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13>
안땔마을 / 상여(喪輿) / 앵두꽃
우리 집은 택호가 안땔집이었다.
우리집은 연곡(連谷) 새말에서 제법 부농(富農)으로 살았다는데 강릉으로 이사를 나와 안땔골 차돌배기 옆에서 6.25사변 전까지 10여 년 살다가 가산(家産)이 기울자 우리 어머니 말씀으로 내가 뚜루루... 뛰어다닐 때 이곳 학산 금광평(金光坪)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안땔마을은 지금은 강릉시 강남동인데 반달모양의 자그마한 골짜기여서 원래 이름은 '안달(內月)'이라고 하다가 안땔로 바뀌었다는 곳으로, 강릉시내를 흐르는 남대천을 경계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광평으로 이사를 온 후 3년 쯤, 6.25 사변이 일어났는데 우리 아버지는 사변이 끝나고 그 이듬해 내가 구정(邱井)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 5월에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속이 졸딱 녹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시절, 독에서 퍼주는 벌건 막소주를 소금을 안주로 잡수셨다니 그럴 만도 하였다.
아버지께서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는데 당시에도 일찍 돌아가신 편이었지만 딸 넷은 이미 출가를 시켰고 두 딸과 끝으로 본 아들 형제는 결혼도 못 치르고 돌아가셨는데 내가 8남매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풍채가 매우 좋으신 분으로 재산이 많은 양양의 먼 친척 종손 집에 양자로 오셨다는데 젊은 시절 흰 옥양목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서울과 금강산 여행을 하신 사진이 있는걸 보면 당시에는 꽤나 멋쟁이요,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독차지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좋던 재산은 화재(火災)와 몇 번의 이사(移徙)로 제대로 써 보시지도 못한 채 날려버리고 이곳까지 흘러와 저 고생을 하신다고...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시고 체면을 중히 여겼던 분으로 기억되는데 비록 밭에서 돌을 주워내며 개간을 하시는 등 거친 일도 하셨지만 동네사람 중에 억지를 부리거나 성질을 돋우는 사람들이라도 보면 ‘에이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하시며 외면하셨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딸 여섯 후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 둘도 안고 어르는 것을 한 번도 못 보았다고 하셨다.
후일 어머니의 회상(回想)으로, 누나들이 어릴 때 울기라도 하면 사랑채까지 멀어 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으련만 ‘시끄럽다, 내다 버리라’고 고함을 쳐서 추운 겨울에도 뒤뜰에 업고나와 달래곤 하셨단다.
추운 겨울 바깥에 나와 우는 아이를 얼르다가 겨우 잠이 들어 살그머니 방안으로 들어오는데 등에 엎혀 오줌을 싼 포대기가 얼어서 달그락거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딸 여섯을 키우느라 큰 고생을 하셨던 어머님도 엄격한 아버지의 성격을 받아들이신 것은 종가 어른들이 자손 대가 끊긴다고 아버지에게 첩을 드리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는데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형님은 딸 여섯 후에 낳은 귀한 아들이라 울어도 방안에서 달랬더니 어느 날 아버지가 방문 앞까지 우루루 달려와서는
‘그깟 놈 당장 내다 버려라. 인왕산 호랭이는 자식이 없어도 산다더라....’ 하고 소리를 쳐서 기급을 하셨다는 이야기로 보면 아버지 성질도 대단하였고 잔재미는 없는 분이었던 듯싶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앵두꽃이 만발한 뒷마당 양지쪽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아이고 속이야, 어디 잘 드는 칼이 있으면 이놈의 뱃속을 갈라 한번 드려다 보았으면 속이 시원하겠구만.....’하고 노상 말씀하시곤 했던 것으로 보아 복통(腹痛)이 매우 심하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보신탕을 드시고 싶다고 하여 어머니께서 아끼던 큰 물독을 주고 설래마을에서 개를 한 마리 바꾸어 손질해 오셨다. 솥에 된장 등속을 넣고 끓이는 중 먼저 익은 내장을 꺼내 오라고 하여 뜨거운 국물과 함께 간을 비롯한 몇 가지 내포(내장)를 드시다가 바로 얹혀버리셨다. 정작 고기는 드시지도 못하고 며칠 후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내내 아쉬워 하셨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친지들이 오셔서 둘러앉았는데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비쭉거리며 애를 쓰시기에 어머니가 입에다 귀를 대고 들었다고 한다. 시내에서 오신 오촌 당숙께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무 쪼가리~~하는걸 보니 평소에 말하던, 남부끄럽지 않게 상여를 해 달라는 소리 같네요...”
“상여(喪輿)는 무슨... 형편이 이런데... 숨 떨어지면 관이고 머고 그냥 떠메다가 묻어야지....”
원래 성격이 좀 모나신 분이기는 했지만 좋던 양가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고 말년에 피란민이 사는 이곳까지 밀려와 고생 끝에 임종을 맞는 사촌이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혀는 굳어져 말은 못하시는데 귀는 아직 들리는지 눈꼬리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라고 하였다.
형편이야 어려웠지만 동네의 반장도 하시고 인심을 잃지는 않으셨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이 나섰고, 둘째 누님이 보내온 돈으로 관(棺)도 좋은 것으로 맞추고 상여도 번듯하게 하여 설래 뒷산 공동묘지에 모셨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오촌 당숙의 매몰찬 말씀을 서운해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고모 네서 팥죽을 쑤어오자 나는 겅정거리고 뛰어다니며 마을 아이들한테 ‘우리는 고모 네서 팥죽 쑤어 왔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고 또 만장(輓章)을 내가 들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니 나는 여덟 살이나 먹었으면서 그다지도 철이 없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