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바사론 제12권
35) 사무색처(四無色處)
4무색(無色)이라 하는 것은,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불용처(不用處)ㆍ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을 지었는가?
[답] 다른 의견을 끊기 위해서 이 논을 지었다.
혹 어떤 사람은 무색계 가운데 색(色)이 존재한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혹 어떤 사람을 무색계 가운데는 색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즉 비바사 논사는 무색계 가운데에도 색이 있다고 주장하려 하고,
육다(育多)외도는 무색계 가운데는 색이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
[문] 무슨 이유로 비바사 논사는 무색계 가운데에도 색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가?
[답] 그것은 부처님의 계경에서부터 무색계 가운데 색이 있다는 논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름[名]과 색(色)은 식(識)에 연유하고 식은 이름과 색에 연유하여 생긴다’라고 하였는데, 무색계 가운데도 식은 있으니 만약 무색계 가운데 식이 있다면 또한 당연히 색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또한 다른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수(壽)ㆍ난(煖)ㆍ식(識)의 세 가지 법은 항상 합쳐 있고 끝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며 이 세 가지 법을 따로따로 건립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 세 가지 법을 따로따로 건립할 수 없다면 무색계(無色界) 가운데도 식은 존재하니,
만약 무색계 가운데 식이 존재한다면 또한 마땅히 난도 있어야 할 것이고,
이 난이 곧 색이다.
또 다른 계경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색음(色陰)과 수(受)ㆍ상(想)ㆍ행음(行陰)을 떠나서 홀로 식음(識陰)만이 시설되어 그것이 왕래하거나 머물거나 생겨나거나 끝난다는 이런 말을 하여서는 안 된다.
무색계 가운데도 식(識)이 있느니라’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만약 무색계 가운데도 식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4식도 있어야 한다.
이 밖에도 이를 힐책한 일도 있다.
즉 만약 무색계 가운데는 색이 없다고 한다면, 욕계에서 색계로 마지막에는 무색계에 태어나는 과정에서 그는 8만 겁에 걸쳐서 색은 영원히 단절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거기에서 생명이 끝나서 욕계와 색계에 8만 겁에 걸쳐서 색과 영원히 단절되었다가 다시 도로 태어나게 된다면, 8만 겁에 걸쳐서 색과 영원히 단절되었다가 다시 도로 태어나는 사람이란, 아라한으로서 무여열반에 들어가 모든 유위(有爲)의 세계가 영원히 단절된 후에 또 한 번 다시 도로 태어나는 경우가 될 것이다.
만약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모든 유위의 세계와 영원히 단절된 후에도 곧 또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면, 해탈이란 있을 수 없고 번뇌에서 벗어나서 욕계를 떠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말에 잘못이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바사 논사는 무색계 가운데도 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같은 계경에서 증명한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 육다(育多) 외도는 무슨 뜻으로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다고 주장하는가?
[답] 그것도 부처님의 계경에서 일어난 설에 따라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식해탈(息解脫:寂靜한 解脫)은 색계를 건너가서 무색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정수의 바탕에서 증득을 이루어 노닐 곳이 성취된다’라고 하셨다.
만약 색계를 건너서 무색계에 이르게 된다면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무색계에 색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욕계를 벗어나서 색계에 이르게 되고 색계를 벗어나서 무색계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색계를 벗어나서 무색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면 이 이유 때문에 무색계에 색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색에 대한 생각의 영역을 건너가면 상대성이 있는 생각은 소멸하고 뒤섞인 생을 생각하지 아니하게 되어 한량없는 공(空)의 세계가 된다.
이 공의 세계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모든 색을 여읜 상(想)이라고 한다면, 이 이유 때문에 무색계에는 색은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전의 ≺선품(禪品)≻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게 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색음이건 수ㆍ상ㆍ행ㆍ식이건 그가 이 5음의 법을 관하기를 병든 것과 같이 보고, 등창난 것과 같이 보고,
칼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독사(毒蛇)에 물린 것처럼 관하고,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임을 관하게 된다’라고 하셨고
또 ≺무색품(無色品)≻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게 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5음 가운데 수음이건 상음이건 행음이건 시음이건 이것을 관하기를 병든 것처럼 등창난 것처럼 칼에 찔린 것처럼 화살에 맞은 것처럼 독사에 물린 것처럼 관하고,
모두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관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선품≻ 가운데서는 색을 말씀하셨으나 ≺무색품≻ 가운데서는 색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으로 무색계 가운데 색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다시 또 이를 힐책한 일도 있으니,
만약 무색계 가운데도 색이 있다고 한다면 법의 순서가 단절되며 알 수 없게 된다.
즉 모든 유(有)의 법은 욕계의 존재에 존재라는 것인데 이 법이 색계와 무색계에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법치ㆍ순서가 단절되어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나.
만약 법의 순서가 단절되어 알 수 없게 되면 최후의 구경(究竟)되는 경지에서도 법이 단절되어 알 수 없게 된다.
법의 순서가 끊어짐으로 인하여 구경에 이르러서도 법을 건립할 수 있게 되니,
만약 구경에 이르러서도 법이 단절되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아마도 해탈도 없게 되고 번뇌를 벗어나서 깨달음의 길로 나서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이론에 허물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는 것이며 이것은 경선이 증명한 일인 까닭에 육다 외도는,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나, 오직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 만약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육다 외도의 설인데 이 설이 어떻게 비바사(毘婆沙)논사가 소의로 삼는 경전이 될 수 있는가?
[답] 이것도 경선에서 말씀하신 것이며 이치면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다.
[문] 어떤 이치가 있으며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 부처님은 때에 따라서 욕계(欲界)의 일로 짐짓 경선을 설법하시기도 하였고, 또 색계(色界)를 주제로 설법하시기도 하였고, 무색계(無色界)를 주제로 설법하시기도 하였다.
또 혹 욕계ㆍ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시기도 하였고, 색계ㆍ무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시기도 하였다.
혹 상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시기도 하였고 혹 삼계를 벗어난 세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시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서 욕계와 연관지어 설법하신 법문은 색계와 무색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나.
설법에 따르면 삼계에서 욕계는 노여움의 세계며 해로운 세계나, 이것이 경전에서 욕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신 내용이며, 이는 색계와 무색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색계를 위해서 설법하신 법문은 욕계와 무색계에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선품≻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경전에서 색계를 위하여 설법하신 법문이며, 이것은 욕계와 무색계에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또한 무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신 법문은 욕계와 색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무색품≻ 가운데서 설법하신 법문은 이는 경전에서 무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한 것으로 욕계에 해당되는 법문도 아니며, 색계에 해당되는 법문도 아니다.
또한 욕계ㆍ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신 법문이며, 무색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이 경전에서 말한,
“명색(名色)은 식(識)에 연유하고, 식은 명색에 연유한다”고 한 이것은,
욕계ㆍ색계와 연관지어 설법하신 법분이며, 무색계에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욕계와 색계에 존재하는 색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명색은 식과 연하게 되고 식은 이름[名]과 색(色)에 연하게 되는 것이다.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는 까닭에 그곳에서는 이름만 식과 연하고 식은 이름과 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은 욕계와 색계에 연관시켜 설법하신 법문이며, 무색계에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또한 색계ㆍ무색계와 연관지어 설법하신 법문으로 욕계에는 해당되지 아니하는 법문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선경(禪經)에서 설법하신 법문이 여기에 해당하며, 경의 내용에서 다시 새로운 경이 생겨난다.
이것이 결전에서 색계와 무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신 법문이며, 욕계에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삼계와 연관하여 설법하셨다고 하는 것은, 설명한 바와 같이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와 연관한 법문이니 이것은 경전에서 설법하신 것을 말한다.
삼계를 벗어난 세계와 연관하여 걸법하셨다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 말씀하신 “비구들이여, 나는 곧 열반과 열반의 도를 설법하겠다”라고 하신 것과 같은 법문이 경전에서 삼계(三界)를 벗어난 세계와 관련시켜 짐짓 설법하신 법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수(壽)ㆍ난(煖)ㆍ식(識) 이 세 가지 법은 항상 합쳐지고 끝내 서로 떨어져 있지 아니하며 이 세 가지 법은 따로따로 건립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이는 경전에서 욕계ㆍ색계와 연관시켜 설법하신 동시에 또한 무색계와도 관련시켜 설법하신 법문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욕계와 색계 안에 존재하는 색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세 가지 법은 항상 합쳐지고 끝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따로따로 건립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색계 안에는 색이 없다. 그런 까닭에 수와 식 이 두 가지 법은 무색계 가운데서 항상 합쳐져 끝내 서로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이 두 법은 따로따로 건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경전의 내용이 서로 상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씀과 같이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법으로 항상 합쳐져서 끝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따로따로 건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 가지 법[壽ㆍ煖ㆍ識 ]은 또한 그 경계와 입(入)과 음(陰) 때문에 따로따로 건립될 수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경계[界]의 측면에서 따로 건립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수(壽)란 법계(法界)에 속하는 것이고,
난(煖)은 색계(色界)에 속하는 것이고,
식(識)은 일곱 가지의 의계(意界)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입의 측면에서 따로 건립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수는 법입(法入)에 속하는 것이고,
난은 촉입(觸入)에 속하는 것이고,
식은 의입(意入)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5음의 측면에서 따로따로 건립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수란 행음(行陰)에 속하는 것이고,
난은 색음(色陰)에 속하는 것이고,
식은 식음(識陰)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법은 항상 합쳐질 수 없는 것이며 경계[界]와 입과 5음 때문에 따로따로 건립될 수 있는 것이니,
“이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법은 항상 합쳐져서 끝내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이 세 가지 법은 따로따로 건립될 수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색음을 떠나서 또 수음ㆍ상음ㆍ행음을 떠나서 홀로 식음만 시설하였기에 식이 홀로 오고 가고 생기고 끝난다는 이런 말을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도,
경전에서 욕계ㆍ색계와 관련시켜 건립하신 설법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욕계와 색계에 존재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식과 네 가지 식이 머무는 까닭에 색계와 욕계에 건립되는 것이다.
무색계 가운데는 색이 없기 때문에 무색계의 식(識)은 세 가지 음[受ㆍ想 ㆍ行]에 머무는 식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은 무색계에 건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색계에서도 능히 식이 건립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색계 가운데는 색이 없다고 한다면 욕계와 색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태어난 경우 그는 혹 8만 겁에 걸쳐 영원히 색이 단절되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죽어 다시 욕계와 색계에 태어날 경우 8만 겁에 걸쳐서 영원히 단절되었던 색이 도로 다시 생겨난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8만 겁에 걸쳐 길이 단절되었던 색이 도로 다시 생겨난다고 한다면, 아마도 아라한(阿羅漢)으로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유위(有爲)의 행이 영원히 단절되는 데 그 후에 역시 도로 유위의 세계에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아라한으로서 무여열반의 세계에 들어가 모든 유위의 행이 영원히 단절되었다가 그 후에 역시 도로 유위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면, 해탈이란 것도 있을 수 없고 번뇌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의 길[出要]로 나가게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 말에 허물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 가운데도 색은 존재한다”고 하셨다.
이 말과 앞의 경우와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이것은 상통될 수 없다.
이것은 경전의 말씀도 아니고 율장[律]에 있는 말도 아니며 아비담(阿毘曇)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세간의 비유로는 현인ㆍ성인의 법을 허물 수 없다.
세간의 비유와 현인ㆍ성인의 법은 다르다.
[문] 이것이 만약 상통되려면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하는가?
[답] 혹 색계ㆍ무색계에 연하여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혹 색계와 무색계에 연하여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혹 무색계에 연하여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또 혹 무색계에 연하여 무색계에 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색계ㆍ무색계와 연하여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라 하는 것은 만약 욕계와 색계에서 생명이 끝날 경우 다시 도로 욕계와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색계와 무색계에 연하여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라 하는 것은 욕계와 색계에서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 무색계에 연하여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라 하는 것은 가령 무색계에서 죽어 다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다음 무색계에 연하여 색계ㆍ무색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령 무색계에서 생명이 끝날 경우 다시 욕계ㆍ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혹 색이 상속(相續)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끊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 혹 잠간 사이에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
색이 상속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끊어지는 경우라 하는 것은 그 색은 다시는 도로 생겨나지 아니하는 색이다.
이어지던 색이 잠깐 사이에 끊어지는 경우는 그 색은 다시 도로 생겨나는 색이다.
저 아라한이란 지위에 오른 사람은 무여열반에 들게 되면 모든 유위(有爲)의 행이 영원히 단절된다. 그런 까닭에 다시 욕계에 태어나지 아니한다.
[문] 그 말씀은 비바사 논사들의 설이지만 이것은 육다외도가 주장하는 경전의 증거와는 상통되는가?
[답] 그들의 말은 부처님이 경전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그 식해탈(息解脫:寂靜解脫)이라 하는 것은 색계를 건너 무색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정수(正受) 가운데에서 증득을 이루어 노닐 곳이 성취된다.
이것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크고 거친 색을 건너가게 하기 위하여 짐짓 무색계 가운데도 색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색이라 하는 것은 다만 미세한 4대(大)가 허공의 세계에 깔려 흩어져 있는 것을 말씀하셨을 따름이다.
그러나 내용을 말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왜냐 하면 색이라 하는 것은 극미(極微)라 하더라도 다른 사음(四陰:受ㆍ想ㆍ行ㆍ識)보다는 오리려 거칠고 크다. 그러므로 4음을 말하였으나 색음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으로 무색계에는 색이 없음을 알 누 있을 것이다.
[문] 그 말대로라면 욕계를 떠나서 색계에 이르게 되고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 가령 “그 색이 욕계를 벗어났다고 하디라도 색계 가운데서는 아직도 색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무색계가 색계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무색계 가운데서는 색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왜냐 하면 만약 그 색이 이 욕계의 색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 색이 욕계 안의 욕망에서 벗어났을 뿐 욕계의 색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색계 가운데는 욕망이 없나니, 이와 같이 무색계는 이 색계 가운데의 색에서 벗어난 세계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 가운데 색은 없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경전에서 증명하였다고 하는 것도 그것과 상통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들의 무지(無智)의 결과며 어둠[闇]의 결과며 어리석음[癡]의 결과며 부지런히 정진하지 아니한 결과로 무색계 가운데도 색이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색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끊기 위하여 자기 생각을 나타내는 일이라 말하며, 사실 그대로 평등한 법을 설법하기 위한 까닭에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끊지 말고 자기 생각도 나타내지 말고 오직 사실 그대로 평등한 법을 말해 주고자 한 까닭에 이 논을 지은 것이다.
4무색은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불용처(不用處:無所有處)ㆍ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공처란 어떤 곳인가?
바수밀이 경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공처다 하는 것은 공처정수(空處正受) 및 공처의 생득정(生得定)을 말한다. 즉 선성(善性)의 수ㆍ상ㆍ행ㆍ식의 4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문] 무슨 까닭으로 선(禪)을 정수(正受) 및 생득정(生得定)이라 하는가?
혹 생득정을 정수가 아니라고도 말하는데 무색계의 경우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하는가?
[답] 무색계라 하는 것은 갖가지가 아니고, 수많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한다.
선(禪:四禪)의 경우 갖가지 종류가 있고 수많은 모습이 있는데 서로 유사한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혹 정수와 생득정이라 하기도 하고 혹 생득정이며 정수가 아니라고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색계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공덕으로 장엄된 세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경지를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선의 경우에는 여러 가시 공덕으로 장엄된 경지다. 그런 까닭에 혹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 생득정이며 정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색계라 하는 것은 많은 묘법(妙法)이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선이라 하는 것은 많은 묘법이 있는 경지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 생득정이며 정수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색계라 하는 것은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세계며 나타내기 어려운 세계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선이라 하는 것은 크고 거칠어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경지다. 그런 까닭에 혹 모든 것을 정수 및 생득정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 생득정이며 정수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4무색정이라 하는 것을 공처ㆍ식처ㆍ불용처ㆍ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의 정(定)을 말한다.
공처정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비구는 모든 색의 생각[想]을 건너서서 상대가 있는 생각이 소멸되고 뒤섞인 생각을 하지 아니하는 그 한량없이 빈 곳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공처정(空處定)이다.
모든 색의 생각을 건너선다고 하는 것은 색의 생각이란 4선의 경지에서 대지(大地:큰 밑바탕)에 깔려 흩어져 있던 색에 대한 상념(想念)을 말한다는 것이다.
나타났던 그것이 곧 소멸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생에 대한 상념을 건너선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생각[對想]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강대가 있는 생각이란 5식들과 서로 호응하는 상념이라는 것이다.
[문] 욕계의 경우에는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 5식신(識身)과 서로 호응하는 상념이 소멸되기고 하고 혹 초선의 경지에서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에 소멸하기도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4선에서 욕망이 제거되었을 때 상대가 있는 생각이 소멸된다고 하는가?
[답] 비록 5식들과 서로 호응하는 상념이 있더라도 혹 욕계에서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 소멸하기도 하고 혹 초선에서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 소멸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처한 곳은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상태다.
4선에서 욕망이 제거되고 나면 그 생각이 처한 곳이 소멸됨으로써 생각도 소멸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의(依)가 소멸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비록 5식들과 서로 호응하는 상념(想念)이 혹 욕계에서 욕망[欲]이 제거되었을 때 소멸하기도 하고, 혹 초선(初禪)에서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 소멸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오직 그 생각의 소의만은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상태이다.
4선이라 하는 것은 그 경지에서 욕망이 제거되고 나면 그 소의가 문득 소멸하게 된다.
이것은 소의가 소멸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상대가 있는 생각이라 하는 것은 노여운 생각[恚想]과 서로 호응하는 생각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노여운 생각과 서로 호응하는 생각의 경우 욕계에서 탐욕이 제거되었을 때는 영원히 소멸되는 것인데,
무슨 이유로 4선에서 욕망이 제거되었을 때 소멸한다고 말하는가?
[답] 원인이 소멸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인(因)과 연(緣)이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노여움이란 색에 원인이 있고 색을 연으로 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 색은 4선에서 욕망이 제거되었을 때 영원히 소멸한다. 이것을 두고 인과 연이 소멸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상대가 있는 생각이 소멸되는 것이다.
뒤섞인 생각을 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것은 4선의 경지에 깔려 흩어져 있는 생각을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답] 그 4선의 경지에 깔려 흩어져 있던 생각은 공처정수(空處正受)를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상념(想念)을 염두에 두지도 말고 공처정수를 닦는 것이 도(道)다”라고 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뒤섞인 생각을 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량공(無量空)이 공처(空處)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공처라 하는가?
그 경지의 성품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경지가 인연하는 곳을 말한 것인가?
만약 그 성품을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4음으로 성품을 삼아야 할 것이며,
만약 인연하는 곳을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4제와 인연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답] 공처라 하는 것은 그 성품을 말한 것도 아니고, 연하는 곳을 말한 것도 아니며, 오직 방편 때문에 공처라 일컫는 것이기에 그 곳에 건립된 것과 같이 말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공처정수이며, 어떤 방편으로 공처정이 성립되는가?
어떤 방편으로 공처정이 성립되는가?
이는 시초에 이것을 수행할 때 혹 산꼭대기에 머물기도 하고 높은 누각 위에 머물기도 하고 높은 대(臺) 위에 머물기도 한다.
이 땅들은 지극히 높은 곳이라서 그는 이 땅이 극히 낮은 경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게 된다.
그는 이것이 공(空)이라 생각하고 마음으로 공이라 해득하며, 그는 이 공을 관하고 이 공을 분별해보고 이 공으로부터 이 정수를 성취하게 된다.
이 정(定)이 성취됨으로써 이것을 공처라 이름짓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이것은 법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즉 그 경지는 무색계가 비롯되는 곳이라 그것을 공처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공처라 말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낮은 경지에서 색과 연하여 색계에서 이미 욕계의 욕망이 제거되고 나면 마침내 3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는 4선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다시 연할 수 있는 색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4선의 경지에서 욕망이 제거되면 그는 그때 허공이라는 상념이 생긴다.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나뭇가지를 기어오르다가 가지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나무의 극한처가 표시되어 다시 기어오를 수 있는 나뭇가지가 없게 된다. 그때 문득 허공의 생각이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색계에서 색과 반연하여 욕계의 욕망이 제거되고 마침내 3선ㆍ4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위로는 다시 반연할 수 있는 색이 없어지고 4선의 욕망이 제거된다. 문득 허공이라는 상념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색을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공처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공처로부터 비슷한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설명한다면 어떤 비구가 공처정수를 얻었다가 그 삼매에서 일어나서 손으로 선상(禪床)을 더듬었다.
그러자 함께 공부하는 비구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찾고 있다.’
이에 함께 공부하는 비구가 말했다.
‘그대는 선상(禪想) 위에 있는데 다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것은 곧 선정에서 깨어나면 정에 들었을 때와 비슷한 상념을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공처라 한다. 그런 까닭에 무량공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무량공처(無量空處)에서 그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한 것은 그 공처의 경지에는 선성(善性)의 사음(四陰:受ㆍ想ㆍ行ㆍ識)이 찾아와서 성취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무량공처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모든 한량없는 공처를 건너가면 한량없는 식처(識處)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식처라 하는가?
그것은 경지의 성품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연을 말한 것인가?
만약 성품을 말한 것이라면 성품은 4음이 존재해야 할 것이며,
만약 연을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4제와 인연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답] 무량식처(無量識處)라 하는 것은 성품을 말한 것도 아니고 연을 말한 것도 아니다.
다만 방편 때문에 방편으로 무량식처라 한 것이니 그곳에 건립된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어떤 것이 방편으로 이루는 무량식처의 정수인가? 어떻게 부지런히 정진하면 무량식처정수가 성취되는가?
이는 처음 수행할 때 청정한 안식(眼識)의 상념(想念)을 관하고 다음에 청정한 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의 식에 의한 상념을 관하면 청정한 큰 불덩이의 불꽃을 관하고 청절한 등불빛을 관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식(識)을 잊지 아니하고 이 식을 마음속에 해득하고 이 식을 관하고 이 식을 분석해보면 이 식으로부터 이 정수(正受)가 성취된다.
이 정수가 성취됨으로써 이를 무량식처정수(無量識處正受)라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모습이 비슷한 까닭에 여기에서 흐뭇한 즐거움이 생긴다.
흐뭇한 즐거움을 인식하는 까닭에 이를 무량식처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량식처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이 무량식처에 선성(善性)의 사음(四陰)이 찾아야 성취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량식처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모든 무량식처의 경지를 건너서면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
[문] 그 가운데 없다[無]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소유(所有)란 무량의 행(行) 가운데에는 없다. 그런 까닭에 무소유처라 말하는 것이다.
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그곳에서는 나[我]라고 헤아릴 만한 나가 없는 까닭에 무소유처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모든 경지의 경우 나라고 헤아릴 만한 나가 없는데 왜 무소유처에서만
말하는 것인가?
[답] 모든 경지에서 나라 헤아리지는 않는다 하나 이는 마치 허술하게 묶어놓은 것을 풀어내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이는 무소유처의 성품과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소유처에서 나라고 헤아릴 만한 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 설명한다면 그 가운데는 상주(常住)한다거나 상(常)이라고 헤아릴 만한 상자체가 없는 그런 까닭에 무소유처라 말하는 것이다.
또 거듭 설명한다면 그 가운데는 집착할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다. 그런 까닭에 무소유처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이 가운데 무소유처의 선성(善性)의 4음이 찾아오게 되면 성취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모든 무소유처의 경지를 건너서면 비상비불상처(非想非不想處)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비상비불상처(非想非不想處)라 하는가?
[답] 그곳의 생각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가령 일곱 경지(4禪과 空處ㆍ識處ㆍ無所有處)의 상념(想念)은 그 정수 가운데 그 상념이 결정되지만 이 경지에서의 정수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상념이 정해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상념 아닌 것도 정해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가령 무상정(無想定)의 경우 그것은 멸진정(滅盡定)이지만 이 가운데서의 정수는 그렇지 아니하다.
[문]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 가운데서 일어나는 정수는 어떤 것인가?
[답] 그 경지는 무디고 날카롭지 아니하며 민첩하고 빠른 반응이 있지 아니하고 결정적으로 번뇌를 끊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를 비상비불상처라 말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비상비불상처의 선성의 4음이 찾아와서 성취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의 수명은 혹 한 세계인데도 갑절의 수명을 얻기도 하고 혹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는가?
[답] 가령 공처(空處)의 경우에는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고 식처(識處)의 경우는 4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문] 그렇다면 왜 무소유처에서는 8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고 비상비불상처에서는 16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그 과보와 연에는 한정된 제한이 있다. 즉 그 연에 제한이 있기에 과보에도 제한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공처에는 무량한 행(行)이 있기도 하고 또 혹 무량한 행이 아닌 경우도 있다.
무량한 행이 있는 사람은 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고 무량한 행이 아닌 사람도 역시 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서는 두 가지의 만 겁의 수명을 누리기 때문에 2만 겁의 수명이라 한 것이다.
식처에서도 역시 무량한 행을 하는 경우와 무량한 행을 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량한 행을 하는 사람도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고 무량한 행을 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의 수명을 4만 겁이라 하는 것이다.
식처 위에서는 무량한 행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서는 무량한 행의 몫에 해당하는 수명은 끊어진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공처 가운데서는 지(止)도 있고 관(觀)도 있다. 지의 수행을 이룬 사람도 만 깁의 수명을 누리게 되고, 관의 수행을 이룬 사람도 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의 수명은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식처(識處)에서도 역시 지(止)와 관(觀)이 있다.
지를 닦은 사람도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고 관을 닦은 사람도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서의 수명은 4만 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식처 이상에서는 지만 남고 관은 점차 엷어진다. 그런 까닭에 관의 몫에 해당하는 수명은 끊어진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모든 경지는 본질적으로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어 있다.
즉 공처에서의 수명은 본질적으로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어 있다.
식처의 수명도 본질적으로 2만 겁의 수명을 누리게 되어 있으나 식처에 이르기 전에 공처라는 한 경지를 건너왔기 때문에 식처의 수명은 4만 겁이 되는 것이다.
무소유처의 수명도 본질적으로 2만 겁이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공처와 식처라는 두 경지를 건너왔기 때문에 무소유처의 수명은 6만 겁에 이르는 것이다.
비상비불상처의 수명도 본질적으로 2만 겁을 누리게 되어 있으나 그곳에 이르기까지 세 경지를 건너왔기 때문에 비상비불상처의 수명은 8만 겁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경지는 한 세계이지만 혹 갑절의 수명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설에 이르기를 욕계와 비상비불상처에는 성인의 도[聖道]는 없다고 한다.
[문] 무슨 까닭으로 욕계와 비상비불상처에는 성인의 도가 없다고 하는가?
[답] 그곳은 터전[田]이 아니고 바탕[地]이 아니고 그릇[器]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두 가장자리는 말한 것이다. 한쪽 가장자리는 욕계며, 다른 한쪽 가장자리는 비상비불상처다.
성인의 도라고 하는 것은 두 가장자리를 제쳐놓고 그 중도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의 일에 두 개의 뿌리가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첫째는 욕계에 있는 뿌리이며, 두 번째는 비상비불상처에 있는 뿌리이다.
성인의 도는 이 두 가지 뿌리를 제쳐놓고 그 중도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욕계라 하는 곳은 안정되지 아니한 세계며 사유하는 경지가 아니며 결사가 제거된 경지가 아니다.
또 비상비불상처는 무디고 날카롭지 아니하며 민첩하고 재빠른 반응이 있는 곳이 아니면서도 결정코 모든 것이 끊어지는 곳이 아니다.
성인의 도라 하는 것은 안정된 길이며 사유하고 능히 탐욕을 제거할 수 있고 무디지 아니하고 지극히 날카로우며 민첩하고 빠른 반응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욕계라 하는 곳은 흔들리는 마음[調心]이 불어나고 비상비불상처라 하는 곳은 지(止)가 불어나는 곳이다.
성인의 도는 지관(止觀)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욕계와 비상비불상처에는 성인의 도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4무색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