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로 얼룩진 동아·조선의 행적③ 동아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상
1936년 여름 나치 독일에서 제13회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에 모인 관중 12만여 명은 마라톤의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틀러의 ‘아리아인종 우월주의’에 세뇌당한 독일인들은 자기 나라 선수가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등으로 달려온 사람은 아리아인종이 아니라 동양의 조선족 손기정이었다. 당시 24세이던 그는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는데 ‘식민지 백성’이라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있었다.
손기정이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반도는 감격의 환호성으로 떠나갈듯 했다. 당시 가장 진보적이고 민중 지향적이던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는 손기정이 시상대에 올라선 모습을 8월 13일자 신문에 실었다. 월계수를 두 손으로 받쳐 든 그의 가슴에는 당연히 일장기가 선명하게 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 사진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일장기는 사라지고 밋밋한 사각형만 드러나 있었다. 총독부 검열관계자는 조선중앙일보의 인쇄시설이 나빠서 그런 사진이 나온 것으로 보고 검열에서 통과시켰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그 신문 기자들의 과감한 ‘거사’였다.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지 12일 뒤인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그의 사진에서도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다. 동아일보사 체육부 기자이던 이길용이 사회부장 현진건 등과 의논한 끝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지면에 실었던 것이다. 그 사진은 총독부 검열에 걸려버렸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중앙일보가 맨 먼저 실었던 ‘일장기 말소 사진’이 새삼 문제가 되었다. 사장 여운형이 책임을 지겠다면서 사퇴했으나 신문은 9월 5일 무기정간을 당했다. 조선 민중의 사랑을 받던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무기정간에서 풀려났지만 재정난이 심한 데다 발행 허가의 효력이 상실되어 11월 5일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때문에 무기정간 처분을 당해 언론사상 최장기간인 279일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다. 기자 8명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해서 주필 김준연과 편집국장 설의식,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기자 이길용 등 13명이 사직하거나 언론계를 떠났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분명히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사주와 간부들은 그 일이 터지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날 길을 찾아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동아일보사> 제1권 364쪽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전(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김성수)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 신문사에 도착하니 밖에는 수많은 정사복 경관들이 지켜 섰고 사내는 마치 독립 만세를 부르고 난 것 같은 흥분에 싸여 있었다.”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면서 기자 이길용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민족지를 자처하던 경영진에게 이 사건은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는 몰지각한 행위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실제 몰지각한 기자의 행위였다 하더라도 그 보도에 대한 책임은 공적으로, 대외적으로 편집국장, 사장 등이 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며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사장 송진우는 조속한 정간 해제 요청을 위해 미나미 총독 및 조선총독부 고관을 지낸 일본인들의 모임인 ‘조선중앙협회’의 줄을 찾아 동경에까지 손을 쓰는 과정에서 ‘사(社)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한 기자의 독단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조사에 의해 분명해진 일 가지고 정간을 장기간 끌고 가는 총독부 처사에는 명분이 없다’고 호소했다.” (최민지, ‘한말-일제하 민족과 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80~81쪽)
무기정간에서 풀리던 날인 1937년 6월 2일자 동아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서 조선 통치의 익찬(翼贊)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2012년 현재까지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신문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한 대표적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를 내세운다.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젊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했다는 일은 덮어둔 채 동아일보사 자체가 주도한 ‘민족사적 사건’이라고 자랑한다.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 자유언론 실천운동에 앞장서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13명을 강제 해직한 뒤에도 ‘일장기 말소’ 때처럼 회사 자체가 그 운동을 주도했다는 식으로 독자들과 국민을 속여 왔다. 동아일보는 그때부터 37년 동안이나 “1974년의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과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은 동아일보사의 역사적 업적이자 자랑”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10월 21일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박정희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폭력배들을 동원해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추방했음을 인정한다는 요지의 결정을 내렸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