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과 20080629 김용한
우리학교 역사학과는 답사를 참 많이 다녀온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있는 정기답사와 여름·겨울 방학 때 다녀오는 기획답사 외에도 답사 집행부, 학회, 소모임에서 따로 준비한 답사를 다녀오거나 이번 답사처럼 수업의 일환으로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우리학교 역사학과 학생이라면 일 년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답사를 다녀오게 된다. 2박~5박 정도를 보내는 정기답사와 기획답사는 답사에 주어진 시간이 길고 참여인원도 많기 때문에 버스를 빌리고 숙소를 잡아 먼 곳으로 답사를 떠나지만(이번 춘계답사의 경우 우리학교 역사학과 50주년을 기념해 중국 산둥반도 일대를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일일답사의 경우 시간적인 제약으로 대개 서울 근교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일답사는 버스를 빌려 충청남도 논산과 강경, 전라북도 익산을 다녀왔으니 다른 때와는 다른 특별한 답사라고 할 수 있다. 답사를 떠난 때는 지난 11월 22일 아침이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든 시기인데다 이른 아침이어서 무척 추웠다. 30명도 넘는 인원이 모였는데 ‘세계사 속의 한국’수업을 함께 하는 수강생들과 교수님 외에도 동작문화원에서 수업을 받으시는 어머님들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논산에 있는 ‘윤증 고택(명재 고택)’이었다. 고택 앞에는 파평 윤씨 집안의 열녀들을 기리기 위해 그 이름과 행적을 적어 세운 열녀비가 있었다. 열녀비 앞에 서서 교수님께서 해주시는 설명을 들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원군을 파병한 뒤 국력이 쇠약해져 멸망했던 명나라의 황제에 대한 제사를 조선이 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습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파평 윤씨 열녀비 뒤쪽으로 윤증 고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택 옆에는 또다른 건물 몇 채가 서있었는데 명륜당(明倫堂)이라고 적힌 현판을 내건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향교였다. 고택 앞뜰에는 물이 다 빠져나가있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주변으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이제 겨울이 다 되었구나 하는 기분을 들게 했다. 고택 대문 앞에 다다른 직후, 1999년부터 10년 가까이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는 관리자분의 안내에 따라 고택 내부로 들어갔다.
윤증 고택은 집안 곳곳에 조선 후기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 많이 있다. 고택 대문부터 각도를 계산하고 문틀 밑에 공간을 두어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고택 안쪽은 내외벽을 통해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해 놓았다. 벽으로 둘러싸여 다소 폐쇄적이었으나 고택 중심에 널찍한 마루가 자리 잡고 있고 집안 여기저기에 창문이 뚫려 있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특히 창문들은 문을 열어두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경치를 비추었다. 창문을 내는 데까지 미적 감각을 고려했던 조상들의 세심함이라 할 수 있다. 사랑채는 고택 내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인데 안쪽은 손님을 맞이하거나 교육을 할 수 있는 시설까지 되어 있다.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의 형태를 동시에 가진 특이한 문도 있다. 윤증 고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베르누이의 정리’가 적용된 길이었다. 베르누이의 정리는 유체가 좁은 통로를 흐를 때 속도와 압력이 증가하고, 넓은 통로를 흐를 때 속도와 압력이 낮아지는 원리이다. 고택 내 서쪽에 있는 이 길은 남쪽 부분이 넓고 북쪽 부분이 좁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좁아지는 길을 거쳐 속도가 빨라지면서 차가워진다고 하는데 이 원리를 이용해 길 끝부분에 찬광을 만들어놓았다. 통풍이 잘 되고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들을 넣어두는 곳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집안 곳곳에 과학적인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현대의 콘크리트로 된 건물 구조로는 재현해내기 힘든 것들이다.
윤증 고택을 뒤로 하고 간 곳은 계룡산 자락에 있는 한 식당이었다. 고풍스러운 한옥 구조로 되어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반찬들의 맛이 일품이었다. 음식들은 모두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았고 나물반찬들은 계룡산에서 직접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식후에 나온 장미차는 처음 마셔본 것이었는데 평소 즐겨마시던 녹차나 유자차와는 그 맛이 사뭇 달랐다. 답사는 그 지역의 문화재들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특산물로 된 음식들을 먹어야 제대로 한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파평 윤씨 문중의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다는 ‘종학당’으로 향했다. 종학당 입구에는 소련의 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에 방문했던 모양이다. 종학당은 중등수준의 교육을 행할 수 있는 시설부터 대학수준의 교육을 행할 수 있는 시설과 기숙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종학당 위쪽에는 정수루라는 누각도 있었는데 그곳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파평 윤씨 선비들은 이러한 누각 위에 앉아 앞쪽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을 것이다.
종학당을 떠나 강경에 있는 젓갈 시장을 들른 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익산에 위치한 ‘나바위 성당’이었다. 이곳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알려진 김대건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다다른 곳이라 한다. 나바위 성당은 서양의 고딕 성당 건축 양식과 우리나라 전통의 한옥 건축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건축되었다. 외부의 문화와 전통 문화를 절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성당 내부 또한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형형색색의 한지로 유리를 장식해 놓았는데 하나하나 성경의 구절을 표현해 놓은 것들이었다. 내부 벽면 위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을 박혀 처형되는 고난의 장면이 14점의 그림을 통해 표현되었다. 이처럼 성당 내부는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비록 나 자신이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분위기였다. 전파 지역의 문화를 수용하는 가톨릭 문화는 이처럼 우리의 옛 문화와 결합하여 최고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옛 것이 소중하다.’,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곤 한다. 생활 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고 과학적으로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를 본받자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현실은 이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도시에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지어진 고층 건물들이 가득히 매우고 있는 통에 조상들이 추구했던 미적 감각과 자연적인 요소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생활 방식 또한 우리 조상들의 방식보다는 서양에서 들어온 방식에 자리를 내주었다. 옛 것과의 조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무분별하게 서구식 생활을 수용하고 있다. 서구식 생활이 우리 조상들의 생활 방식보다 더 과학적이고 편리한 것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결코 비(非)과학적으로 생활하지 않았다. 윤증 고택 곳곳에서 드러난 모습과 같이 매우 과학적인 건축 기술을 토대로 집을 지었으며 장 담그는 기술이나 여름·겨울을 지내는 방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생활 방식 또한 과학적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자연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여유로움까지 갖추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옛 것을 돌이켜보고 좋은 것은 보전하거나 타문화와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바위 성당의 건축 양식은 우리의 옛것과 서양의 것이 결합하여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조건 타 문화를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로움과 지혜를 갖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