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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평과 행복한 돼지의 삶(춘지, 그리고 뚜 다라!)
장한평!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삼각산(북한산은 일제가 삼각산의 위용을 훼손코자 그렇게 고쳐 부른 것임) 봉우리들의 분수령에서 남쪽 경사면으로 흘러내린 물이 삼청동 계곡을 지나 황토현(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마주보고 있는 태평로에 있었던 작은 동산)에서 청계천이 시작되고, 여기에 남산 분수령에서 북쪽비탈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합수해서 용두동과 마장동을 지나 청계천이 되고, 역시 삼각산과 도봉산 그리고 의정부지역의 수많은 야산과 수락산의 물이 흘러내려 중랑천을 이루고, 이 청계천과 중랑천이 한양대학교 옆 살고지 다리에서 만나 다시 1km쯤을 흘러 응봉 앞 한강줄기의 무수막강에 합수되어 마포와 양화나루를 지나 김포반도와 북녘 땅을 가르면서 서해바다로 빠져든다.
한강이 천리이면 강 양편으로 늘어선 마을에서 한강을 부르는 또 다른 천개의 이름이 있었으니 충주의 “달래 강”, 여주의 “여 강”, 마포의 “서강”과 같이 응봉에는 옛적에 무쇠 솥을 만드는 주물공장인 무쇠막이 있어서 그 앞의 강을 “무쇠막강”으로 불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무쇠 막”이 발음하기 쉬운 “무수 막”이 되어 뚝섬과 응봉 앞의 강 이름을 왕십리 사람들은 “무수막강”으로 불렀다.
오늘날은 서울이 비대해 지면서 왕십리동이 조그맣게 남아 있으나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시구문 밖 성동구 전체를 당시 서울사람들은 “왕십리”로 불렀었다.
그러니 그 당시는 “왕십리 ≑ 성동구”였던 셈이다.
무수막강의 건너편이 천하의 간신 한명회가 관직에서 물러나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늘그막에 한강물을 더럽혔다는 압구정에서 유래한 압구정동이다.
그 중랑천과 청계천물이 천하의 절경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등의 진토를 수억 년을 두고 실어 날아온 것이 싸이고 쌓여 평평한 평야를 이루었으니 그 평야를 “장한평”이라 불렀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한평은 호남평야의 막내 동생과 같이 드넓은 논과 밭과 습지가 어우러진 평야였다.
여기에 청계천 서편으로 대지를 가르며 지나가는 경원선 철길(왕십리역~청량리역)사이의 땅도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그것을 다 합친 것이 바로 장한평이었다.
그 장한평 논과 웅덩이는 1960년대까지는 가난한 왕십리 아이들의 여름철 천렵과 물놀이 놀이터였다.
장한평 논과 습지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여름철에 몸이 초록색깔을 띄고 있는 몸집이 큰 왕잠자리를 잡는 놀이였다.
내가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던 충청도 촌구석에서도 그 파랗고 몸집이 큰 잠자리는 표준어인 “왕잠자리”나 “말잠자리”로 불렀었는데 왕십리 아이들은 그 잠자리를 “춘지”로 불렀다.
사전을 찾아보아도 “춘지”는 잠자리를 부르는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단어이고 그때 그 시절 왕십리아이들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다 소멸될 이름인 것 같다.
어쩌면 일본말에서 유래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춘지”를 알다 죽을 마지막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왕십리 아이들의 춘지 잡이 놀이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춘지의 수컷은 몸이 더 푸르고 짝짓기를 하기 위해 암컷을 찾아 물가를 빠른 속도로 배회한다.
그러니 잠자리채를 팔기는 하였어도 잠자리채를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은 긴 풀을 뽑아 움켜쥐고 날아다니는 춘지를 잡는데 잘 잡히지를 않았다.
반면에 춘지의 암컷은 아주 드문데 수컷에 비하여 몸 색깔이 누른 편이고 나는 속도도 느리고 대개는 수초에 매달려 앉아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산란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암컷은 드물기는 해도 일단 눈에 띄면 잡기가 수컷에 비하여 훨씬 쉬웠다.
이 암컷을 한 마리 잡아 허리에 길이가 50cm쯤 되는 실을 묶고 실 끝에 나무토막을 묶어 수컷이 날아다니는 물가를 향하여 수컷의 눈앞에 들이대고 “뚜- 다라!, 뚜 다라!”하면서 빙빙 돌려댄다.
그러면 수컷이 짝짓기를 하기 위해 암컷의 등에 올라타고 순간적으로 꼬리 끝을 암컷의 뒤통수에 쑤셔 박으며 짝짓기 첫 단계 동작을 마무리 한다.
이때 암컷을 얼른 풀밭에 주저앉히면 수컷도 따라 풀 속에 처박히고 그 순간 양손으로 암수 한 쌍의 춘지를 덮쳐 수컷을 잡아 양 날개를 접어 입술에 물고 암컷을 가지고 또 수컷을 홀려 잡고 하는 것이다.
암컷 한 마리를 가지면 이렇게 해서 수컷 열 마리까지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 간에 춘지 암컷과 수컷의 교환은 대개 1:3~5 으로 이루어 졌다. 그만큼 암컷이 귀한 몸이었다.
어찌해서 수컷만 한 마리 갖고 있는 아이는 그 수컷의 몸에 호박꽃의 암술을 따서 수컷의 몸에 노란 꽃가루를 발라주면 수컷이 암컷과 비슷하게 노란색을 띠게 되고, 그게 요샛말로 짝퉁 암컷이 되는 것이다.
그 짝퉁을 역시 실에 묶어 수컷을 홀려 잡는데 진짜 암컷으로 하는 것 보다는 성공확률이 훨씬 낮다.
짝퉁 암컷을 갖고 수컷을 홀릴 때 옆의 아이가 “호박꽃!”하고 외치면 짝퉁을 노려보고 짝짓기를 하기 위해 달려들던 수컷이 어떻게 알아챘는지 뺑소니를 놓는다. 그러면 짝퉁을 갖고 수컷을 홀리던 아이와 “호박꽃!”을 외친 아이 간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다.
이 “호박꽃!”이라고 외친 소리가 춘지 수컷을 향하여 그거 짝퉁이니 속지 말라는 소리이고, 잠자리가 사람의 말을 어찌 알아들을까마는 이상하게도 “호박꽃!”소리를 지르면 정신없이 짝퉁을 향하여 달려들던 수컷이 예외 없이 뺑소니를 치는 것이다.
아-!
춘지!
뚜- 다라!
정녕코 내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알다 가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 평화롭던 장한평의 서편 끝자락에 1950년대 말에 폭풍이 몰아쳤다.
청계천과 경원선 철길 사이에는 왜정시대부터 있었던 조그만 발전소인 왕십리내연발전소가 널따랗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50년대 말에 그 왕십리내연발전소 북편으로 경원선철길 바로 옆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토목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었던 불도저가 들어오고, 흙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줄 지어 들어오고 삽을 든 인부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바로 왕십리 도축장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논과 습지를 메우고 콘크리트 옹벽을 친 4각의 물웅덩이를 수도 없이 만들더니 그 물웅덩이위에 크나큰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 여름 그 물웅덩이에서 잠자리 잡기를 하던 초등학생 한 명이 익사를 했다.
죽은 아이를 건져 거적을 씌워놓은 싸늘하게 식은 자식을 보며 몸부림치며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같았으면 공사장을 그렇게 위험하게 방치한 건설회사가 곤욕을 치렀겠지만 당시는 그저 불운해서 어린 아들을 잃은 한 가족의 슬픔으로 끝났다.
그렇게 해서 왕십리 아이들의 천혜의 놀이터는 영원히 사라졌다.
내 놀이터도 그렇게 해서 빼앗겼고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왕십리 도축장이 서울의 대표 도축장이었고, 10여 년 전까지 서울시민들의 소와 돼지고기를 생산하던 도축장은 도시화에 밀려 구로구 고척동인가로 쫓겨 갔고, 지금은 정육도매상과 고기를 주 메뉴로 하는 식당들이 남아 그 자리가 도축장 터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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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여년을 건너뛰어 1980년대 초
한전에 입사하여 신당동 전기시험소에서 근무를 하던 나는 평직원에서 과장으로 막 승진을 하여 1980년 4월에 왕십리내연발전소의 한 편을 쪼개 한전에서 필요한 전기 자재를 관리하는 <한전 서울보급소>라는 한전사업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20여 년 전에 불도저와 삽날에 빼앗겼던 내 어릴 적 놀이터 바로 옆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전두환과 노태우가 총구를 쑤셔대고 칼날을 갈며 허수아비 최규하를 모양새를 갖춰 내 몰고 정권을 강탈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전남 광주 한전보급소에 출장을 보낸 직원이 아무 연락도 없이 몇 날 째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고 광주에 있는 모든 한전과 전화도 불통이었다.
직원을 출장을 보낸 나 뿐 아니라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출장을 보냈던 직원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회사가 난리가 난 것이다.
며 칠 뒤 간신히 그 직원한테서 온 전화를 받을 수가 있었다.
아직 광주의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전쟁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여관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다고 하는 전화를 하다 전화도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그게 바로 <5.18광주민중항쟁> 이었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도, 그 항쟁의 한 가운데 있는 출장을 보낸 직원도 뭐가 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게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다.
그 광주사람들의 슬픔은 오늘도 광주사람들만의 슬픔이고 아픈 기억이다.
이게 전 국민의 슬픔이 되면 그날은 <민주주의>도 <평화통일>도 되어있는 때일 것이다.
아-!
1980년의 광주!
그들의 눈에 맺힌 피눈물을 언제 어떻게 누가 씻어준단 말인가?
5.18 광주사태(전두환 일당의 표현)도 그럭저럭 가라앉고 문어대갈통이 휘젓는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세상이 되었다.
“정의사회 구현”이 전두환 정권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였다.
총칼과 군홧발의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던 시절이다.
하루는 직원들과 일찌감치 점심식사를 끝내고 도살장 견학(?)을 가기로 했다.
곱게 생긴 여직원 한 명을 포함 너 댓 명이 손을 잡고 바로 옆 도축장으로 향했다.
먼저 소를 잡는 도축장 견학을 하기로 했다.
지붕이 높다란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안개가 자욱한 천장에 매달린 큰 파이프라인을 통하여 이미 죽어 축 늘어진 수많은 소들이 줄을 이어 뒷다리가 묶인 사이로 끼워진 파이프라인을 타고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마 그 다음 단계마다 목을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네 다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부위별로 절단을 하여 냉동차에 실려 각 지역 도매상으로 풀릴 것이다.
소를 죽이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고, 같이 간 여직원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장면을 다 보았다.
소를 도축하는 것은 더 이상은 볼 수가 없고 거기까지라고 했다.
다음은 돼지를 잡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소를 잡는 것 보다 훨씬 낮은 기둥만 바쳐 놓고 벽은 없는 슬레이트를 얹은 긴 일(一)자 건물이 돼지를 도축하는 건물이란다.
그 지붕 밑에는 4면을 높이 1m정도 되는 콘크리트옹벽으로 틀어막고 철문만 하나 달랑 달린 내부면적이 5~10평정도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옹벽 통이 옆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이어져 있었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이십여 전 전에 보았던 내 또래의 사내아이 한 명을 익사케 했던 바로 그 옹벽웅덩이였다.
수많은 돼지를 실은 차가 들어오더니 차에서 돼지를 내리게 해 그 옹벽웅덩이의 철문을 열더니 한 웅덩이마다 돼지를 수십 마리씩 몰아서 집어넣고 철문을 닫아걸었다.
조금 있으려니 짓 푸른 두루마기 같은 도포를 걸친 도살부(고유의 우리말로 백정) 몇 사람이 손에 큰 해머(함마)하나씩을 들고 나타났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해머의 한쪽에는 못 끝을 잘라 용접해 붙인 것 같은 뾰족한 돌기가 돋아나 있었다.
철문을 열고 웅덩이 안으로 들어간 도살부가 앞에 닥치는 대로 돼지의 양 눈 사이 미간에 돌기가 튀어나온 부분으로 한 방씩 먹였다.
제대로 맞은 돼지는 “끽!”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나자빠져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해 가볍게 떨다 잠잠해 들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여직원이 돼지 대신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고 줄행랑을 놓았다.
하지만 남자직원들은 그대로 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하여 설맞은 돼지는 왕십리가 다 떠나가도록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한쪽 구석에 처박혀 조금 더 꽥꽥거리다가 정통으로 맞은 앞 동료의 뒤를 따랐다.
돼지 한 마리가 쓰러질 때마다 웅덩이 안은 안개가 짙어지며 피의 수위가 점점 더 올라갔고, 웅덩이 안은 말 고대로 피바다였다.
그 숨 막히는 장면에서 나는 <행복한 돼지>의 삶을 보았다.
옆 동료가 쓰러져 피를 흘리고, 바로 1초 뒤는 자신의 차례인데 그 다음차례의 돼지는 아무 근심이나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동료가 흘리는 피를 열심히 핥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행복하게 태어나서 항상 배부르고 등 따습게 아주 행복하게 한평생을 살다 한 순간에 아무 고통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사주팔자를 드세게 타고난 돼지만이 빗맞아 고통을 10여 초간 느낄 뿐이다.
한 10분간의 살육의 잔치가 끝나나 우리 안은 잠잠해 졌고 도살부가 피가 범벅이 된 도포를 입은 채로 자신의 밥줄인 해머를 들고 나와 맛있게 담배 한 대를 빨더니 성큼성큼 샤워장인 듯싶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 도살부가 옆으로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결국 돼지대신 비명을 질렀던 여직원은 그 다음날 결근을 했고, 그 뒤로도 출근을 하여서는 한 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고, 의식적으로 창 너머로 빤히 바라다 보이는 도축장 편으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같이 견학을 했던 남자직원들도 며칠 간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무두다 그것을 견학한 것을 후회했다.
그 도축장 옆으로 즐비한 식당들은 다른 곳 보다 고기양이 넉넉하고 국물이 진해 한전직원들의 단골 회식장소였고, 서울의 이곳저곳에서 식도락가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였다.
그것을 견한 한 뒤로는 한전직원들은 그 식당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회식장소를 바꾸었다.
그것도 벌써 30여 년 전의 옛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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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새누리당 당내 대선 예비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던 이재오와 정몽준은 박근혜와 경선 룰을 같고 줄다리기를 하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완전 국민경선이 받아들여 지지 않자 경선 참여를 포기했고, 정몽준은 그 경선 참여를 포기하는 변으로 “행복한 돼지”론을 들고 나왔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그만인 행복한 돼지로 살다 가느니, 차라리 가시밭길을 걷더라고 사람의 삶을 살겠다는 오기이자 비아냥거림이었다.
그 정몽준이 지금 <행복한 돼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불행한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시각과 판단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떤 삶인가?
행복한 돼지의 삶인가?
불행을 사주팔자로 타고난 불쌍한 인간인가?
우리국민들은 또 무엇인가?
행복한 5천만의 돼지인가?
행복한 5천만의 사람인가?
아는 사람은 답을 좀 알려주십시오!
첫댓글 좋은 글 퍼갑니다.
저도 70대년대 80년대를 지나..90년대 2000년대를 기억하면....분명 돼지가 인간으로 진화 한다고...
아니 돼지라도..이간의 삶을 살고..인간인가..? 하며 인간이 일꺼야...까지...그런데..돼지적 판단이..돼지적 결과가..??
우린 아직 돼지 인데...인간인척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 이라면...이런결과가 나오지 않고..나왔다 해도..이렇게 대응하며 살지 않았겟죠..돼지가 인간의 삶을 맛본 후유증 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