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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도 장년 기도력 1월
영광의 소망
THE HOPE OF GLORY
저자 소개_ 존 브래드쇼 목사
‘잇 이스 리튼(It Is Written)’의 책임자이다. 라디오 방송 진행자였던 브래드쇼 목사는 청년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음 전도자와 교회 목사로 일하다가 2011년 1월, ‘잇 이스 리튼’에 합류했다. 그동안 6개 대륙에서 100여 차례 전도회를 이끌며 약 30개 국가에서 ‘잇 이스 리튼’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기도력 『Every Word』를 저술했다. 아내 멜리사와 두 자녀를 두었고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 인근에 살고 있다.
1월 1일 영광의 소망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우리는 대쟁투에 휘말려 있다. 이것은 우주에서 가장 어두운 세력이 하늘의 하나님과 맞서며 벌이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태초에 창조된 인간들에게 타락한 천사들은 악의를 품고 있다. 사탄은 6천 년 동안의 죄로 쇠약해진 인간들을 분노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
그에 대응해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인류에게 알려 주신다. 그분은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으라 하시며,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과…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라고 촉구하신다(골 3:10; 벧전 1:15; 계 14:12). 그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 그대로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26절). 그리고 그 ‘비밀’이 가리키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설명한다(27절).
이 엄청난 전투에서 단 한 사람도 붙잡혀 갈 필요가 없다. 보이지 않는 원수로부터 우리를 지키려고 천사들이 에워쌀 만큼(시 34:7) 이 싸움은 맹렬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과 우리의 나약함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신다. 6천 년의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가 원수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거듭날 수 있는 ‘비밀’을 보여 주신다. 그 비밀은 바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 패배한 죄인에게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을 힘입어 회복되고 재창조될 수 있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도록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만이 아니다. 가까이 계시는 것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위대한 약속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소망”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전 세계 선교지에서 섬기는 선교사들을 위해
1월 2일 수적 열세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삿 7:7)
성경에서 기드온의 이야기는 놀랍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에 맞서 싸우라고 명하셨는데 3만 2,000명은 적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였다. 성경은 적군을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다고 표현한다(삿 7:12). 이렇듯 기드온이 이길 확률은 매우 낮았는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으로 더 줄이셨다. 기드온은 300명을 데리고 엄청난 군대에 맞섰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나님은 왜 기드온의 병력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줄이셨을까? 3만 2,000명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대거 이탈한 뒤에 남아 있던 1만 명을 데리고 승리했어도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적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그런데 기드온이 눈앞의 어마어마한 적군을 고작 300명으로 물리쳤다면 그 승리의 비결은 단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에 앞서 아무리 해도 안 될 것 같은 상황 속에 그들을 놔두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구원받는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해방, 하나님의 치유이다. 한편 다윗의 인구 조사는 그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인구 수효를 확인했다면 다윗과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구원과 번영, 행복이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바라신다.
기드온처럼 절망적인 상황일 때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우리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 넘볼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적으로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다주신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권순범, 강지희 선교사(대만)
베이툰 교회 건축을 위해
1월 3일 폭탄 돌리기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한 남성이 아파트 14층에서 문이 잠겨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절박했던 그는 위층에 찾아가 발코니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밤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와 취한 상태였으므로 그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판단은 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추락했고 윗집에서 13층 정도 아래에 있는 이웃 건물의 지붕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는 목숨을 건졌고 크게 다치긴 했지만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았으니 대단히 운이 좋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매일 이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도 죄를 귀여운 아기 고양이 다루듯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죄란 맹독을 지닌 독사에 더 가깝다. 죄는 치명적이다. 죄 때문에 죽음이 찾아왔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고, 노아가 살던 시절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 죄의 결과로 모든 재앙과 불행이 생긴 것이다. 죄는 결국 예수님의 생명도 빼앗았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는 죄를 그저 ‘재미있는 것’, ‘좀 떨리는 것’, ‘약간 짓궂은 것’ 정도로만 여길 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도덕적인 추문에 휩싸여도 대체로 사람들은 ‘그게 뭐 대단한 일이야?’라고 반응한다.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부끄럽게 여겼던 일들이 이제는 인기와 성공을 얻기 위한 필수 코스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죄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그 위험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죄에 무신경한 것은 폭탄 돌리기와 같다. 50미터 높이의 아파트에서 창문을 타고 다른 집으로 넘어가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해서는 몸을 사리고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죄가 가져다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목숨을 앗아 가는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지 말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지성배, 김영란 선교사(파키스탄)
재정적 어려움으로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장학금 지원을 위해
1월 4일 유혹이 극심할 때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성경에 따르면 죄는 유혹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삶에서 유혹은 피할 수 없다. 유혹이 모두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양만 바뀔 뿐이지 유혹은 늘 존재한다.
문제는 유혹받느냐가 아니라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배우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싶거나 남의 물건을 슬쩍하고 싶거나 말을 둘러대고 싶은 유혹이 들 때라도 그 과정에는 유혹을 뿌리칠 기회들이 늘 있다. ‘어쩔 도리가 없었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발생한 일이야.’와 같은 핑계로 유혹의 실체를 얼버무리려 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부르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환난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보증하신다. 유혹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찾으면 그분이 유혹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그럴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인간이 극심한 유혹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매섭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분이 도와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부족함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유혹을 이겨 낼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유혹도 하나님의 능력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시험에서 건져 내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차분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극심한 유혹 속에서 그분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뚜렷이 보여 주실 것이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계속 그분을 의지한다면 머지않아 하나님을 찾는 삶이 일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죄를 이겨 내는 삶도 일상이 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정훈, 정슬기 선교사(러시아)
사할린 한인교회에 코로나로 낮아진 안식일 출석률이 회복될 수 있도록
1월 5일 굴복하라는 부르심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유지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 두 사람이 똑같이 영적인 유익과 기회를 경험하고 심지어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결과는 전혀 다를 때가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따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은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라고 묻고 나서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자문자답한다. 바울에 따르면 아그립바왕은 믿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진리임을 알았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며 바울의 메시지는 진리의 메아리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분께 굴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것은 그가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았고 영생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면서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그립바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는 쉽지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도 아그립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와 시대는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다름 아닌 마음의 문제이다. 내가 누구에게 굴복해야 할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아그립바가 그토록 추구한 것은 무엇일까? 명예? 권력? 칭송?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숭고하고 더 값진 것, 영원한 것을 찾으라고 부르셨다. 그럼에도 아그립바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아그립바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복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종하면서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종한다는 것은 시험이자 시련이며 삶의 최상위권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맡겨 버리는 것이다. 내려놓으라.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도록 맡겨 버린다면 여러분은 옳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병섭, 이세주 선교사(대만)
타이동 교회가 예배소에서 교회로 차질 없이 승격할 수 있도록
1월 6일 구속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우리는 소름 끼치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뉴스는 연일 무시무시한 범죄 행각을 보도하고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 낸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끔찍한 범죄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고 고백한다. 또 다른 성경절에서는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 1:15)이며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13절)라고 표현한다. 바울은 악당이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성경의 여러 책을 기록했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를 하늘에서 만날 것이다.
서아프리카 국가 라이베리아에 퇴역한 군 지도자 한 명이 있었다. 90년대에 발생한 그 나라의 내전에서 이 지도자 때문에 대략 2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고 진상 조사 결과 그의 주장은 사실로 드러났다. 현재 그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가족에게 찾아가 일일이 사과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표징으로 삼길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든지 그분께서는 그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사업을 계속하시며 가장 무자비한 사람도 돌이키실 수 있다. 한 가닥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라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잔인한 권력자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치러야 할 죄의 값이 있고 그 값은 사망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구속 사업을 벌이고 계신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자신에게는 그 어떤 계획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보여 주신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종철, 윤미경 선교사(몽골)
교회 건축을 위해
1월 7일 도발을 당해도 잠잠히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벧전 2:23, 공동번역)
여러분이 뱀을 자극하면 뱀은 곧바로 공격을 가하거나 공격 태세를 갖출 것이다. 몇 미터 앞에서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개는 건드리면 짖거나 물고, 고양이는 괴롭히면 쉭 소리를 내거나 할퀴고, 말은 난폭해지면 발길질을 한다.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며 달려드는 것이 안타깝게도 인간의 면모이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류에게 베드로전서 2장 23절은 도전장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인류의 창조주이자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거절만 당한 게 아니다. 악인들은 그분을 처단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분의 뜻은 곡해되기 일쑤였다. 당국자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밀정들을 선량한 사람처럼 꾸며 예수께 보냈”고 “예수의 말씀을 트집 잡아 사법권을 쥔 총독에게 넘겨서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다. 정작 분통을 터뜨려야 할 쪽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온갖 도발과 자극에도 예수님은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셨다. 잠잠했고 친절했고 자비로웠다.
그분은 친구에게 버림받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 그런 뒤에 두들겨 맞았고 침 뱉음을 당했고 자신의 피를 요구하는 군중의 고함질을 들었다. 온종일 먹지 못하고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화내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인 동시에 ‘그렇다.’이다. 자기 힘으로는 그런 의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삶에 함께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대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길 앞에서 태연하고 압박을 받으면서도 차분하다면, 저주를 복으로, 악을 사랑으로 갚는다면 이보다 더 강력한 증언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서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배진성, 정해옥 선교사(인도)
선교사들의 안전과 영성 관리를 위해
1월 8일 왕의 탄생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조지라고 지었다. 온 세상의 눈길이 그에게 쏠린 듯했다.
언론 매체들은 그 순간순간을 대서특필했다.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왕세손비 사이에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왕실 소식통들이 분 단위로 실황을 전했고 기념품 업계는 매출 대박을 기대했고 따뜻한 분위기가 영국 전역에 흘러넘쳤다.
놀랍게도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어떤 매체도 이 소식을 다루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이 그 탄생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기야말로 참된 왕이었다.
이 왕족의 탄생은 역사를 바꿔 놓았다. 그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는 맹인을 보게 하고 청각 장애인을 듣게 하고 불구자를 걷게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할 장본인이었다. 이 아기는 혼란에 빠진 이에게 평화를, 비난 대신에 자비를, 죄와 수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베풀 왕이었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이 독창적이고 비범한 능력을 지녔고 그의 지혜는 당대 최고의 학자보다도 뛰어났다. 그런데 이 왕족의 탄생은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의 탄생은 오래전에 예언되어 있었지만 여행자들이 거룩한 아기를 찾아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보니 사람들은 그 왕의 탄생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언론 매체들이 베들레헴의 사건을 대서특필하지 않았어도 이 아기는 세상을 바꾸었고 각 시대 각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대다수가 무시하고 넘어가도 베들레헴의 겸손한 아기께서는 여전히 세상을 바꾸신다. 여러분이 승낙한다면 그분은 오늘 여러분의 세상도 바꾸어 주실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광성, 이은정 선교사(대만)
매일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1월 9일 싸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익숙해지면 얕본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흔한 것은 눈여겨보지 않게 마련이다. 영적인 문제도 그렇다. 죄에 친숙해지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위험이 생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그 해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음욕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 사회를 휩쓸고 있다. 사탄이 여기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문제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팔리는 잡지들은 늘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아이들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매장 진열대에는 한 세대 전만 해도 용납되지 않았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일반 대중이 보는 신문과 웹사이트에서 외설적인 문제를 밥 먹듯이 다룬다.
이런 우려를 구닥다리 사고방식이라고 치부하기 전에 육체의 정욕은 ‘영혼에 싸움을 걸어오는 것’(현대어성경)이라고 말한 베드로의 경고를 명심해야만 한다. 베드로는 부적절하게 빠져든 정욕은 영적인 행복을 거스르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지나고 보면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하는 길들이 있다. 죄는 무해하지 않다. 그리고 사탄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약해지는지를 알고 있다. 성경은 영원한 유익을 얻으려면 사회가 용인한 몇 가지 문제에 등을 돌리라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고한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수많은 사람이 만약 유혹에 저항했다면 그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육욕적인 죄에 저항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면 잘못이다. 반면에 이런 유혹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 낼 수 없다고 말해도 그 또한 잘못이다. 사탄은 6천 년 동안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유혹 방법을 계속해서 탐구했다. 베드로의 권면에 따르면 우리는 맹렬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국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떨쳐 내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지훈, 신은주 선교사(미얀마)
MPM 직업훈련센터에서 배출하는 청년들의 교육 및 독립 과정을 위해
1월 10일 창조의 신비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커다란 거미가 만들고 있는 거미줄을 보면서 나는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거미는 끈기 있게 애쓰며 이토록 멋진 공학적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새들은 둥지를 짓는 법, 정확한 때에 정확한 곳으로 이동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까? 아주 작은 벌새는 멕시코에서 알래스카까지 먼 거리를 이동한다. 최근에 새 떼 특별히 오리 떼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연못이나 호수에 내려앉는 비결을 설명해 놓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오리들은 늘 지구의 자기장과 조화를 이루며 착지한다. 오리는 지구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무리 지어 다니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착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나 그보다 더 대단한 일들을 자연의 본능 혹은 우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물의 경이로움에 대해 좀 더 나은 설명이 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땅의 짐승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들짐승, 새, 물고기를 만드셨고 놀라운 일들을 수행할 지식을 그 속에 넣어 주신 것이다. 물론 동물의 행동 중에는 학습된 것도 있다. 오리는 나면서부터 날지 않고 아기 사자는 사냥 방법을 체득한다. 회색곰도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경이로운 자연은 우리가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알려 준다. 동물이 지닌 놀라운 지식과 기술이 진화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믿음이 필요하다. 분명 새들은 A지역에서 B지역으로 이동하는 법을 터득하기 전에 진화 과정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동물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셨는데 이것은 동물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대단하시다는 방증이다. 거미줄, 벌새의 이동, 오리 떼의 착륙은 완벽하게 계획하시고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드러낸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정태, 김성진 선교사(베트남)
베트남 삼육신학교 이전 및 건축을 위해
1월 11일 균형 유지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균형이 중요하다. 히브리서 5장 9절에서는 예수님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구원이 순종으로 얻어진다는 뜻일까? 구원이라는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 어디서도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히브리서 5장 9절에서는 구원에 순종이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는 삶은 영적으로 계속 성장한다.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영적으로 실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게 된다고 니고데모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영적 거인이 아니라 영적 갓난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학습 곡선을 경험한다. 아기가 작고 연약하게 태어나 자라면서 힘이 세지고 성숙하듯 그리스도인은 양분과 영적 성장이 필요한 가녀린 존재로 태어난다.
영적으로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을 완전히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적 성장을 갈망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아이나 강아지, 정원의 풀이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적 성장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명한 사실은 간과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영적 성장을 경험해야만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정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오면 이후로 절대 약해지는 순간이 없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실망하기 딱 좋은 발상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에 오실 때는 구원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 시간이 갈수록 옛 방식은 가을 낙엽처럼 우리 삶에서 사라져 간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도록 허용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며 삶이 더욱 그분을 닮아 갈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노영, 이미진 선교사(대만)
한글을 배우는 대학생, 주부반 학생들이 성경을 배우고 주님과 동행하도록
1월 12일 그분 앞에서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요나서의 이 짤막한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희망적인지를 보여 준다. 요나는 니느웨에 사는 앗수르인들에게 다가올 엄중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라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강 근처 모술 지역에 해당한다. 요나가 니느웨 가기를 꺼렸던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앗수르인은 잔혹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한 작가는 대영박물관에서 열린 아시리아 미술 전시회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들”이 담겨 있는 전시회라 평하기도 했다.
요나는 대놓고 하나님에게서 도망쳤다. 니느웨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는 정반대편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욥바항에 서 있는 요나를 보셨다. 그가 다시스행 배에 오르는 것도 보셨다. 그분은 폭풍우를 보내어 그 배를 곤경에 빠뜨리셨고 반항적인 선지자를 데려가고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욘 1:17). 그 바다 생물을 마주한 요나는 ‘이제 죽는구나!’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기밥으로 만드는 대신 특별한 사명을 위해 붙들어 놓으셨음을 금세 알아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을 그는 깨달았다.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쳤다고 믿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의 곁에 계셨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뛰쳐나가도 그분께서는 바로 뒤따르며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자기 나름의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은 지켜보고 살피신다. 요나처럼 어리석게 행동해도 하나님은 눈을 부라리거나 평정을 잃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시고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기회를 주고자 사랑으로 행하신다. 하나님을 피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피하라. 여러분이 영생을 위해 준비되도록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조장원, 이성혜 선교사(인도네시아)
새로 개원한 동인도네시아 자야푸라 분원을 통해 파푸아 오지에 세 천사 기별이 힘차게 전파되도록
1월 13일 돌이키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전했다. 이때 성령에 감동받은 베드로는 ‘돌이키라’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에는 ‘회전하다’, ‘방향을 바꾸다’, ‘되돌리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방향으로 인생길을 걷는다.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유턴하라고, 방향을 180도 되돌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따르면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송두리째 바뀐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하나님과 동떨어진 옛 삶을 손질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대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사람은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회심 이전의 삶에 머물러 있기란 불가능하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아래쪽으로 세 번째 장소에 크고 낡은 주택이 있었다. 분명 누군가 그 집에 살고 있었지만 마치 수년 동안 버려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낡아 빠진 지붕이 수리됐고 외벽 널판이 바뀌었고 페인트칠도 새로 했다. 창문도 새것으로 갈았다. 현재 그 집은 패션 잡지에 소개될 법한 아름다운 주택이 되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바뀌면 집이 바뀐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영접하면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이 역동적으로 임하셔서 삶을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내맡기면 그분은 그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수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바꾸어 놓으신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게 해 드리자. 그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원상, 김수경 선교사(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교우들의 삶이 개선되도록
1월 14일 실화인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스코틀랜드 북쪽에 길이가 32km인 호수가 있다. ‘네스호의 괴물’이라는 신비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호수이다. 이 호수에서 신비한 바다 생물을 목격했다는 주장들이 수년 동안 제기됐고 네스호의 괴물을 찍었다는 사진과 동영상들도 등장했다. ‘네시’라고 별칭하는 이 생물체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네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
보았다는 이도 거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수천 년 동안 주장된 장소가 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 이 장소를 언급했고 성경의 마지막 책 역시 그 장소에 대해 말한다. 그렇게 성경에는 그곳이 수백 번 나온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고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소개하신다. 여러분은 그곳에 가 보지 못했다. 가 본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왔으며 하늘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지구로 돌아와 자기 사람들을 하늘로 데려가서 함께 지낼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천국에 황금 거리, 생명강, 생명나무 또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 저택이 있다고 들었다.
네스호의 괴물이 실존한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천국은 분명히 존재한다. 천국은 이 땅에서 보내는 짧은 인생을 영원한 삶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약속이다. 죄로 얼룩진 이 세상이 언젠가 끝난다는 징표이며 우리 삶에서 아픔과 눈물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증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늘에 있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놓으셨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도록 하라. 그러면 하늘은 여러분의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세담, 박유진 선교사(대만)
선교사 비자가 속히 발급되도록
1월 15일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
참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어느 컴퓨터 매장 직원들은 바로 옆의 매장에서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들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여성의 비명과 끔찍한 폭행이 벌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여성은 동료 여직원에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지도 심지어 건물 경비원을 부르지도 않았다.
옆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영생을 잃고 죽어 가는 이들을 향해 신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이 그저 팔짱만 끼고 있는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사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의 길로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바꾸어 놓을 무언가를 하라고 자기 사람들에게 간청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마 28:19).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부르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통해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실 수 있을까?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힘을 합쳐 불쌍한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나선다. 이 세상에도 6,000년 전에 큰 재난이 닥쳤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해자들을 도울 이들을 찾고 계신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먼 곳까지 날아갈 선교사가 있어야 한다. 직장과 학교, 지역 사회와 가정에도 선교사가 필요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잃어버림 당한 이들은 산과 바위를 향해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계 6:16). 놓쳐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 오늘 하나님을 힘입어 누군가를 영원한 길로 이끌고 싶다고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시어 누군가의 삶에 복음의 빛이 밝혀지게 하실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최봉길, 최경미 선교사(필리핀)
선교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잘 성장하도록
1월 16일 요지부동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500년도 더 지난 1521년 4월 18일에 젊은 수도사 하나가 위압적인 교회 공의회 앞에 섰다. 공의회로부터 교회와 구원에 관하여 자신이 쓴 글을 취소하라는 성난 요구를 받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독일 보름스성에서 소집된 역사상 가장 엄중한 모임에서 루터는 용감하게 선언했다. “여기 서 있는 저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오늘날 보름스에 가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필립 멜란히톤,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등 여러 종교 개혁자에게 헌정된 거대한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가까운 교회 외벽에는 루터의 유명한 선언이 새겨져 있으며 예수님을 위해 루터가 담대하게 섰던 자리에 소박한 표식이 남아 있다.
이사야 50장 7절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분의 헌신이 주를 이룬다. 예수님은 조롱과 핍박을 받고 괴롭힘 당하면서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죄 많은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셨다.
위대한 믿음은 단지 마르틴 루터나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는 특성일까? 하나님께서는 매일 각 사람에게 위대한 믿음을 발휘할 기회를 주신다.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 예상치 못한 중병을 진단받고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 가슴 아프지만 하나님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기에 파혼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며 전진하는 젊은 남녀가 바로 그런 이들이다.
그보다 훨씬 더 평범한 순간일지라도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것은 위대한 믿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생의 더 사소한 사항들에서 위대한 믿음을 터득했고 그 믿음을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냈다. 하나님을 신뢰한 그의 경험을 여러분도 누릴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최운성, 조선희 선교사(대만)
대학생 선교를 위해(교회 반경 5km 이내 3개 대학의 학생 3만 1,000명)
1월 17일 얼마나 오래 살까?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영국의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지는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기대 수명이 100세에 이를 것이라고 전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성경에 비추어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모두가 영생을 누리는 온전한 공간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요일 2:25)이라고 사도 요한은 확실히 말했다.
100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영연방 국가에서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사람은 관례적으로 여왕에게 축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훨씬 나은 계획이 있다. 성경의 선조들에 비하면 100세까지 사는 것은 햇병아리 수준에 불과하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 그의 아들 셋은 912세, 셋의 아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다. 세계 최장수 기록 보유자인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다가 홍수가 발생한 해에 죽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은 죽지 않고 승천해서 지금껏 살아 있는 에녹이다.
죄가 퍼진 세상에서는 100세까지만 살아도 대단한 일이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의 수명은 116년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장기 계획’을 세우기를 바라신다.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노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건 정말 긴 시간이에요. 내가 그렇게 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사람은 의미와 성취감이 있는 즐거운 삶을 끝없이 누릴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이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태영, 전주은 선교사(인도네시아)
서인도네시아 1000명 선교사 훈련원에 더 많은 선교사가 모집되도록
1월18일 실수가 아닌 선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어느 남자에게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온라인 결제 수단인 그의 페이팔 계정에 실수로 미화 9경 2천조 달러가 입금된 것이다. 백만 달러에 백만을 곱하고도 9만 2천을 다시 곱한 액수다. 1,000조 달러만 해도 그해 전 세계의 총생산을 합한 액수의 11배나 된다. 페이팔 측은 몇 분 내로 그 오류를 수정했고 그의 자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갔고 잔고가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중에 그는 돈이 빠져나간 걸 보고도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그런 엄청난 선물을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영원한 삶은 9경 2천조 달러와 비교할 수도 없이 값지다! 영적 계좌를 확인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이게 말이 돼? 도대체 누가 이런 터무니없는 선물을 주겠어?”라며 소리 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아니란다. 전부 네 것이야. 자격이 없는 너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었단다. 그걸 돌려받을 생각은 없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값진 선물은 세상의 그 어떤 부와도 비할 수 없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난 낭비이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세상에 오셨다(요 10:10).
바울은 우리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제 힘으로 획득할 가능성도, 받을 가치도 전혀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가치 있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경원, 조효정 선교사(파키스탄)
파키스탄 1000명 선교사 분원 건축을 위해
1월 19일 끔찍하다. 끔찍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가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아이를 놀리기 시작했고 아이는 더 이상 축구가 재미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엄마는 ‘그렇게 할 거면 뭐 하러 축구를 하니? 아유, 끔찍하다. 끔찍해!’라고 말하곤 했어요.” 자기 엄마라는 사람이 퍼부은 조롱과 거부 반응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장 잘 격려해야 할 장본인이 오히려 그를 깎아내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부모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 주셨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바울은 ”아비들아”라고 말했지만 이 교훈은 분명 어머니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축구장까지 쫓아다니는 엄마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부모는 자녀에게 다양한 말을 한다. 모든 부모가 항상 옳은 말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마디로 아이들이 힘을 얻거나 무너질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리고 여린 아이들을 대할 때는 한마디 말이 큰 유익을 주거나 큰 해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녀를 기를 때 주어지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한번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별 악한 뜻 없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나,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지만 순간적로 울컥하여 쏟아 낸 말도 되돌릴 수 없다. 사과한다고 해서 부주의한 말로 입은 상처가 다 무마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울려 버린 종소리는 거둘 수 없고 한번 내뱉은 말 또한 주워 담을 수 없다.
여러분은 부모이든 아니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가장 거친 혀라도 길들이실 수 있다. 친절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라.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언어에서 그분의 임재가 드러날 것이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은 태도와 어휘도 바꾸어 주실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효수, 김윤주 선교사(서아시아필드)
비밀리에 예배드리고 선교하는 이란 교우들의 안전과 신앙을 위해
1월 20일
손쉬운 접근
“여자가 뱀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어’”(창 3:2, 쉬운성경)
호주에 사는 세 살배기 아이가 뒤뜰에서 알 몇 개를 찾아내 그릇에 담아 침실 벽장에 넣어 두었다. 얼마 뒤 엄마는 아이의 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방 안을 살펴보다가 일곱 마리나 되는 새끼 뱀을 발견하고 까무러칠 뻔했다. 아들이 주워 온 알에서 나와 침실에 둥지를 튼 뱀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독사인 이스턴 브라운 스네이크였던 것이다.
야생 환경에서 뱀을 봤다면 상황은 다르다. 뱀은 야생 동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뱀과 마주치기가 싫겠지만 야외에서 뱀을 만났다면 뱀의 활동 영역에서 뱀을 만난 셈이다. 독사는 야생 동물이다. 따라서 침실 옷장에, 특별히 세 살배기 아이의 옷장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성경에서는 사탄을 뱀으로 묘사한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그를 집 안으로 들이고 있다. 오늘날 사탄은 다양한 통로로 우리의 삶에 접근한다. 대표적인 수단이 TV와 인터넷이다. 이스턴 브라운 스네이크 일곱 마리를 집 안에 풀어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묵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죄가 어떤 경로로 세상에 들어왔는지 생각해 보라.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면서다. 사탄이 인간에 접근하려고 사용한 뱀은 분명 매우 아름다웠을 테고 하와는 보고 듣는 것에 빠져들었다. 하와가 만약 뱀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또 사탄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물리쳐 버렸다면 인류가 타락할 일도, 죄가 세상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혹에 저항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사탄을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사탄이 손쉽게 작업을 벌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예수님을 초청하여 사탄을 물리치시도록,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그를 쫓아내시도록 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민섭, 김순임 선교사(대만)
신띠엔 교회의 대학생 선교 사역을 위해
1월 21일 결과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 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국제 보석 거래의 중심지인 브뤼셀 공항에서 남자 8명이 비행기에 실린 다이아몬드를 11분 만에 훔쳐 갔을 때 경찰들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절도는 치밀하게 계획됐고 도둑들은 5천만 달러나 되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기막히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5천만 달러짜리 다이아몬드를 도대체 어떻게 처분하느냐였다. 바로 여기서 일이 꼬여 버렸다. 보석들을 제네바로 빼돌리려는 시도는 그들의 완벽한 절도 행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허술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그 결과를 모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민수기 32장 23절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짓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처음의 거짓말을 은폐하고자 또 다른 거짓말들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딱 한번 이성을 잃고, 커닝하고, 나가서 술에 취했어도 거기에는 ‘결과’라고 하는 골치 아픈 일들이 따르며 그 대부분은 피할 수가 없다. 은밀하게 저지른 일들 또한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잡힐 것이 두려워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때 생길 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요한은 진술했다.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면 다 엉망진창이 되고 말 거야.’, ‘이렇게 하면 누군가 상처를 입을 거야.’라고 생각만 했더라도 유혹에 빠져들 일은 훨씬 줄어들고 훌륭한 결정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유혹이 몰려오면 멈추고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옳은 길을 택하라는 하나님의 경고, 뜻을 단념하고 그분께 굴복하라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려놓기로 선택하라. 유혹의 한가운데서 예수님께 마음을 내맡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에서 건져 주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행동에는 결코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르지 않는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효신, 이은화 선교사(캄보디아)
힘들게 사는 캄보디아인들의 아드라 구호 활동을 위해
1월 22일 불행한 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여인은 자신의 결혼반지를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작은 나무 상자에 담아 옷장 속에 두었다. 나무 상자를 이불 밑에 밀어 넣었고 퇴원하면 와서 꺼낼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마음씨 좋은 남편은 집안을 청소하고 남아도는 물건들은 벼룩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집 안을 정리하다가 옷장에서 나무 상자를 발견했고 10달러에 그것을 팔았다. 상자 속에 있던 결혼반지의 값어치는 2만 3천 달러나 되었다. 문제는 상자 안에 소중한 반지가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몰랐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주기만 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람들이 겪는 영적인 문제는 대부분 소통의 부족에서 비롯한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고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소통이다. 누구나 할 수 있고 특별한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
삶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서도 우리는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감사, 찬양, 탄원, 고백의 기도일 수도 있고 자신이나 타인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다. 기도할 것이 이렇게 차고 넘치는데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기도는 부족하고 미흡하다며 한숨짓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셨다.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꿈으로 뜻을 알리셨고,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을 길에서 부르셨고, 컴컴한 밤중에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고 싶어 하신다.
자신의 기도 생활이 시원찮다고 해서 문제를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그 나무 상자를 구입한 사람은 그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신문에서 보았고 반지는 되돌아왔다. 하나님과 소통이 부족하여 삶이 복잡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잘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과 자주 이야기하는 습관을 들이자. 그러면 삶이 풍성한 복을 얻을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손만식, 어은숙 선교사(필리핀)
세 천사 평신도 선교단을 위해
1월 23일 밤도둑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다. 거듭거듭 성경에서는 그날을 위해 준비하라고 다그친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한밤중의 도적같이 임할 것”(살전 5:2, 쉬운성경)이라고 바울은 기록했다. 흔히 도둑은 생각지 않은 순간에, 사람들이 걱정 없이 가장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온다. 도둑에게 집이 털려 봤다면 그 충격과 참담한 기분을 알 것이다. 알다시피 도둑들은 들키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재주가 뛰어나다.
1990년 3월, 두 남자가 미국 보스턴에 있는 가드너 박물관에 경찰 행세를 하고 들어가 경비원 두 명에게 수갑을 채운 뒤 무려 5억 달러어치나 되는 미술품을 훔쳐 갔다. 거기에는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의 명작들도 있었다. FBI는 절도범들의 신상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도난당한 그림들은 되찾지 못했고 혐의가 제기되지도 않았다. 도둑들은 밤에 왔고 허를 찔린 박물관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소스라치게 놀랄 비상사태가 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재림을 가리키는 징조들이 성경에 분명하게 소개되어 있는데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에 대비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노아 당시의 홍수나 예수님의 초림에 대해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았듯이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화들짝 놀랄 것이다.
지금의 삶은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옳게 이해한다면 지구상에 살면서 벌이는 온갖 사업과 분주한 활동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여러분의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어디에 정력을 쏟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다. 그분의 재림이 여러분에게 비상사태가 되지 않게 하라. 재림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기꺼이 맞이하려는 사건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최중식, 이주현 선교사(대만)
영성 훈련을 통한 제자 양육과 루주 교회의 성장을 위해
1월 24일 재림을 맞이할 준비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예수님의 재림은 수많은 사람에게 밤의 도둑처럼 이를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온갖 기회를 다 제공하셨는데도 대다수는 준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1941년 12월 7일 아침, 두 남자가 이동식 레이더 장치로 하와이 오아후섬 주변의 하늘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보국에서는 하와이가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보낸 터였다. 사실 진주만에 첫 번째 폭탄이 떨어지기 약 1시간 전에 레이더를 작동하던 두 사병은 일본 항공기들의 접근을 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상부에서는 그것을 아군 항공기로 오판했고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아무런 제재 없이 미국 영토로 날아들었다. 그 결과로 2,200여 명이 사망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말려들었다. 미국이 좀 더 단단히 경계했다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여전히 비극적이기는 해도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몇 년 전부터 인간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냈다. 운전하거나 걸으면서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 때문에 지금까지 없었던 문제들이 생긴 것이다. 그 한순간의 부주의로 삶은 돌이킬 수 없게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조심’하는 것은 안전 운전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자칫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전 중에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는 경우가 흔하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정신이 산만한 사람, 즉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닌 ‘잠들어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꾸준하게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하늘을 의식할 수 있고 성령이 마음에 계속 거하실 수 있다. 영원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머지않아 마지막으로 설교를 들을 때가, 마지막으로 전도지를 나눠 줄 때가, 마지막으로 성경을 배울 때가 이를 것이다. 머지않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류재경, 김미현 선교사(기타 지역)
레프코샤 교회 건물 구입을 위해(재정 확보와 좋은 건물을 찾도록)
1월 25일 진리의 사랑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사도 바울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다(살후 2:10).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진리를 ‘아는’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한다.
교회에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예언에 대해 깊이 알고 교리에 빠삭한 사람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성경적 ‘IQ’는 높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가슴 아플 정도로 흔하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채 지식만 높이 쌓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원하는 진리를 다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을 건드리실 때만 그 진리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구원은 이론으로 얻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옳으면서도 여전히 틀릴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상당한 부분에 대해 옳았지만, 신앙을 지키는 가운데 메시아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진리는 올바르게 경험하면 변화를 가져다준다. 진리를 많이 알수록 더 ‘철두철미’해지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진리를 더 알수록 더욱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이다. 궁극적으로 진리는 교리나 예언이나 성경 해석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다. 진리의 궁극적인 표현은 인격이신 예수님이다. 성경이 밝혀 주는 빛 가운데서 계속 전진하는 사람의 품성은 갈수록 더욱 그분을 닮아 가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순수한 교리를 사랑하거나 올바른 성경 원칙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그 진리에 더욱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진리는 조금도 진리가 아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의권, 스즈키 에리코 선교사(일본)
구지가와 교회와 쓰쿠바 학원교회의 영적·육적 건강과 연합 및 지역 사회 선교를 위해
1월 26일
인간에게 가장 좋은 친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학자들은 머지않아 애완동물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 고양이 심지어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과 동물은 ‘의사소통’을 해 왔지만 지금은 과거에 비해 한 단계 더 발전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사람들은 개에게 그만 짖으면 좋겠다거나 무엇 때문에 짖는지 알고 싶다고 말해 줄 수도 있다. 동물행동학자들은 고양이와 이야기하는 법을 찾아내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신다(렘 33:3). 기도는 단순한 과학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기도하려면 친구에게 하듯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된다. 기도란 아뢰지 않으면 들어주시지 않았을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시게 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기도의 목적은 바라는 것을 얻어 내는 게 아니다. 누군가와 결혼한 결과가 불행으로 이어진다면 하나님께 그런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직업을 얻은 결과로 인생이 더 고달파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더욱 감사할 것이다.
바르게 이해한다면 기도는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0절에서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이다”(한글킹제임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뜻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지 않기를 더 바라셨지만(마 26:42)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다.
학자들은 언젠가 사람이 고양이와 개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고 내다본다. 그러나 꼭 필요한 언어는 기도의 언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진정 그분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남웅, 심은정 선교사(대만)
새 지역에서 시작한 교회가 기존 교우들의 제자 훈련을 바탕으로 전 교인 복음 전도 운동이 일어나도록
1월 27일
멋진 삶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어니는 사륜 오토바이를 탔던 멋진 날에 대해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쓰러진 나뭇가지 위로 지나갈 때 들판에 있던 사슴이 달아났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만면에는 미소가 번졌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딱 하나만 뺀다면 말이다. 어니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사람들이 볼 때 큰 걸림돌이라고 여길 만한 장애가 있지만 어니는 사륜 바이크를 타고 농장을 돌아다녔다. 그가 위험한 곳으로 다가갈 때면 조카가 휘파람을 불어 알려 주었다. 어니에게는 기막힌 하루였다!
장애라고 하는 것이 풍성한 삶에 걸림돌이 되게끔 그냥 놔두지 않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그뿐 아니라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 우리가 무의미하거나 변변찮은 삶을 사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계획은 어마어마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실현된다.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구해 와서 얼마 안 되는 너의 기름으로 그 그릇들을 다 채워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그대로 따르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 이야기에서 가난한 과부가 그릇을 겨우 두세 개만 빌려 왔다면 선지자가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또 그 과부는 어떤 복을 잃어버렸겠는가? 한 여인이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행위는 하나님께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을 기대한다는 표현이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갈 수 없었던 네 친구는 군중 때문에 체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붕으로 친구를 데리고 올라가 예수님 바로 앞에다 그를 내려놓았다.
어니가 사륜 바이크를 타지 않았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기꺼이 뛰어들었고 그 덕분에 이야깃거리와 영원히 보석처럼 간직할 추억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린다면 그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복을 소나기처럼 부어 주실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찬민, 백수경 선교사(레바논)
진리를 갈망하는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비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1월 28일 과정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올림픽 선발전 800m 여자 육상 경기 도중 브렌다 마르티네즈는 100m도 남지 않은 지점에서 동료 주자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올림픽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종목의 출전이 좌절됐다. 그러나 경기 이후 마르티네즈는 낙담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1,500m 경주 준비에 집중하고 있으며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미국 국가 대표로 출전할 최고의 기회를 얻기 위해 실망감을 떨쳐 내야 한다고 마르티네즈는 말했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집중한 것이다.
무리하게 목표에만 치중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때가 있다. 비이성적인 위험이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평점 4.0 유지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학생이 A학점을 얻으려고 커닝을 하거나 운동선수가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정 목표를 이루려다가 선을 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지나친 목표 지향은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목표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영적인 목표에 관해서는 특히 그렇다. 구원받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신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체크 리스트로 여기기가 쉽다. ‘나는 바르게 예배드리고, 바르게 헌신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의롭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행동에 치중하는 것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다.
바울은 과정에 집중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는 말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살라는 뜻이다. 구주와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에서 바울은 과정을 강조한 것이다.
외적인 것과 행위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은 좌절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과 하나 되는 과정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기쁘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영생이 자기 것이 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서세광, 최우정 선교사(홍콩)
홍콩 삼육대학의 캠퍼스 선교, 특히 다문화 학생 선교를 위해
1월 29일 두 번째 기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1849년,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반정부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12월 22일에 총살형을 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형수는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쪽에서 자신이 처형될 차례를 기다리며 동료들이 줄줄이 기둥에 묶이는 모습을 보았다. 사형 집행인들이 총을 들었고 사형수들은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준비, 조준!” 하는 명령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사격 명령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에 전령이 도착해 러시아 황제가 그들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진작부터 집행 유예를 허락했지만 그 사실을 최대한 늦게 알려 주고자 했던 것이다.
몇 년 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쓴 소설에서 처형대에 올라 죽음을 기다리는 인물을 묘사했다. 주인공은 만약 삶의 기회가 다시 한번 더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1분을 일생처럼 바꾸어 놓겠다.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고 매분을 계산하겠다.”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사실 모두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는 “죄의 값은 죽음”이라고 말하며 바울은 같은 책 앞부분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고 진술했다(롬 3:23, 쉬운성경).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죄의 형벌을 면할 길을 제공해 주셨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예수님을 믿는 죄인은 누구나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 모두는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주신다. 사형 선고는 취소되고 온갖 것이 가능한 삶이 우리에게 펼쳐진다. 놓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진수, 이주연 선교사(대만)
교회 이전과 리모델링을 위해
1월 30일 아버지 용서하소서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 3:13, 공동번역)
부당하게 취급받았다고 느낄 때 생기는 분노나 원한은 좀처럼 삭이기가 힘들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권한다(골 3:13).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할 때가 자주 있다. 어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올림픽 경기에서 자기를 이겨 놓고 나중에 약물 남용으로 드러나 실격당한 여자에 대해 “절대로 용서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살인 사건 재판 도중이나 재판 후에 사람들은 피고인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런 감정을 유발하는 아픔과 고통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원한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상처와 고통에만 매달리면 신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에도 해롭다.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은 독약을 먹고 나서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다. 바울은 용서할 만한 경우에만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서는 무엇보다 용서하는 그 자신에게 가장 큰 효과가 있다.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품기로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가해자가 통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는데도 피해자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그가 머물면서 고통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코번트리의 대성당이 폭격을 당한 뒤 성당 주임 신부인 리처드 하워드는 건물 잔해 안쪽의 제단 뒤에 ‘아버지 용서하소서.’라는 문구를 써 놓았다. 도시가 적군에게 폭격당하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리처드 하워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았다.
용서의 대가는 예수님이시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오늘날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도 용서의 손길을 펼치신다. 아무도 받을 자격이 없는 용서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형우, 배현경 선교사(일본)
동경 한인교회 이전 및 건축을 위해
1월 31일 너를 용서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한 남자의 운전 부주의로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했다. 깊이 뉘우치고 있는 그 남자에게 고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저의 가족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말이었다. 물론 그를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를 베푼 덕분에 고인의 가족은 끝없는 상처와 원한에서 벗어나 앞날을 살아갈 수 있었다.
‘너를 용서한다. 가족들도 너를 용서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자세이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한다. 믿을 수 없는 용서에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남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용서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에 내놓을 것이 없다. 기독교인들의 표준이 높다는 것을 비신자들은 알고 있으므로 교회가 표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비난과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셔서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시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어떤 능력보다도 위대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아픔과 상실을 겪으면서도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용서를 거부할 때가 많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로 택하셨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기회가 펼쳐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라는 성경절처럼 놀라운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얼마나 잘못을 많이 저질렀든지 하나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도 남들에게 그와 똑같이 사랑과 동정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 활짝 열려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고종식, 김은아 선교사(필리핀)
필리핀 아드라 사업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