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천의 조계산송광사(승보사찰)만 알았지 완주의 종남산송광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확한 주소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번디
신라진평왕 5년에 터를 잡았고 경문왕 7년에 구산선문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삼조인 보조국사 체징에 의해 개창되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어언 수백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덕림 스님을 중창주로 설두하여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통해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재정이 고갈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본사를 복원·중창한다는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보조국사의 뜻을 쫓아 덕림스님 등이 뜻을 내었고 당대의 최고의 승려로서 국가의 절대적 신임과 수행, 학덕을 갖춘 벽암각성대사를 大공덕화주로 파견하여 본사를 복원·중창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복원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간과할 수 없었기에 국가의 절대적 정책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신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오실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하며 병자호란시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본사에 승군 700명을 배치하였던 곳으로서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시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을 나투신 곳이기도 하다.
진묵스님께서는 이적을 많이 나투신 관계로 그저 신화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나 초의선사가 제봉선사의 주선으로 편찬한 문헌외에는 족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이곳 송광사 개창비에 (大禪師 震○堂)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진묵스님께서 많은 시간을 이곳에 주석하셨음을 엿볼 수가 있다.
벽암각성대사도 본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1660년(현종1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그후로 전법초조인 도의국사의 뜻을 쫒아 선종대가람사로서 많은 고승 대덕이 배출된 곳이다.
일주문이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리워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사료된다.
불조의 혜명을 받들어 1600년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고 열악한 전북불교를 회생시키고 민족과 역사속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선종대가람사 종남산 송광사의 새로운 조명과 절대적 중흥이 필요하다.
★. 일주문(終南山松廣寺 한자도 순천의 송광사와 같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호
금강문은 팔작지붕이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3호)
금강역사 음상과 동자상
금강역사 아상과 동자상
사천왕문은 만재지붕
소조 사천왕상(보물 1255호)
대웅전(보물 1243호) (봉안된 불상을 보면 대웅보전이라야 맞다.)
대웅전 현판 글씨에는 쓴 사람의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통상관례이나 요즈음은 낙관한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을 하였음에도 이와 같이 쓴 사람의 낙관을 한 것은 절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왼쪽의 낙관을 보면 '의창군서'라고 되어있다. 의찬군은 선조의 아들 이광이다.)
소조 삼세불중 중앙의 석가모니불상
석가모니불의 왼쪽 약사불상( 아미타불로 착각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왼손에 약이 있다.)
협시불로 아미타불상
이 절의 특징이 대웅전내에 목조 삼패(가 있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0호)
(유교로 말하면 위패불교에서는 불패라고 한다.)
가운데의 목패에는 '주상전하수만세' 라고 써져 있다. 가장 높아서 2.28m이다. 글씨의 좌우로 쌍용을 그려서 격이 다름을 나타내고 있다.
세자저하수천추 높이 208m 단용이다.
왕비전하수제년 높이 2.08m
대웅전 천장의 닫집없이 단청을 하였는데 아주 아름답다. 불상이 매우 높아(5m) 천장에 닿을 정도라 아마 닫집을 생략하지 않았나 싶다.
대웅전 안에 이런 상은 처음 본다.
대웅전 추녀의 단청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있는데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서원에 있는 료대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모양이 아주 재미있었다. 비석받침처럼 거북이등에 세워져 있었다.
괘불걸이 대도 매우 높은 것을 보면 이 절에 큰 괘불이 있다는 뜻인데 보물은 아닌 모양이다.
종루 (보물 1244호)
십자 모양의 종루로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조선시대의 동종을 비롯 법고 운판 목어가 있다. 종은 2 구가 있었는데 바닥에 그냥 둔 것이 조선시대 동종인 듯
하였다.
조선시대의 동종이라고 하는 것인데
종신은 아래로 내려갈수로 넓어지는 조선시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용뉴와 천판은 고려시대종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상대의 태두리가 뾰족뾰족한 것)
걸려 있는 이 종은 최근에 만든 듯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2호
개창비의 귀부
신라시대에는 거북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거북몸에 용머리를 한 것이 나타난다.
9용자중의 맏이로 힘이 좋다고 하여 비를 등에 지고 있다.
최근에 만든 탑인데 8각으로 날씬하게 만든 것을 보면 고려탑 형식을 모방한 듯하다.
곳곳에 이런 동자상이 있다.
경내에 이런 정자도 있었다.
합장을 한 장승도 있었다.
첫댓글 가까이 살면서도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오작교님을 통해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들러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