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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12권[2]
[화산 화상] 禾山
구봉九峰의 법을 이었고, 홍주洪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호는 무은無殷이며, 복주福州 연강현連江縣 사람으로 속성은 오吳씨이다.
설봉산雪峰山에서 출가하여 계를 받자마자 조사의 도를 찾아 민월閩越을 떠나 종사의 회상을 두루 돌다가 구봉九峰에게 가서 한마디에 마음의 근원을 단박에 깨닫고, 만 갈래 물에 뜬 달이 다르지 않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십일위집十一位集 수백 마디를 저술하니 법을 구하는 이가 문턱을 메웠는데, 이는 선사에게 여러 가지 요긴한 법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선사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직을 고하니, 구봉이 게송을 주어 전송했다.
보배를 가지고 보배에 견주니 뜻이 다르지 않고
유리瑠璃 줄로 유리구슬을 꿴다.
안팎이 다 통해 있어 다른 길이 없나니
우리 집 정원을 울창하게 하는 것은 계수나무 한 포기로다.
선사가 처음에는 화산禾山에서 살다가 다음에는 상광祥光과 취암翠巖에서 살았는데, 신해년辛亥年에 칙명으로 홍주洪州 호국사護國寺의 주지가 되었고, 호를 징원澄源 선사라 하였다.
선사가 언젠가 양구했다가 말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니라.”
또 언젠가 어떤 스님이 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간질병이라도 걸렸느냐, 무엇하는 짓이냐?”
스님이 얼른 물었다.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소일蕭逸도 아니면서 어찌 난정蘭亭을 얻으려 하는가?”
선사가 또 말했다.
“여러분, 이런 말 저런 말 하지 말고, 화산禾山이 그대들을 위해 증명해 줄 터이니 기다리라.
여러분 알겠는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이래도 미치지 못하고 저래도 이르지 못하니, 모름지기 지침이 되는 말이 있어야 그대들이 깨달을 것이다. 그대들은 이러쿵저러쿵 뒤엉켜 놓은 말들을 탓하지 말라.
듣지 못했는가?
석가께서 법상에 올라 양구하시니, 대중은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추자(鶖子:舍利弗)가 나서서 백추白槌를 치면서 말하기를,
‘법왕法王의 법을 보시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법왕法王의 법이 이러합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곧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하느니라. 여러분들은 이 한 토막의 이야기를 놓고 얼마나 많이 꿰어 맞추었던가?
또 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가섭에게 설법을 청한 것처럼 청을 받은 가섭이 자리에 올라 양구했다가 이내 내려오니,
왕이 묻기를,
‘어찌하여 제자에게 법을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이에 가섭이 대답하기를,
‘지위가 높고 명예가 두터우십니다’ 하였느니라.
그 당시 이론이 분분하였던 것을 지금 모두 알아 버렸다.
여러분은 옛사람의 뜻이 무엇이라 여기는가?
80세의 늙은이가 집에서 나오는 뜻을 알겠는가?”
이때 어떤 사람이 물었다.
“가섭은 그 당시 뜻이 어떠하였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세월이 변한 것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것은 소리 없는 분명한 흐름이다.”
또 언젠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화산이 발악하는 것을 아는가?”
스님이 얼른 물었다.
“화상께서 까닭 없이 발악하여 무엇을 하시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성난 주먹은 웃는 얼굴을 치지는 않느니라.”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쉽지가 않다. 여러 스님들이여, 옛 노덕老德이 제자를 제접할 때 한 번 열고 닫자 문득 깨달아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이는 유정有情세계의 방편이다.
이보다도 영운靈雲이 복사꽃을 보고, 앙산仰山이 구름을 본 것은 무정세계의 사물이니, 어떻게 대처해야 문득 깨달아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수 있게 하겠는가?
이러한 것이 생각을 만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고덕古德의 묵은 근기에 방울을 달아 놓은 것 같다고 꺼려하지 말라. 건들기만 하면 바로 응하나니, 그러한 근기라야 비로소 되느니라.
더욱이 귀종歸宗이 솥을 두드리고 주먹을 세우고 포모布毛를 들어 보이고, 불자를 던진 일들이 있는데, 작용하는 그대로가 작용이 없는 것이어서 마치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닭이 밖에서 쪼는 일과 같다. 이렇듯 최상의 근기라야 비로소 된다.”
“사물을 인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뜻이 어떻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고기가 그물을 뛰어넘으려면 한번 부딪쳐 봐야 되지만 용은 채색의 몸을 바꾸지 않느니라.”
또 언젠가는 어떤 스님을 붙들고 말했다.
“떠나면 머무는 것이요 머무르면 죽으리니,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
그대에게 안목眼目이 갖추어져 있는가?
오늘날 한결같이 헛소리만 한다.
그대들은 6조가 숭산에서 온 더럽혀지지 않은 말을 회양懷讓에게 물은 것과 신회神會 화상이 말한 근본 원천인 불성이라 하는 이치를, 옛 어른들은 배대하기를,
‘한 사람은 조사의 뜻을 알았고, 한 사람은 경전의 뜻을 알았다’ 한 말을 듣지 못했는가?
누가 이런 분별을 했다고 여기는가?
그대들은 말해 보아라. 모름지기 아왕鵞王의 작作이어야 하리라.
그대들은 보지 못했는가?
위산이 화림에게 묻기를,
‘저는 그것을 구리 병[銅甁]이라 하는데, 사숙師叔께서는 무엇이라 하십니까?’ 하니,
화림이 말하기를,
‘나는 끝내 나무 말뚝이라 부르지 못하리라.’ 하였다.
이에 위산이 말하기를,
‘그러시다면 제가 위산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했으니,
그 정도의 살림살이야 누구인들 없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러한고?
또 설암雪巖이 도오道吾에게 묻기를,
‘저는 저것을 짚신이라 부르는데, 사형師兄께서는 무엇이라 부르시겠습니까?’ 하니,
도오가 말하기를,
‘그대가 짚신이라 부른다면 채찍으로 가슴을 때리고 등을 치리라.’ 하였다.
이에 운암이 다시 묻기를,
‘사형께서는 무엇이라 부르시렵니까?’ 하니,
도오가 말하기를,
‘나무 말뚝이라고는 부를 수 없느니라.’ 하였다.
여기서 분별할 수가 있겠는가?
가려내기가 몹시도 쉽지 않느니라. 모름지기 용의 눈동자와 무쇠 눈알이라야 하느니라.”
어떤 이가 물었다.
“이 두 사람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문 밖에서는 주인을 볼 수 없더니, 방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뜻 맞는 벗을 만났느니라. 여러 화상들이여, 그대들은 천연적으로 자연히 생긴 것이 아니요, 나 또한 성인이 아니다. 일을 경험하여 아는 것이 많을 뿐이다. 이 문중에서는 모름지기 정미하게 하고 격조가 높은 이를 가까이하여 대화를 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문의 무리라면 취하고 버리는 이치가 있을 것이나, 만일 그런 무리가 아니라면 한 법을 완전히 거두어들이되 한 법도 취함이 없고, 부끄러움도 버리지 않고 편견도 없으며 모두 가져와 걸림 없이 왕래할 때 비로소 있고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일을 통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가리어 알겠는가?
첫째는 모름지기 자기를 광대하게 넓혀야 할 것이요,
둘째는 하루 동안 수행의 단계로서 도와야 하고,
셋째는 도반을 널리 찾아야 하나니,
만일 오고가는 도반이 없다면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보지 못했는가?
석상石霜 화상이 운암에게 가니,
운암이 묻기를,
‘어디서 왔는가?’ 하자,
석상이 대답하기를,
‘위산에서 왔습니다’ 하였다.
운암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거기에 얼마나 있었는가?’ 하니,
‘대여섯 여름을 지냈습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그 산문에서는 어른이겠구나’ 하니,
‘제가 거기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였다.
이에 운암이 말하기를,
‘남도 알지 못한다’ 하였다.
나중에 석상이 도오에게 가서 앞의 일을 들어 이야기하니,
도오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어찌 그리 불법이라고는 없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던가?’ 하였다.
옛사람들을 좀 보라. 어디가 불법이라고는 없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던가? 능숙한 솜씨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니라.
이는 마치 총림의 여러분들이 배운 것을 통달하지 못하고 그저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하는, 즉 주고받는 말에 집착하여 일상생활의 문답이 세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첫째는, 눈앞에서 인연을 대할 때 근기에 맞추어 놓아주고 빼앗는 것 또한 문답이 되고,
둘째는 마음으로 망설이는 그대로가 물음이 되고, 계속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 되니, 이는 약과 병의 말씀이요,
셋째는 물음 없는 물음이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는 것이니,
이러한 종문宗門의 바른 물음과 바른 대답의 길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반드시 따져서 가려야 하느니라. 만일 들어서 제창함을 말한다면 이는 홀로 시행하는 길이 되겠지만, 만일 사람들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면 퍼뜨리는 이치를 따라야 한다.”
이에 어떤 이가 물었다.
“이 세 가지 문답은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중생들을 위해서 검고 흰 것을 밝히지만, 길에 들어서면 미혹되는 줄 누가 알겠는가?”
선사가 말했다.
“차례를 따지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선사 노릇하기 어려우니, 꼭 그런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만일 당장에 알아듣지 못한다면 다시 20년, 또는 30년 동안 총림에 처박혀 숨을 죽이고 있는 이라야 한다. 설사 대용(大用:큰 작용)은 나타나지 않아도 역시 다듬기 전의 옥[坯璞]은 되나니, 그 어찌 눈서리를 이겨내지 못하는 8월의 동갓[冬芥] 나물과 같을 수 있으랴? 한 차례의 얼기설기한 말들을 털어 놓으니 듣고 또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주어라.
이쪽에서 인용하고 저쪽에서 증거를 끌어대다가 문득 옛 어른들과 선현先賢들로 인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도,그 어찌 필疋 자 위는 부족하고 비比 자 밑은 남음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인과가 없다고 말한다면 반야般若를 비방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비방도 자세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현재의 자기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니, 어디에서 생멸하고 문드러지는 몸이 불도를 이룰 수 있으랴 하고 말하는 이러한 무리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낸 이로서 화합 대중을 깨뜨린 무리라고 부른다.
둘째는 끝없는 예로부터 무명이 뒤따라서 익어진 업이 전도된 자들이니, 오늘날 반드시 잘못된 생각을 쉬어 참됨으로 돌아가서 생사를 없애고 6근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금시방今時謗이니, 비방이란 헐뜯는다는 말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금시방이 없어야 비로소 질문한 것이 없게 되느니라.
듣지 못했는가?
옛 어른이 말하기를,
‘묻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말한다’ 하였느니라.”
이에 어떤 이가 물었다.
“묻는 이가 있으면 설명해 주십니까?”
“묻는 이가 있으면 말하지 않느니라.”
또 물었다.
“묻는 이가 없으면 말해 주시렵니까?”
“묻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을 말해 주느니라.
그러기에 옛 어른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백 가지를 말하나 하나도 물은 것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요즘 사람은 백 가지를 물으나 하나도 말해 주는 것이 없으니, 이로써 역량이 충만하지 못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어떤 스님이 옛 노덕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백 번 물었으나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검은 구름이 자욱한 것이니라.’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백 번을 말해도 한 번을 묻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맑은 하늘에 밝은 달이니라.’ 하였느니라.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에게 묻기를,
‘질문하면 대답을 하겠지만 묻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을 때에는 어찌합니까?’ 하니,
동산이 대답하기를,
‘재계를 지키면서 고깃국을 먹느니라.’ 하였다.
이에 조산曺山이 말하기를,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습니다’ 하였고,
조산이 또 이 일을 들어 석상에게 물었는데,
석상이 대답하기를,
‘잣대를 꺾지 않는다’ 하였으니,
퍽이나 알아듣기 어려우니라. 이야기하는 이는 많으나 분별해서 아는 이는 드물구나.
셋째는 자기의 전생 부모가 있다고 알고 그러한 알음알이가 있기 때문에 허물을 짓게 되나니, 또한 큰 비방이라고 부르게 된다.
보지 못했는가?
어떤 사람이 남산南山에게 묻기를,
‘반야般若를 비방한 사람도 허물이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어째서 없겠는가?’ 하였으며,
또 듣지 못했는가?
‘부모를 해치고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고, 화합한 대중을 깨뜨리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면 무엇이 허물이겠는가?’라고 한 것을.”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이 이치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듣지 못했는가?
‘여러 겁劫 동안에 주림과 추위를 겪었다’ 하였느니라.”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 말은 비방인 줄 알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비방인 줄 모른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라. 설사 알았다 하여도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비방이 되느니라.”
그리고는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비방임을 모르는 이치를 아는가?
보지 못했는가?
옛사람이 좌주座主를 보자,
‘좌주여’ 하고 부르고는,
말하기를,
‘그대의 몸 안에 부처가 있는데, 그대는 아는가?’ 하니,
좌주가 대답하기를,
‘어디 그렇게 똥오줌이나 싸는 부처가 있으리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방인 줄 모르는 것이다.
대체로 말을 하고 기개를 토함에 이것저것 섞어서는 안 된다.
무릇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이 어찌 예사로운 무리들이겠는가?
우선 한 가지를 말하건대, 본래부터 진여여서 계급과 같지 않으며 닦아 증득하는 것을 빌리지 않는데, 어찌 수고로이 여러 성인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리오. 천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으면 물러날 때에 적멸을 이루기 어려우니라. 이러한 경지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사람에게 의지해야 한다.
만일 환하게 밝히지 못했다면 어떻게 여실한 이치를 알겠는가?
그렇게 두 가지를 이미 통달했으나 겉과 속이 없어지지 않아서 유위의 법에 끄달린 채 무위의 속박을 만난 것이니, 능能과 소所를 없애고 허망한 생각도 모두 녹아서 마치 툭 트인 허공처럼 유연悠然히 의지할 바 없이 되어야 비로소 공이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지는데, 그러한 지위를 본정本情이라 부른다.
과果가 이루어지면 큰일은 원만히 성사되나니, 비로소 지위를 매기게 되어 도솔兜率에서 홀로 존귀하고, 뭇 품류를 뛰어넘는다.
마치 나무 열매와 같이 되어야 비로소 격식에 맞게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지켜 견해로 삼으면 더위와 병이 침노하더라도 홀가분하게 벗어나 병이 붙지 않나니, 이를 두고 말없이 일색一色의 이치를 말하였다고 한다.
이미 두 가지의 이치가 세워졌다면 모름지기 유양劉陽이
‘한 빛이 된 뒤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은 항상 즐겁고, 어떤 사람은 분한 마음이 절박하느니라.’ 한 까닭과,
또 늑담氻潭이
‘고양이 입 속에 참새가 난다’고 말한 까닭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한 격식만으로 되나니, 그 밖의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느니라.”
선사가 “조사와 부처는 알지 못하지만 이노狸奴와 백고白牯)는 안다”고 한 남전의 인연을 들어 말했다.
“여러분 모두는 제방에서, 도道는 어구語句를 초월해서 행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화산禾山이 다시 여러분에게 묻나니, 어떤 것이 이노와 백고인가?”
이때 어떤 스님이 나서서 대답했다.
“주리면 풀을 뜯고 목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도는 많은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두 글자만 있어도 족히 시행되느니라.
옛사람이 진리에 계합했던 일을 어찌 듣지 못했는가?
동산洞山이 흥평興平에게 절을 하니, 흥평이 말하기를,
‘늙은이에게 절을 하지 말라.’ 하였다.
동산이 말하기를,
‘절을 받았다면 늙은이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흥평이
‘그는 절을 받지 않는다’ 하니,
동산이 다시 말하기를,
‘멈추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이 틀렸느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그때에 동산이 대답하되 ≺일찍이 멈춘 적도 없었습니다≻ 했어야 한다’ 하였으니,
지켜보는 이와 말하는 이가 똑같은 격이니라.
옛사람은 들어 제창하자마자 흑백이 바로 분명해졌으니, 그렇게 어물어물 가리지 말라. 그리해서 무엇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미세한 가운데서는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하느니라.
무릇 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저마다 자신의 주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옛 노장들이 제자에게 이르기를,
‘무릇 사문이란 하루 가운데 한순간도 잃어서는 안 되고, 한 시각도 등져서는 안 된다.
상상上上의 근기는 한 번 퉁기면 곧 움직이지만, 중하中下의 근기는 공훈功勳에 떨어지나니, 밤낮 없이 부지런히 하여 심식心識을 말려 버려야만 무선도無線道를 가르친다’ 하였는데,
설사 그와 같이 말하였다 해도 이 또한 빌린 구절이니라.”
이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빌린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금패金牌 위에 이름이 없거든 바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와 나오시지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
“그렇게 와서는 모두 이르지 못하느니라.”
“세상에 나오시기는 합니까?”
“여러 성인들께서는 하실 일이 더 있느니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해서니라.”
“부처님께서는 어느 곳에 나타나십니까?”
“몸을 내세우는 이도 만나기 어렵고 용맹스러운 이도 만나기 어려우니라.”
“어떤 것이 몸을 내세우는 일입니까?”
“일마다 모두를 지나쳐야 하느니라.”
“일마다 모두를 지나칠 때가 어떠합니까?”
“그는 말을 전할 줄 아느니라.”
“그는 누구의 말을 전합니까?”
“남의 부촉은 받으나 남의 말을 듣지는 못하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화상께서는 학인더러 알아들어라 하시는데,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눈앞의 일과 꼭 같아야 하느니라.”
“알아들은 뒤에는 어떠합니까?”
“오늘이 있음을 알지 못하느니라.”
“어떤 것이 옛 부처님의 마음입니까?”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니라.”
“세계가 어찌하여 무너집니까?”
“그처럼 내 몸이 없기 때문이다.”
“앙산仰山이 삽을 꽂은 뜻이 무엇입니까?”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니라.”
“현사玄沙가 삽을 걷어차서 쓰러뜨린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대에게 물은 것이니라.”
“지척咫尺 사이에 있는데, 어찌하여 스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까?”
“우선 그대에게 반쯤만 일러 주리라.”
“어째서 완전히 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법대로 다 시행하면 백성이 없느니라.”
“백성이 없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는 법대로 시행해 주십시오.”
“다음에 화산禾山으로 오라.”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는 것이니라.”
“어째서 죽습니까?”
“좋은 마음에 좋은 과보가 없느니라.”
다시 물었다.
“존자尊者께서 눈썹을 털고, 눈을 부릅떠서 아육왕阿育王에게 보인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학인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마리지산摩利支山 아닌 것이 없느니라.”
“학인이 일상 중에서 반연과 경계를 다 쉬어 버리면 어디로 돌아갑니까?”
“낙엽이 땅에 뒹굴면 비로소 쉬는 줄 아는 경지에 이르느니라.”
“낙엽이 땅에 뒹굴고 쉬는 줄 안 뒤에는 다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혀를 끊는 칼은 있으나 사람을 살리는 검劍은 없구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이미 국사國師를 알았으니, 모름지기 동산을 밝혀야 하느니라.”
“온백설溫伯雪과 중니仲尼가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하였는데, 어찌하여 만난 뒤에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도道는 눈만 마주치면 되는 것이고, 지음知音은 또 누구던가?”
“종자기鍾子期가 소리를 낼 때에는 또 어찌합니까?”
“다만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사랑할 뿐이요, 문후文候의 뜻을 잇지는 않는구나.”
“유교에서는 귀를 씻는 것을 가장 깨끗한 선비로 여기는데, 불교에서는 무엇으로 극칙極則을 삼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번성하거나 마르는 일을 싫어하지 않거니, 표제(瓢提:드러냄)는 누구를 위하고자 함이던가?”
“그러나 세상을 피해서 사는 것이야 어찌하겠습니까?”
“소보巢父의 뜻과는 다름이 없으나 허유許由의 솜씨를 좋아하기 때문이니라.”
“거사居士의 불이不二 법문을 어떻게 토론하여야 후학後學들의 의혹을 멈추겠습니까?”
“가물 때에 잘 가라. 장마 때를 기다리지 말지니라.”
“학인은 차라리 장마를 기다리겠습니다만스님의 뜻은 어떠합니까?”
“푸른 산은 수려한 빛에 의하고, 물이 푸름은 파도에 의존한다.”
“그림자 없는 말씀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입 속에 가득한 것을 다 털어놓으려 하니, 알아들을 줄 아는 이가 벌써 갖추어졌구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구해야 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목숨을 버리면 곧 목숨이 없어지고, 바라는 것이 없으면 도리어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이 된다.”
“이미 목숨을 버렸는데, 어찌하여 목숨이 다시 없어집니까?”
“소식을 끊고 왕래가 없으니, 어찌 도가 이미 시행된 줄을 알리오.”
“대인大人들이 만나면 추한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화상께서는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나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깊이 간직한 못난 재주가 없으니, 말로써 이야기한들 무슨 방해가 있으리오.”
“방해되지 않는 일을 스님께서 방편으로 보여 주십시오.”
“현재 금하는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혀를 끊길 이유가 없느니라.”
“처음으로 설산[雪嶺]에 오르시어 정각을 이루셨는데, 어찌하여 상림霜林에서야 겨우 옥엽玉葉에게 전하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샛별이 솟을 때, 가지[枝]가 오늘날의 푸름과 다르다는 뜻을 보였느니라.”
“그렇다면 가지마다 끊이지 않게 되겠습니다.”
“싹을 찾는 데는 길이 있다 하겠으나, 끝내 뿌리에 이르는 지혜는 아니었느니라.”
“염소를 탔다가 차츰 소를 타는 이치를 마침내 알고, 그리고서 네거리를 두리번거리고 돌아본다면, 이 사람은 가업家業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세 가지 수레로 불난 집을 벗어났으나 노지백우露地白牛는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이 노지백우露地白牛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누가 노지백우를 탑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하루해가 걸릴 정도의 여정이 없기에 마침내 그림자의 자취를 띠고 돌아오느니라.”
“호명護明보살이 탄생하실 때에 나 홀로 높다 하셨고, 샛별이 솟는 날 또 도를 이루었다 하셨으니, 이 이치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중생을 위하여 방편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지위에 따라 치달린 것임을 어찌 알리오.”
“지위에 따른다든가 세상에 나타나심은 여전히 지금의 방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이도 있습니까?”
“도솔천에도 살지 않았고, 쌍림에서도 변색이 안 되었느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으로 망설여도 곧 어긋나는데, 하물며 말이 있을 수 있으랴’ 하였는데,
마음으로 망설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파초芭蕉를 겹겹이 벗긴 뒤에야 스스로가 의심하지 않게 될 줄을 누가 알리오.”
“어찌하여야 이런 허물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해는 동쪽 봉우리 위에 솟고, 달은 서쪽 봉우리에 지느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소경ㆍ벙어리ㆍ귀머거리ㆍ말더듬이 등, 이런 사람을 구제하지 않으면 불법은 영험이 없다’ 하였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구제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비록 기특한 뜻이 있기는 하나 도리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격이다.”
“학인은 달게 받겠습니다만 화상께서는 또 어찌하시겠습니까?”
“산에 오르면 물의 맥脈을 알게 되고, 방에 들어가면 따사로운 침상에 앉느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나면 서로 부르고자 하나, 우물우물 말을 못한다’ 하니, 서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옛사람의 근기와 비슷한 것 같았는데 오히려 혀끝을 갖춘 이와 같구나.”
“그렇다면 학인이 공연한 짓을 했습니다.”
“진창을 밟지만 않으면 무엇 하러 번거롭게 발을 씻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