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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이규성에 대한 추억들 : 겉지층과 곁지층
- 2026 08 3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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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이야기할 수 있는 스승과 선배가 행복하다. 그 이상으로 동지가 있다는 것은 더욱 행복하다. 아마도 형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흐름 속에 있었고, 이들 속에서 각자의 고유성을 잘 보았고, 그리고 그 나름으로 소화했을 것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는 것은 유효하다. 그 인물은 영토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학문에서는 관점들 사이에 길이 달라도 경계가 없고, 그 연구자가 속한 영토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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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학문을 하려면 가학(家學)과 연관 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라는 충고가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보다 세상과 관심에 맞는 학문의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은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사람들을 사귀는 방향까지 바꾸었다. 사람들은 부마항쟁(1979)이 박정희정권을 몰락시켰다고 하지만, 박정희의 폭압으로 몇 년간 대학가가 학내 시위조차 없이 조용했는데, 1978년 10월 경북대의 가두시위와 3개 대학이 연대로 데모가 일어날 줄 몰랐던 시기, 그 가두시위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1979년 12월 26일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숙명은 그 다음달 친형이 우리 형제의 곁을 떠났고 서울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로 올라온 1979년 초봄은 아직 싸늘했다. 나는 개학 며칠 전에 올라와 인왕산의 서편 골짜기를 찾아갔다.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그 암벽들 사이의 검은 흔적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가파른 암벽의 곳곳에 촛불 흔적과 서낭당과 같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6월 26일 효창공원에 조화 바구니를 들고 갔을 때, 김구 묘소에 이르는 계단 곳곳에 검은 양복들이 주시하고 있었고, 묘소 앞에는 광복군동지들이라는 분들 몇몇이 맞이 하였다. 참배객은 나 혼자였다. 그 중 안내하는 분은 저쪽이 들리지 않게 어디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를 물었다. 내가 조화 바구니를 받치나니, 그가 인사를 시키는데, 당시 김신 장군과 공군에서 갓 제대한 김양과 인사를 하고 난 뒤, 안내하는 분은 내내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검은 양복이 가까이 오니까 고함을 치면서 오늘 같은 날 어떻게 가까이 오느냐고 호통치며 그들을 멀리 쫒아냈다. 약간 겁 먹었다. 참배식을 마치고, 안내분이 안중근동지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가묘로 되어있다는 설명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삼의사의 묘소에서도 참배를 마치고, 같이 (식사?)가자고 했는데 쫄았는지 같이 가지 않고 나는 혼자 다른 길로 왔는데, 검은 양복은 뒤따라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벗에게 했다. 그는 살벌한 시기에 왜 갔냐고 했다. 살벌한 시기인 줄 몰랐다. 그런데 조화 바구니까지 가지고 갔지, 그리고 다음 해는 가지 않았는데 갔다 온 이들의 이야기로 묘소 앞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참배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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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강의로 이명현의 과학철학, 윤명로의 고대철학 등을 듣고 있었다. 한 학기가 지나고 가을이 시작할 때 지도교수를 정하라고 연락을 받았다. 이미 맑스를 하기보다 프랑스 대혁명과 연관 있는 루소를 공부하기 위해 박홍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하려면, 프랑스어 명문인 벩송을 읽으면서 프랑스 철학을 익히라고 하셨다. 여름 방학 중에 기초 희랍어와 겨울 방학 중에 기초 라틴어를 들으라는 것이다. 따라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초 문법을 해보았지만 따라가지 못했다.
학기 초에 석박사 함께 하는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각각 이 소개 하였는데, 그 자리에 키가 자그마한 형은 조교로서 참석했었고, 그리고 윤구병 형님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마주하고 앉아 있었던 이명현 교수님은 형님에게 농담을 걸었다. 형님이 대학 시절에 청량리 경찰서에서 전화온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이명현이 조교였다. 그런데 형사가 ‘청량리 뒷거리에서 삐끼질을 하는데 서울대 철학과 학생증이 있다'는 것이다. 이명현은 그 학생 우리 학생 맞다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였다. 형님은 다른 이야기로 받아쳤는데 거의 친구처럼 서로 농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대구에서 들을 수 없었던 학부의 여러 강의를 청강하였다. 언어 분석철학, 과학철학, 현상학, 고대철학(영혼론), 사회철학, 윤리학, 동양철학(귀국 후 심재룡 선생님 강의도) 등을 두루 들었다. 그 중에서 남는 장면으로 과학철학의 이명현 선생은 수업 중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이름을 파자하여 칠판에 써가면서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윤명로 선생님이 학부 강의 고대 철학을 강의하셨는데,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강의 시작에서 학생들에게 그리스 알파벳과 중요개념을 읽는 법(명사, 동사)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중요 용어가 등장하면, 매 강의에서 조금씩 보태어 문법을 설명하는데, 용어의 명사 격변화와 동사의 변화 등을 설명했었다. 나로서는 학부 초년생에게 고전어를 가르치는 것이 생소했었다.
80년 말인가(?) 대학원생들의 모임에서 각 원생들이 자기의 지도교수 논문에 대한 이해를 위한 발표회가 있었다. 독일철학 전공자들은 여러 교수님들의 논문을 그리고 나는 박선생님의 「Bergson에 있어서의 근원적 자유(1975)」을 읽고 발표했었다. 그런데 그날 형님이 오셨는데 발표를 듣고 나서, 그것 밖에 못 설명하냐고 나무랐다.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하니 열 번이라도 읽지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각자가 무엇을 전공하려 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서로 소통하는 좋은 기회였고, 뒷풀이는 더욱 흥미로웠다. 동서양철학 전공자들이 함께 하는데 형도 참석했었다. 형이 상당히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서로를 이해하는 참 좋은 기회였다. 여러 번 모였던 이 모임은 교수님들이 알고 나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선생을 비판하려고 한다는 것이고, 이런 모임이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하였다.
대학원 강의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김태길 선생님은 내용의 중점을 요약 설명해준다고 느꼈다. 다른 강의 형식으로 윤명로 선생님과 한전숙 선생님의 합강이 있었는데, 한 선생님이 해석상에 문제거리가 생기면, 후설 작품에서 뽑아온 이런저런 문장들의 독서카드를 가지고 설명을 하셨다. 이에 비해 윤 선생님은 문장을 죽 읽어보라고 하시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실 또는 현상이 무엇인지를 박사과정의 수강자들에 설명해 보라고 하고, 이런 문장과 문단은 우리가 부딪히는 이런 사실들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라고 다시 제시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문장이 아니라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며 공부하라는 지침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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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의 이남영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나는 어떤 한 논문을 읽고 요약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을 맡았다. 그리고 읽고서 나름으로 정리해서 발표했는데, 무안할 정도로 꾸중을 듣고, 그리고 다른 것을 다시 발표하라고 했다. 왜 이런 질타를 받았는지를 깨닫지 못했는데, 박사과정을 수료해서 수업에 잘 참석하지 않는 형을 찾아가서, 다음 발표문을 보여주었더니 용어들도 고치고 문장도 고쳤다. 그리고 나의 발표 시간에 형도 참석했다. 발표하고 이런 저런 토론하다가, 나는 몰랐지만 다른 길로 빠지면, 형이 개입하여 부연 설명하였고, 그리고 이남영 선생님이 무슨 말씀으로 평가했는데, 아마도 좀 모자라지만 저번과는 달라졌다고 한 것 같다. 그래도 동양철학은 매번 청강으로도 강의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오판이었다. - 그래도 대구에서 군대 갔다 온 다음부터 매일 아침 향교에 가서 한문 강의를 들었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양철학을 계속 듣고 싶다고 했었는데...
형에게 상의하면서 동양철학 전공자들의 강독 세미나에 참석했다. 아마도 그 당시에 허남진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강독이 수업보다 더 깊게 읽는 것 같았다. 주자의 ‘사서집주’를 읽고 있었는데, 본문은 읽지도 않고 집주를 읽고 있었다. 이들을 이끈 이가 형이었다. 동양철학의 관심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관심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내가 경북의 유가의 관점이 문제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 그 당시 형에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문중에서 들었던 이야기로는 서울대에는 동양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연세대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이나 충남대(?) 유정기(柳正基, 1910-1997)에게 배워야 한다고 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두 분은 철학이라기보다 한학자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북의 유가 입장은 사림(士林)으로서 남인이며, 서울의 입장은 사장(詞章)으로서 노론의 입장이라고 생각했었다. 참고로 우리 집안은 영조시대 류정원(柳正源, 1703-1761)이 있는데, 그는 사도세자의 스승이지만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 전에 세상을 떴기에 가문에 화가 없었다고 한다. 류정원 그 다음의 사도세자 스승 중의 한 사람이 정조시대에 재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었다. 나의 벗은 경주 안강 출신인데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옥산서원 부근이라,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유가적 입장을 가졌고, 그리고 먼지 잘 모르지만 경북의 유교 맥의 일부를 잇고 있는 것으로 상상했었다. 나와 벗은 우리 집 사랑방의 족자의 글 “명 성쇠지원(明 盛衰之源), 통 성패지단(通 成敗之端), 심 치난지기(審 治亂之機), 지 진퇴지절(知 進退之節)”처럼 사는 것이 선비이며 군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규성이 나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났지만, 그의 1년 나의 군대 3년을 합하면, 형은 학문적으로 4년선배였다.난 그를 형처럼 생각하고 앵기면서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박홍규 선생님은 금(?)요일과 토요일 강의였고, 동양철학 세미나는 토요일이라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업 후에 마치고 나서, 저녁에 관악구청 부근에서 식사와 막걸리를 마시는 기회가 많았는데, 여러 공부팀들 중에 고대철학과 동양철학이 친화성이 많아서 만날 기회가 있었고, 동양철학 팀과 어울리다가, 당시 통금이 있을 때라 헤어질 때 따라가겠다고 하면, 형은 물리치곤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2005년 쯤에 다시 한번 이야기했더니 그런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 당시에 형이 시대의 고민을 안고서 동철 집단을 이끈 것은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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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못했던 나로서는 계명대에 백승균 선생님과 상담하여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에 민주화의 덕분으로 광주 조선대에 서울대 철학과 출신들(설헌영 염수균, 이OO)이 내려가듯이, 대구 영남대에 여러 젊은 교수들과 더불어 형이 내려왔다. 백승균을 비롯하여 시대의 변화를 추구하는 대구의 교수님들이 대구지방사회연구회(우리가 속칭 방구회라 부르는)를 만들었는데, 선배도 참여했다. 지역사회운동에서는 방구회에 기대가 상당히 컸다. 덕분에 형을 따로 여러 번 만났고 이 시기쯤에서 형이 학생운동권으로 치자면 민족해방운동에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덕분에 대구에서 여러 활동가들이 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만나서 술 한 잔 할 때, 형은 영남대의 철학과 분위기에 한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울 이화여대로 간다고 했었다. 영남대에서 그를 따르던 학생들이 되돌이키려 서울까지 갔었다고 했지만, 이미 선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방구회에서는 환경 생태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리고 “녹색평론”을 냈던 김종철(1947-2020) 교수도 떠나는 등(2004년)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었다. 사실 김종철교수는 대구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는데, 서울에서 형과 더불어 여러 차례 같은 자리에서 만나곤 했었다.
이 시기에 다른 상황이 있었다. 계명대에 등록하였고, 그 당시 정년 후 강의하시던 하기락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 선생님은 세계 아나키스트회의 회원이었고, 프랑스에서 정기회보가 왔었는데, 회보의 중요기사 번역을 나에게 맡기려 했었다. 선생님 집에서 식사도 하였지만 여러 사정을 들면서 맡을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 서재에 맑스 전집 메가(20권?)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빠진 부분이 있었다. 당시 어느 음성출판사가 전집 복사본을 내려고 했는데, 출판사 쪽에서 전집 전체를 다 맞추지 못했다고 하였고, 그 모자라는 3권인가를,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서 출판사로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여러 경우에 선생님과 거리를 두었고, 국내 아나키스트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선생님께 말하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우리 집안의 유림(柳林, 1894-1961)과 연결되어 얽히지 않으려 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 프랑스를 갔다 오고 나서, 노무현 정부시기에 독립운동사 전공자들과 술좌석에서 유림-양일동(1912-1980)-하기락의 계보임을 알았다. 2022년쯤에서 류림 전공자들을 만나 류림과 양일동의 기일(忌日)이 4월 1일 같은 날이며, 그들은 우이동에서 매년 두 묘소 참배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계명대에서 박사과정 수료 후, 프랑스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갈 때는 한 두 해 쯤 있으면서 박사논문의 참고 자료를 수집하고 벩송의 전체를 찬찬히 읽어보고 벩송을 떠나 루소로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2년 반 정도 걸려서 벩송전집을 다 읽었는데, 박홍규 선생님이 말씀하신 벩송의 철학이 서양철학사 2500년을 뒤바꾸어 해석해 놓았다는 것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간 대신에 시간, 우주론 대신에 우주발생론, 과거에 수학과 물리학을 통한 형이상학을 보는 관점과 달리 생물학과 심리학을 통해 “자연배후학”을 보는 관점 등에 관해 다시 탐구하기로 하였다. 좀 더 머물면서 다시 8권 작품 이외에 편지글, 미발표문, 학술보고서, 강의록 보고서 등을 보태어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2년이나 걸렸다. 벩송은 다른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발표 순서대로 다시 읽었다. 벩송을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되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에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님은 벩송과 삐아제 또는 벩송과 뒤르껭을 연결하여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첫째 완독에서 삐아제는 벩송과 달리 심리학 부분에서 지성의 발달에 더 관심이 있었고, 생물학적으로도 의식의 원형 또는 원리가 먼저 있는 것처럼 사유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벩송에 붙여서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뒤르껭의 부분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MR, 1932)과 연관하여 읽어보았으나, 뒤르껭은 사회 현상의 틀과 도식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으며, 관련 논문들을 보건데, 뒤르껭은 칸트주의자이며, 벩송이 여러 곳에서 비판하는 신칸트주의의 인식론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둘 다 유대인인데, 뒤르껭은 벩송보다 나이상 한 살 많지만, 소르본대학에 교수가 되었는데, 벩송은 교수지원을 했지만 두 번이나 투표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벩송은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다. 프랑스 사회에 내가 모를 이상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뒤르껭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지만, 벩송은 유대인으로 남았으며 또 그의 글과 활동을 보건데 그는 시오니즘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솔한 세파라드 유대인이었다.
셋째 완독을 할 때쯤, 보르도 출신인 스피노자 전공자를 만났는데, 데카르트 생가의 지트(학생들의 숙소)에서 포도주 한병으로 밤을 세워가며 이야기 했는데, 유대인을 평가하는 입장은 그와 내가 유사점이 많았는데, 스피노자를 다루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그는 ‘영원의 상하’에서 나는 ‘지속의 상하’에서 보았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박사 논문을 거의 완성 단계에 있어서, 그 시기에 프랑스 스피노자 전공 교수들의 알려주었는데 그때 “모로”의 이름을 들었다. 참, 그가 말한 것 중에 기억 남는 것이 있는데, 프랑스 유대인이라고 해서 동일한 유대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파리와 리용이 다르고, 보르도와 마세이유도 다르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가 카발라를 설명했는데, 카발라는 탈무드와 달리 토라에서 나온 것으로 모세오경(Pentateuque)을 중요시했고, 이것을 철학적 또는 신비적 해석을 하는 것이라 했다. 벩송도 도종(MR)에서 나오는 이집트 파라오 이크나톤과 유대 신비주의를 다루는 것도 모세오경에 대한 이해에서 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비주의에서 이런 유대인의 기원과 해석은 철학과 달리 신학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스피노자의 신정론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전공자로부터 스피노자에 대한 것보다 유대사상에 대한 설명에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해 바로 형이 파리에 왔다. 전화가 없었던 나는 연락을 받고 파리를 가서 하루를 보냈다. 하루 종일 벩송과 유대인, 유대교와 신비주의에 관해 이야기했다. 앞의 이야기에 보태서, 러시아 혁명후 유대인(트로츠키 포함)의 디아스포라로 프랑스에 왔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벩송을 만나서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유태인으로서 맑스도, 후설도 있고, 프로이트도 있는데, 맑스는 그대로 아세키나제 유대계로 자랐지만, 별명이 무어족인 것처럼 파리로 런던으로 세파라드로 살았다고 했었고, 후설은 뒤르껭처럼 개종했으며 제도 속에 자리를 차지했고, 프로이트는 독일의 과학주의 인식의 영향으로, 심리학을 또한 무의식의 내부를 양적으로 층위로 보았던 것 같다고 했을 것이다. 거의 18시간 동안 같이 식당으로 술집으로 술을 사서 그의 방으로 움직이면서, 다른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시간만 주어지면 나는 유대인과 학문의 방향에 대해, 물론 아인슈타인과 벩송의 관계도 설명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오니즘에 친근성이 있는 아세키나제 유대인과 코스모폴리탄같은 노마드인 세파라드 유대인을 구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은 2005년 이후에 들뢰즈의 안티 외디푸스(1972)를 읽으면서, 들뢰즈에 가깝게 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나중에 형이 이야기했지만, 나의 국내 귀국 후, 나를 보고 그 당시 약간 맛이 갔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에서 그냥 두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귀국을 종용하려 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까, 스피노자 이야기에는 형이 흥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로의 스피노자를 번역했고, 형은 그 번역 원고를 끝까지 읽고 수정할 부분을 줄 쳐주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박기순이 학위 후 귀국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던 것 같다. - 선배는 나중에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신정정치와 연관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철학사론사에 대한 글을 마쳤을 때쯤일 것인데 그는 어느 날 레오 스트라우스(1899-1973)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났을 때, 나로서는 레오 스트라우스를 우리 통일운동에 끌어들이는 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끌어들이는 것만큼이나 좋은 방식이 아니라고 했다가 꾸중을 들었다. 내가 2019년 들뢰즈의 스피노자를 다시 정리하고 이야기하려 할 때, 그는 나의 이야기에서 들뢰즈의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넘어갔다.
내가 스피노자 이후에 프로이트와 벩송을 차이를 찾기 위해 프로이트를 읽었는데, 프로이트가 2년 일찍 태어났으나, 철학적 저술과 학설의 전파에서는 벩송이 프로이트보다 앞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토대로서 시간(흐름), 무의식, 추억과 기억, 생명 진화 속에서 의식, 사회 속에서 의식 등에서 주제 상으로 여러 분야와 많은 부분들이 프로이트와 겹치지만, 당시에는 둘 사이에 차이 정도만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판 번역 프로이트 작품들은 독어판보다 읽기 쉽게 되어있었다(96년 당시 우리나라 번역은 두 세 권 정도였다). 그런데 2012년(?) 정도부터 형이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내가 벩송에 비추어서 프로이트의 관점과 사유의 틀, 즉 3원성을 비판하였는데, 형은 못 마땅해했다. 나중에 들뢰즈의 라깡비판에 더하여, 프로이트사유의 스콜라철학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했다가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나의 비판이 앵글로 색슨의 비판의 연장선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 그러나 이제는 프로이트-라깡과 벩송-들뢰즈의 차이라기보다 질적인 차히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인간의 정신적 왜곡 현상을 파라노이아에서 보았다면, 후자는 인간의 자유분방한 사유의 발산을 스키조프레니라고 설명하고 싶다. 이런 사변적 차이는 전자는 존재론에서, 후자는 자연론에서 기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양자는 공간론과 시간론의 대비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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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멤에프(IMF, 1998)로 그해 말에 귀국하고, 다음 해 한 해 동안 이정호의 고마운 도움으로 방통대에서 지냈다. 그는 학업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던지, 1년이 지나 그는 2000년에 창립한 철학아카데미에 강의하면서 합류하고 대학 시간 강의를 권했다. 나는 다른 동료들과 갈라진 길이 서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래도 우리 방식이 도래할 것을 생각하고 “마실에서 천하루 밤”을 만들고 작은 글들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벩송에 관한 단행본을 준비했었다. 우선 프랑스어로 써가던 부분을 우리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프랑스 사상을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본래 우리말 논문을 먼저 쓰자고 해서 우리말로 쓰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프랑스어로 준비했었는데도, 번역의 어려움이 아니라, 사유의 폭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이었다. - 모든 외국 학위자들은 국내에서 본인의 논문을 발표 후에 전임으로 뽑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을 때이기도 하다.
2004년 초에 형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벩송의 단행본을 준비하면서 정리는 다 안 되었지만 원고지로 1500매 정도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형이 양을 보더니 그것 들고 백선생님을 찾아가라고 했다. 백선생님도 바로 학위 준비하라고 해서 가을에 다시 논문자격시험을 치고, 원고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장과 절을 구성하여 배치했는데, 전체 양을 1000매 기준으로 하고, 어떤 부분들은 전부 빼고 나중에 다시 단행본을 낼 때 쓰라고 하였고, 지금은 구성과 장마다 흐름을 맟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은 다시 쓰라든지, 여기는 소절을 보태라고 하였다. 형은 내가 생각하기보다 벩송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가을에 원고를 들고 백선생님을 만나러 갔더니 대학원에서 심사위원이 구성되었고, 다음 해까지 세 번의 예비발표 후에 가을 졸업을 하였다. 뒷 이야기 중에서 하나는, 형은 선생님의 벩송 해설과 나와 다르다고 했었는데, 나는 기본 틀은 발생론적 관점에서 같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형은 논문에서 심리적 자아가 발생적 자아를 거쳐 확장적 자아로 가는 길에서 자아가 성립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아가 의식 일반 속에서 변해가는 것인데, 그러면 벩송에서 자아는 정체성의 부재가 아닌가라고 했는데, 그 때는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라고 했던 것 같다. - 지금 같으면 불교에서 걸승이 자아를 찾아가지만, 아라한이 부타가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돈수돈오이듯이 철학도 그렇게 노력하며 흘러간다고 했을 것 같다. - 당시에는 벩송의 사상이 소크라테스의 내적 의식과 가깝다고 생각했을 때이며, 고대 사상의 소크라테스에 관하여 다섯 편을 읽고 난 뒤에 스토아 전기사상과 플로티노스의 접합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형은 나에게 엉뚱하게 벩송을 좀 잘못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었다. 그 이유는 벩송은 사상의 전개가 분명하고 또한 정확한 것이 특징인데, 너는 모호하지 않느냐 것이다. 아마도 의식의 비결정성 때문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의 학위 논문을 마치고 규성이 형을 진심으로 형으로 생각했고, 나의 마음 속에 두 자문인 중의 하나로 남았다. 그리고 10여년 이상을 매년 분기별로 그를 찾아가 철학적 문제 전반에 걸쳐 또한 사회운동의 방식에 대해 그의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 나의 벗인데 심층 운동에서 우리 또래의 기수로서 일 년에 두 번 꼭 만나러 갔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형이 민중파에 가깝다면 벗은 공화파에 가깝다. 덧붙여 한철연의 후배 동지들은 대중파(시민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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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위 논문 이후에는 형이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진솔한 이야기를 여러 가지 했었다. 내재의 철학: 황종희, 1994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1)(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저술들을 낸 것은 학위 논문에서 덜 익은 것을 쓴 것이라 부끄러워서 후배들이 그 논문을 다시 읽지 못하게 단행본들을 냈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그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걸맞는 저술을 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이 시기부터 형은 한철연이 나아갈 방향을 정립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가 동학과 천도교, 대종교, 함석헌 씨알 사상, 일제시대 사회사상 등을 정리하면서, 시대와 연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많이 배웠다. 그의 사유에는 통일이 들어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던 것 같은데, 주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가끔 나에게 외국인으로서 그 나라의 철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허구 같다고 했었다. 그래요, 하면서, 나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프랑스에서 데카르트 학회에 갔었는데, 발표자 중에 데카르트의 어머니가 임신했던 동네와 데카르트 태어난 동네가 다른데, 태어난 동네가 데카르트라는 지명을 받았다는데, 임신 8개월을 지낸 동네가 데카르트 지명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유학자들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누구에게 배웠고, 그리고 누구의 학문 방향을 따라갔다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 거리이다 라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그 나라 사람들이 하지 남의 나라에서 연구하는 이들로는 할 수 없지 였다. 주자에 대해 중국에서 구해 온 수징난(束景南, 1945-)의 천쪽에 가까운 “주자평전([1992] 2003판) 원문을 다 읽고서 한탄하기도 했었다. - 나중에 수징난의 “주자평전”(번역 2015)에 나왔는데 다 읽지는 않더라고 긴 서문을 꼭 읽어보라고 책을 빌려주었다. 그는 수징난의 긴 책을 읽고서 중국 철학에서 우리 철학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 같았고, 그 결실이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2012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민중운동과 대중운동의 성장과 위상의 확보만큼이나 통일운동에서 인민의 설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루소와 벩송과 들뢰즈로 이어지는 자연 안에서 자주와 자발성을 통한 저항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했었다. 말하자면 공화파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는 여전히 통일운동의 바탕은 동학운동으로부터 민중운동의 확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한철연의 노동과 시민의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이정호가 지원하는 맑스-레닌의 공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유학의 전통에서 공화를 인정하면서도, 인민의 용어와 공화정의 연결에서 ‘인민’의 용어를 쓰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나로서는 서울 풍토가 우리의 고대(청동기)와 불교 천년, 유학 오백년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이어갈 방식을 찾으려면, 서양에서는 퀴니코스-스토아, 플로티노스, 루소, 대혁명, [철학사와 수학사 번역 이후에는 꽁트를 포함하여] 벩송, 들뢰즈로 이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때, 그는 이상하게도 들뢰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벩송을 차라리 불교에 가깝다고 했을 때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벩송의 사유가 유일신앙과 연관 없고, - [이런 점에서 벩송은 보편 관념(개념)보다 일반개념을 선호했고, 그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2017년 출판)에는 일반개념의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한 긴 강의더 있다.] - 19세기 말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확률론의 도입이라든지 - [이것은 수학사를 번역하면서 느끼지만, 수학에서 기호에 대한 쁘왕까레의 협약론] 등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었다. 그는 보편성과 통일성의 관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서 많이 배운 것은 우리로부터 사상사를 다시 정립하고자 하는 형의 부단한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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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새로운 저술을 구상하고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사상가들을 섭렵해 나가는 과정에 있을 때, 내가 그를 만나러 갔던 몇 년 동안에, 그가 가장 활기 있었고 또한 많은 이야기를 전개했었다. 그런데 그는 거의 동양철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아니라, 서양철학의 중요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매번 곁들여서 했었다. 어쩌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우리사상과 같은 시기의 서양사상의 대조 또는 비교 과정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도 벩송(1859-1941)에서 그 시기에 벩송 연관을 인물과 서양의 사상사조를 대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그는 벩송을 꼼꼼하게 읽었고 도종(MR)도 잘 읽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얼과 혼으로 우리나라의 사상사의 바탕을 잡은 데 대해 좋아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도종(MR)에서, 그가 벩송의 신비주의가 크리스트교 계시주의와 비슷하게 보았던 점에 대해, 나로서는, 벩송의 신비주의는 박홍규의 아페이론(플라노메네 아이티아)처럼 자발성을 갖는 필연성이고, 스스로 지금까지 현상과 다른 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이지, 하늘의 계시의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하였고, 이런 사유는 자연의 발생과 발산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수용하지 않았다. 그가 함석헌의 영향을 받아 씨앗 생명이 먼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고, 게다가 카톨릭 신부였던 데이야를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와 벩송의 의식의 수렴이 같은 것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나로서 샤르댕과 벩송과 전혀 방향이 다르다고 했었다. 어쩌면 샤르댕은 헤겔식으로 전체가 하나의 완성체로 가는 신스콜라적 사유를 한 것이라고 했다가, 샤르댕 때문이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타박받았다. 이런 견해차가 내가 들뢰즈의 읽고 있는데 대한 불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인식과 대상의 평행론처럼, 마찬가지로 주자이래 이기론을 인식 체계로서 암묵적으로 바탕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사유에는 헤겔이 보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견해와 나중에 알게 되었지 스트라우스와 연결 지으려 했던 점에서 온 것 같았다. 아무려나 그는 신유학에서 노론의 “사문난적”처럼 다른 견해와 다른 체계를 물리치고 변증법을 통한 보편과 절대로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방식을 따른 것같아 보였다. 형은 시대 순으로 중요인물과 사상을 펼치면서 소소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 주었고, 그리고 박종홍에까지 정리했었다. 형은 박종홍에 대해 이병수의 반론을 염두에 두면서도, 학문과 시대 한계를 구분하며 박종홍에서 배워야 할 변증법 등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형과와 나의 견해차가 드러난 것은, 엉뚱하게도 박홍규와 윤명로 사이의 학내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차치하고. 그리고 당시 내가 읽었던 벩송 시대의 주변 이야기에서 박홍규의 견해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즉 선생님도 아퀴나스나 꽁트를 보는 시각이 일본의 시각이 아닌지라고 했을 때, 거의 수긍하는 듯했다. 그런데 나의 입장으로서 벩송을 심층적으로 영혼과 자연에서 보면,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좌파보다 더 벩송이 근원적 좌파라고 했을 때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내가 들뢰즈를 읽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가지 형이 얼과 혼으로 우리의 중심사상을 생명과 자유로 구축하려고 하듯이, 묘하게도 형님은 결과 톨이라는 용어로 자연에서부터 우리 학문을 조성하려고 힘쓰고 있었다.
형과 더불어 그의 방대한 양의 저술이 완성되기까지 나는 진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형에게 배운 것을 벗에게 일 년에 두 번 이야기 했었다. 물론 형의 시각과 벗의 관점의 차이가 있었지만, 통일론으로 가는 과정의 견해차 정도로 보였다. 나로서는 가끔 딴지를 걸면서, 우리나라 철학통사를 보는 다른 관점도 제기하였다. 말하자면, 노론에 대해 남인의 실학에 대해이야기하기도 했다. 실학에는 철학의 근원적 물음 또는 변증법적 사고가 부족한 것처럼 말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노론의 ‘사문난적’과 정조의 ‘문제반정’은 일제가 우리는 포획할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했다가, 공부를 제대로 하라고 핀잔을 듣기도 하고, 또한 문헌을 잘 읽어야 한다고 나무랐다. - 지나가는 이야기로 나의 벗은 서울 견해를 화중지병(그림속의 떡)이라하고 경북의 운동은 산중호걸이라 했다. 이는 정도전의 경중미인(鏡中美人)과 송죽대절(松竹大節)을 변형시킨 것이리라.
[이것은 근래의 이야기인데 다산이 읽은 중국의 기술에 관한 책이 아마도 프랑스에서 나온 디드로의 백과사전일 것 같다. 그리고 제수이트 선교사가 번역한 이 책들을 정조가 수입해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읽게 했고 수원성 축조에 응용했다고 한다. 선교사의 번역이라지만 백과전서에 새로운 경제, 기술 등에 관한 것이 우리나라 실학사상으로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꽁트의 실증철학강의(1830-1842)이 실학에 들어왔는지를 알 수 없다. 어쩌면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접했는지도 모른다. 백과전서의 글들은 신학과 전혀 관계없고, 종교에서는 유물론이라해서 금서로 올렸던 책이다. 다산은 이런 글에 빠져있어서 천주교 박해 때 형들 둘과 달리, 육지인 강진으로 유배 갔을 것이다.]
형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통사론으로서 박종홍을 넘어서 윤노빈을 한 장으로 넣을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윤노빈과 장일순을 엮어서 천도교의 최시형의 원주 활동의 확장으로, 게다가 김지하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국대안 반대자였다가 서울을 떠난 이후 서울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은 농민운동의 중요인물이었고, 그리고 윤노빈과 김지하와 더불어 원주에서 헤겔과 맑스 연결로서 정신현상학을 깊이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형은 윤노빈의 사유에 헤겔, 스피노자, 벩송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신생철학(1974)(2003 재판)을 읽어오라고 했는데, 예전에 읽었던 것인데 다시 읽어보니, 나로서는 그 책 속에는 벩송의 사상이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가, 다시 읽어오라고 한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형은 지나가는 이야기로 서울대 교수들 중의 몇몇의 평가로서, 그 책이 철학 에세이 정도라고 하거나 또는 변혁을 사유했다기보다 시대를 진단하는 분노와 광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던 것 같다. 형이 관심 있던 부분과 더불어 다시 읽고 또 읽어보았지만, 나로서는 신(新)생철학은 벩송의 생명(자연) 진화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였고, 세간에 평가되고 있는 벩송의 영향은 김지하의 평에 덧씌워진 것이라고 했었고, 내가 보기에 신(新)생철학은 니체 사상의 변형이라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김지하를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가 들뢰즈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피상적이었고, 벩송의 창조적 진화를 이야기할 때는 내용이라기보다, 얼핏 윤구병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아마 형은 장일순, 김지하, 윤노빈의 연결을 통하여 내재적 불화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변증법적 사유로 풀어보려고 했던 것 같았다.
이런 흐름에 덧붙여서 윤노빈을 주의 깊게 읽었던 부산대 출신이면서 서울대 박사과정을 보낸 하성대 선배에게 형은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 선배님은 윤노빈으로부터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배웠고, 서울대 박사과정에 와서, 독일철학 세미나 그룹에서 정신현상학(1807)독해의 다른 관점을, 즉 의식의 발전과정을 제시했던 것 같다. 이런 독해는 당시에 명지대 임석진교수의 정신현상학에서 노동개념을 주목했던 만큼이나 헤겔전공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더하여 나로서는 하선배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인혁당과 연관 있는 산수 이종율 선생과 윤노빈의 연관도 형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형은 신생철학에서 벩송 관련 부분을 다시 찾아오라고 했는데, 아마도 한 꼭지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그 뜻도 모르고, 몇 번 읽고서 그 책 속에는 벩송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신생(新生)의 생(生)은 니체에 가깝다고 했다. 형은 그 이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그것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니, ‘얘가(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기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나는 벩송이 카톨릭에서 금서로 올라온 것은, 그의 사유가 카토릭과 전혀 다른 사유이라는 것, 그래도 시인 샤를 뻬기 같은 이는 파리 주교를 만나서, 카톨릭이 벩송의 사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크리스트교가 벩송을, - 가끔은 박선생님도 크리스교에 대한 친근성을 드러내는데, - 가깝게 여기는 것은 벩송의 소개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나로서는 벩송의 사유가 불교로 접근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었다. 형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는 더 이상 벩송의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형은 이미 다른 길을, 즉 쇼펜하우어와 그 시대 주변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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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별로 한 번씩은 형을 찾아갔다. 형은 독일과 영미 과학철학에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앵글로색슨 철학이라고 하면서 그 과학철학들이 거의 신칸트학파의 인식론으로 흐르고, 이런 사유가 논리실증주의와 현상학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형은 그런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자료를 제시해야 하지 않느냐고 핀잔이었다. 형은 과학철학과 논리철학이 심리학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도 영혼 또는 정신의 역할이 물리화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좋아한 것 같았다. 이에 대해 19세기말 20세기 초의 프랑스 심리학은 앵글로색슨의 인식론적 탐색과 다르다고 했었다. 형은 나에게 대응하지 않고서 그 인식론 계열을 탐구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이라면 브룅슈비끄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에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힌두이즘과 불교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형이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을 보는 관점이 정리되는 것 같이 보였다. 나로서 잘 모르는 분야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읽은 벩송과 불교의 연관에서, 벩송이 읽었던 불교에 관한 것은 쇼펜하우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로 된 불교 경전을 읽었다고 되어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문헌적으로 세일론(스리랑카) 판본을 중요시하며, 사상적으로는 동양의 대승이나 소승의 구별에 관심보다 네팔의 산스크리트 불교에 관심이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싯달다의 출가를 생로병사에 있지 않고, 성밖에서 걸승(un mendiant)을 만났는데, 싯달다 자신이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현자임에도 거지로 살면서 무엇인가를 탐구해야 하는가에 있었다고 한다. 무엇을 탐구하는지를 물었는데, 아마도 왕자의 덕목과 전혀 다른 진리탐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고 했었다.
19세기 말 정치경제학에 대한 것 말고, 과학과 인식에 대한 견해에서 인간의 자유와 연관해서 형은 다른 탐구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심리학 등이 지금까지 서양철학사와 달리 탐구하였다고 했지만, 형은 관심이 생명 다음에 아마도 자유였던 것 같다. 벩송의 자유에 대해 가끔 물었는데, 나는 박홍규선생님의 논문이 제일 흥미롭다고 했었다. 그러나 형은 시간론, 지속과 달리 인간이 자발적이고 의지적으로 실행하는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본능의 의지 말고 자유의 실현 의지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니체의 권능의 의지를 말하면서, 자연 내재성의 발현과 달리 인간의 의식에서 자유 실현을 찾는 것은 인본주의에 가깝다고 하였고, 게다가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열광하다가 왜 버렸겠느냐고 했었다. 형이 화가 났다. ‘너는 들뢰즈를 읽다가 변했구나’였다. 형은 우리에게 알려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1844 재판과 부록)는 초판인데, 그 부록이 매우 길고 그것을 읽어보면, 왜 자유의 획득 노력이 중요한지가 들어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형은 당시에 새로운 읽기로서 어떤 사람과 그 내용을 그날 내내 설명하면서, “너가 공부를 덜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꼭 부록을 읽어보라고 했었다.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대신 소크라테스를 읽었다. - “이규성 철학 연구 심포지엄.(2026, 06)”에서, 연효숙의 발표문에서, 뮤제/마시스(Charles Arthur Muses /ˈmʌsɪs/; 1919–2000)가 등장하는데, 형이 말한 그 학자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
만날 때 마다, 형이 탐구하는 앵글로색슨 철학과 나의 관점 사이의 거리라 멀어져 갔다. 나는 의식을 파악하는 방식이 과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행위에서 드러나는 과정을 보는 것이라고 줄 곧 이야기했었다. 게다가 나로서 불교 사상의 제일 첫째로 ‘이뭣꼬’라는 화두가 얼(혼)이라고 하면서, 이로부터 개별적 혼에 대해 이야기하면 파라독사가 생기며(불이논쟁), 이런 불이(不二)논쟁이 앵글로색슨 철학사에서 수학과 심리학에서 제기하는 파라독사에 닮았다고 했을 것이다. 어느 좌석에선가 후배들도 있었는데, 고대로부터 중세의 신학에까지 파라독사(아포리)를 잘 해결할 수 없었을 때, 신앙으로 땜방하고, 그리고 근세철학의 이원론(불교의 불이론)이 평행이니 상응이니 또는 정합이니 조화니 해도 안되니, 완전한 답을 위하여 뭉쳐서 통일과 절대로 만드는 것이 변증법이다라는 식으로, 변증법을 비판했다가 형이 술잔에 남은 술로 나를 덮어 씌웠다. 사유의 방향이 다른 것을 넘어서 대립으로 향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형의 관심을 살 방법으로 소크라테스를 대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관점을 제시했다. 벩송과 들뢰즈의 철학이 2500년 철학사가 상층의 정신(지성, 이성)으로부터 실재성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면, 벩송 이래로 심리학과 유전학이 성립하면서 심층의 실재성으로부터 표면의 다양성의 발현으로 나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런 차이를 넘어서는 차히는 소크라테스를 대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했다. 형이 말하는 문헌 제시로 번역해서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빨강이인가?” 라는 팜플렛을 작성했다. 형은 좌파 또는 빨강이를 공공연하게 딱지 붙이지 말라고 했었다. 나의 긴 팜플렛 안에는 알프레드 푸이예(Fouillée, 1838-1912), 레옹 로방(Robin, 1866-1947), 리보(Rivaud, 1876-1956), 베르그송(1859 –1941), 제르파뇽(Jerphagnon, 1921-2011), 나르시(Narcy 1942-) 등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분만을 완역하여 놓았다. 선생님은 로방을 참조한데 비해, 벩송은 주로 푸이예를 참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참조의 차이에는 ‘이뭣꼬’를 다루는 방법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했었다. 당시에는 형은 달리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정호의 견해를 참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엉뚱하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정호는 그런 것이 일차 문헌도 아니고 학자들의 견해를 주제로 삼을 필요 없다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계보에서 삶과 탐색의 직계는 상층으로서 플라톤도 크세노폰도 아니고, 심층인 아리스티포스와 안티스테네스이며, 게다가 심층의 깊이에서 솟아나는 안티스테네스 삶이 퀴니코스에서 스토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의 주체는 우주 영혼과 함께하는 개인 영혼이라고 했다. 안티스테네스-퀴니코스-스토아로 이어지는 실천과 사유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플라톤의 진의는 이데아(페라스)가 아니라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이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아페이론이 세계영혼이고 이 영혼 속에서 개별영혼의 뭉치거나 솟아난다고 하는 생각이 들뢰즈의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벩송과 들뢰즈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의 심층으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에서 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원전 탐구 후에 찾아낸 이는 박홍규라고 했다. 게다가 이런 들뢰즈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혁명과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형은 ‘애가 맛이 갔나’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런 차히를 넘어서 들뢰즈의 생성론과 라깡의 삼원론을 대비시키면서 설명했다가 혼났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만났고 나중에 형은 나에게 ‘너는 라깡 세미나도 가지 않으면서 너마음 대로 재단하면 되느냐’고 나무랐다.
2019년 윤구병의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6회 좌담에서 다섯 회나 형이 좌장으로 진행하였다. 뒷풀이에서, 윤구병을 중심으로 이야기와 이규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겉 돌았는데, 내가 보기에 들뢰즈과 라깡의 거리만큼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형님은 들뢰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고, 형이 형님을 딱히 반박한 것은 아니지만, 형님과 형 사이에 간격이 나에게는 분명하게 보였다. 이 시기에 형은 몸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저술작업을 계속하였다. 형은 병원에 다녔고, 분기별 만남도 끊어지고, 게다가 코로나가 닥쳤다. 병문안이 안되었다. 중국현대철학사론 획득과 상실의 역사(2020 06 30)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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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이 불역군자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학습에서 형이, 유붕에서 벗이, 셋째에서 상징으로 형님이 있어서, 나로서는 철학 공부하는 총 53년을 버틸 수 있었다. 형과 벗에게 항상 감사하고, 옆에 없어도 있는 듯이 산다. 그리고 형님은 있어도 없는 듯하기도 한다. 그런데 형님이 9월 말에 섬에서 나와 한철연에 나오신다고 한다. 더하여 세파에 힘들고, 내몰려도 버팅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철연에 기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형: 이규성, 벗: 권용원, 형님: 윤구병, 선생님: 박홍규] (11:25, 59SMNA)
(12:24, 59SNA) (12:30, 59TKB)
정담2026이규성1952얼WC

첫댓글 소크라테스에 관하여
류종렬: “소크라테스, 빨강이인가?”
https://cafe.daum.net/milletune/REMI/8
아래 참조글들은 원문을 번역한 자료들이다.
알프레드 푸이예(Fouillée, 1838-1912), https://cafe.daum.net/milletune/REMP/19
레옹 로방(Robin, 1866-1947), https://cafe.daum.net/milletune/REMP/18
리보(Rivaud, 1876-1956), https://cafe.daum.net/milletune/REMP/15
베르그송(1859–1941), https://cafe.daum.net/milletune/REMG/3 [강의록에서]
벩송과 소크라테스 (https://cafe.daum.net/milletune/REMG/4) [전집 속에서]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https://cafe.daum.net/milletune/S5Th/3
박홍규의(1919-1994) https://cafe.daum.net/milletune/REM3/23
위에 이어서
제르파뇽(Jerphagnon, 1921-2011), https://cafe.daum.net/milletune/REMP/17
나르시(Narcy 1942-) https://cafe.daum.net/milletune/REM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