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 원불교장유교당 교무
2022년 2월 12일 오전 6:17
<2.11. 특별정진기도7일째>
(선진님 이야기)
6.구타원: 이공주 종사
[李共珠, 1896~1991]
본명은 경자(慶子). 법호는 구타원(九陀圓). 법훈은 종사. 필명은 청하(淸河). 1896년 12월에 서울 대조동 112통 8호에서 부친 유태(裕泰)와 모친 민자연화(閔自然華)의 3남 3녀 중 차녀로 출생. 원불교 초창기의 대표적인 여성교역자의 한 사람.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시독(侍讀)을 하는 등의 신구지식을 갖추었다. 1924년(원기9) 서울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 후 법문수필 등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법낭(法囊)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교서 발간 등으로 초창기 교단의 호법주, 경제적 기초 확립과 기관ㆍ시설의 창립ㆍ후원 등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공덕주였다. 전무출신을 서원하여 여자수위단원으로 제1대 성업봉찬회 회장, 감찰원장 등 교단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문화교화 등에 기여했다. 만년의 91세 때인 1986년(원기71)에는 필생사업으로 진행해 오던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전7권)를 편찬하여 자비로 출판했다. 1991년(원기76) 대종사탄생100주년까지 교단발전사의 현장을 지킨 인물로, 일생을 자료의 수집ㆍ보관, 사료정리에 공을 들여 교단사와 관련한 귀중한 유품을 다수 남겼다.
생애와 활동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예지(聰明叡智)했고 강의고결(剛毅高潔)한 기상을 가졌다. 1902년에 부친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깨쳤고, 1907년에 한국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인 허난사(許蘭史)에게 한문ㆍ산술ㆍ초급영어를 배우고, 이듬해에 이화학당 초등과에 입학했다가, 동덕여학교로 전학했다. 1909년에서 1913년까지 대한제국 황실의 윤(尹)황후의 시독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논어》ㆍ《심상소학독본》 등을 공부했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경성여자보통학교(현 경기여고) 본과를 수료했다.
1916년 박장성(朴將星)과 결혼하여 이듬해에 장남 남기(南基, 법명 昌基)를 낳고, 1920년에 차남 동기(東基)를 낳았으나, 1922년에 부군이 별세했다. 1924년(원기9) 교단 창립총회를 마친 다음 익산총부 건설을 시작하면서 서울교화가 개척되었는데, 10월 26일 상경한 소태산을 이공주는 모친인 민자연화ㆍ언니 이성각ㆍ조카 김영신과 함께 창신동에서 배알하고, 박공명선(朴孔明善)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1927년(원기12) 5월에 교단최초의 수양교과서 《수양연구요론》(소태산 술)을 편집ㆍ출판했으며, 영산 방언공사에 따른 부채를 탕감했다.
이듬해 창립 제1대 제1회 총회에서 공부계 특신부, 사업계 정2등의 유공인에 해당했다. 1930년(원기15) 4월 민자연화의 추천으로 출가하여 서울교당 교무로 발령받고, 같은 달 26일 임시 여자수위단 조직과 함께 중앙단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5월 1일부터 9일까지 이동진화 등과 함께 소태산을 배종하여 금강산을 탐승하고, ‘세계적 명산 금강산 탐승기’(《월말통신》 제32호)를 발표하여 당시 수필한 법문 등을 전했다. 1932년(원기17) 5월, 사재를 털어 서울교당 부지를 마련하여 신축하고, 7월 장남 박창기를 데리고 중앙총부에 와서 전무출신 시켰다.
1934년(원기19) 연구ㆍ통신부장에 임명되어 기관지 《회보》 편집을 담당하여 전후 7년간 진력했다. 1940년(원기25) 송도성ㆍ서대원 등과 함께 《정전》 편수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교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원기28) 5월 16일 소태산의 시질(示疾)에서 6월 1일 열반 및 상ㆍ장례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서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 총부교감에 임명되었고, ‘구타원’ 법호를 받았다. 1950년(원기35) 제1대 성업봉찬회장에 임명되어 1953년(원기38)에 대회를 마치도록까지 각종사업을 전개했다. 이해에 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원기42)에 대봉도 법훈장을 수증하고, 1962년(원기47)에 서울사무소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원기51)에 감찰원장, 1971년(원기56)에 서울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원기71) 12월 교단창립 제2대 및 대종사탄생100주년 성업봉찬회의 결성과 함께 회장에 임명되었고,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을 자비로 편집ㆍ출간했다. 1988년(원기73)에 종사 법훈장을 수증하고, 만년에 총부수도원과 서울수도원을 내왕하면서 서울보화당한의원 등의 경영을 이끌다가 1991년(원기76) 1월 2일에 열반했다. 세수는 96세, 법랍은 61년으로, 공부성적은 종사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이었다.
업적
이공주는 학교교육이 처음 시행되던 근대의 격변기에 신구지식과 함께 지도력을 겸비한 여성으로서 소태산을 배알하고 돈독한 신심을 바쳤다. 특히 갖추어진 재력가로서 공심과 공부심을 발휘함으로써 원불교의 창립기에 있어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출가와 더불어 교단요직에 임하여 100세에 가까운 생애를 살면서 교단발전의 현장을 지킨 인물이다. 따라서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성, 그리고 갖추어진 경제력에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을 갖추어 공부계와 사업계를 가리지 않고 교단의 대소사에 그의 역할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하겠지만, 두드러진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소태산의 법문수필이다. 그의 법문수필은 1927년(원기12) 5월, 기관지인 《월말통신》 창간호의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이 비롯이다. 이는 오늘의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이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 행한 ‘최초법어’ 중의 하나로 《정전》에 수록되었다. 이후 그는 소태산이 준 별호 ‘법낭’에 걸맞게 많은 법문을 듣고 기록하고 발표했다. ‘좌선에 대한 법문’(《회보》 제15호), ‘돈 버는 방식’(동18), ‘사은사요의 필요성’(동26) 등은 교리체계로 《정전》에 편성되고, ‘나의 가르침은 인도상 요법이 주체이다’(동24),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동33) 등은 교리의 활용법으로 《대종경》에 채록되었다.
② 경전ㆍ교서 및 기관지 등 서적의 발간이다. 1927년의 《수양연구요론》과 1931년(원기16)의 《보경 육대요령》 발간을 주도한 것이 경전ㆍ교서라면, 1931년의 《통치조단규약》과 1933년(원기18)의 《회보》는 법전ㆍ기관지의 발간이다. 1940년(원기25) 《정전》 편수위원으로 참여한 것처럼, 이후 교서의 편정과 발간에 직접 참여하며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③ 초창기 교단의 경제적 토대마련과 기관ㆍ시설의 건립ㆍ후원이다. 1919년(원기4)에 이룬 영산방언답에 소출이 충분치 않음에 따라 누적된 부채를 1928년(원기13)의 1회 결산 전에 탕감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의 기관ㆍ교당ㆍ시설 등에 그의 손이 두루 미쳤다. 수도원ㆍ중앙훈련원 등의 중앙총부 기관ㆍ시설, 서울교당ㆍ서울회관ㆍ서울수도원ㆍ서울보화당 등의 서울 시관ㆍ시설, 삼동훈련원ㆍ제주국제훈련원ㆍ소남훈련원 등의 훈련기관에 대해 설립ㆍ운영ㆍ재정지원 등의 여러 방법으로 참여하고 후원한 것이 그 예이다.
④ 교단의 제도 정착기에 있어서 교단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도력을 발휘한 점이다. 초창기 여성교역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수위단원ㆍ성업봉찬회장ㆍ감찰원장ㆍ수도원장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재를 육성하고, 교단의 역사자료를 수집ㆍ정리하며 지도자의 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저술과 사상
이공주는 글을 해독한 이후 일생을 기록과 함께 했다. 특히 1909년 5월 14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일생 동안 계속된 데다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신의 생애는 물론 교단사의 정리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 그의 저술은 소태산의 법문수필에서부터 시ㆍ논설ㆍ역사기록 등 다양하며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고본(手稿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저술은 교단적인 역사물에 위의 《원불교 제일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1986)ㆍ《원불교연혁》(1953) 등이 있고, 자신의 문집에 《한 마음 한 길로》ㆍ《금강산의 주인》ㆍ《세계가 함께 보는 구슬》(1984), 요절한 장남 박창기(山朴昌基, 1917~1950)의 문집인 《묵산정사문집》(1985)이 있다.
구타원종사기념사업회에서는 일기장과 교단사 관련자료를 묶어 《구타원이공주종사 소장 원불교교단사 자료집성(九陀圓李共珠宗師所藏圓佛敎敎團史資料集成)》 전8권(2005)을 영인발행하고, 사진첩 《구타원 이공주종사》 2권(2006), 그리고 법문수필집으로 《일원상을 모본하라》ㆍ《인생과 수양》(2007), 열반관련 자료와 후인들의 회고담을 모아 추모문집으로 《새 회상 도덕박사 세계의 큰스승》(2007)을 발행했다. 원불교 초창기 교단사와 함께 전개된 그의 사상은 원불교 교리를 믿고 실천한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의 결과이며, 이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새 회상과 주세불관이다. 소태산을 만나 주세불로 모시고 새 회상의 건설에 참여하여 교리ㆍ제도의 체계화에 앞장서 오면서 교서편정ㆍ역사정리ㆍ성가작사 등을 통해 그 사상을 실천하고, 그 법통을 이어 역대 종법사에 대한 사제의 도리를 다했다.
둘째, 철저한 역사ㆍ문화의식의 소유자였다.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사료정리ㆍ유물수집ㆍ계몽의식고취 등에 모범을 보였다. 교단의 기관ㆍ인물에 대한 서적ㆍ역사ㆍ사진 등의 자료는 상당한 부분이 그를 통해 전승되었다.
셋째, 인재육성에 매진한 열린 교육관의 소유자였다. 바른 정신과 자질이 확인되면 인재로 길러 적재적소에서 역할할 수 있도록 직접지도와 함께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베풀었다. 교단의 지도자로서 열린 교육관을 가짐으로서 학식과 능력을 기르는 가풍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넷째, 탁월한 공익주의자였다. 자신은 철저한 근검주의를 실천하면서도 교단 전체를 살피면서 공익에 필요한 일이면 큰 금액을 주저 없이 제공했다.
따라서 교단의 대소사는 항상 그와 상의가 되고, 그렇게 하여 호법주ㆍ공덕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아들 박창기가 전무출신 하였다.〈梁賢秀〉
구타원 이공주 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