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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르피아 산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만광
밀양 삼랑진 안태리 [양수발전소]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즐겨찾는 곳이다.
특히 4월초에는 발전소 진입로에서 하부저수지에 이르는 5㎞의 길에
벚꽃이 활짝 펴 찾는 방문객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학생들을 위한 전력 홍보관도 운영하고 있다.
발전소 진입로에서 하부저수지에 이르는 5㎞의 벚꽃 터널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제11회 밀양 삼랑진 딸기한마음 축제
4월 6(토)~7(일) 밀양 삼랑진 안태 일원
우리나라 딸기 시배지 삼랑진에서 아름다운 벚꽃과 어루러진 축제 !
* 아름다운 가요콘서트*
남진,함중아,양하영,소명,장계현,김진욱 등 출연
(사진 : 밀양광장 / 사오십대 쉼터)
동래~한양 영남대로 삼랑진 구간 처자교 발굴
400년을 진흙속에서 오롯이 견디며 자기소임을 다하고있는 나무가 보입니다.
놀라운 석축 공법으로 축조한 "작원잔도" 전경
수백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잔도는 암벽에 튼튼하게 설치되어 있다
암벽에 설치한 돌기둥의 공법을 보고 모두다 탄성을 자아냈다
직각에 가까운 암벽에 둘기둥을 세우고, 그 돌기둥을 바탕으로 잔도를 설치한 석축공법은 정말로 놀라웠다
<밀양지 내용>
작원관지(鵲院關址)와 종병탄(鍾柄灘)
작원관(鵲院關)은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었는데
낙동강 본류와 응천강(凝川江 ★밀양강)이 합류하여 휘도는 절벽이 그 유허(遺墟)이다.
밀양의 동남쪽 관구(關口)로서
육지로는 양산과의 경계이며 서울로 북상하는 교통 및 국방상의 첫 번째 요해지(要害地)이다.
또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의 도요저(都要渚)를 바라보며 동서의 요충(要衝)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원관은
그 명칭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영남지역의 동서와 남북요로상의 작원관으로서
여행하는 관원(官員)들의 숙박소의 기능과 천험(天險)의 관방(關防)으로서
외적(外賊)을 경비하고 방위하는 술소(戌所)의 역할과 작원진 이라는 나루터로서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구실 등 이른바 원(院). 관(關). 진(津)으로서의
소임(所任)을 겸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작원조(鵲院條)에
작원재부동남사십리(鵲院在府東南四十里) 자원남행오육리허(自院南行五六里許)
연안잔도심위험그일곡착석개로(沿岸棧道甚危險其一曲鑿石開路)
부시천장지연수색심벽인개긍혼첩족이행(俯視千丈之淵水色深碧人皆兢魂疊足而行)
석유일수령추이익지금호원추암(昔有一首領墜而溺至今號員墜岩)
기서안내김해부지도요저야(其西岸乃金海府之都要渚也)라 하여
원우(院宇)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5.6리 지점에 있었던 이 관문은
낙동강을 굽어보고 김해 도요저를 대안(對岸)으로 한 높은 돌벼랑 천험지대인데
그 한 굽이에 돌을 깎아 사닥다리길(잔도 棧道)을 내었으나 매우 위험하다고 하였다.
밑을 내려다 보면 천길 심연의 물빛이 짙푸르고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하여
발을 모아 겨우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한 수령이 지나가다가 실족하여 빠져죽은 곳으로
원추암(員墜岩)이라는 이름이 붙은 험난한 요새이다
작원에 대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천험적(天險的)인 지형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교통상.국방상의 관방지(關防地)로서는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겠다.
따라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강우의 가야제국을 정토한 전략적인 요새지로서도 이용되었을 것이며,
중세시대에 빈번했던 왜구 침입의 주요한 방어진지로서도 역사적인 유서(由緖)는 많았을 것이다
근년에 발간된 어떤 향중(鄕中) 기록에는 작원의 창건을 고려시대라 하였으나
구체적인 연대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동국여지승람의 자료로서도
조선조 초기 이전에 이미 제도에 의한 작원과 관(關). 진(津)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것은 인정이 된다
그러므로 작원은 고려시대 이래 동래. 소산. 물금. 원동을 잇는 황산도(黃山道)의 접점으로서
용가(龍駕)와 금곡(金谷 상동)을 거쳐 성현도(省峴道 : ★경북 청도군 남성현 남쪽)에 연결되는
국도변 역원과 관소(館所)였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한 듯하다.
또 동래에서 한양에 이르자면 문경의 조령관(鳥嶺關)과 함께 통과해야 하는
교통상 국방상의 2대 관문(關門)이라는 통설도 인정할 만한 것이다
조선조 초기에 작원은
여지승람의 기록과 같이 그 원우는 잔도(棧道 :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 선반처럼 달아서 낸다)에서
5. 6리쯤 북쪽 지점에 위치하였고,
원(院)에서 남쪽에 위치했던 그 심험(甚險)한 1曲의 잔도는 자연적인 관소의 구실을 한 것이다.
원우(院宇)의 구조와 건물의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작원제영조(鵲院題詠條)에 문왈한남루왈공운(門曰捍南樓曰拱雲)이라 한 주기(註記)가 있고,
밀주승람( 密州勝覽) 작원조에도
유한남문사포교(有捍南門四浦橋)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남문(捍南門)과 공운루(拱雲樓)로 편액한 누각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과연 그 건물이 당초의 원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원관의 연혁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 전적지로서의 사실(史實)과 역사상의 평가라 할 수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에 이 작원관은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제1군을 맞아
가장 치열하게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항전한 전적지로서 기록되고 있다.
당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은 개전 초에 부산의 위급을 듣고 일부 부병(府兵)을 거느리고 달려갔으나
그 때는 이미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왜적은 그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
왜병의 제1군은 1만 8천 7백명으로 소서행장. 종의지(宗義智) 등 여러 장수가 지휘하여
소산(蘇山,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기장. 양산을 무인지경으로 짓밟으며 그 기세가 자못 높았다.
소산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군사는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 방위 책임을 진 장수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가는 추태만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기개 높은 젊은 무인 박진은 혼자서라도 영남을 지키기 위한 제일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임지인 밀양으로 분환(奔還)하여 이곳 작원관의 요새를 이용 제2 방위선을 구축하였다.
박진은 300명의 병졸과 약간의 우도(右道 : ★경상우도) 원병(援兵)에다가 지방민의 지지를 얻어 항전하였는데
왜적은 동래에서부터 거침없는 진격을 해오다가 비로소 이곳에서 완강한 박진의 저항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작원의 중요한 방위전에 관해서는 밀주지에 단편적인 자료가 산견(散見)될 뿐이다.
선조실록 등 정사(正史)에도 기록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그때 각 자방이 전화로 잿더미가 되고
적군의 무자비한 차단으로 현지의 보고가 중앙에 잘 전달되지 못한 데에서
이러한 유실(遺失)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다행하게도 선조수정실록에 적입밀양경부사박진수작원강잔(賊入密陽境府使朴晉守鵲院江棧)
잔도협진발통전거사(棧道狹晉發筒箭拒射) 적연일불득진(賊連日不得進)
개이적방함양산군원출기후(旣而賊傍陷梁山郡遠出其後) 수병망지개산(守兵望之皆散)
진주환부성분병고창곡이준(晉駐還府城焚兵庫倉穀而遁) 이라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왜적이 밀양으로 쳐들어오려 함에 부사 박진은 작원의 잔도를 지켰다.
이 잔도는 일부당관만부막개(一夫當關萬夫莫開)로 “한 사람이 협착(狹窄)한 목을 지키면
가히 만사람을 당적할 수 있는 요해지라”,
박진은 이곳에서 통전을 마구 쏘아 적은 연일 전진하지 못하였다.
아군의 결사적 항전으로 공격이 차단되자
왜적은 양산쪽으로 둘러서 작원의 후방으로 개미떼같이 기어올라 공격하매
우리 수병(水兵)들은 마침내 흩어져 괴멸되고 박진은 밀양성으로 달려 돌아왔다고 하였다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 조선기왜란부조(朝鮮紀倭亂部條)에는
박진자양산차수황산잔도(朴晉自梁山遮守黃山棧道) 적장승은교장은솔이진(賊將乘銀橋張銀率而進)
진역전참수급군관이대수김효우중환이사(晉力戰斬數級軍官李大樹金孝友中丸而死)
적유령절기귀로(賊踰嶺截其歸路) 진치환본부분창고돌위이주(晉馳還本府焚倉庫突圍而走)라 하며
혈전의 상황을 좀더 알려주는 바가 있다.
(자료: 밀양광장)
지금은 없어진 작원관 : 오른쪽 옹벽은 경부선 철로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엽서 사진은 일제 강점기의 삼랑진 지역 사진이다.
작원관 사진은 그 모습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 지금 복원된 작원관과 대조가 된다.
낙동강 철교가 있는 삼랑리 주변도 지금과는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1923년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축석법으로 보아 원래의 작원관은 아닌 것같고 일제가 경부선철로를 놓기 위해 약 50미터
정도 검세리 쪽으로 옮겨 놓은 작원관인 것같다.
뒤쪽에 초가집이 보이는데 주막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반 민가는 관에 가까이 들어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경상도 도사, 영천군수를 역임했던 安璹(안숙 1572-1624)의 "작원한남문"이라는 시가 있다.
옛날 더러운 냄새가 우리나라를 물들일 때
누가 삼군을 이끌고 이 관문에서 패했나
만고에 흐르는 강물도 수치를 씻지 못하고
지금도 원통한 귀신 강가에서 곡하누나
안숙은 1616년에 경상도 도사를 역임했으므로 이 시는 그 즈음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철교 : 주위인 삼랑리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자료 : 밀양사람)
삼랑진읍의 지세와 연혁
삼랑진읍은 밀양시 동남쪽에 위치하여 밀양, 양산, 김해 등 세 고을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삼랑진의 유래는 응천강(밀양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드는 지점으로 바다의 조수와 함께 세 줄기 큰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일렁이는 곳이라고 하여 그대로 불렀다고 한다. 삼랑이란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불리어졌던 것 같다.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감국사 충지〔1226년(고종 13년)∼1292년(충렬왕 18년)〕의 삼랑루에 관한 시가 『밀주지』에 전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겠다.
삼랑진읍이 지세를 살펴 보면 산간곡저와 하천유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500m의 산지를 이루며, 곳곳에 만어산(670m) · 매봉산(284m) · 금오산(760m) · 천태산(632m) 등이 솟아 있다.
동으로 금오산(720m)에서 맥을 이은 천태산(632m) 자락이 작원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서 양산시 원동면과 경계를 이루었고, 남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김해시 생림면과 경계를 지었다. 서쪽으로는 밀양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상남평야와, 북쪽으로 만어산(670m)과 자씨산 줄기를 경계로 단장면, 밀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낙동강과 응천강의 범람원 지역이었다. 응천강, 낙동강 두 강의 흐름을 따라 과거에는 자주 범람하였다. 지금은 제방공사를 하고 관개와 배수시설의 확충으로 밀양강 유역의 범람원인 임천, 숭진, 청학, 용성리와 낙동강 유역의 범람원 지역이었던 안태, 송지, 검세리 등의 마을 앞에 넓고 비옥한 평야가 펼처져 있다. 경부선 철도와 58번 국도가 있으며, 대구-김해간 고속도로가 본 읍을 통과하고 있다.
삼랑진읍은 밀양강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이 된다. 밀양강을 중심으로 하여 임천리, 청학리, 용성리 등의 지석묘군,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검세리의 지석묘군, 송지리, 율동리의 선사시대 유물 산포지 등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임천리, 숭진리, 검세리 등에는 삼국시대 고분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추화군의 영역으로, 고려시대에는 밀성군의 영역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고려시대부터 낙동강의 조운이 활발해지면서 수운 교통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삼랑리에 있는 통창과 후조창과 곳곳에 남아 있는 나루터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왜란 이후 면리제를 정비할 때 밀양도호부를 중심으로 동편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동면,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동면, 본 부의 아래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하동면이라 했다. 당시 방리에 대해서는 『밀양지(密陽志)』(신익전(申翊全), 『동강유집(東江遺集)』19권 3책, 1690년 간행)에는 금물리(金勿里),안태리(安泰里),병항점(甁項店),우읍곡(于邑谷),율동(栗洞),작원소(鵲院所),야항리(也項里),삼랑리(三浪里) 등 8개 리가 있었다. 『밀주지』(숙종 연간에 편찬)에는 금음물리, 광탄, 만어사, 삼랑리, 무흘역리, 율동리, 안태리, 부암, 작원리 등 9개가 있었다. 병항점과 야항리 등 이름은 없어졌다. 그 후 18세기 초에 하동면의 방리로 안태리, 율동리, 칠기점리, 무흘리, 숭진리, 청용리, 삼랑리 등 7개 坊里로서 재정비되어 종래의 금음물리, 광탄, 만어사, 부암(父庵), 작원리 등의 이름이 없어진 반면, 칠기점리, 숭진리, 청용리 등의 지명이 새로 나타났다.
19세기 중엽에는 일시 하동면을 하동초동면과 하동이동면으로 분리되었다. 하동초동면에는 미전, 용전, 우곡, 율동, 삼랑, 송지, 검세, 안태, 행곡 등 9개 리가, 하동이동면에는 임천, 숭진, 청학, 용성 등 4개 리가 각각 소속되었다. 1895년에 다시 하동면으로 합쳐졌다.
1914년도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행정개편으로 인한 삼랑진면의 면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동면(下東面)
1. 임천리 : 임천리, 숭진리 일부
2. 숭진리 : 숭진리, 학금리(鶴琴里) 일부
3. 청학리 : 학금리, 숭진리, 임천리 일부
4. 용성리 : 용성리, 숭진리, 임천리 일부
5. 우곡리 : 우곡리 일부
6. 용전리 : 우곡리, 미전리 일부
7. 미전리 : 미전리, 삼랑리 일부
8. 송지리 : 송지리, 율동리, 검세리, 미전리,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 일부
9. 검세리 : 검세리, 안대리 일부
10. 안대리(安臺里) : 안대리, 행곡리 일부
11. 행곡리 : 행곡리, 양산군 하서면 내포동 일부
12. 율동리 : 율동리, 우곡리 일부
13. 삼랑리 : 삼랑리 일부
(越智唯七,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7, 진한 글자는 면사무소 소재지를 의미함)
위와 같이 면리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 때 개편된 면리의 명칭은 해방 이후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현재의 밀양권역은 기본적으로 1914년의 행정개편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위의 사실로 보아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에는 종전의 자연 부락을 통폐합하여 임천, 숭진, 청학, 용성, 미전, 용전, 우곡, 율동, 삼랑, 송지, 검세, 안대, 행곡 등 13개 리로서 법정리로 삼았으며,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에 소속된 류도 마을(버들섬)을 본읍의 송지리에 편입시켰다. 이 때 면사무소는 송지리에 두었다. 1918년에는 하동면을 삼랑진면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삼랑진면은 경부선과 마산선(후에는 경전선이 됨) 철도의 분기점으로서 삼랑진역이 생겨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1963년에는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6년에는 임천리에다 출장소를 두어 임천·숭진·청학·용성리 등 지역의 행정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현재 삼랑진읍은 13개의 법정리에 종전 59개의 자연 부락을 통폐합하여 31개의 행정리를 거느리고 있다.
유적지로는 신라 시대의 王堂坪과 王亭子 등이 문헌 기록괴 지명으로 전하고 있으며, 또 중세 시대부터 내려오는 ‘금음물부곡’이 있다. 그 위치는 만어산 서남쪽에 위치한 임천·숭진·청학·용성리 등 일대로 추정된다. 이 부곡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존속해 왔던 것 같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성(土姓)으로 제(諸)씨가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부곡이 고적조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에는 소멸되었던 같다.
또 고려 시대부터 남쪽 연해에서 개경에 이르는 교통상 요지로서 당시 금주도(金海)의 무흘역(無訖, 지금의 美田)이 있었던 곳이며, 낙동강 동쪽 벼랑에 작원관이 자리잡아 국방상의 요충지로도 알려져 왔다.
불교 유적으로는 만어사와 3층석탑이 있으며, 숭진리 삼층석탑과 부암(부은사) 등이 있다.
일찍부터 삼랑진읍은 육로와 수운의 교통 중심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 것 같다.
육상교통으로는 조선시대에는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가 본 읍을 통과하였다. 고개로는 단장면 감물리로 가는 당고개, 무흘고개(미전고개), 솔티고개 등이 있다. 수운의 유적으로는 조선시대의 후조창의 유적이 있고, 나루터로는 삼랑나루(낙동나루), 작원나루, 광탄나루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외에 종병탄, 시목포, 광탄, 작원관 등은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만어화석, 오우정, 인전소, 원추암, 승교, 처자교 등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충렬왕대의 스님 원감의 삼랑루시, 조선조의 부사 안주의 만어사시, 낙원 안숙의 한남루시 등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일제 때는 삼랑진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인과 농장주들이 수백 명이나 거주했으므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헌병대, 경찰파출소를 비롯하여 과수원, 시장, 일본인 학교, 각종 상점 등이 일찍부터 들어서서 도시화를 이룬 지역이다. 또 근년에는 안태리의 천태산 기슭에 낙동강 물을 끌어 올려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대한 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이 일대는 빼어난 관광지로 바뀌어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밀양강과 낙동강의 범람 때문에 생계를 위하여 농업 이외에 수공업도 활발히 하였던 같다. 지금도 쇠점(金店), 통점(桶店), 사기점(沙器店), 칠기점(漆器店), 가래점(楸店)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근래까지 검세리, 우곡리, 칠기점 등에서는 옹기와 기와를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또 낙동강의 수운이 활발해짐에 따라 많은 배가 오르내리는 것을 이용하여 일찍부터 상업 활동도 하였으며, 어업도 많이 하였던 것 같다. 특히 낙동장(삼랑장)은 인근에서 유명한 장시(場市)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없어지고 송지장이 대신하고 있다. 낙동강에서 어업을 하여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수운이 활발함에 따라 상선과 배가 많이 왕래하였다. 강이 굽은 곳에서는 배가 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고니”라고 하여 배를 전문적으로 끌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고니에 대한 것은 2009년 3월 14일에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중리 마을로 해서 작원잔도를 답사할 때 중리 마을에 평생 거주해 온 서주식씨(당시 73세)에게 작원잔도와 배를 끌고 가던 고니에 대하여 증언을 해주었다.
2010년 1월 22일에 삼랑진읍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김부웅씨(삼랑진읍사무소 근무, 58세)에게 같은 증언을 들었다. 1950년대까지도 낙동강에서 배를 끄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해 주었다.
삼랑진읍의 주산물에 대해서『밀주승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토품(土品)조를 보면 산을 등지고 물가에 끼어 있어서 그 토지는 부드러운 흙이 많다. 보리와 뽕나무, 과실이 적당하다고 한다.
토산(土産)조를 보면 잉어(鯉魚), 연어(鰱魚), 숭어(崇魚), 웅어(葦魚), 복숭아, 배, 능금(林檎), 포도(葡萄), 배추(白菜), 무(菁根), 반석(磐石), 비석(碑石) 등이 난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쌀·보리 생산 이외에 과수 및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딸기와 복숭아, 포도, 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특히 삼랑진읍 송지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딸기가 재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4월이면 딸기축제가 열리고 있다.
지금은 신노선공사 중인 경전선 복선공사와 부산 신항만 배후 철도공사가 진행 중이며, 대구-부산간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설치, 경부선 고속전철화, 삼상교, 삼랑진교 재가설 등으로 새로운 교통의 요충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1933년에는 총호수가 2,351호이며, 이 중에 일본인이 116호, 중국인이 2호가 있다. 인구는 총 11,972명이다. 남자는 6,169명이며, 여자는 5,803명이다. 일본인은 남자가 217명이고, 여자는 245명이다. 중국인은 남자만 4명이다.
전체 면적은 면적 78.31㎢이며, 총세대수는 3,401호이며, 인구는 7,729명이다. 남자는 3,850명이고, 여자는 3,879명이다(2009년 12월 말 기준).
〔참고문헌〕
『고려사』,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지』(신익전, 『동강유집』권16 별록, 1690년 간)
『밀주지』(17세기 말), 『경상도 읍지군』(1871, 1895, 아세아문화사 간, 영인본)
『밀주읍지』(정조 연간), 『밀주구지』(정조 연간)
『밀주지』(밀양향교, 1933년), 『밀주승람』(손병현, 1933년 경)
『밀양지』(밀양문화원, 1987년), 『밀양지명고』(밀양문화원, 1994년)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越智唯七, 1912)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越智唯七, 1917)
『밀양시 문화유적지도』(밀양시와 동아대학교 박물관, 2001년)
(자료 : 푸른함성)
(사진 : 푸른함성)
삼랑진의 풍경(사진 : 木人)
▽숭진초등학교
▽ 숭진리 앞 부산대 밀양캠퍼스
▽ 삼랑진읍 시내전경 부은사에서
▽ 삼랑진읍 금호리
▽ 가래점을 바라보고 잡은 숭진리 못
밀양의 자랑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30)- 삼랑진역 급수탑(三浪津驛 給水塔)
- 증기기관차에 물을 넣어주던 급수시설 -
밀양시 삼랑진읍 송지리 156-1번지 삼랑진역 철로 변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근대 문화유산인 급수탑이 우뚝 솟아 있다.
삼랑진역 구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급수탑은 옛날 증기기관차에 물을 넣어주던 급수시설로 1923에 설치한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51호)이며, 2003년에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소유자는 한국철도공사이며 수량은 1동1층(36.7㎡)이다.
급수탑은 사계절 색을 달리하는 담쟁이 넝쿨 잎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일 년 내내 나그네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삼랑진역은 급수탑으로 인해 기억되는 정겨운 시골역이다.
급수탑은 줄무늬로 표현한 석조이며
위쪽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는 철제 물탱크를 설치하였다.
기계실 출입구에 별도의 지붕을 가진 포치(porch)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포치는 급수탑 앞으로 급수탑과 지하시설을 잇는 통로지붕과 입구건물 등
지하시설 공간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계실은 목재로 만들어 졌으며,
지하시설 통로 골함석 지붕과 입구 건물은 나무로 만든 구조인데 판자로 덮어져 있다.
당시의 트러스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지붕의 일부분은 세월이 흐른 탓인지 뜯겨서 나가 지하밑 부분이 내려다보일 정도이다.
탑 뒤로는 급수정을 덮은 덮개로 추정되는 콘크리트 침목들이 덮여진 공간이 있다.
급수탑이 석조에서 철근 콘크리트로 넘어가는
시대적 변천 과정을 잘 나타내어 주는 철도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삼랑진역은
경부선을 운행하는 열차의 보통 역으로 1905년5월28일부터 영업이 시작되었다.
급수탑이 우리나라 기차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99년 노량진~재물포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1개의 우물을 이용하던 급수탑은 1923년에 만들어졌다.
증기기관차 시대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급수시설은
1950년대부터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급수탑이 지난 역사를 기억하며 덩그렇게 근대유물로 우리지역에 남아있다.
삼랑진을 지날 때 마다 육지의 등대처럼 여겨진다.
삼랑진역은 3면6선의 승강장을 갖추고 있으며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경부선과 경전선의 분기역이다.
적산가옥이 삼랑진역 주변에 한 블록 모여 있다.
1900년대의 흔적을 조명해 주는 철도직원의 숙소였던 곳이다.
높은 돌담 벽과 나무집에 계단이 놓여있는 집들이다.
이런 집은 신분이 높았던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다.
적산가옥은 1945년 팔일오 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日帝)나 일본인 소유의 집을 광복 후에 이르는 말이다.
역 도로변 상가 중에도 그 시대의 가옥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이색적인 거리이다.
상점들은 아주 시골스럽고 낮은 단층건물들이 많다.
장날에는 조용했던 거리가 분주한 시골장터 풍경들로 변한다.
장터와 연계한 적산가옥 거리를 걷는 즐거움도 개발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기차를 타고 삼랑진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이 있다고 한다.
특산물로는 딸기가 유명하여 매년 4월에는 삼랑진 딸기축제가 열리고 있다.
학창시절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딸기를 사 먹으러 온 기억도 있다.
얼마 전 밀양관광연구소에서
<영남대로 삼랑진구간 문화유적 정비 및 관광개발 기본구상용역> 주민공청회를 실시하였다.
삼랑진은 많은 관광자원을 간직하고 있고 최근 복원된 문화재도 있다.
계획대로 정비되고 관광개발이 이루어진다면 규모도 으뜸가는 관광명소가 되리라본다.
낙동강이 넓게 펼쳐지고 만개한 벚꽃오거리 봄 또한 아름답다.
만어산의 암괴류, 작원관지, 작원잔도, 처자교, 숭진리 삼층석탑, 천태호, 삼랑진양수발전소 등
많은 문화재와 볼거리가 있다.
삼랑진역에 가면 기차의 기적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하다.
증기 기관차의 칙칙 폭폭 하는 우렁찬 기적소리에 놀랐던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급수탑의 나이만큼 원숙한 여유가 감도는 역이다.
언젠가 역사 속에 기억될 간이역을 떠올려 보며 역 광장에서 한 포즈를 취했다.
그늘이 좋은 벤치에 앉아보았다.
<삼랑진역>을 노래한 이우걸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낙엽이 쌓여서 뜰은 숙연하다
노인 혼자 벤치에 앉아 안경알을 닦은 사이
기차는 낮달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글- 이두애(수필가)ldae0602@hanmail.net
(원문: 미리벌 향기 / 운영님 작 )
첫댓글 안태길 벚꽃거리도 진해 못지않턴데~~~~~~~~~
친구 영문이가 있어서 밀양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네 ㄳ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