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 사천 이야기 35
사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 삼천포 향촌동 하향마을 매향암각 이야기(1)
사천에는 백성들의 미래 세상 염원을 담은 매향비와 매향암각이 있습니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 시대 사람들은 좋은 향나무를 골라 다듬어 펄 속에 묻어두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향 가운데 가장 귀한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 스스로 물위로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갯벌에 묻어 만든 침향(沈香)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하고 향기는 비길 수 없이 감미롭다고 합니다. 그 향을 불교에서는 최고의 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로 으뜸인 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埋香)의식을 하고 그걸 기념하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 바위에 글을 새겼습니다. 비석처럼 세운 것을 매향비라고 하고 그냥 땅 위에 삐져나온 바위에 새긴 것을 매향암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사천시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자료와
초록창 언니의 도움을 받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도 쬐끔 보태고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매향비와 매향암각은 고려시대 9개, 조선시대 7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중에 사천 곤양면 흥사리에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 보물 제614호), 사천 향촌동 하향 마을에 삼천포 매향암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88호)이 있습니다.
매향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이라는 불경에 근거한 신앙형태로,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그 나라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의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미래에는 고통 없는 천국이나 극락에 태어나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 염원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입니다.
발견된 매향비는 모두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갯벌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불가(佛家)에 전하고 있는 매향하기 가장 좋은 곳이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 사천 흥사리 매향비 근처에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갯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옛날에는 매향비 근처까지 사천만을 통해 바닷물이 올라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천 매향비 비문을 보면 매향을 주도한 이들은 권문세족이 아니라 승려와 일반 백성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매향비가 모두 14, 1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왜구의 침략이 많았던 해안지역의 불안한 민심을 매향을 통하여 치유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빼앗아 가고 거두어 갈 줄만 알았지 외적 하나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나라(왕실, 중앙 정부)보다는 신앙(종교)에 의지하는 것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침향을 흠향하게 될 부처는 현세불(석가모니)도 내세불(아미타)도 아닌 미래불(미륵)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현실에서는 희망이라는 것을 꿈조차 꿀 수 없었습니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고통 없는 미래를 염원했던 겁니다.
고려 말기 백성들은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안으로는 권문세족한테 시달렸고 밖으로는 왜구한테 당했습니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서글픈 비원이 56억7000만년 뒤에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인 것입니다.
이는 매향지의 백성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했던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천 흥사리 매향비는 1977년 6월에 발견되었으며, 1978년 3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매향한 곳에 세운 비석으로 그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그 첫째는 ‘완전한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 중 네 번째 이른 시기에 세워진 것인데도 보존 상태가 무척 양호합니다. 다른 매향비들이 투박한 글씨로 간략히 새겨졌다면, 흥사리 매향비는 14행 204자의 글자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발원자의 수가 4100명으로 가장 많다는 점입니다. 4100명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숫자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조선 초기 사천현의 인구는 1817명, 고성현은 2885명, 곤남현(곤양과 남해 일대)은 1300명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파악되고 있던 호구대장에 따른 수치이겠으나, 어쨌든 매향의식에 4100명이 모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매향을 위하여 돈이나 물품을 내고 발품을 팔고 사람을 모으고 지식을 보탠 인원이 고을 전체 인구보다 많습니다. 이는 인근 고을 백성들도 힘을 모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매향 의식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백성들의 대규모 결집은 지배계급에게는 위력시위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매향한 지 635년이 흘렸습니다. 서부 경남에 살던 선조들이 매향한 향나무는 침향이 되었을 겁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아직 그 갯벌 아래 묻혀 있을까요? 흥사리 앞 갯벌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는데 침향이 된 향나무가 바닷물 위로 떠 올라오지 못해 땅속에 묻힌 채 슬퍼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매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매향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의식을 통해 고통을 잊고 희망을 갖고 지역민의 결속을 도모했을 겁니다.
오늘날 지방에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중앙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21세기형 매향의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긁적거리다 보니 양이 너무 많아 사천시 향촌동 삼천포 매향암각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2022.9.23.
김상옥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