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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계 人物 小史 2019년 2월 18일. 강우식, 최동수 작성.
■■■ 아래 내용은 대략 2000년까지 기타계에서 활동하던 분들 중에 이미 여러분의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머지않아 사라질 분들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현재 활동 중인 회장단뿐만 아니라 저명한 연주가와 제작가들도 거의 제외되어 있습니다.
어언 80세가 되어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그동안 듣고 보았던 얘기들을 간추렸으나, 오류나 누락된 사례도 있을 터이니, 원로들과 현역 여러분께서 수정 내지 보완할 사항이 있으면 주저 마시고 아래 주소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최동수> david6070@daum.net
가칭 [기타계 인물사]는 현역들이 은퇴한 후에나 완성되리라 예상됩니다.
[차례]
1. 여명기黎明期 ( ∼ 1945 ∼ 1959 )
가) 최초의 기타연주회
나) 기타 연주회의 태동胎動
2. 초창기初創期(1959년 ∼ 1974년)
가). 매스 미디어
나). 이어지는 기타 연주회
다). 기타 학원들
라). 기타 콩쿨 대회
마). 음악협회에 가입되다
바). 기타 연주가
사). 기타 제작가
3. 개화기開化期 (1975년 ∼ 2000년)
가). 산업화와 대량생산
나). 외국 연주가들의 내한
다). 국내 기타인
라). 해외 기타인
4. 발전기發展期(2000년 ∼ 현재까지)
가). 지도자 육성
[부록] 한국기타협회 역대 회장단(2019년 1월 20일 현재)
1. 여명기黎明期 (...1945 ∼ 1959 )
가). 최초의 기타 연주회
우리나라 최초의 기타 연주회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므로써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0년에 서울 부민관(현 세종로 덕수궁 옆 서울시의원 회관)에서였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타연주자 정세원과 김인걸의 연주회였다.
정세원鄭世源 (1926? 재 북한, 작고)
그는 재령갑부의 자제로 일본 유학시절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첼로를 닮은 미야모도 긴빠찌宮本金八 작 비올론 모델이 나왔을 때 아무도 그 기타의 뚝심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는 일반 기타 형태가 아니고 바이올린처럼 스프루스 앞판과 메이플 뒤판이 곡형이고, 안쪽에 고이는 지주(魂柱)가 있었다.
기타수리로 세고비아의 찬사까지 받은 제작가 미야모도는 그러나 허탈해 있었다.
이때 유학생 정세원이 나타나 그 기타로 타레가의 호타, 아리랑 변주곡, 등을 연주하자 방중이 모두 놀랐다. 미야모도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기타를 증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세원은 굳이 사양하고 거금을 치루었다. 더욱 감격한 미야모도는 후에 [평화平和]호라 이름 지은 또 한 대의 명품을 그에게 기증하였다 - 평화호는 침략으로 고생하는 유학생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 악기에는 “정세원을 위해 이 기타를 제작하였다”고 쓰여 있다. 평화호는 정세원이 소장하고 다른 한 대는 김인걸을 거처서 이성룡에게 넘겨졌다.
그는 부민관에서 2회나 연주회를 하면서 자신의 자작곡인 ‘아리랑 환상곡’도 연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비제의 가곡 ‘진주잡이’도 트레몰로 곡으로 편곡하였다는데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일본의 [Asian Evening]의 라디오 프로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그는 상해에 체류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서 명망 있는 연주가로 활동 했다고 한다. 연세대 고 황병기 교수와 경희대 고 김동진 교수가 모두 동기생들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남포 연주 후 1963년경 병석에 누워 사후에 소장했던 기타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그 후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석근, 임창년, 박종문, 황병갑 등이 그의 제자였다.
이종석李鍾碩 (1917 - 2014)
5년 전까지도 기타협회의 고문을 역임한 기타계 최고령(97세)이셨다. 도쿄의 미조부찌 고고로溝淵浩五郞에게 수학하였다(미조부찌 기타 교본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채택 사용되었으며, 타레가 연주법과 편곡은 매우 아름답다). 그가 소장했던 100엔의 기타는 엄청난 큰 액수였다. 당시 일본인들도 100엔짜리 지폐는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었다. 퇴계로에 살다 6.25 전쟁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기타는 분실되고 없었다. 후에 광주로 옮겨 미공사美工社를 경영하다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다처서 연주는 못하게 되었다. 이응주와 합작하여 기타협회의 엠블렘을 공동 디자인하였다. 유명한 연주가 안춘열을 배출하여 쏘르의 앙카르주망 2중주를 최초로 공연했다. 후에는 전남대학 기타반을 지도하여 여려 차례 전국 합주와 콩쿨 우승을 시킨 지도자이다. 김태수, 양영근, 변보경 등의 우수한 제자들을 낳게 했다.
김인걸金仁杰(1921?-1978?)
우리나라 최초로 기타를 배웠고 초대 한국기타협회장을 맡았으며 한국 배우 전문학원장으로 우리나라 연극영화 배우를 양성 배출시킨 분이다. 그는 평양이 고향이고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오구라 슌小倉俊을 사사했다. 사진은 외국인들이 끼여 있어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1973년경에 공개했다 - 당시는 냉전시대여서 이북에 있는 사람의 사진 공개를 꺼려했었다. 그는 비제의 진주 잡이 같은 서정적인 곡을 좋아했고 그날은 기타 2중주도 선보였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명동에 기타학원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으나 해방 후의 혼란기,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상태라 경영이 어려워 한국 배우 전문학원을 충무로 영화가映畵街에 차렸다. 유현목 감독을 강사로 좋아했고 신성일 엄앵란 등의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기타인과의 교류를 즐겼고 항상 친절한 격려를 아끼지 아니했다.
김인걸은 당시 기타인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엄상옥 공방도 자주 찾아가 후배들의 연주를 듣고 즐겼다. 그는 평생 손톱을 길러 자신이 기타리스트임을 잊지 않았다. 연주회 때는 무대 뒤에까지 와서 조언을 했고 때로는 관객석의 의자 정리까지도 서슴없이 하면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겸손함이 몸에 밴 분이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제2악장을 암보하여 연주할 수 있다면서 즐거워하였다.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이다’라고 말한 베토벤의 말을 자주 인용했으며, 언론잡지사 기자들과 늘 가까이 했으며 예술인, 문인들과도 친했다.
호방한 성격의 정세원과는 달리 김인걸은 매우 예의바르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그의 소장 악기인 스페인제 ‘발렌시아’를 친구가 2개월 기한으로 빌려간 후에, 제3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차마 반환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주말 등산을 즐겼는데 환갑을 지나서는 길에 자란 풀도 함부로 밟지 않고 벌레도 생명이 있으므로 잡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1970년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가 양성한 배우들도 눈치 채지 못하게 위암으로 생을 마쳤으며 캐나다로 이민간 자식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 기타 연주회의 태동胎動
1959년 11월 29일 프란시스코 타레가 탄신 107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우측 당시 수도육군병원 강당에서 최초로 합동 기타연주회가 열렸다, 이는 건국 후 최초의 기타연주회였다. 추운 날씨였으나 처음으로 기타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들의 환호는 대단하였다. 원형계단식으로 된 관객석은 높은 곳에서 듣게 되었으므로 소리가 잘 울렸다. 청중들 중에는 언론기자, 제작가, 악기점 관계자들도 많이 참석하여 관심을 보였다. 출연자는 김인걸, 황병갑, 하희영, 박종문, 한세남, 강우식 등이었으며 독주곡 이중주곡 외에 4중주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춤 등이 연주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회를 대형극장에서 하지 않았느냐고 의아해 한 사람들도 많았다(그 후 을지로 입구 원각사에서 공연계획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무산되었다).
1960년 여름 하희영, 한세남, 강우식과 박종문으로 구성된 4중주단은 용산에 있는 미군방송 AFKN-TV에 출연하였다. 방송효과는 즉시 나타나서 미군 장교클럽에서도 초청이 왔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KBS 제1스튜디오에서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기타 4중주를 하였다. 이런 합주공연이야말로 기타음악이 활성화 되는데 일조 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강우식은 춘천 육군병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춘천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춘천 도립문화원에서 매년 호반앙상블 연주회를 개최한바, 강우식, 장수익, 한광석, 이낙경, 박철근 등이 주요 멤버였다.
이성용李晟用 (1928 - 작고)
그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인 1940년 정세원의 부민관 연주회 후에 문하생을 모집하므로 서대문 인근 정세원 댁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 2층에서 정세원과 조교 김인걸을 사사하였다. 그는 ‘1937년작 미야모도 긴빠찌宮本金八’ 기타를 최후까지 소장하였다.
그는 많은 기타 악보를 소장하여 기타인들에게 제공했으며, 성균관대학 기타반을 지도하는 한편 이응주, 하희영과 합주운동을 일으켰다. 본업은 광산업鑛産業이었으나 미국 국제원조처, 애견협회이사, 야인野人 임창년의 후견인, 음악인과의 교류, 법원 출입 등 다방면에 달인이었다. 이희진, 한광석, 박석환 및 성균관 대학의 성음회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임창년林昌年 (1926? - 작고)
기교가 뛰어나고 섬세한 음색과 음악의 아름다운 표현력은 듣는 이를 매혹시켰다. ‘한국의 세고비아’라는 칭송을 받기도 한 그의 연주는 완벽해서 미스 터치를 볼 수 없었다. 우교순, 홍종극 등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했고 엄태흥 조무광 등이 그를 추종했다. 그는 아포얀도 주법으로 탄현하되, 손가락 끝이 다시 U 자로 되돌아오면서 알 아이레 음색을 동시에 나도록 찍어 누르는 연주법은 그만의 수행으로 익혀서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김인걸 회장도 그의 연주를 높이 평가했고 ‘보리피리’ 작곡가 조념 교수는 기타곡을 헌정했었다. 그의 연주기법은 비올론 기타의 소리를 효과적으로 내도록 하는 훈련에서 나온 결과로 추측되며 악보의 철저한 분석 등 그의 탐구정신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응주李応宙 (1926? - 작고)
제3,4,5대와 제11,12,13대 기타협회장을 장기간 역임한 분이다. 해방 후 인천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다 서울에서는 독립문 근처와 신촌에서 후배를 양성하였다. 이성용, 하희영과 중주 활동 및 후에 서울대 화현회, 이화여의대 기타반을 지도했다. 그는 타고난 예술가요 한량이었다. 그의 ‘토레스를 찾아서‘라는 전국 방랑기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고 문필文筆도 뛰어나서 금수현(지휘자 금난새의 부친)이 운영하던 월간음악지의 편집을 돕기도 했었다.
박승천朴勝泉 (1927? 작고)
일본에 유학하여 오구라 슌小倉俊에게 수학하였고 일본의 기타인들과 교류하였다.그는 불광동에 악기점과 기타학원을 차리고 제자양성에 힘썼다, 한때는 서울 역전에 맥주홀을 열어 기타 연주 스테이지도 시도했다. 그의 딸 박혜순 양은 파리에 유학하여 사다노프스키 밑에서 수학하고 일본 오사카와 서울에서의 연주회도 가졌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기타교수를 하고 있다.
하희영河喜榮 (1927? - 작고)
김인걸을 스승으로 모셨고 서울 시청 공보계장으로 재직하면서 공무와 기타협회 행정을 도맡아 했었다. 스페인 세레나데와 알함브라의 회상이 일품이었고 73년 합동연주회 때는 현악사중주들과 비발디협주곡을 최초로 연주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좋아 엄태흥 등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이응주, 이성용 등과 합주 팀을 구성하고 임창년, 제작의 엄상옥, 이완근 등과도 교류하였다.
배영식裵永植 (1927 - 작고)
부산을 거점으로 많은 음악활동의 공로로 부산시 문화상을 탔다. 일본의 국제기타행사에 참여하였고 베렌트와도 처음 사귀었다. 그가 1962년 국립극장에서 연주할 때 사용한 음향반사판(Horizondo)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용한 유일한 시도였다. 많은 기타교본과, 걸출한 제자(김금헌, 조재경) 등을 배출하였고 아들 배학수도 뛰어난 연주가이고 제작가이다.
이표李杓 (1927 -작고?)
파란만장한 청년시절의 고난 탓인지 방랑객放浪客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사사끼, 고가 마사오 선생께 4년간 수학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해서는 함경도 고향에 돌아가 반공유격대원으로 투쟁하다 붙잡혀서 우즈베키스탄의 수용소에 5년이나 갇혀 있었다. 수용소에서 얇은 합판 쪼가리를 주워서 기타를 만들어 퉁기면 수용소의 로스케 관리들도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이곤 했다. 덕분에 특별대우를 받게 되자 어느 날 용케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월남하여 서울에 자리 잡았다. 그는 후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성남시 독립 유공자 아파트로 이주하였다.
그는 홍익대와 신촌을 거점으로 제자 양성과 기타제작도 하였다. 당시에는 가요 기타도 가르첬으므로 다녀간 제자가 2천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중 클래식을 배운 제자만도 2백명 가량 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박종문朴鍾文 (1927 - ?)
외항선 선원 출신으로 정세원을 따라 다니면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등을 즐겼고 이득춘 등 제자를 두고 앙상블에도 자주 참여했다.
황병갑黃炳甲 (1928?, 미국 뉴욕 이민, 작고)
그는 기타뿐 아니라 콘트라베이스의 선구자였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보낸 분이다. 벤조 마림바 등 만능 연주자였다. 충무로의 무학성 카바레에 정기 출연했는데 그가 합류하면 앙상블이 저절로 흥이 난다는 정평이 있었다. KBS 교향악단과 최초로 김희갑 편곡의 타레가의 카프리치오 아라베 협주를 하였으며 시노폴리의 스페인 세레나데도 연주했다. 당시 인기 있는 라디오 프로인 수요일 밤의 향연에 계속 출연했고 용산에 있는 미군의 당시 유일했던 AFKN TV 방송프로의 핵심 연주 멤버였다. 미국 뉴욕에 이주하여 카프테리아에서 연주생활을 하였다고 들린다.
한세남韓世男 (1929 - 작고)
필자의 기억에 연습량이 가장 많았던 분이다. 함흥에서 교사를 하다 형제가 월남했는데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기타음악에 관한 이론서적을 많이 수집하여 연구를 쌓았다. 박자 관념이 철저하고 합주, 합창지도에 능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고 동양 FM 방송, 국립공보관 문화센터 기독교 방송국 후원으로 기타반을 개설하여 수백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961년에는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강우식과 함께 2주 간격으로 7회에 걸친 ‘기타음악의 밤’을 개최하였다. 월남越南 참전 시절에는 UN 연합사 음악회에 한국군 대표로 기타를 연주한 적도 있다. 예편 후에는 묵호 고등학교에서 기타 전문반을 양성하다가 과로로 뇌출혈을 일으켰다. 병석에서도 해외교류 등 열의가 대단했다.
안춘열安春烈(1930-1972?)
이종석의 제자로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6.25 전쟁시 8백리 피난길을 기타를 자전거에 매다는 등 생명을 걸고 기타를 놓지 않았다. 홍난파의 조카 홍지유와도 교류하며 많은 연주활동과 방송활동을 하였다. 그는 단파방송을 청취하며 외국의 연주 방송을 참고하여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였다고 한다. 유달리 기타에 정렬을 쏟으며 활동하던 그의 요절夭折은 아쉽기만 하다. 그가 기독교 방송에서 연주한 작품은 만돌린 합주를 포함해서 2시간이 넘는 자료가 남아있다.
강우식姜佑植(1932 - 현 기타협회 고문)
제6,7,8대 기타협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신경내과 박사로 군의관 재직 시 수도육군병원에 음악실을 개설하여 합주단 활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서 안춘렬에게 입문하였고, 미국에서는 소포클래스 파파스를 사사하였다. 60년 중반에 일본 음악가 고부네 고지러小船幸次郞의 기타화성학을 김명표와 공동번역 하였다.
지그프리트 베렌트의 내한 공연 시 열과 성을 다해 영접하는 등 국제교류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경희대 음대의 한성석 교수가 작곡한 야상곡을 초연한 적도 있다. 그는 세계적인 신품 명기의 수집가로 한때 30여대의 소장악기를 본 기억이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 중에는 이그나시오 플레타 1세가 있다. 그는 오디오 수집가로 일본의 오디오 연감에도 소장품이 소개된 적이 있다. 한편 그는 詩,書,畫에 뛰어난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의 9대손으로 백여 점에 달하는 표암의 유작 중 거의 절반을 소장하고 있다.
김용호金龍湖 (1933 - ?)
일본에 유학하여 작곡을 전공하고 제9,10대 기타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기타곡 뿐만 아니라 특히 불교예불찬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었다.
그 외에 일본 유학생으로 해방 후에 소식이 끊겼으나 나리다 도시오라는 일본명으로 방송계에서 활약한 성리진成利鎭, 이채진, 박옥규와 프랑스 유학시절에 기타를 익힌 박성종 신부 등이 있다.
2. 초창기初創期(1959년 ∼ 1974년)
기타협회가 결성되자 지금까지 개인 활동으로 합주, 제자 양성 등의 분산되었던 힘이 합쳐져서 기타계가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사회적인 호응도 빨리 왔다. 전후 복구와 산업사회로의 전환기를 맞아 직장 내에서의 복지사업으로 기타 동아리가 생겨났다. 대학가의 한일수교 반대 데모 등의 억제책에 대한 반응으로 대학가에도 기타 동아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 매스 미디어
KBS 방송은 당시 수요일 밤의 향연 같은 무게 있는 프로그램에 기타 합주를 자주 등장시켰다. 김희조 편곡 황병갑 독주와 KBS 교향악단의 협주로 타레가의 아라비아 카프리치오 시노폴리의 세레나데가 연주되었다.
문화방송은 기타합주 프로를 매주 가졌으며 뉴스나 토크 등의 사이에도 간혹 선을 보였다. 당시 유일한 TV 방송이었던 미군방송 AFKN에도 등장했다. 이어서 동양 FM의 기타강좌와 CBS의 수십명 규모의 강좌가 있었다. 한국일보 홀에서의 연주나 콩쿨 행사는 홍보효과도 컸다. 조선일보의 문화 기사나 경향신문의 베렌트 초청 등은 클래식 음악으로는 매우 드문 행사였다.
음악세계의 기사에도 취재되었고 70년대의 월간음악에는 매월 기타강좌와 부록으로 기타 악보의 발행도 있었다. 1969년에 한국기타협회는 [기타음악]지를 창간하였다.
언젠가 KBS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방송되었던 로드리고 협주곡(아랑페스 협주곡)이 훗날 여러 방송의 간주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일반인 중에도 거의 모르는 이가 없는 기타곡이 된다.
나). 이어지는 기타 연주회
1973년 서울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기타협회 합동발표회를 열었을 때, 하희영의 서울 현악 4중주와 Vivaldi Dm Guitar Concert는 백미였다.
한편 이로부터 제2세대들이 대두되어 눈부신 발전을 예고하였다. 당시 구성된 동아리는 응주 고전기타합주단(1968), 인하 고전기타회(1970), 서울공대 화현회(1971), 서울 여대, 성균관대, 한양대, 한국대학생 기타협회(1971) 등이 있었다.
리여석 기타 오케스트라
리여석 제24대 회장에 대한 소개는 생략했으나, 인터넷을 통해 세계적인 이목耳目을 끌고 있는 기타 오케스트라만큼은 설명해야겠다.
- 1970년 카르카시 고전기타 합주단 창단.
- 1980년 리여석 실내합주단.
- 1990년 리여석 기타 오케스트라로 재편성 되었다. 이는 정규 단원 30여명, 협력 단원 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동안 450여곡을 편곡하고 정기연주회 50 여회, 비정기 연주회 200 여회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며 KBS, MBC, TBC TV 등에 20여회 이상 고정 출연하고 있다.
1998년에 일본 오오이따 현에서 1개월 간 개최된 전 일본의 국가적인 행사인 국민 문화제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연주자로 초청되었다,
2000년경부터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유럽, 미국, 남미,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 제의를 받고 있다,
2001년에는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한국 최초로 국제 기타페스티벌을 개최하여 기타음악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2003년 중국 요녕성 기타학회 초청으로 인민 대극장에서 연주하였으며, 이후 심양음대에 기타과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용악기도 다양하여 소프라니노, 소프라노, 소프라노 쳄발로, 알토 쳄발로, 알토 기타, 프라임 쳄발로, 프라임 기타, 베이스 기타, 콘트라 베이스, 기타론 등 10개 종류 외에 때로는 차랑고도 동원되어 청중을 감동적인 화음의 세계로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음원은 2008년과 2018년에 CD가 발간되었다.
다) 기타 학원들
오랜 세월이 지나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나 서울의 김금헌(세기), 김용대(모짜르트),김정윤, 김지영(알함브라), 리진, 박승천(한국고전기타), 박영익(샤론), 박영일(성광), 백양수(문창), 이응주(엘리/흐루겔), 이충우, 이표, 정진덕, 허병훈, 황영애, 인천의 리여석, 이성진(인천고전기타), 춘천의 한광석, 충주의 김윤선, 대전의 고종부, 광주의 김태수, 양영근, 대구의 김영철, 제정민, 부산에 배영식 등이 기억된다.
라). 기타 콩쿨 대회
기타음악의 저변 확대와 신인 발굴에 필요한 콩쿨 대회는 계획당초부터 어려움이 컸다. 제1회 기타 콩쿨 때는 응모자가 드물어서 경연자를 찾아 참여시킬 때까지 임원들의 노력은 땀으로 얼룩졌다.
제 1회 기타 콩쿨 (1972년)
- 1등 : 조재경(여 22세)
유달리 명랑한 톤과 트레몰로가 아름다웠다. 후에 후진양성과 외국연주가들의 스폰서 사업, 국내 최초의 부부 2중주(오세춘/조재경)로 전국을 순회 연주하였고, 지금은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다.
- 2등 : 변성용(남 11세)
초등학교 5년의 어린나이에 모차르트-소르의 마술피리를 연주하여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소년부가 있었다면 단연 그가 1등감이었다. 그는 재능을 발휘하여 깁슨의 파이어 핑거보드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8군의 쇼 무대에 진출해서 클래식을 떠난 아쉬움이 있다.
- 3등 : 허병훈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서울대 강사 등을 거쳐 후진양성에 정진하고 있다. 한편 화가로도 등단하여 인사동 화랑에서 작품전시회를 격년으로 열고 있다
제2회. 기타콩쿨(1973년) : 김윤선, 박병학.
제3회. 기타콩쿨(1974년) : 제정민, 김홍천, 신응철.
제4회. 기타콩쿨(1975년) : 이순식, 배성학, 김윤중.
제5회. 기타콩쿨(1977년) : 이명근 배성학, 송형익, 신인근.
제6회. 기타콩쿨(1978년) : 이성우, 윤종태.
제7회. 기타콩쿨(1980년) : 장승호, 신춘승, 김해경.
제8회. 기타콩쿨(1981년) : 신춘승, 김주영, 노영민,
제9회. 기타콩쿨(1982년) : 노유식, 안승범, 나영수.
제10회. 기타콩쿨(1984년) : 김규태, 최해건, 김성진, 신현수.
제12회. 기타콩쿨(1987년) : 안형수, 김남중, 최현규.
제13회. 기타콩쿨(1988년) : 이미나, 방호용, 강태성.
제14회. 기타콩쿨(1991년) : 양승만, 윤원준, 배장흠.
제15회. 기타콩쿨(1993년) : 장상원, 전승현, 박현진.
제16회. 기타콩쿨(1995년) : 홍인숙, 진철호, 윤창호.
제17회. 기타콩쿨(1997년) : 최용석, 성현제, 고의석.
제18회. 기타콩쿨(1999년) : 한은, 고의석, 이노영.
제19회. 기타콩쿨(2000년) : 이성준, 박윤우.
제20회(2001년) 이후는 생략함.
그 후 매년 콩쿨 대회를 통하여 많은 인재들이 발굴되었다. 콩쿨 대회 우승을 계기로 해외 유학 등 기타연주에 생애를 거는 연주가도 많이 생기고 있다.
마). 음악협회에 가입되다
음악평론가협회 회장 김형주 기타협회 고문이 발의하고, 바이올린계의 대부 계정식 박사, 음악협회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조상현 교수 등이 유학시절 ‘성악은 낮의 음악이고 기타는 밤의 음악’이라고 배웠다며 클래식 기타협회를 음악협회 분과위원회로 가입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김형주金亨柱(1925 - 현, 한국기타협회 고문)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으로도 그만큼 음악회에 많이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음악평론가로 한국기타협회 고문직을 수락한 후에 음악평론의 본업 외에 성음레코드에서 최초로 합동 취입한 음반을 발행하였다. 서울음대의 강석희, 백병동 교수, 이화여대의 황병기 교수, 중앙대의 이유선 교수 등이 기타곡 작품도 발표하고 연주회에도 초청하였다. 황병기 교수는 가야금 연주와 작곡뿐 아니라 이화여대에 기타과 설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김형주는 수많은 기타 연주 평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단한 열성은 지금까지 8권 째의 음악평론 전집을 출간하였고, 최근 기타협회 총회에도 참석하여 지도와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각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한국작곡가회 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한국국민음악회 회장, 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많은 작품과 저서가 있다
바). 기타 연주가
한광석韓光錫 (1929 -2008)
평양 출생인 그는 1961년에 잠시 KBS에서 근무하다가 이성용의 기타 수업에 입문하였다. 음악실 PD를 하면서 음악적 소양을 기르고 이희진 등을 지도했다. ‘자라미 나루즈’ 라는 여성기타 앙상블이 내한했을 때 인솔단장 오너와 교류하게 되어 그를 통해 많은 악보와 자료를 받아보게 되었다. 특히 월간 ‘현대기타’는 평생 빠짐없이 구독하였으며 춘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강우식과 함께 춘천의 호반 기타앙상블 발표회를 도왔으며 성심여대 출강하여 수년간 지도하였다. 그의 동생 한성석은 중앙대 작곡과 교수로 기타곡 야상곡(Nocturn)을 현대 화성법으로 작곡했다.
김금헌金琴憲
배영식의 제자로 연주에도 뛰어나고 앙상블이나 지도력이 대단하여 연주가협회를 새로 조직하여 젊은이들을 규합 발전시켰다. 많은 기타교본이나 곡집을 발간하고 외국연주가들의 초청도 활발하였다.
정진덕 (鄭眞德 1935 - )
평소 조용한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 성품이어서 한동안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연주회를 매년 치루었다. 서울공대 화현회, 이화여대 기타반을 지도하며 많은 독주회를 열어 기타보급에 공헌하였다. 그의 형은 오디오의 진 스피커를 개발할 정도로 음악과 인연이 깊다.
김영철金永哲 (1940 - 현재 )
바리톤 성악가인 그의 경쾌한 그라나도스 무곡 연주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후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안동대 음대학장으로 재직하였다. 현재 Bella Voce 오페라단을 조직하였고 얼마 전에는 대한국인 안중근 오페라를 리드했다. 그는 이성우의 스승인 제정민을 지도하였다.
이낙경李洛京
그의 형(이정남, 작고)과 포르테아 dance fortea의 sonata 2중주를 하였다. 그의 형제는 현대건설과 울산 현대 상선에서 근무 중에 영국인들과 사귀면서 기타도 새로 구입하고 문화 활동을 하다가 캐나다로 이민 갔다. 그의 누이 이원경 아나운서는 방송국에서 활동하며, 춘천 원주지역에 많은 후계자를 양성했다.
김명표(제14,15대 회장), 김종만(제16대 회장, 작고), 성영삼(제17대 회장), 김정윤(제18,19대 회장), 송형익(제20대 회장)에 관해서는 [부록]으로 대신 한다. (추후 보충 설명 요함)
사) 기타 제작가
엄상옥嚴相玉(작고)
우리나라 기타제작의 원조이다. 요즘말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에 해당하는 소목장 기능인으로 일본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기타 수리와 제작을 하였으며 여러 형태의 기타를 창안 제작하였다. 홍익동 그의 자택 사랑방에는 기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 옛날 스페인의 산또스 에르난데스의 사랑방이 ‘기타의 전당’이라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던 것처럼 초창기의 기타인들은 모두 그의 사랑방 손님이었다. 베렌트, 파파스 등에게 헌정한 기타는 그들의 컬렉션 리스트에 들어있다. 엄태흥, 엄태창 두 형제는 가업을 이은 제작가로서 국내외 전시회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완근과 ‘제노아 기타’를 제작하다가 넘겨주고 ‘다이아몬드 기타’라는 상호로 수제품 제작에 정열을 쏟았다.
신경철申景徹
그는 일본 나고야 현악기 제작과를 수업했으며 우리 국악기의 제작에 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그의 12프렛에서의 접철식 기타는 싸일런트 기타와 대비되는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그는 나일론(아리랑) 현도 생산하였다
김진영金進榮
그는 세고비아 기타라는 상호로 한국의 기타산업을 주도하여 기업인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중국에서도 세계적 규모의 수출 공장을 일으켰으며 국내에서 생산된 세고비아는 지금도 브랜드 가치가 높다.
문위윤文胃尹
서울 음대를 나와서 기타 제작에 손을 댄 문위윤은 유일한 음악 학사 제작가로서 오봉기타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오혁환吳爀換
가야 기타는 독특한 음색으로 그의 독특한 손재주에서 나온(이주호 바이올린 제작가)의 기술이 접목된 결과이다.
이밖에 대구 콜롬비아 기타의 김상학과 광주의 가야금 제작가 이전우가 오동나무를 앞판으로 만든 기타는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최동수崔東秀 (1939 - 현 기타협회 고문)
건축기술사로서의 본업이 있는 관계로 시종일관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기타계를 후원하였다.
지그프리트 베렌트가 매3년마다 독일 문화사절로 내한할 때 1971년부터 기타연주 지망생들의 워크샵을 지도하여 수준향상을 도왔다. 워크샵에는 여러 지망생들이 참여했는데 호세리가 기억에 남는다. 어려웠던 시절에 지그프리드 베렌트가 동반한 민요가수 벨리나, 전위가수 배우 클라우디아 및 타악기 전문가 지그프리트 핑크 일행을 체류기간 내내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사비(私費)로 영접하여 기타협회의 명예를 선양한 일화가 남아있다. 그 답례로 베렌트가 소장한 기타를 선물 받았다. 이는 ‘야마하 기타’의 감독 이자끼가 4대를 제작하여 나루시소 예뻬스, 줄리안 브림, 존 윌리암스와 베렌트에게 각각 헌정된 기타 중의 한대이다.
그는 해외 근무하는 동안(18년) 기타제작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조기 은퇴 후에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힐즈버그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과 스페인 꼬르도바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명장 호세 로마니요스의 4주간에 걸친 마스터 클래스를 수료하였다. 그 후 전업으로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년간 2∼3대씩 소량 제작에만 몰두하고 파는 데는 관심이 없어 상당수를 증정하였다. 말하자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작가였다. 자서전 ‘포플러나무 너머에’와 기타제작에 관한 ‘기타, 그 모든 것’을 저술하였다.
그는 2017년에 은퇴하기까지 총 54대의 화려한 장식의 악기를 남겼다. 그중에는 국내 초유의 줄감개가 몸통에 있는 여행용 기타, 지팡이 기타, 총기타, 자개상감 기타 3대, 한지 기타(Papier Mache) 2대, 리라 기타 4대와 비웰라 기타 2대가 있다
3. 개화기開化期 (1975년 ∼ 2000년)
문풍인의 스페인 유학을 시작으로 허병훈, 유민선, 배철희, 송형익, 이성우 등이 해외유학을 다녀왔고 198?년 피어선 신학대학(현 평택대학의 전신)의 기타과 설립을 필두로 우리나라의 기타계는 아마추어의 경계를 넘어 프로의 세계로 발돋음 하게 된다. 유학생들의 귀국 독주회는 물론이고 매년 정기 연주회, 발표회와 연구보고 등 값진 실적들이 날로 쌓여갔다.
한국기타협회의 활동범위도 점점 커갔다. 각 지방에 지부가 설치되고 매년 열리는 전국 콩쿨에는 새얼굴들이 등장했다. 대학입시를 위한 학원교육도 생겨났고 외국 콩쿨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나르시소 예페스는 3천석의 세종문화관에서 마이크 없이 기타연주회를 이끌었으니 상상도 하지 못할 충격이었다. 쿨트 마주어가 트란스 잡음이 난다하여 지휘를 멈추었던 때와는 반대의 정경이 펼쳐졌다. 전문음악당도 없던 1960년대를 돌아볼 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호암 아트홀에서 줄리안 브림의 연주가 있을 때 높은 수준의 청중 덕에 최상의 컨디션을 찾았다고 좋아했다.
가). 산업화와 대량생산 및 수제기타의 등장
가문비나무과에 속하는 스프루스(Spruce)는 피아노 향판에 쓰인다. 수도 피아노사는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부산물로 나오는 스프루스 재료를 기타의 양산에 사용했다. 이어서 영창, 삼익, 스즈키 피아노사도 같은 방식으로 다량생산을 하여 한때 붐을 이루었으나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기타의 가격이 절하되기 시작하여 대중악기로 보급되었다. 김진영의 세고비아 기타는 다량생산을 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고 지금도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1960년경에 독일제 기타 칼 회프너(Karl Höfner)가 수입되자 수제기타 뿐만 아니라 공장제 기타도 성능 좋은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병갑의 KBS 협연에도 회프너가 연주되었다. 기타 줄도 어거스틴(AUGUSTINE)을 선두로 종전의 가트(Gut)에서 튼튼한 나일론 줄로 바뀌기 시작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까지 찾아가서 낚시 줄을 골라 기타에 쓰던 시절은 지났고 피라스트로 등 양산 기타에 쓰이는 나일론 줄이 널리 보급되었다. 거금을 들여야 구입 가능했던 악기가 대량생산 덕택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었다. 직장이나 학교 등 단체구입에 사용되는 반수제나 OEM으로 생산된 기타 중에도 간혹 잘만 고르면 꽤 우수한 기타를 고를 수 있었다. 기타의 본고장인 스페인에서도 명문 라미레스(Ramirez)가 콘서트 모델 외에 보급형(Estudio)이 나왔다. 일본의 야마하나 한국의 세고비아에서는 공장 일각에 클래식 생산 파트를 분리 운영하는 곳도 생겼다. 앞판은 스프루스나 씨더 그리고 옆, 뒷판 재로는 인디언 로즈(Rose wood) 외에 하카란다와 메이플도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목재 전문가로 유선묵, 수출입종합상사의 김상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자생하는 소나무재를 사용하던 기타 공장들이 선진국 수준의 재료와 제작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기타공장과 수제공방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이에 발맞춰 이완근(제노아), 신경철(아리랑), 김만철(파라마운트)은 기타줄도 생산하였다.
기타 공장 : 강두원(원음 기타), 김상학(콜럼비아 기타), 김제만(케라우스), 김진영(세고비아 기타), 문위윤(오봉 기타), 문현철(성원 기타), 안상덕(샤프 기타), 엄상옥(다이아몬드 기타), 오혁환(가야 기타), 은재표(스스키 그랜드 기타), 이완근(제노아 기타), 이재형(킹스턴 기타), 임석용(뉴-스스키-기타), 최주찬(쉼멜 기타-수도 피아노) 등.
수제 공방 : 1990년 전후해서 여러 대학에 기타 전공학과가 개설됨에 따라 수제기타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개인 공방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산또스 에르난데스-엄상옥에 이어지 듯 곽웅수, 김희홍과 이성관 공방에는 사랑방도 생겼다. 이들이 제작한 수제 기타로 국제기타 콩쿨에서 입선되는 연주가도 다수 생겼다.
강수원, 곽웅수(브라만), 김정곤(전음 기타), 김정국, 김희홍(알마 기타), 신경철(아리랑), 엄태창, 엄태흥(다이아몬드), 이성국, 이성관, 이형규 등(2,000년 이후는 제외).
일본의 기타 제작가 마쓰모도, 이나가끼, 가즈오 사또, 마사노부 마츠무라 등의 왕래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토머스 험프리를 위시해서 로버트 럭, 안드레 마르비, 앙겔라 발트너, 스테판 뢰슬러와 헤르만 하우저 3,4세, 등의 기타제작 마스터 클래스도 개최되어 수제 기타 제작계도 빠르게 수준향상이 되고 있다.
나). 외국 연주가들의 내한
스페인 : 1960년 동화통신사 초청으로 서울 이대강당에서 Alegrias 민속무용단l의 공연이 있었다. 그때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2명(Samuel Matin과 Anastasio Duque)이 함께 왔다. 기타 제작가 엄상옥은 수제 ‘다이아몬드’ 기타를 무대에서 증정하였다. 다음날 기타협회 주최로 중앙우체국 옆 미장그릴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거기서 그들은 기타 연주를 했는데 클래식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우리 측에서는 김인걸 회장, 이응주, 엄상옥과 이완근이 참석하였다.
나르시소 예페스는 세종문화회관 대형 홀에서 마이크 없이 생연주를 하였다.
독일 : 1965년 지그프리트 베렌트(Siegfried Behrend)는 민요가수 벨리나를 동반한 클래식기타 연주회가 명동 국립극장에서 처음 열렸다. 독일문화원 (Goethe Institut)의 문화대사로 매3년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그는 연주와 워크샵 뿐 아니라 전위음악을 클라우디아와 함께 공연했다. 타악기 전문가 지그프리트 핑크(Fink)와 크루거, 트뢰스터 등의 연주가도 함께 공연했다.
미국 : 마누엘 바루에코, 크리스토퍼 파크닝, 페페 로메로, 찰리버드, 로버트 루스 등이 미국문화원의 후원으로 왔다. 그후 버지니아 루케와 샤론 이스빈은 개인자격으로 초청 받아 내한 공연하였다. 이후의 연주자들은 공연기획사를 통하여 내한 하게 된다.
프랑스 : 장 피에르 쥬메와 사다노프스키 등이 왔고, 프랑스 문화원에서는 매주 첫 월요일에 기타협회 모임을 위하여 지하 영화관을 개방해주었다.
영국 : 줄리안 비잔틴, 존 윌리암스, 알리스 아츠트 등이 왔으며 줄리안 브림의 호암 아트홀 연주는 큰 감동을 주었다.
브림은 김포공항에서 한강변을 따라 신라호텔에 이르는 동안 손가락을 마찰시켜 “50, 60”하고 헤아리면서 체감 습도까지 느껴보고 있었다. 1950년에 군에 입대했을 때 처음에는 한국근무를 지원하려다 한국의 기후가 여름 겨울의 건습과 온냉 차이가 심하다하여 기타연주에 지장이 있을까봐 취소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호암 아트홀에서의 그의 연주는 젊은 시절의 화려한 기교가 다시 살아났었다. 청중들의 환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악은 청중과 연주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라고.
우루과이 : 오스카 코스타(Oscar Costar)가 한국일보 강당에서 단정한 연주로 인상이 깊었다. 우루과이는 한국의 UN가입을 제안한 국가이므로 정부의 특사대접을 받았다
일본 : 우다가와, 이사무 사이또, 기꾸찌, 이나가기 미노루, 요시 이와나가, 야마시따, 하시모도, 와다나베 아끼꼬 등 많은 연주자들이 다녀갔다.
다). 국내 기타인
문풍인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기타를 전공한 분으로 2010년 아까운 나이에 작고했지만 그의 공로는 피어슨대학(현 평택대학)에 기타과를 설립하여 피어선파로 일컬을 정도로 많은 제자 후배들을 양성한 공로가 크다. 기타교본도 여러권 출간했으며 유학시절 안또니오 마린 몬떼로 공방에서 쉘락칠을 터득하여 기타의 마감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호세리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호세리는 무용가인 부인 주리와 스페인에서 플라멩코 교습소를 20여 년간 운영하다가 귀국했다. 호세리는 불모지인 국내에 플라멩코 보급의 기회를 열고 평택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있다.
김태수
그는 이종석의 제자로 한국기타협회 광주지회장과 고문을 겸직하고 있는 호남지역에 오랜 연고가 있는 교육자이다. 그는 차분한 성품을 바탕으로 광주기타합주단, 전남대, 조선대, 호남대, 광주기계공고 등에 7개 기타합주단을 창단하였다. 현재 음악전문 싸이트 뮤직필드, 광주교육대, 전남예술고에서 클래식 기타 강사를 역임하고 있다. 한편 광주 소재 대한기타전문학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으며 윤원준과 변보경의 스승으로 많은 연주가를 양성하였다.
송경수
그는 원만한 성격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대전 고전기타 100인 연주회를 결성하여 지휘했다. 또한 충남교원연수원, 공주대학 부설 중등교원연수원, 대전 과학고등학교, 대덕고등학교 등 대전지역의 광범위한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저서에는 ‘학생음악용어사전’, 국내 최초의 기타음악사인 ‘클래식 기타’뿐만 아니라 여식 송정연과의 공저共著 ‘내가 사랑하는 노래들 1,2집이 있다.
이희진
연세대 오르페우스 동아리 출신의 이희진은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동안, 많은 기타 자료와 재료를 수집하여 보내주고 버지니아 루케, 페페 로메로, 샤론 이스빈 등의 연주자들을 초청하였다.
신현수 :
울산에 거주하는 그는 아벨 깔레바로의 과학적인 기타연주법을 깊이 연구하여 의학 해부학적인 운지 및 연주법의 연구결과 타레가의 사진에서 보는 손목의 직각자세의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였다.
장승호 :
그는 80년대에 뛰어난 연주와 음악해석으로 강석희, 백병동, 김명표, 김형주, 김영호, 등의 작품들을 정통적으로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최병택(1957 - )
치과교정전문의인 그는 83년 2월 정재동 지휘 시향의 <범세대 연주회>의 공개 오디션을 통하여 줄리아니 협주곡 전악장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국내 최초로 협연하였다. 이로써 국내 연주사에 큰 획을 그었다. 93년 일본 교토 초청 음악회에서 연주한 비발디 협주곡과 줄리아니 협주곡 등을 수록한 CD를 SK에서 출반하였다. 현재 클래식과 플라멩코 연주를 병행하고 있다
서정실徐政實(1969.7.31.∼2017.3.4.)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 연주 중 뇌출혈로 졸도하여 치료를 받다가 3개월 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는 연세대 화공과 재학시절 기타 동아리 ‘오르페우스’에서 활동하다 도미, 뉴욕 맨하탄 음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전국 순회 독주회를 열고 ‘한국 페스티발 앙상블’ 및 ‘희망의 소리’의 음악감독을 역임하였다.
그는 한국예술 종합학교, 평택대학, 수원대학, 계원여고, 명지대, 이화여대, 연세대 등에 출강하면서, KBS-1 FM의 ‘당신과 밤의 음악’, ‘뮤직 플러스‘ 코너를 진행하고, TBS FM, KBS TV, Art TV 등에 연주 및 녹음방송을 하였다.
한편 페스티발 앙상블 멤버와 함께 케냐 나이로비의 UN 환경협약 본회의장, 제네바 UN 본부,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홀 등에서 공식연주 하였고, 네팔, 방글라데쉬, 싱가폴, 필리핀, 알제리, 모로코, 미얀마 등지에서 자선 음학회도 개최하였다.
CD 음원은 [Song of My Heart], [Theme & Variations]가 남아있다.
라). 해외 기타인
특히 LA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 살며 한국인 기타 합주단도 운영되고 있다.
여류 연주가 김인자님이 LA한인 기타협회 회장을 맏았었다.
박윤관
뉴욕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으며, 악기교류, 악보 수집과 편곡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고급 기타재료도 가끔 보급하였다. 찬송가 CD 2매를 출판하였다.
오해권
그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로 기타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다현 기타나 류트 연주에 조예가 깊으며, 예술의 전당에서 하프시코드와 협연한 적이 있는데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국건
그는 특히 영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 능통하며 많은 기타음악 역사자료와 악기들을 소장하고 있다. 2009년에는 여류 연주자 김인자와 2중주를 조직하여 기타음악 300년사의 주제로 국내 각지에서 고악기 전시와 강연을 가졌다.
유경(Yoo Kyung)
한국인 최초로 보스턴의 New England Conservatory에 기타전공으로 입학했다.
1984년 졸업연주는 마우로 쥴리아니의 그랜드 소나타와 바흐의 BWV 996 등이었다. 또 NEC Honor's New England Chamber music competition에서 백병동 교수의 기타, 첼로, 플루트 삼중주 “소리”로 입상하여 NEC Jordan Hall에서 다시 연주하였다. 졸업 후에는 Tufts 대학에서 경제와 수학을 전공하고 Software Engineer 일을 하는 대신 수시로 연주회에 참가하고 있다. 김정미와 박윤관을 사사하였다.
온광철 :
1990년경에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독주회를 하였다. 음악성과 연주기교가 놀라웠다는 기억이 남는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실 음악원에 유학 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현지에 영주하게 된 말하자면 장기유학생이다. 근래 마드리드 유학생들은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송무정
그는 88올림픽 때 해외봉사단으로 통역을 하며 기타재료나 악기 구입을 도왔다.
4. 발전기發展期(2000년 ∼ 현재까지)
가). 지도자 육성
창립 40여년의 역사와 전국 50여개의 지회, 지부를 가진 기타인의 단체로 나날이 늘어가는 기타인구와 학교 방과 후, 복지관, 문화센터, 각종 동아리, 평생교육원등에서 책임 있게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육성하고자 2002년경에 발족되었다.
지도자 교육은 기타의 전공자 외에 전국 지회, 지부에서 기타를 배우는 연구생뿐만 아니라 장차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가까운 지회, 지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전국적인 교육망을 구축하여, 실력 있는 교수진의 실기와 이론 교육, 엄격한 자격 검정 및 관리하는 긴밀한 체계를 구성하여 실시되고 있다.
■■■ 2000년 이후는 생략함.
-------------------------- 이 상 ---------------------------
[부록] 한국기타협회 역대 회장단(2019년 1월 20일 현재) | |||||
년도 | 차례 | 회장 | 부 회 장 | 비 고 | |
1959 | 초대 | 김인걸 | 배영식, 임창년 | 한국 기타 연주인 협회 창립 | |
1969 | 1대 | 김인걸 | 이종석, 이응주 | 한국 클래식기타 음악인 협회 | |
1970 | 2대 | 김인걸 | 박승천, 강우식 | 1년 임직 | |
1971 | 3대 | 이응주 | 강우식, 엄태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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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4대 | 이응주 | 김금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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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5대 | 이응주 | 김복환 | 한국 기타아 협회 | |
1974 | 6대 | 강우식 | 이표 | 2년 임직 | |
1976 | 7대 | 강우식 | 김정윤 |
| |
1978 | 8대 | 강우식 | 김영철, 김용호 | 중도사퇴 | |
1979 | 9대 | 김용호 | 허병훈, 김홍천 | 1년 임직 | |
1980 | 10대 | 김용호 | 이표, 김홍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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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11대 | 이응주 | 김종만, 김명표 |
| |
1982 | 12대 | 이응주 | 오용훈, 이순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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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13대 | 이응주 | 송영성, 김용대 | 3년 임직 | |
1986 | 14대 | 김명표 | 최원식, 강은덕 | 2년 임직 | |
1988 | 15대 | 김명표 | 강은덕 |
| |
1990 | 16대 | 김종만 | 강은덕, 임현화 | 중도사퇴 | |
1991 | 17대 | 성영삼 | 조광섭, 송형익, 오승국, 김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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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18대 | 김정윤 | 조광섭, 노돌호, 송형익, 유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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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19대 | 김정윤 | 송형익, 노돌호, 오용훈, 이용수, 유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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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20대 | 송형익 | 이용수, 박종화 | 중도사퇴 | |
2001 | 21대 | 김금현 | 최원식, 허병훈, 문풍인, 김용대, 전상진, 강은덕 | 중도사퇴 | |
2002 | 22대 | 최원식 | 김용대, 노돌호, 박종대, 김해경, 신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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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23대 | 최원식 | 조광섭, 박종대, 김해경, 신경숙, 박재만, 방효용 | 3년 임직 | |
2007 | 24대 | 리여석 | 조광섭, 박종대, 김해경, 신경숙, 박재만, 방효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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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25대 | 조광섭 | 김윤배, 신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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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26대 | 조광섭 | 김윤배, 신경숙, 김금석, 임장순, 배장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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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27대 | 김윤배 | 이봉주, 윤원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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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 28대 | 윤원준 | 2019. 1. 20일 당선되어 부회장은 인선 중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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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록 불초 소생이 작성해서 내용이 빈약한 점은 인정합니다만
그나마 구하기 힘든 자료입니다.
기타애호가들께서는 다운 받아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료 수집과 일괄적으러 정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소중한 자료 잘 봤습니다..!
1900년 후반대 부터 부회장님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