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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0월 23일(제42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민수기 10:11-16
제목 :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
여러분에게 꿈이 있습니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하시나요? 내가 아무리 좋은 꿈을 가지고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픈 사람에게 꿈이 있다면 그 아픔을 이기는 건강의 회복일 것입니다. 그러면 건강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사의 치료와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애굽 땅에서 종이 되어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출애굽은 하나님의 기적의 은혜였습니다. 이제 애굽을 나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최고의 땅입니다.
애굽을 나왔으니 이제 가장 좋을 길을 통하여 가장 빠르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고생 끝 행복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가면 15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광야로 인도하여 40년을 가게 하셨습니다.
민수기 33장에 보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40년 노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생활 동안 43곳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그 광야는 길이 없는 험난한 곳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대제사장 아론이 호르 산에서 123세에 죽었습니다(민 33:38).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어렵고 힘들고 험난한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풍요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신령한 가나안 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의 과정은 천국을 향해 순례의 행진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역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고난의 날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말입니다. 고진감래의 반대말은 ‘흥진비래’입니다. 곧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새옹지마’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새옹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서 노인이 낙심하였는데, 그 후에 달아났던 말이 한 필 끌고 와서 그 덕분에 훌륭한 말을 얻게 되었으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노인이 다시 낙심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아들이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아니하고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함).
민수기 1: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민 1:1)라고 시작합니다. 출애굽한 후 시내 광야에서 1년 1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본문으로 오면 1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1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12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머무니라.”
11절에서 말하는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올랐다’는 말은 이제 출발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가나안 땅입니다. 광야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께서 가장 빠르고 쉬운 길로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머무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로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빠르고 좋은 길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왔으면 블레셋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면 가장 가깝고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광야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이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미드바르, 에레모스)라는 말은 ‘넓은 들판으로서 거친 땅, 빈들, 사막’ 등의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불모지로서 ‘씨 뿌리지 못할 땅’(렘 2:2), ‘사람 없는 땅’(욥 38:26). ‘짐승이 부르짖는 황무지’(신 32:10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황을 광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가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광야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삼일 예배에서 나누고 있는 마가복음 1장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사명을 위해 필요한 장소였습니다. 이와 같은 광야의 시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곳입니다. 이 광야의 시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위하여는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교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내 삶이 광야 같아서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육신의 아픔도,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모든 범사도 때로는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광야가 믿는 자들을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길목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고난인 광야의 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필요한 광야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달음의 은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의 시간도 이것은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시간임을 깨듣고 극복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 광야인생을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와 사역의 광야를 경험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발 3500미터의 발칸 산맥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최고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밤중에 따는 장미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인격과 헌신의 향기도 극한 고난의 밤, 절망과 아픔의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며 나올 수 있습니다.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두운 벽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광야의 시간에서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됩니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 정도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80알 또는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경험했듯이 겨울이 지나면 싹이 난 보리밟기를 했습니다. 이때 허약한 싹들이 모두 꺾이고 다시 일어나는 싹들은 밟히기 전보다 훨씬 강한 줄기가 되어 수백 알이 열리게 된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은 13년의 광야 같은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 광야를 통과한 후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되고 기근에 죽어갈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형통한 땅으로, 평안한 땅으로, 좋은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시는데 세상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제일 힘들고 어려운 광야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빠르고 좋은 길을 놔두시고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광야는 먹을 식물도 없습니다. 마실 물도 없습니다. 쉴만한 물가도 없습니다. 한 마디고 광야는 고통의 땅이요 저주의 땅과 같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경험한 성지순례의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합동신학대학원에 다니던 1997년, 졸업 기념으로 성지순례를 여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 길을 광광버스를 타고 그 행로를 따라간 경험이 있습니다.
광야는 정말 삭막하고 험악한 땅입니다.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 제가 갔던 때가 10월 달이었는데 낮 기온은 42-43도로 살인적인 더위가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광야에는 뱀과 전갈이 많습니다. 독사가 이글거리고 맹수가 이글거리는 곳입니다. 숲이나 물이 없습니다. 나무는 다 가시나무요 잎사귀가 없습니다. 그러니 햇빛을 막을 만한 그늘이 없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곳이 광야요, 양식도 없고, 밭도 없고, 곡식 하나 심을 수 없는, 옥수수 하나 심을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광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수기를 보면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쏟아주셔서 목마른 사람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2백 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40년 광야 생활을 기록한 것이 민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더우니까 햇빛을 가리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춥고 어두우니까 따듯하고 밝은 구름 기둥으로 저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세상은 인생이 광야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성도는 어떤 위기, 어떤 어려움, 어떤 불가능, 물 한 모금 없는 곳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쌀 한 톨 없는 곳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불 뱀과 전갈과 동물들이 이글거리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암송하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이 그것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힘들고 험난한 광야 길을 만나셨나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볼 때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세상은 전부 민수기 같은 광야의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광야 같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광야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함께 동행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광야 같은 환난과 위기와 고난이 있다고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쓴 편지에서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고후 4:7-9)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성도는 광야 세상에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광야 세상에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광야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도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광야 세상에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광야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요?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곳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늘 언제나 같이 하십니다. 성도가 좋을 때도 함께하시고 환난 중에도 함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자기가 걸어 온 길을 보니까 주님이 늘 손을 잡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길을 보니까 어떤 때는 예수님하고 나하고 같이 걸어 온 발걸음이 있는데 어떤 때는 내 발걸음이 없고 예수님 발걸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어떻게 주님과 제가 같이 걸었는데 어떤 때는 예수님 발자국만 있고 제 발자국은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래 잘 보았구나. 좋을 때는 너하고 손잡고 같이 걸어갔고 네가 환난당하고 병들고 위기를 만날 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으니까 내 발자국만 있고 네 발자국은 없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도 함께 하십니다. 그 광야를 통하여 힘들고 어렵다고 낙심하지 말고 더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미국에는 마약 중독자가 얼마나 많은지 감옥에 있는 마약 중독자만 2백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미국이 최고의 선진국이요 부자의 나라지만 말이 됩니까? 미국의 국방 예산이 우리나라 예산보다 많은데 이 국방 예산의 절반이 마약 때문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마약 퇴치와 마약과 싸우려고 돈을 일 년에 수 천 억불을 투자하는데 2백만 명이상이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인생이 폐인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광야 같은 세상이 속상하고 괴롭고 답답하니까 마약을 복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약을 복용하면 잠간은 잊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마약의 광야를 통과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나라도 마약 천국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져드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광야가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좋은 세상을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우울하게 살고 괴롭게 살고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까요?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길이 없습니다. 아무데나 막 가다가 가시에 찔립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주님이 인도하시므로, 성도는 광야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 같은 이 땅에 죄인들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벳세다에 있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의 군중들을 먹이셨습니다. 아마도 여자와 어린이까지 합하면 수만 명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광야를 거쳤습니다. 야곱도 광야에서, 다윗도 광야에서, 모세도 광야에서, 아브라함도 광야에서, 다니엘도 다 광야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풀무불과 사자굴 속에서 지켜주시고, 그 모든 위기에서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믿음으로 가는 믿음의 성도들을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습니다. 명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무슨 철학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맡기면 우리의 길에 광야의 기적이 오늘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의의 저주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광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저도 매일 매일 새벽을 깨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걸 경험합니다. 우리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날 사람 떠나고 빈자리가 많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좋은 성도들이 있는 것이 저에게는 광야를 이기게 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를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광야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광야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을 기록한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광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셨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였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주신 것은 만군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 생활하는 것은 광야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을 살면서 광야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름기둥을 바라보고 불기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이 없고 가시만 있는 광야로 보지 말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와 같이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나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광야 같을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시면 만나가 내립니다. 기적이 내립니다. 경제적으로 광야를 만났을지라도 성도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굶어죽지 않습니다. 주님이 살려주십니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기적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 광야를 권력의 힘으로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질의 힘만으로, 지식의 힘만으로 이 광야를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짜증밖에 안 납니다. 답답하고 우울증에 걸려서 권태기가 옵니다. 하지만 같은 광야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성도는 매일 매일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어떤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분인데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를 못 하니까 아들보고 ‘이놈의 자식아 공부를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하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이 아버지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배낭 속에 집어넣고 테이프로 다 붙여가지고 몇 달을 집 안에 놓았다가 들켰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살벌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없는 광야생활이 신경질만 나고 아버지도 밉고 아내도 밉고 말하면 그냥 죽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지식이 얼마나 긴장하고 완악한지 모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마음에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살아나고, 소망이 살아나고, 살고 싶고, 좋은 세상이 되고, 사랑하고 싶고, 주고 싶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왔으니까 이런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건강의 기적이 몸이 아픈 성도들에게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그냥 다녀가는 성도가 되지 말고 은혜 받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광야와 같지만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광야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고 행군하는데 있어서 중앙에 위치한 성막입니다. 바로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넓은 광야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성막위에 하나님의 구름이 늘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광야생활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늘 바라보며 살고 성전을 가까이하며 살고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도 레위지파는 성전에서 봉사하므로 살고 유다지파는 하나님께서 성전 가운데도 동편, 문이 있는 곳에 유다지파가 진을 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교회생활을 항상 문 입구에 서서 교회 출입을 자주 하고 교회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가까이에서 성전을 사랑하며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은혜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애찬을 나누고 교제를 나누는 것이 세상 광야를 이기게 하는 힘의 원리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 하나님은 성전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성전에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주시고 성전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광야 같은 세상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문제는 늘 있습니다. 광야에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문제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광야가 없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은 문제가 없겠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기업이 되면 문제가 없겠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일이 없겠지만 우리나라가 100%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믿어서 국회의원이 300명이 예수님을 다 잘 믿어도 우리나라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문제가 없게 하려고 하면 이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지만 문제 많은 광야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족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아들 12명을 가리켜서 족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걸어간 길을 족장 길이라고 합니다. 족장 길, 족장시대, 이것이 성경의 뿌리입니다. 핵심입니다. 그것은 정말 잘 믿는 사람들이 걸어 간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약 2백 년 동안 걸어 간 그들의 길이 얼마나 위대한 길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아들 열 두 형제가 살았던, 걸어갔던 그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광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나서 남의 나라에 피하고 아브라함도 거짓말하고 아브라함도 온갖 시험당하고 하갈을 취하고 별의별 일이 그의 가정에 있었습니다. 가정불화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이삭도 똑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야곱도 형제간에 너무너무 싸우고 그의 딸도 어려운 일을 당하고 야곱의 가정에 별의별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하나님의 가정에 광야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더합니다.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먹습니다. 이런 믿음의 가정에 이렇게 기가 막히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이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은 진행되고 문제는 해결되고 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앞으로 메시야에게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약속의 땅으로 자자손손 이어갑니다.
그 다음에 야곱의 가족 66명이 애굽에 들어갔지만 애굽에 들어가서 요셉을 모르는 애굽 왕 바로가 등장하자 노예가 되지 않습니까?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로 비참한 노예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되자 그 약속을 지키시어 출애굽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들어선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을 떠났지만 광야로 들어오지 않습니까?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출애굽기를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모세를 원망하고 돌 던지고 당을 짓고 낙심하는지, 그것이 이스랑레 백성들, 하나님의 선민들의 걸어온 행로입니다. 출애굽의 행로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출애굽 시대가 지나가면 크게 보면 사사 시대가 오는데 별의별 사사들이 다 나옵니다. 그래도 그 가운데 함께 합니다. 사사 시대가 끝나면 통일 왕국 시대가 옵니다. 사울 왕이 등장하고 다윗 왕이 등장하고 솔로몬의 이 삼 대 왕이 통일 왕국인데 사울 왕을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그 나라에 얼마나 어려움이 옵니까? 다윗이 인류역사에 하나님을 제일 잘 믿었지만 다윗의 가정에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습니까? 아들끼리 형제끼리 죽이지 않습니까?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이 광야에서 이겨내는 것 이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기지를 못 하고 넘어지는데, 이기지를 못 하고 끝내는데 성도는 이걸 뛰어넘습니다.
사사 시대 다음, 통일 왕국 시대 다음, 분열 왕국 시대, 그 다음에 바벨론 포로 귀환 시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그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 가정이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을 잘 믿어도 별의별 일이, 광야의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로부터 기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성전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예배드립니다. 제사지냅니다. 제사의 핵심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죄의 짐을 벗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 시간에 우리의 죄는 용서 받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 진홍같이 붉은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십니다. 이 광야의 성막이 하는 것, 광야에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총은 죄를 사하십니다. 죄는 무서운 저주가 있고 독이 있고 다이너마이트와 같고 흑암 천지와 같이 우리 삶을 파괴하고 멸망시키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 아들의 피로 인하여 죄는 사하여집니다. 죄는 다 정결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죄의 능력은 전염병과 같지 않습니까?
요즘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백신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백신이라는 이 주사는 예방접종입니다. 우리 몸에 백신을 맞으면 이 몸에 들어와서 이것이 굉장한 항체를 가지고 힘을 얻어서 내 몸에 침투해 있는 이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밖으로 내어 쫓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방접종, 백신입니다. 백신을 개발해서 주사를 맞으면 깨끗해집니다. 바이러스가 침투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병이 있어도 자꾸 과학자들이 그걸 개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개발해도 개발하지 못 하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 안에 있는 이 저주는 백신이 개발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사람이 개발할 수 없습니다. 죄의 능력이 인간을 다 파괴하고 국가도 다 망치는데 이걸 막아낼 수 있는 백신은 영원히 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 백신은 예수님의 피로 놓아야, 예수님의 피가 들어가야 이 저주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능력은 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지 마십시오. 죄가 우리에게 별의별 일을 다 만들어 내는데 광야에서 별의별 사고와 재난과 불행을 가져다주는데 이것을 막아낼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시편 122편 6-7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오늘 죄 사함 받고 예배시간에 축복도 임하는 걸 믿으십시오. 오늘 많은 사람은, 복은 세상에서 받고 복은 인간의 힘으로 받고 교회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묶어 놓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의인화 된 것이지 실제로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오늘 엉터리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여기도 계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광야 생활에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성막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면 성도는 길 잃지 않고 광야 같은 세상에 가시의 아픈 경험 하나 없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지날 줄로 믿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괴롭고 어렵다고 광야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면 광야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부엉이는 캄캄한 밤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흑암천지이지만 부엉이 눈에는 먹이가 다 보이고 온 세상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훨훨 날아서 밤에 가서 토끼도 잡아 오고 다 가져다가 먹습니다. 캄캄하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부엉이 눈을 주셔서 캄캄한 밤은 대낮같이 보도록 지혜의 창을 열어주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13장에 보면 “우리는 갈 수 있다, 우리를 가리라 승리하리라,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리라.” 광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희망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축복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록펠러는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록펠러가 지은 교회만 4,982개 교회를 지었어요. 한 사람이 많이도 지었지 않습니까? 록펠러도 광야에서 돈을 의지하고 자기 능력을 의지했을 때는 폐인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방향을 교회로 바꾸었을 때 그의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고 그의 가정은 광야의 기적, 광야의 은총의 잔치가 그 가정 안에 이루어지고 대학도 많이 세우고 장수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잠을 못 자서 고민하던 이 록펠러는 하나님의 성전 중심으로 방향을 옮기면서 잠도 잘 자고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길 잃고 방황하고 범죄하고 타락하고 쓸모없는 모든 인간은 광야에서 교회로 데려오십시오. 데려오면 그날부터 잠이 옵니다. 예배시간에 벌써 잠이 옵니다. 밥맛도 좋고 광야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복을 받으려면 국가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교회 중심에서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광야에 길이 없는데 예수님이 길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진리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식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들으러 오는 것이지 지식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사망의 길이 아닙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다시 다음 주일 나올 때까지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런데 광야 같은 세상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켜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찌들어버린 세상적인 것들을 벗어버리고 새로워지라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이 광야의 길에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인류역사에 광야를 통과하면서 천하에 없는 세계적인 사람들도 진시황도 별 수 없고 알렉산더도 별 수 없습니다. 히틀러도 다 자살했습니다. 별 수 없어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면 광야는 광야가 아닙니다. 은총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천국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