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의 토대를 마련한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송월재(松月齊) 문집의 발문(跋文)에서 그의 학문을 두고 '함우지정(函牛之鼎)에 손가락 끝이나 한번 적시는 정도'로 비유했다.
다시말해 송월재의 학문을 한 마리의 소를 넣을 수 있는 큰솥이라고 하면 자기 학문의 깊이는 그저 그 큰 솥에 손가락 끝을 약간 적시는 정도로 여긴 것이다. 이익과 같은 대학자가 송월재의 학문을 이렇게 여겼으니 그의 학문이 얼마나 심원한지를 뜻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월재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의 아호다. 이시선의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조 태종의 7남인 온녕군(溫寧君)의 8세손으로 부친은 추만공(秋巒公) 이영기(李榮基)이다.
송월재는 진흙 수렁에서의 명리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바가 못된다는 부친의 가르침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전국을 두루 탐방하고 돌아와 향리에 송월재라는 서재를 짓고는 두문불출 한 채 독서와 학문탐구에 전념했다.
송월재는 학문을 하되 육경(六經), 사서(四書)와 성리학을 최우선으로 하고 한편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를 섭렵하여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그는 당시 외면받던 노장(老壯),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통달해 일가견을 이뤘으며, 병서와 지리는 물론 심지어 점법에 관한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
이익의 묘지명에 "경서는 물론 고금의 서에 박통(博通)하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금의 서적과 학문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춘 송월재는 남달리 활발한 저작 활동을 보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널리 알려진 저술로는 <송월재집(松月齋集)>을 비롯해 <사보략(史補略> <역대사선(歷代史選)> <경서훈해(經書訓解> <서전참평(書傳參評)> <시전남과(詩傳濫課)> <전의병지(傳義騈枝)> 등과 손수 편집한 문집 <하화편(荷華編)>이 있다.
그중에서 중국의 역사를 상고시대부터 명나라까지 서술한 <역대사선>은 모두 70권으로 정작 본고장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규모면에서 대작으로 꼽힌다. 이와함께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역을 한글로 옮긴 주역언해본(周易諺解本)도 저술했다.
올초 국역으로 발간된 <하화편>은 송월재의 해박한 지식을 폭넓게 확인할 수 있는 저술로 내(內)ㆍ외(外)ㆍ잡편(雜編)으로 된 것을 국역에서는 상(上)ㆍ하(下)권으로 나누고 별책으로 하화편원문과 참고되는 사진을 모아 실었다.
하화편 상권은 <송월재집> 권1~3을, 하권은 권4~7권과 보유문을 담았다. 이중 '권1'은 사서오경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적은 글과 자기 저술의 발문인 '주역전의변지발(周易傳 義駢枝跋)'등 11편의 글이 수록돼 있다.
'권2'는 천명ㆍ우주ㆍ인간을 논한 글과 우리 고대사와 관련 있는 기자에 대한 '기자찬(箕子贊)'등의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권3'은 '음덕송(陰德頌)'과 '농훈(農訓)'등 일반 문집의 잡저에 해당되는 내용들과 자전의 기록인 '송월자전(松月子傳)'등 10편의 글이 수록돼 있다.
'권5'는 '오악지(五嶽志)'등 중국의 산천과 우리나라의 금강산ㆍ속리산의 기행문과 기문(記文)이, '권6'에는 시(詩)ㆍ편지(書)ㆍ제문(祭文)의 글이 실려 있다.
이번 하화편 국역 발간은 송월재 문집과 그 내용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점과 함께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문중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제작ㆍ발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화편 발간을 주도한 전주이씨온녕군파종회 이광재 회장(송월재문집발간추진위원장)은 "책은 말이 없으나 읽는 이의 눈빛과 마음에 동화되어 소리 없이 화음을 내는 것"이라며 "지은이보다도, 만든이보다도 더 오래 남을 참으로 보배로운 책으로서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겨 보고자 한다"고 출간의 의미를 밝혔다.
송월재가 고서와 선인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점도 후학에 적잖은 교훈을 시사한다. 가령 주역(周易)에서 공자는 "역에 태극이 있다"고 하고, 주자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 하였는데 송월재는 '역유태극'의 주안점인 태극을 강조하되 도기불리(道器不離)를 전제로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태극의 나타냄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공자가 '논어'(자한편)에서 말한 '사무(四無)'를 송월재는 인(仁)과 예(禮)를 합친 것으로 보았다.
송월재의 방대한 저술에 대한 재평가와 국역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하화편 국역 발간은 한국학 진흥에 일조하는 것은 물론 정서가 메마른 이 시대의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일깨워주고, 사라져가는 선비정신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