 천마는 귀신과 번개처럼 빨랐다고 읊었다. 감숙성 박물관에서 천마를 처음 본 곽말약은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진품이다”고 외쳤다.
기원전부터 하서회랑을 통한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천산산맥을 넘어온 천마와 많은 서역의 문물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문화의 세기를 맞은 오늘날 중국인들은 실크로드의 요충, 무위시의 뇌대공원에 높이 솟은 천마상을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중국 문화의 대표적 상징물로 삼아 자랑하고 있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부럽군요. 잦은 여행에서 얻은 기행문 많이 실어 주세요.
글을 읽다보니 내가 문득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황사 가득한 허허로운 벌판에... . 엣날 고선지 장군을 생각하면서 글 속에 빠져서인지. 실크로드! 한번은 가봐야할텐데...
정말 귀한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