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평가하는 말로 '삼불후'란 말이 있다.
세 가지 썩지 않는 영원한 것!
첫째는 그 사람의 인격과 덕행이고
둘째는 그 사람이 일을 하여 어떤 공을 세웠는가
셋째는 그 사람이 남긴 학문과 저술
즉 입덕, 입공, 입언
덕을 확립하고 , 공을 세우고, 언어를 통해 학문을 수립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퇴계와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했으면서도 율곡은 퇴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퇴계 선생은 세상에서 유교의 최고봉이다. 정암 조광조 이후로는 견줄 만한 분이 없다. 그 재주와 배짱은 정암이 미치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의리를 탐구하여 자세하고 은미한 데까지 드러내는 것은 정암이 미치지 못한다.
조선조 사회의 분위기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 율곡의 이같은 평가는 극찬에 가까운 것이다.
율곡의 평가처럼 퇴계는 일생을 의리와 리의 탐구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강력하게 부르짖었다기 보다는 자연과 인간, 사물과 실제 세계에 대한 원리와 이치를 끝까지 캐물어 들어가는 공부에 몰두한 것이다.
외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으로 성찰하는 삶을 살며 언행일치에 힘썼다.
그러한 퇴계의 삶은 혼란의 시대를 감내하면서 사색과 연구의 결과로 남아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영남학파의 태두이자 퇴계확파의 교육 정신이었다.
퇴계의 최대 강점이라면 무엇보다도 교육과 연구, 토론에 임하는 학문의 자세에 있다. 퇴계는 제자가 물으면 깊이 생각한 후에, 자상하게 일러주는 친절하고 겸손한 스승이었다. 이는 늘그막에 자식과도 같은 새파란 청년이던 고봉 기대승과의 사칠논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를 두고 이식은 퇴계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배우는 사람을 이끌어주고 붙들어준다. 병통에 따라 약을 준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궁색하지 않고, 자세하고 깊이 있게 살피며, 간절한 마음으로 대한다. 그러기에 학문이 제대로 다듬어지고, 그것이 문장으로 드러나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 얼마라 덕성이 깊은가!"
퇴계의 수제자에 속하는 조목, 김성일, 정유일 등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을 칭송한다.
"학문에서는 자사하면서도 넓고, 의리에서는 바르고 깊이가 있어, 학문과 도덕 모두에서 우리나라 최고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날 정도로 모범을 보여주고, 가까이 다가서면 따스하여 다정한 마음과 가르침이 넘쳐난다. 선생의 곁에만 있어도 나쁜 마음이나 행동이 저절로 없어진다."
"처음에 선생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함부로 다른 사람과 학문을 논의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배운 것은 바르고 얻은 것은 참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품과 학덕이 날로 세상에 드러났다. 관직에서 물러나면 덕은 더욱 높아지고 행실은 더욱 친절해지며 스스로 터득한 것이 깊어지며 유유자적하는 삶이 늘어났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말한다.‘우리나라에는 참된 선비가 있다!' 그 후로는 선생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퇴계선생'이라고 불렀다."
퇴계의 사상, 근대 일본과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다
자성록을 숙독하고 마음이 눈을 뜬다 - 야마자끼 안사이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교육헌장에도 영향을 끼치다
바야흐로 세계적 사상가로 거듭하고 있는 퇴계 이황
「입덕은 법을 세워 널리 펴 민중을 구제하는 것을 말하고, 입공은 재난을 구제하고 어려움을 없애며 그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말하며, 입언은 말에 요점이 있어 이치를 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立德謂創制垂法, 博施濟衆. 立功謂拯厄除難, 功濟於時. 立言謂言得其要, 理足可傳.)」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평가하는 말로 '삼불후'란 말이 있다.
퇴계 이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