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한담漢詩閑談
송강 정철과 진천의 송강사
조영임(중국 광서사범대학
교수)
우리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을 어떻게 알고 있나?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과 같은 걸출한 가사문학을 남겼기에 주저 없이 그를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부른다. 혹은 고산 윤선도와 시가문학상 쌍벽을 이루었다고도 평가하고 있다. 그가 지은 시조는 어떠한가? 「훈민가訓民歌」 중의 한 편인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아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는 ‘효’를 강조하는 우리의 전통교육에서 곧잘 거론되는 표준 예문이 된 지 오래되었다. 또한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로 시작하는 「장진주사將進酒詞」는 풍류 꽤나 안다는 인사치고 모르는 이가 없지 않은가.
아니, 모르는 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참으로 다양한 버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럼,
그의 한시는 어떠한가?
남용익은 『호곡만필』에서 “정송강은 절구에 가장 능한 시인”이라고 소개하였다. 세상에서 정송강의 절창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다음의 작품을 소개해 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성글은 비 소리로 잘못 알고서
중을 불러 창밖에 나가 보랬더니
시냇가 나뭇가지에 달 걸렸다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밤에 산사에서 읊다(山寺夜吟)」
시인이 조용한 산사에 있다가 후두둑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그래서 심부름하는 중을 불러 나가 보라고 했더니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는커녕 달만 훤하네요.”라는 것이었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한 모양이다.
실상은, 나뭇잎 소리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일어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인데, 이것이 시화된 위의 한 편의 시는 참으로 기발하고 절묘하다. 결구의 ‘나뭇가지에 달이 걸렸다’는 표현은 밋밋한 중의 대답을 시적으로 승화하였다. 시상은 재치 있고, 시적 표현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절구의 그 그릇에 딱 맞게 표현되었다.
하늘 끝에 기러기 끊어져 편지가 오지 못해
돌아갈 생각에 날마다 망향대에 오른다.
은근히 반기는 함산의 10월 달 국화
중양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 피었네.
天外無鴻信不來, 思歸日上望鄕臺.
慇懃十月咸山菊, 不爲重陽爲客開.
위의 시는, 송강이 함경도 어사로 함산에 도착하여
10월에 국화가 핀 것을 보고 지은 것이다. 함산은 함흥의 옛 이름이다. 기구의 ‘기러기와 편지’는 한나라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땅에서 비단에 쓴 편지를 기러기의 발에 매어 무제武帝에게 보냈다는 고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승구의 ‘망향대’는 한나라 성제가 왕궤 장군을 보내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왕망의 찬역으로 왕궤가 호중으로 도망가 버리자,
사졸들이 대를 쌓아서 고향을 바라보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승구는,
소식이 끊긴 하늘 끝 변방에서 고향을 애타게 그린다는 의미이다.
‘天外’,
‘無鴻’,
‘信不來’,
‘望鄕臺’ 등의 어휘가 시인이 느끼는 비애를 점진시키고 있다. 전결구의 핵심어는 ‘국화’이다. 송강은 10월에 핀 국화를 보고서,
그것이 중양절을 위해 핀 것이 아니라,
외로운 자신을 위로하려 핀 것이라고 하였다.
차천로의 『오산설림』에는 위의 시를 수록하고 나서 그 말미에 “나중에 송강이 조정에 돌아오자, 상공 박충원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 사람이 바로 은근히 반기는 함산의
10월 달 국화,
중양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 피었네.’라는 시를 쓴 사람이란 말이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구의 ‘慇懃十月咸山菊’은, 남용익이 『호곡만필』에서도 정철의 ‘절가絶佳’라고 뽑은 구句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당시에 꽤나 알려졌던 모양이다.
이렇듯 정철은 가사면 가사,
시조면 시조, 한시면 한시 등 여러 문학 갈래에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예로부터 ‘인품人品은 곧 시품詩品이요, 시품詩品은 곧 인품人品’이라는 말이 있어 왔지만, 정철의 인품人品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문학에서 보여준 만큼 호평 일색은 아니었다.
우선,
선조는 “정철의 사람 됨됨이는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실이 또한 바르다.
다만 그 말이 너무 곧기 때문에 시류에 용납되지 못하고 남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하였고, 율곡 이이는 “정철 같은 사람은 충직하고 청백하고 강직하며,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라밖에 없으며, 그의 기절氣節로 말하면 사실 한 마리의 독수리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중봉 조헌은 “얼음같이 맑고 옥같이 깨끗하며 적심赤心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철은 선조 임금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 중봉 조헌과 같은 당대의 명사에게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선조실록』에 수록된 「정철의 졸기」에는 사뭇 상반된 평가를 보이고 있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가수假手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 <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
이처럼 정철을 두고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데에는 그의 정치적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정철은 강원도, 전라도 그리고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나서
1589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때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는데, 정철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위관委官이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중심에 있던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관련된 인사 천여 명이 숙청된 것으로 정리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축옥사’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철은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가 속한 서인은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고 반대편에 있던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591년 정철은 이산해와 결탁하여 세자 책봉 문제를 제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즉, 정철과 이산해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나중에 이산해가 배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세자로 의중에 두고 있던 신성군의 외삼촌인 김공량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 주기까지 했다. 결국 광해군이 아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심기를 건드려 정철은 좌의정에서 파직,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정철에 대한 선조의 평가와 『선조실록』에 기재된 평가가 상이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철에 대한 평가가 ‘충신’ 혹은 ‘간신’과 ‘소인’으로 양분되는 것도,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정치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김장생은 “정철 공과 좋아한 이는 퇴계 이황ㆍ율곡 이이ㆍ우계 성혼ㆍ하서 김인후ㆍ사암 박순ㆍ고봉 기대승ㆍ중봉 조헌 등 제현이요,
공을 미워한 자는 이산해ㆍ이홍로ㆍ정인홍ㆍ정여립ㆍ기자헌ㆍ이이첨 등이었으니,
그 공을 좋아하고 미워한 바를 보면 공의 현부賢否를 알 수 있다.”고 단정지어 말하기까지 하였다.
정철이 과연 선조의 말처럼 ‘시류에 용납되지’ 못하여서 뭇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만인을 두루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낙엽진 빈 산에 빗소리 쓸쓸한데
상국의 풍류가 이곳에 잠들다니
슬프구나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워
지난날 가곡을 오늘에 부른다오
空山落木雨蕭蕭, 相國風流此寂寥.
惆悵一杯難更進, 昔年歌曲卽今朝.
위의 시는 정철의 사후 석주 권필(1569∼1612)이 그의 묘를 지나다가 읊은 것이다. 정철의 묘소는 우암 송시열이 주도하여 충북 진천으로 이장하였지만 본래는 고양시 신원리에 있었다. 권필은 정철의 문인이다. 기구는 스승이 부재한 현실의 쓸쓸함을 노래한 것이지만, 앞서 정철의 절창이라고 소개한 「밤에 산사에서 읊다(山寺夜吟)」의 기구인 “蕭蕭落木聲”을 연상케 한다.
결구의 ‘가곡’은 바로 송강이 지은 <장진주사>를 말한다. 위의 시에서 권필은 스승 정철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동시에, 그와 같은 스승을 다시 뵐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하였다.
현재 정철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에 위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암 송시열이 주도하여 이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정철의 위패를 봉안한 정송강사가 있다. 경내에는 우암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가 있어 역사상 정철이 차지하는 위상을 드높여 주고 있다. 지금 이곳은 일반인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 낭송회와 각종 문학제 행사가 열리고 있어 문학인의 성지라 일컬을 수 있다.
진천은 청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학부 시절 이곳에서 야외 수업을 하곤 했었다. 교수님의 문학 강의는 한 마디도 흘려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어쩐지 이곳에서는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눈으로는 송강사 안에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를 응시하거나 높다랗고 가파른 계단 너머에 있는 사당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입으로는 “한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를 읊조리곤 했었다. 그리고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 시절에는 이곳에서 교수님이 따라주시는 술잔을 황송한 마음으로 받고 감격했었다. 아마도 이곳이 문학사상 큰 족적을 남긴 송강 정철의 의리지장衣履之藏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정치사적으로 송강 정철의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문학사적으로 그의 이름은 변함없이 우뚝하다. 살면서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할 때, 일상에서 휴식이 필요할 때, 풍류가 있고,
재치가 있고, 기발한 시적 재능이 있었던 문학인이 떠오를 때, 진천의 송강사를 둘러보는 것도 꽤나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