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희고 높고 외딴 꿈
- 김승민 선생님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 속 자작나무들의 마을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라는
백석의 시 「백화(白樺)」를 읊는다.
“빨리 떠나야한다 시간이 없다”집을 나서는 우리 식구 동구 밖으로 이웃사촌들
길이 모여 강을 이루고 허허벌판 수백 수천이 난리가 났구나.
1950년 겨울, 아아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울며불며
돌아갈 길 완전히 끊어버린 바로 그 날이었겠다 싶었지요.
그날을 아프게 그려보면서 나도 따라 부산까지 떠내려 왔더니
부모님의 남행은 그때 보다 먼저였다 합니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홀로 남아
초생달 설운 이별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발길 닿은 곳은 부산 아닌 광주 땅이었다구요.
항, 임 마중 길을 잘 못 잡았군요.
그래요... 바로 광주시 대인동.
이 포구의 골목이라면 내게도 손바닥인디
그 남도극장 천일극장 시민극장 계림극장들을 샅샅이 조사하며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바람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말잠자리처럼 대인시장 금동시장 남광주시장 학동시장으로 건들거리던
그 60년대 고물 영사기 속 빛바랜 영화 같은 장면이라도
한번은 기엉코 스쳤을 인연.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라니!
우리 이제는 환갑 진갑으로 고개고개를 넘어왔나니!
“내래 우리 아바이는 함경남도 북청 바다 갈매기 같았지비
고저 우리 오마닐랑 강원이북 원산포구래 아침놀마냥 고았다디요”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 팔십 구년 여름.
끝내 직장을 건 한판 승부로 소용돌이치면서
추격과 피난의 공방이 죽 끓던 불망의 전교조 전선
그 눈 땡그런 전장에서 내래 한눈에 반했더란 말입니다.
고저 이 사람 외로운 사람이로구나...
그날로부터 모름지기 난 의형제의 환몽도 꾸었드랬디요.
이 자, 남쪽바다 의연히 독도 같은 파도, 김승민입니다.
반도 땅 남쪽 끝에서 우리는 기꺼이 선생님의 업을 삼았습니다.
통일겨레 빛나는 염원의 깃발을 왼손에 들고
바른손엔 민주나라 건설의 백묵 높이 들어
저 높은 이상,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혁명의 숨결 가다듬어 천지신명께 고해바친 맹서.
전교조가로 북을 치고 참교육가로 함성을 높였습니다.
“어아어아 배달의 아들딸
백백천천 우리 모두
착한마음 큰활 되고 약한 마음 과녁되네
어아어아 우리 모두 곧은 화살 한마음 되리”
우리들 가슴 속 불화살처럼
우리들 한마음으로 벼린 날선 검처럼
시시때때로 고개를 드는 꽃송이 같이
민주교육의 꽃잎 천지사방으로 흩날렸습니다.
이 애타는 반도의 남쪽 모퉁이를 붙들고
흠도 티도 없이 떳떳하게 참세상의 너른 밭을 일구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당신의 쟁기 날에 갈채를 뿌립니다.
내 평생의 불구, 분단의식은
세상 모든 관계의 분열 또는 고통을 상징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기형을 보듬고 가까스로 한 세상을 넘었습니다.
아직도 당당 멀었습니다.
남은 날도 진력을 다하여 진정한 평화가 우리나라로부터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기도합니다.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라 외친
백석의 마을 어디쯤, 오마니 아바이의 고향 그리울 때면
그대의 오랜 노고와 허무와 그리움의 일기장을 태워
자작자작 타오르는 흰 냉갈 한 줌 소맷부리에 훔치시게나.
그 뒤로 서서 나는 검은 눈썹 흰 꽃 한 송이로 고개를 숙이겠네.
자작나무 숲은 희고 높고 깨끗합니다.
우리 민족의 진산 백두 천지의 건강한 물맛으로 자랐습니다.
참세상과 통일세상을 갈망한 그대의 사상도 희고 높습니다.
“승민아우...
갑진년 정월 스무 두 날 아침, 아우님 생각하며
이 편지를 쓰네. 두 집 처마 나란한
개천산 천태산 바라기 우리 도담마을 마루에
높지막이 바람이 불고 나지막이 눈발이 붐비네.
이 눈이 하얗게 밤을 새우면 우리들의 아침은
천상의 날개가 되어 알바트로스 새처럼 날아오르기도 했지.
그러면 어떠하던가 저 말 아래 사바가...
그리고 우리들 희디흰 지상의 꿈은...
캥캥 여우 울음은 없어도 자네 양이와 우리 강애지 울고
그 맛있는 모밀국수 삶을 장작이사 천지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큰 새 알바트로스 수컷은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장 오래 난다는데
긴 활개로 까무룩이 구름 위를 차오르면
뒤돌아 지상으로 걸친 사다리를 툭 걷어차 버린다네.
눈 폭풍 몰아치는 남극의 하늘도 아니고
블리자드 빙원의 가장자리를 헐어야 할 땅도 아닌
참 아늑하고 자늑한 이름 없는 마을에서
아홉은 하늘선반에 올려놓고 나머지로 온전히 땅 하나를 쉬는 맛.
그대 소꼽스런 첫 동네에서 우리 어른스런 끝 마을까지
흰 수염 길게 한번 날려나보세나.”
순하고 의롭고 외로운 자작나무 그대여,
우리 오랜 동무여!
유성이 빗발치던 임자도의 여름 그 파도소리처럼
보길도 끝 몽돌바다에 누워 황홀하던 가을 달빛처럼
우리들의 첫 처음 참교육 맹세하던 싱싱한 건강과
달콤한 생의 자랑이 쏴쏴 밀려들기를
참교육 원년 동지들 앞에서 한마음으로 기도하겠네.
단기 4357년 2월 23일
김진수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