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덕암 장한기 작)
"한국사협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사진. 글 : 寫眞評論家 德岩 張漢基)
사진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매체로는 사진 촬영용 기구의 등장과, 사진화학 재료의 개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르네상스 이
후에 어두운 방 이라고 명명한 "카메라옵스규라" 의 등장과, 1674년 '크리스토프 아돌프 발두인' 의 실험에서, 탄산칼슘이 질산 속에서 용해되어 질산칼슘이 형성됨을 발견하고, 이 화합물의 침전물을 증류시켜 가라앉은 앙금이 가열되었을 때, 어둠 속이나 찬 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앙금에 "포스포러스(빛의 운반자)"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1727년 독일의 자연철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체'가 발두인의 실험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이 화합물질은 열 보다는 빛에 의해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스코토포러스(어둠의 운반자)" 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18세기 중엽에는 다게르에 의해 다게레오타입의 은판 사진이 등장하여 세계 최초의 사진기에 의해 복제된 사진 원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사진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 문제로 극히 일부의 과학자들에 의해 다루어 졌으며, 사진의 대중화의 출발은 19세기 이후 휴대형 카메라의 등장이 그 전기가 될 것이다.
근대 문명에서 사진이 갖는 위력은 대단하다. 중세 유럽에서 성행하던 초상화를 대체 할 사진술의 발달에 기여한 "카메라 루시다" 가 개발되면서 부터 였으며, 은염사진의 원조인 음화의 제작이 실현 된 것은 1841년 탈보트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그림 이라는 뜻을 가진 칼로타입의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칼로타입 사진술의 등장은 '데이비드 옥타비오스 힐' 과 '로버트 아담슨' 에게 세계 최초의 음화사진술을 활용한 예술작품을 성공시킨 인물로 기록되게 하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예술의 기본은 인간이 주제로 등장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인물 사진은 사진가의 영원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토록 사진술은 인류사상 한 획을 긋는 위대한 발견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가장 뛰어난 지성을 매혹시키는 진화된 과학이자, 인간의 가장 기민한 정신을 자극시키는 예술로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진술은 한 두 시간이면 익힐 수 있는 간단한 도구에 불과했으나, 가르쳐서 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빛을 읽는 감
각이다. 예술가의 눈으로 파악해야 할 것은 빛의 방향이나 각도가 피사체에 미치는 영향을 예견하는 능력과 통찰력이었으며, 그 누구도 사진 찍히는 사람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 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으며, 또한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우연한 한 순간의 산물인 평범한 초상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을 심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진을 제작하려면 즉시 그의 정신세계로 뛰어 들어가 그의 사상과 기질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세계적 화가 '렘브란트' 의 작품 속의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 속에는 그만이 표현하는 빛의 방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에 와서는 이를 사진술에 적용하는 라이팅기법으로 "램브란트라이팅" 이 인물 사진에 널리 응용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요원한 과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한편 음화 사진술의 성공적 출현은 이를 확대 보존하는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근대문명의 척도가 되는 출판문화에도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초상사진의 세밀한 묘사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인간생활의 라이프 사이클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사진화학의 발달과 함께 광학기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휴대가 가능한 소형 카메라가 등장하였고, 이때부터 사진술은 다양한 각도로 발전 방향을 펼쳐가게 되었다. 초상사진 일변도의 표현은 생활사진으로 그 변화의 폭을 넓히게 되었으며, 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분야는 역시 잡지사나 신문사의 기사용으로 활용한 보도사진 부문이 되고 있다. 이때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 세계 사진계의 제일세대의 사진가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분리파의 결성이나, 기관지인 카메라워크의 창간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 졌으며, 로버트 카파 같은 세계제일차대전을 기점으로한 종군 기자들의 활약상도 바로 이 시기의 전쟁사진에서 그 원류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세계적 사진조류의 변화는 역사의 변천에 따른 인간의 생활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제일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류가 평화의 무드로 진입하게 되자, 사진의 조류도 전쟁 중심의 사진에서 인간의 생활사나 예술적 회화중심의 사진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어 가게 되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세계 사진사의 주요 포인트를 짚어보면, 1925년도에는 바우하우스의 총서 중 '모흘리 나기'의 (회화, 사진, 영화) 가 출간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26년에는 세계제일의 카메라 메이커인 라이카가 첫 시판을 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세계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앙리 까르띠에-브레쏭이 첫 개인전과 함께 (라이카에 의한 나의 기록) 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함으로써 라이카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세계 제일차대전 종전 후인 1945년도에는, 현재까지도 세계 보도사진계를 이끌고 있는 사진통신사 매그넘이 로버트 카파 등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52년도에는 전 세계인의 사진의 대명사가 된 "결정적 순간" 이 앙리 '까르띠에-브레쏭' 에 의해 출간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55년도에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간 가족전" 이 '에드워드-스타이캔' 에 의해 기획되어,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창립 25주년 기념전으로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 인간 가족전은 스타이캔이 2년간에 걸쳐 전 세계에서 2백만 장의 사진을 모았으며, 그중 68개국의 사진가 273명의 사진 503장을 선별하여 4개월간 전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1957년 4월 3일부터 28일까지 25일간 경복궁 미술관에서 개최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입장객이 무려 3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과히 그 규모나 관심도가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후에 월간사진사에서 미니본으로 제작하여 자료의 일부나마 볼 수 있게 되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편 한국사진의 역사는 1945년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태동을 시작하였으나. 패색이 짙은 일제의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로 인해 사진의 존립조차도 힘든 궁핍 속에서 그렇게 우리의 사진사는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 후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출발과 동시에 격동기의 시련을 겪게 되나, 1952년(당시 단기 4285년) 11월에 드디어 한국사진의
대표 격인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게 되었으며, 지난해 12월에 사협창립 50주년의 역사적인 시기를 넘기게 되었다. 그간의 우여곡절을 견디어 낸 한국사협이 내부 제정파탄과 한국사진대전의 파행 운행 등으로 문광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 된지 1년여의 세월을 넘기고 있으나, 현시점에서도 집행부와 회원의 갈등이 지속되어 발전과 전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 협회창립 반세기를 넘기는 시점에서 한국사협50년사에 기록될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할 역사적 사명은 과연 무엇인지 회원과 집행부 모두가 고심해 보아야 할 때가 된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