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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 제26권
30. 척요품(䨥要品)
1
야광충[夜光]도 어둠을 비추지마는
그것은 아직 해가 뜨기 전이니
햇빛이 크게 광명을 펼치면
야광충의 안색은 새까매진다.
이 이치를 관찰하시고 부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후생들로 하여금 그 일을 밝게 알게 하셨다.
가령 야광충이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있으면서 그 광명을 놓아 멀리까지 비추는 것을 보고는,
‘우리의 광명을 따를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다가,
해가 백천 광명을 놓으면서 동쪽에서 솟으면, 그때 야광충의 광명은 없어지면서 그 안색은 진먹처럼 새까매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야광충도 어둠을 비추지마는
그것은 아직 해가 뜨기 전이니
햇빛이 크게 광명을 펼치면
야광충의 안색은 새까매진다.
2
관찰하는 사람도 광명을 펴지만
그것은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이요
부처님이 큰 광명을 놓으면
관찰하는 이도 없고 성문도 없다.
외도 범지들은 그 행이 같지 않으니, 어떤 이는 관찰하여 알고, 어떤 이는 선정에 들어서 알며, 또 어떤 이는 스승의 교훈을 듣고 깨닫는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세상에 활개치고 다니면서 제각기 제일이라고 자칭하는데, 그 까닭은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큰 광명을 놓으면서 교화를 펴면, 그때 외도들은 저절로 없어지면서 그 도가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위신(威神)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관찰하는 사람도 광명을 펴지만
그것은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이요
부처님이 큰 광명을 놓으면
관찰하는 이도 없고 성문도 없다.
3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나니
삿된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란 무슨 뜻인가?’
이 중생들은 생사를 연모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다섯 가지 쾌락에 탐착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은 견고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그러므로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이란 무슨 뜻인가?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오랫동안 자기 의견에 집착하면서 서로 지적하다가 이렇게 주장한다.
“사사로이 듣건대 불가에서는,
‘열반에는 생멸도 없고 생멸하는 생각도 없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즐거운 노래나 기쁜 춤도 없고 부모ㆍ친척도 없으며, 가고 오고 나아가고 멈추는 것도 없고 동산과 못도 없는 것이니, 거기 무슨 견고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니, 그들은 뒤바뀌고 삿된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견고한 것으로 열반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도리어 견고하지 않다고 비방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러므로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나니, 삿된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란 무슨 뜻인가?
멸진(滅盡)의 열반에는 어떠한 근심도 없으니, 맑은 무위(無爲)로서 응결된 신(神)이 흔들리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진실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는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나니, 삿된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나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
만일 어떤 중생이 멸진의 열반에는 생멸이 없는 줄을 알면, 그는 세상에 속거나 미혹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은 영원히 쉬는 집이니, 만일 어떤 중생이 그 집에 들어가면 그는 영화가 이르러도 더 기뻐하지 않고 어떤 훼욕이 닥쳐와도 더 걱정하지 않는다. 뒤바뀐 소견을 가진 사람과는 그 말이 다르고 삿된 무리들과는 그 뜻이 달라서, 마치 아득한 허공이 영원히 쉬면서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는 지혜로운 이의 사모하는 것이지 무지한 이의 익힐 바가 아니다.
그 집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건너야 하고, 열 두 가지의 큰 벼랑을 뛰어넘기를 구해야 하니, 그렇게 하여 생사의 험한 언덕을 건너면, 신(神)이 안정되고 무위의 맑디맑은 경지에 이른다.
그때는 오랫동안 겪은 모진 고통을 뒤돌아보면서,
‘아아, 괴로워라. 그처럼 무지하고 미혹하였구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견고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나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
5
무지한 사람은 견고하다 생각하다가
도리어 아홉 가지 결박을 받는 것이
마치 새가 그물에 드는 것 같나니
그것은 깊고 굳은 애욕 때문이니라.
“무지한 사람은 견고하다 생각하다가”란 무슨 뜻인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고치기 어려우니, 다섯 가지 요소를 견고하다 하기도 하고 혹은 번뇌의 근본을 견고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온갖 생각을 일으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니, 비록 집을 떠나 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도리어 삿된 행을 익힌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은 견고하다 생각하다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도리어 아홉 가지 결박을 받는 것이”란 무슨 뜻인가?
수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집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나쁜 벗을 만나서 그릇된 길을 배우면, 과거의 결박을 버리려 하다가 도리어 아홉 가지 결박을 받으니, 마치 저 부나비가 나중 일을 생각하지 않고 불에 날아드는 것과 같다. 이는 깊고 굳은 애욕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러므로 “도리어 아홉 가지 결박을 받는 것이, 마치 새가 그물에 드는 것 같나니, 그것은 깊고 굳은 애욕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온갖 존재[有]가 의심을 품고 있지만
이승에 있어서나 또 저승에서나
선정으로 능히 멸진(滅盡)한다면
괴로움 없이 범행을 닦으리라.
“온갖 존재가 의심을 품고 있지만”이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몸뚱이가 추악하고 더럽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의심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버리지만, 법을 들으면 그것을 곧 믿으면서 되풀이해 생각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온갖 존재가 의심을 품고 있지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승에 있어서나 또 저승에서나”란 무슨 뜻인가?
이승이란 현세의 몸이요 저승이란 후생이니, 지금이란 현세요 나중이란 후생이다.
이 가운데 있으면서 망설이거나 의심을 내지 않으면 그것이 곧 안정된 마음이니,
그러므로 “이승에 있어서나 또 저승에서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정으로 능히 멸진한다면”이란 무슨 뜻인가?
선정에 든 사람은 그 마음이 견고하여 집착하는 생각을 모두 없애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니,
그러므로 “선정으로 능히 멸진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괴로움 없이 범행을 닦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번뇌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마음가짐이 청정하여 그 마음이 항상 한결같으면, 닦는 공덕의 근본이 남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니,
그러므로 “괴로움 없이 범행을 닦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티끌을 없애서 티끌을 여의면
그는 이 옷을 입을 수 있다.
제어하지 못해서 이르는 곳 없으면
그는 이 법복에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도 항상 더러운 생각을 갖기 때문에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가사를 입었더라도 이 세 가지 독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티끌을 없애서 티끌을 여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이 옷을 입을 수 있다”란 무슨 뜻인가?
오직 현성이라야 온갖 악을 막아 버리기 때문에 이 진실한 법의 옷을 입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입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옷을 입을 수 있다. 제어하지 못해서 이르는 곳 없으면, 그는 이 법복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
만일 온갖 더러운 때를 버리고
계율과 평등한 지혜와 선정을 닦으면
그는 마땅히 업을 생각할 것이니
응당 법복 가사도 입을 만하다.
“만일 온갖 더러운 때를 버리고, 계율과 평등한 지혜와 선정을 닦으면”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공부할 때에 더러운 때를 버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면, 세 가지 독의 번뇌가 남김없이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나 비록 아라한이 되었더라도 선정에 들지 못하면, 무기(無記)가 닥칠 때에야 그 잘못을 알 수 있을 것이니, 계율을 닦고 때를 버려서 도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온갖 더러운 때를 버리고, 계율과 평등한 지혜와 선정을 닦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마땅히 업을 생각할 것이니, 응당 법복 가사도 입을 만하다”란 무슨 뜻인가?
선정에 드는 사람은 반드시 이익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생각하는 일에 모두 그 결과가 있다. 그래서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ㆍ악마ㆍ하늘 악마ㆍ제석ㆍ범천ㆍ사천왕들도 모두 받들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업을 생각할 것이니, 응당 법복 가사도 입을 만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9
부드럽고 순한 말 쓰지 않아도
남의 칭찬을 받는 수 있고
좋은 얼굴빛을 가진 사람도
거짓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부드럽고 순한 말 쓰지 않아도, 남의 칭찬을 받는 수 있고”란 무슨 뜻인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남과 이야기할 때 마음속으는 간사와 거짓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체한다.
그러므로 “부드럽고 순한 말 쓰지 않아도, 남의 칭찬을 받는 수 있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좋은 얼굴빛 가진 사람도, 거짓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란 무슨 뜻인가?
옛날 바사닉왕은 동산에 놀러 나갔다가 어떤 두 범지가 몸을 괴롭히면서 수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해와 달을 우러러 섬기고 물이나 불에 제사하였는데, 왕은 그들이 마음을 괴롭히면서 수도하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아까 동산에 놀러 나갔다가 범지 두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이 몸을 괴롭히면서 수도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워서 아무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덕을 닦는 사람으로서 상대가 계율을 완전히 갖추었는가를 알려고 하면, 반드시 같이 살면서 그 위의를 관찰하고 말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비로소 그가 계율을 갖췄는지 갖추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부끄러이 여겼다. 그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발에 머리를 대어 예배를 드리고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왕은 궁중으로 돌아가자마자 곁의 신하에게 명령하였다.
“그대는 빨리 가서 저 두 범지를 불러다 내 뒷동산에 있게 하라. 과연 그들이 고행하면서 도를 구하는지, 아니면 거짓으로 속이면서 그 행이 합치하지 않은지 살펴보리라.”
신하는 분부를 받고 그들을 불러다 뒷동산에 있게 하였다. 왕은 누각 위에서 그들의 행을 보고 비로소 그들이 거짓으로 도를 닦는다고 속이는 줄을 알았다. 그리하여 거듭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하고는 굳건한 믿음으로 부처님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왕은 즉시 나라의 백성들에게 영을 내렸다.
“누구나 외도를 받드는 이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고 모두 죽이리라.”
그리고는 왕은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머리를 대어 예배하고는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4사(事)로 삼보를 공양하고 공경하겠사오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맹세를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얼굴빛 가진 사람도, 거짓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그것을 잘 끊는다는 것은
그 뿌리를 아주 뽑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온갖 더러움 버리고
비로소 좋은 얼굴빛을 가진다.
“그것을 잘 끊는다는 것은, 그 뿌리를 아주 뽑는 것이다”란 무슨 뜻인가?
세상 사람들은 간사한 마음을 많이 품고 있어서 비록 몸에는 가사를 입었지마는 안의 행은 진실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 간사한 마음을 능히 끊어야 비로소 도의 문에 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끊는다는 것은, 그 뿌리를 아주 뽑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온갖 더러움 버리고, 비로소 좋은 얼굴빛을 가진다”란 무슨 뜻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할 때에 반드시 도에 알맞게 하되, 법이 아닌 것은 행하지 않으므로 학자들의 귀여움을 받고, 그 얼굴빛은 빛나고 환하여 뭇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 더러움 버리고, 비로소 좋은 얼굴빛을 가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
조용한 그 얼굴빛 따르지 말고
잠깐 보고도 사람의 마음을 알라.
세상의 많은 사람이 행실을 어기면서
마음대로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저 거짓된 놋쇠 속에
순수한 구리가 있다고 속이는 것처럼
홀로 아무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니
속도 더럽지만 겉도 더럽다.
“조용한 그 얼굴빛 따르지 말고, 잠깐 보고도 사람의 마음을 알라”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남과 이야기할 때 조용한 얼굴빛으로 올바른 듯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그러나 속마음은 마음과 말이 서로 어긋나는 거짓이기 때문에 비록 사람이라 하지마는 그 성질과 행동이 고르지 못하다.
또 겉으로는 어진 사람인 체하지만 속으론 독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다만 잠깐 보아서는 그 현우(賢愚)를 분별할 수 없다. 마치 밤에 멀리서 불빛을 보고 쫓아가 붙잡다가 손을 데이는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라서 겉으로는 좋은 얼굴빛을 가졌지만 속에는 뜨거운 불꽃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조용한 그 얼굴빛 따르지 말고, 잠깐 보고도 사람의 마음을 알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 이 행실을 어기면서, 마음대로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란 무슨 뜻인가?
장차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짓과 간사함이 더욱 많아져서 마침내 현성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갖가지 간사한 꾀로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호리지만, 남과 이야기할 때에는 그 안색이 바르지 못할 것이다.
또 말은 아름다운 문장 같고 변재는 걸림이 없지마는 대중 속에 있으면서 무도한 일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그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닦으면서 볼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많은 사람 이 행실을 어기면서, 마음대로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저 거짓된 놋쇠 속에, 순수한 구리가 있다고 속이는 것처럼”이란 무슨 뜻인가?
교묘하고 간사한 사람은 수단과 꾀가 많기 때문에 연기로 구리를 쏘여 그 빛깔을 순금보다 낫게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호리어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가진다.
그래서 부처님도 비유를 통해서 “저 거짓 놋쇠로 세상의 많은 이익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간사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달콤한 말과 아름다운 변재로 시주들을 꾀어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 따위의 네 가지 공양이 끊이지 않게 하지만, 그러나 그런 공양을 받더라도 뒤에 가서는 갚아야 한다. 즉 지옥을 그 과보로 받아서 갖가지 고통을 받지만 쌓인 죄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거짓된 놋쇠 속에, 순수한 구리가 있다고 속이는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홀로 아무 거리낌이 없이 돌아다니니, 속도 더럽지만 겉도 더럽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간사한 사람이 많은 부하를 데리고 세상에 다니지마는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는 것과 같고, 포악한 도적들이 마을을 휩쓴 뒤라야 그들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홀로 아무 거리낌이 없이 돌아다니니, 속도 더럽지마는 겉도 더럽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음식을 탐하면서 절제할 줄 모르면
때때로 3전(轉)을 행하더라도
우리 안에 기르는 돼지처럼
계속해서 어미 태를 받을 것이다.
“음식을 탐하면서 절제할 줄 모르면, 때때로 3전을 행하더라도”란 무슨 뜻인가?
저 우치한 사람은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남의 공양을 받더라도 그저 제 몸만 기르기 때문에 살만 쪄서 몸을 돌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우치한 비구도 거짓으로 앉아서 선정에 들어가 사유하는 척하며, 때때로 시주들의 예배를 받고 많은 공양을 받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도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마치 저 기르는 돼지가 눕고 먹고 움직이지 않지마는 오래지 않아 잡혀 죽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쉬지 않고 몸을 버리고는 또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음식을 탐하면서 절제할 줄 모르면, 때때로 3전을 행하더라도, 우리 안에 기르는 돼지처럼, 계속해서 어미 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3
사람이 그 뜻을 잘 단속해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 알아서
그 몸을 지탱하여 나아간다면
목숨을 기르면서 그 도를 지킨다.
옛날 부처님은 바사닉왕을 위해 위의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바사닉왕은 일찍이 덕의 뿌리를 심었기 때문에 복의 메아리가 스스로 응하여 뒷동산에서 저절로 사탕수수가 나서 단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저절로 한 포기의 메벼가 나서 수백 이삭을 드리웠는데 아무리 베어도 다하지 않았다. 왕은 그 복을 받고는 만족할 줄 모르고 자꾸 먹었기 때문에 몸이 매우 비대해지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몹시 괴로워하며 몸을 돌리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몸을 굽히고 합장한 뒤에 한쪽에 앉았는데, 그때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사람이 그 뜻을 잘 단속하여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 알아서
그 몸을 지탱하여 나아간다면
목숨을 기르면서 그 도를 지킨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 뛰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하직하고 궁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왕은 곧 요리사에게 명령하였다.
“만일 네가 음식을 받들어 내 앞에 놓을 때는 먼저 이 게송을 읊은 뒤에 나로 하여금 먹게 하라.”
그래서 항상 이 말을 법으로 삼으니, 왕은 차츰 음식의 분량을 줄여서 몸이 가뿐해지고 가고 오는 행동거지에 아무 고통이 없었다.
14
청정함을 살펴서 스스로 닦더라도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지 못해서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면
그런 것은 무지한 범부의 행이다.
도리어 욕심만 자꾸 늘게 하나니
집이 부서져 물이 새는 것과 같다.
“청정함을 살펴서 스스로 닦더라도,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지 못해서”란 무슨 뜻인가?
처음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뜻이 굳지 못해서 마음속으로 머리털과 손톱ㆍ발톱과 이빨을 사유하면서도 청정함에 집착하여 탐욕을 내는데, 이는 도리어 욕망의 생각을 낸 것이기 때문에 분노와 우치가 더욱 자라나고, 모든 감관을 거두어 잡지 않으므로 안정을 얻지 못해서 마음대로 방탕하다가 드디어 도의 등불을 잃고 만다. 마치 왕성한 불에 기름을 쏟는 것과 같거늘, 이 이치를 분명히 안다면 어찌 그것이 불을 끄는 방법이 되겠는가?
대개 음욕과 분노와 우치의 불을 끄고 다시 일지 않게 하려면 마땅히 ‘이 몸은 더럽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청정함을 살펴서 스스로 닦더라도,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지 못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면, 그런 것은 무지한 범부의 행이다”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이 자꾸 구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구한 것을 포대에 쌓아 두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범부의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면, 그런 것은 무지한 범부의 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도리어 욕심만 자꾸 늘게 하나니, 집이 부서져 물이 새는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이 무지를 고집하면서 선한 일을 닦지 않으면, 욕심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스스로 고칠 수 없고, 다시 생사의 고난을 겪어야 한다.
마치 지붕을 덮되 견고하게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물이 새서 깨끗한 옷을 더럽히는 것과 같으니,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그 뜻이 견고하지 못하면 거기서 음욕과 분노와 우치가 새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욕심만 자꾸 늘게 하나니, 집이 부서져 물이 새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5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보아서
모든 감관이 훼손되거나 새지 않으며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을 알고
신심을 잡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욕심대로 방일하지 않으면
바람에 끄떡 않는 태산 같으리.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보아서, 모든 감관이 훼손되거나 새지 않으며”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잠깐도 쉬지 않고 그 뜻을 제어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몸에서 새어 나오는 더러운 물질들을 관찰하여 낱낱이 분별하고,
‘이 몸 속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더러운 물질을 분별하여 머리에서 발 끝까지 청정하지 못해서 하나도 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모든 감관을 잘 거두어 잡아 새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보아서, 모든 감관이 훼손되거나 새지 않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을 알고, 신심을 잡고 부지런히 노력하며”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이 뜻을 굳게 잡으면 변함이 없는 믿음을 얻고, 많이 먹으면 멍청하여 선정에 들지 못하며, 신심이 불꽃처럼 왕성하면 능히 정진할 수 있다. 그래서 무리에서 뛰어나고 홀로 높아서 이내 도를 깨달으니,
그러므로 “음식에 대해 만족할 줄을 알고, 신심을 잡고 부지런히 노력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심대로 방일하지 않으면, 바람에 끄떡 않는 태산 같으리”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어지럽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하니, 욕심은 화의 근본이 되어서 온갖 재앙과 걱정을 만들고, 몸과 마음을 흐리멍텅하게 하여 지혜의 등불을 받지 못하게 하며, 죽으면 몸을 태우는 고통을 그 과보로 받게 한다.
이런 이치를 잘 생각하면 모두가 괴로움과 걱정뿐이므로 그 뜻을 잘 제어해서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에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즉 밖으로는 여섯 가지 경계를 제어하고 안으로는 여섯 가지 감관을 거두어 잡아서 안팎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하니, 그렇게 하면 그리하여 마치 태산이 우뚝 서서 회오리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금강과 같아서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욕심대로 방일하지 않으면, 바람에 끄떡 않는 태산 같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6
저 한적한 곳은 매우 즐길 만한데도
사람들은 그곳을 즐기지 않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살 곳이지
욕심이 있는 사람이 살 곳 아니네.
“저 한적한 곳은 매우 즐길 만한데도”란 무슨 뜻인가?
성인이 이런 것을 말하는 까닭은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리 그 법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적한 곳에 있으면 그 뜻이 전일하여 잠깐도 쉬지 않고 사유하기 때문에 시절을 옮기지 않고 의념(意念)이 메아리처럼 응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저 한적한 곳은 매우 즐길 만한데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즐기지 않네”란 무슨 뜻인가?
그런 무리들은 모두 범부이기 때문에 애욕에 집착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여색에 집착하여 실제로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여자가 죽고 나면 비로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곳을 즐기지 않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살 곳이지”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성인이란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어서 온갖 결박과 집착을 활연히 다해 버렸기 때문에 깨끗하기가 순금과 같아서 조그만 티끌도 없는 사람이다.
그가 마을에 있으면 두루 다니면서 교화를 하는데, 때가 되면 발우를 들고 가서 복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되 그 보시가 많건 적건 그 시주를 축원해 준다. 그 시주가 성문(聲聞)을 만날 때에는 그 설법을 들어서 마음에 사무치도록 하고, 가령 벽지불을 만나면 허공에 발우를 날리면서 열여덟 가지 변화를 부릴 때도 그 몸은 비록 대중 속에 있지마는 그 마음은 광야에 있다.
그러므로 “욕심 없는 사람의 살 곳이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심이 있는 사람이 살 곳 아니네”란 무슨 뜻인가?
탐욕에 집착하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법관이 빨리 판결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한 해가 다가도록 나오려고 하나 끝내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음탕한 사람도 그와 같아서 우치한 마음에 얽매이고 애욕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무루(無漏)의 거룩한 지혜의 약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서 구제를 받으려 해도 좀체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 있는 사람이 살 곳 아니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7
한가하고 고요한 마을이든
높은 언덕이나 평탄한 땅이든
아라한이 한번 지나간 곳에는
누구나 다 그 도움받는다.
아라한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영향이 있다. 그 토지의 신이나 사천왕들이 항상 와서 옹호하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는 어떤 재앙도 받지 않으니, 이처럼 선이 능히 악을 억눌러서 어떤 손해도 생기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사는 현성의 위신의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한가하고 고요한 마을이든
높은 언덕이나 평탄한 땅이든
아라한이 한번 지난 곳에는
누구나 다 그 도움받는다.
18
옮기기도 어렵고 흔들기도 어렵기가
마치 저 무거운 설산(雪山)과 같건만
현인(賢人)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나니
마치 밤에 어둔 방에서 활 쏘는 것 같다.
현성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계획한 것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이루게 된다. 마치 여러 산들이 좋은 약을 다투어 낼 때, 마음대로 그약을 캐어서 그 해독을 분별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온갖 덕을 두루 갖추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옮기기도 어렵고 흔들기도 어렵기가, 마치 저 무거운 설산과 같건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인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나니, 마치 밤에 어둔 방에서 활 쏘는 것 같다”란 무슨 뜻인가?
선지식이 아니면 선지식을 가까이할 수 없다는 것이니, 악한 일을 들어도 그 근본을 드러내지 못하고 선한 일을 들어도 그 덕을 찬탄할 줄 모르니,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 속에서 가만히 활을 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현인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나니, 마치 밤에 어둔 방에서 활 쏘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9
어진 사람도 수천 명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숲처럼 있으니
뜻과 이치가 지극히 깊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잘 분별한다.
“어진 사람도 수천 명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숲처럼 있으니”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어진 사람은 무엇이나 분별하는 것이 있으니, 한 글귀의 뜻을 들으면 무수한 변재의 법으로 연설한다. 이처럼 깊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은 다 관찰을 단련하였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어진 사람도 수천 명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숲처럼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뜻과 이치가 지극히 깊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잘 분별한다”란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을 분별하여 그 차례를 잃지 않는 것이니, 의리(義理)를 깊이 파고 그 법을 끝까지 밝히되, 그것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과 어디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그 이치를 낱낱이 분별하여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뜻과 이치가 지극히 깊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잘 분별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0
저 중생들 아무리 많더라도
쏘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
지금 이 이치를 관찰하건대
계율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해야 하네.
“저 중생들 아무리 많더라도, 쏘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맞는 자는 법이 아닌 것을 닦는 사람이니 이 때문에 “저 중생들 아무리 많더라도 쏘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이 이치를 관찰하건대, 계율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해야 하네”란 무슨 뜻인가?
근기가 날카롭고 빠른 사람은 항상되고 항상되지 않은 것과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관찰한다. 그리하여 계율을 갖춘 사람은 그 깨끗한 것을 찬탄하지만, 계율을 범한 사람은 그 교훈을 듣고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도리어 비방하며, 자기의 성명이나 출생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를 낮추면서 그를 칭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좋은 화살을 가려서 그 공을 이루려 하듯이 해야 하니, 그 이유는 악한 사람은 그 행을 고치게 하고 선을 닦는 사람은 바른 법을 숭상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이치를 관찰하건대, 계율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1
유(有)를 관찰하면 두려움을 알아야 하니
그 유도 변하면 무(無)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를 즐기지 말고
반드시 여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유를 관찰하면 두려움을 알아야 하니, 그 유도 변하면 무가 되기 때문이다”란 무슨 뜻인가?
유란 두려운 것이요 믿을 것이 못 되는데도 그 유를 여실히 여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를 관찰하면 두려움을 알아야 하니, 그 유도 변하면 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유를 즐기지 말고, 반드시 여읠 것을 생각해야 한다”란 무슨 뜻인가?
대개 사람은 누구나 괴로움의 근본을 좋아하지 않고 그 근본 업이 지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유를 즐기지 말고, 반드시 여읠 것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2
믿음도 없고 은혜도 모르니
담 구멍을 뚫는 도둑과 같다.
바라는 그 마음 끊어 버리면
그야말로 용사라 할 수 있으리.
“믿음도 없고 은혜도 모르니”란 무슨 뜻인가?
어떤 부처님의 제자는 독실히 믿는 마음이 없으니, 그 이유는 부처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고 비구를 믿지 않으며, 또한 고ㆍ집ㆍ멸ㆍ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멸이란 번뇌가 아주 사라진 열반인데도 그는 그것을 믿지도 않고 공경하거나 받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믿음도 없고 은혜도 모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담 구멍을 뚫는 도둑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한다는 사람들은 번뇌가 가득한 삼계의 담을 뚫고 그 안에서 수도하는 값으로 복과 경사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담 구멍을 뚫는 도둑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라는 그 마음 끊어 버리면, 그야말로 용사라 할 수 있으리”란 무슨 뜻인가?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을 끊고 다시는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사람 중의 대사[士]로서 그보다 나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는 그 마음 끊어 버리면, 그야말로 용사라 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과
왕의 집안과 두 가지를 버리고
그 경계를 두루 없애면
더러움 없는 범지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과”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이 이것을 말씀하신 까닭은 사랑하는 마음을 남김없이 없애서 다시는 생기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과”라고 말한 것이다.
“왕의 집안과 두 가지를 버리고”란 무슨 뜻인가?
왕을 말한 것은 교만을 나타낸 것이요,
두 가지란 첫째는 계율이고,
둘째는 삿된 소견이니, 교만을 버리고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집안과 두 가지를 버리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경계를 두루 없애면, 더러움 없는 범지가 된다”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이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교만을 남김없이 아주 없애서 깨끗한 행을 닦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그 경계를 두루 없애면, 더러움 없는 범지가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사람이 만일 의지하는 데 없고
먹는 것이 귀중함을 알면
공(空)과 무상(無相)과 또 무원(無願)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
“사람이 만일 의지하는 데 없고”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아무 번뇌도 없고, 또 물건을 쌓아 두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의지하는 데 없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먹는 것이 귀중함을 알면”이란 무슨 뜻인가?
세상 사람은 음식에 의하여 그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식(摶食)이 생긴 그 유래를 알아야 하고, 촉식(觸食)은 온갖 생각을 일으키되 날 소가죽과 같고, 사식(思食)은 불더미 같으며, 식식(識食)은 칼이나 창과 같은 줄을 알아야 한다.
즉 단식을 먹는 사람은 그 음식의 유래를 관찰하되 손으로 집거나 발우에 둘 때마다 ‘이 음식은 어디서 생겼고 또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이 몸은 더러운 것이라서 탐하거나 즐길 것이 못 된다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 귀중함을 알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과 무상과 또 무원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란 무슨 뜻인가?
저 중생들이 이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면, 항상 도를 사유하고 염(念)해서 마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과 무상과 또 무원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5
저 허공을 나는 새가
발자취가 없는 것처럼
저 수행하는 사람도
취향하는 곳이 없다고 말하리라.
“저 허공을 나는 새가, 발자취가 없는 것처럼”이란 무슨 뜻인가?
허공을 나는 새는 모두 봉황이라 하는데, 그 허공에는 발자취를 볼 수 없고 가고 오며 돌아다녀도 일정한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저 허공을 나는 새가, 발자취가 없는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저 수행하는 사람도, 취향하는 곳이 없다고 말하리라”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뜻과 이치를 관찰하면 동서남북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 수행하는 사람도, 취향하는 곳이 없다고 말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6
유(有)의 근본을 잘 끊는 사람은
그렇게 되기 전에 의지하지 않고
공(空)과 그리고 무상(無相)의 행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은 유의 근본을 끊어야 한다. 이른바 ‘유’란 욕계의 존재와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이니, 그것을 남김없이 아주 없애서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의 근본을 잘 끊는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의지하지 않고”란 무슨 뜻인가?
아직 변하지 않는 일과 흥망성쇠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기 전에 의지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과 그리고 무상의 행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란 무슨 뜻인가?
세 가지 해탈과 열반의 문에 집착하여 스스로 즐기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과 그리고 무상의 생을, 사유하는 것으로 행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7
이상하여라, 어떤 중생은
그 바른 길 따르지 않으므로
구제받으려 해도 구제받지 못하고
죽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이상하여라, 어떤 중생은, 그 바른 길 따르지 않으므로”란 무슨 뜻인가?
가령 어떤 중생은 중앙의 나라에 나는 일이 드물고, 또 어떤 중생은 현성을 만나는 일이 적다.
그러므로 “이상하여라, 어떤 중생은, 그 바른 길 따르지 않으므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제받으려 해도 구제받지 못하고”란 무슨 뜻인가?
많은 중생들이 있지만 이 세상을 건너려 하는 사람은 적으니, 그 결과 생사 뿌리의 있고 없음과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 그 성질과 행실이 더럽고 흐리어서 트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제받으려 해도 구제받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살기를 탐하기 때문에 다만 눈앞만 볼 뿐 죽은 뒤의 갖가지 괴로움을 받는 것을 알지 못하며, 또 세상을 건너갈 업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죽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8
사람들 모두 평등하게 말하고
법을 법답게 서로 관찰한다면
온갖 번뇌를 모두 끊어 버려서
다시는 치열한 괴로움이 없으리라.
“사람들 모두 평등하게 말하고, 법을 법답게 서로 관찰한다면”이란 무슨 뜻인가?
대개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 옳고 그름을 잘 관찰하고 법을 법답게 완전히 이루어서 거기에 높고 낮음을 없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 모두 평등하게 말하고, 법을 법답게 서로 관찰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온갖 번뇌를 모두 끊어 버려서, 다시는 치열한 괴로움이 없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이 사유하고 헤아린 끝에 온갖 번뇌를 끊어 버리고 집착하는 생각을 아주 버려서 다시는 치열한 괴로움의 병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를 모두 끊어 버려서, 다시는 치열한 괴로움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9
그 가는 길이 다시는 걱정 없고
종일토록 해탈을 얻은 사람은
모든 번뇌가 아주 다하여서
다시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
“그 가는 길이 다시는 걱정 없고, 종일토록 해탈을 얻은 사람은”이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이 덕을 닦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온갖 괴로움을 끝내고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는 길이 다시는 걱정 없고 종일토록 해탈을 얻은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번뇌가 아주 다하여서, 다시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이 그 뜻을 굳건히 잡고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가 아주 다하여서, 다시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0
지음 없음은 지음 있음이 없는 것이니
짓는 사람은 치열한 번뇌를 받으리라.
짓지도 않고 지음 없음도 아니라면
먼저는 걱정했으나 뒤에도 그러할까.
“지음 없음은 지음 있음이 없는 것이니, 짓는 사람은 치열한 번뇌를 받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먼저 죄를 짓고는 그것이 법이 아닌 줄을 절실히 깨달으면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고 참회를 구하면서 숨기지 않으니, 그렇게 하면 그는 다시 몸을 받아 나더라도 고뇌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음 없음은 지음 있음이 없는 것이니, 짓는 사람은 치열한 번뇌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짓지도 않고 지음 없음도 아니라면, 먼저는 걱정했으나 뒤에도 그러할까”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가도 이내 회개하면, 그는 목숨을 마치는 날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않고 선한 신장들이 호휘하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짓지도 않고 지음 없음도 아니라면, 먼저는 걱정했으나 뒤에도 그러할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1
이미 지으려면 좋은 행을 지어라.
그렇게 하면 걱정이 없으리라.
그리고 짓되 즐거이 지으면
천상에 나서 즐거움 받으리라.
“이미 지으려면 좋은 행을 지어라. 그렇게 하면 걱정이 없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선행을 닦는 사람은 여러 가지 덕을 두루 갖추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받들어 섬기며 목숨을 마친 뒤에는 천상의 좋은 곳에 난다.
그러므로 “이미 지으려면 좋은 행을 지어라. 그렇게 하면 걱정이 없으리라. 그리고 짓되 즐거이 지으면, 천상에 나서 즐거움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2
또 그가 변론할 줄 모르면
어떻게 현성의 차별을 알랴?
그러나 그가 변론할 줄 안다면
그 말에는 때[垢]의 자취가 없다.
“또 그가 변론할 줄 모르면, 어떻게 현성의 차별을 알랴”란 무슨 뜻인가?
만일 저 수행하는 사람이 변론할 줄을 몰라서 글귀의 이치도 분별하지 못하고, 또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도 위의와 예절에 대해 알지 못하면, 현인과 어리석은 자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 그가 변론할 줄 모르면, 어떻게 현성의 차별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변론할 줄 안다면, 그 말에는 때의 자취가 없다”란 무슨 뜻인가?
때가 끼지 않은 변론은 모든 집착하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도 즐겁고 또 남의 한량없는 칭찬도 받는다. 그리하여 그 설법을 듣는 사람은 모두 그 법맛[法味]에 배를 불리고는 저의 아귀나 축생이나 지옥과 같은 나쁜 길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나 그가 변론할 줄 안다면, 그 말에는 때의 자취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3
법에 알맞는 변론을 설해서
마땅히 선인(仙人)의 깃대를 세워야 한다.
법의 깃대를 바로 선인이라 하고
선인을 바로 법의 깃대라 한다.
“법에 알맞는 변론을 설해서”란 무슨 뜻인가?
불꽃처럼 왕성한 법맛을 남을 위해 연설하되, 표현과 내용을 완전히 갖추어서 이리저리 가르친다는 것이다. 선인이란 바로 부처님을 말한다. 이름의 몸과 글귀의 몸을 설명할 때 낱낱이 분별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바른 법을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법에 알맞는 변론을 설해서
마땅히 선인의 깃대를 세워야 한다.
법의 깃대를 바로 선인이라 하고
선인을 바로 법의 깃대라 한다.
34
혹은 조용히 꾸짖기도 하고
혹은 대중 속에서 꾸짖기도 하며
혹은 소리내지 않고 꾸짖나니
세상에는 꾸짖지 않는 일이 없다.
“혹은 조용히 꾸짖기도 하고”란 무슨 뜻인가?
마음속이 치열해서 쉬지 않고 저주하되 저 사람이 수재나 화재를 당하거나 도둑을 맞았으면 하는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혹은 조용히 꾸짖기도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혹은 대중 속에서 꾸짖기도 하며”란 무슨 뜻인가?
높은 소리로 크게 꾸짖되 높고 낮은 이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은 대중 속에서 꾸짖기도 하며”라고 말한 것이다.
“혹은 소리내지 않고 꾸짖나니”란 무슨 뜻인가?
일부러 대중 속에 있으면서도 큰소리를 치지 않고 직접 꾸짖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은 소리내지 않고 꾸짖나니, 세상에는 꾸짖지 않은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
한 번 비방하고 한 번 칭찬하는 것
다만 그 이름만 이롭게 할 뿐이니
그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알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번 비방하고 한 번 칭찬하는 것, 다만 그 이름만 이롭게 할 뿐이니”란 무슨 뜻인가?
온갖 선의 공덕은 그 몸을 기르는데, 혹 공양을 얻었더라도 그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혹 비방을 받았더라도 그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선한 마음은 끊어진 것이 아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징조가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아서 반드시 표전(漂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한 번 비방하고 한 번 칭찬하는 것
다만 그 이름만 이롭게 할 뿐이니
그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알 수도 없는 것이다.
36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받나니
고운 것에든 추한 것에든
지혜로운 사람은 결함이 없다.
그의 지혜와 선정과 해탈은
마치 저 자마금(紫磨金)처럼
안팎이 모두 청정하게 사무쳤다.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받나니, 고운 것에서든 추한 것에서든”이란 무슨 뜻인가?
깨달은 소견과 넓은 소견으로 하나의 뜻[一義]을 연설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미치지 못하니 모두 그의 구제를 받아서 괴로움에서 떠나게 된다.
마치 부처님이 다니실 때 땅에서 네 치쯤 떨어진 허공을 밟고 다니시지만, 땅에는 발자국의 무늬가 저절로 환히 나타나서 벌레들이나 형상이 있는 무리들이 모두 그 광명을 입고 구제를 받아 이레 동안 아무 고통 없이 아주 편안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그는 마치 자마금처럼 안팎이 청정하여 아무런 티가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 받나니
고운 것에든 추한 것에든
지혜로운 사람은 결함이 없다.
그의 지혜와 선정과 해탈은
마치 저 자마금처럼
안팎이 모두 청정하게 사무쳤다.
37
마치 저 안명산(安明山)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비방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저 안명산이 굳세게 우뚝 서서 끝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세상에 사시지만 세상의 여덟 가지 법을 버렸기 때문에 비방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으신다. 많이 널리 두루 보아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어떤 범지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와 비방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땅처럼 지녀서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부처님 처소에 가서 온갖 욕설과 비방을 했지만, 그 뒤에는 다시 온갖 칭찬과 기리는 말로 부처님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은 굳건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치 저 안명산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비방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8
만일 어떤 나무가 뿌리 없으면
가지도 없겠거늘 하물며 잎이 있으랴?
그리하여 건전한 자는 결박을 풀었거니
누가 능히 그 덕을 비방하랴?
“만일 어떤 나무가 뿌리 없으면, 가지도 없겠거늘 하물며 잎이 있으랴”란 무슨 뜻인가?
무명의 뿌리는 온갖 근심의 근원이요, 애욕은 가지와 잎을 내어 삿된 소견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나무가 뿌리 없으면, 가지도 없겠거늘 하물며 잎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건전한 자는 결박을 풀었거니, 누가 능히 그 덕을 비방하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건전한 자란 모든 부처님을 가리킨 것이니, 부처님은 모든 결박과 집착을 벗어나서 다시는 태의 몸을 받지 않고 또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리하여 건전한 자는 결박을 풀었거니, 누가 능히 그 덕을 비방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9
번뇌 없으면 집착도 없는데도
몸의 구덩이에 괴로움의 종자를 심네.
가장 뛰어난 이는 애욕이 없으므로
천상이나 인간에서 아는 이 없다.
“번뇌 없으면 집착도 없는데도”란 무슨 뜻인가?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아주 없앤 것이니, 번뇌가 있으면 집착이 있고 번뇌가 없으면 집착이 없으며, 또 몸의 구덩이도 없고 괴로움의 종자도 없다.
그러므로 “번뇌 없으면 집착도 없는데도, 몸의 구덩이에 괴로움의 종자를 심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장 뛰어난 이는 애욕이 없으므로, 천상이나 인간에서 아는 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이 고요한 선정에 들어서 삼매를 바로 받을 때에는 몸을 없애고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에 여러 하늘과 성인들은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뛰어난 이는 애욕이 없으므로, 천상이나 인간에서 아는 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0
애욕은 우거진 숲에 그물을 친 것 같으니
애욕이 없다면 다른 것이 또 있으랴?
부처님은 한량없는 행이 있지만
그 자취가 없거니 누가 잡으랴?
“애욕은 우거진 숲에 그물을 친 것 같으니”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지금 너희들을 위해 애욕의 뿌리와 그 가지와 잎의 뻗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리니 잘 명심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세한 것은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중생들은 생사에 헤매면서 다섯 갈래의 길로 헤어져 다닌다.”
그러므로 “애욕은 우거진 숲에 그물을 친 것 같으니”라고 말한 것이다.
“애욕이 없다면 다른 것이 또 있으랴”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은 도를 이루어 다시는 애욕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갈래의 길을 아주 끊고 삼계에 처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애욕이 없다면 다른 것이 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행이 있지만, 그 자취가 없거니 누가 잡으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부처님은 일체를 깨달으셨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 없고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다. 즉 4의지(意止)ㆍ4의단(意斷)ㆍ4신통ㆍ5근(根)ㆍ5력 (力)ㆍ7각도(覺道) 등을 닦고는 그것을 널리 펴 연설하시되 다함이 없으니, 높기는 위가 없어서 능히 헤아릴 수 없고 깊기는 밑이 없어서 또한 측량할 수 없다.
번뇌가 있으면 자취가 있고 번뇌가 없으면 자취가 없다. 대개 사람이 발이 있기 때문에 동ㆍ서ㆍ남ㆍ북과 네 간방과 상ㆍ하로 돌아다니는데, 번뇌의 자취가 있으면 장차 삼계에 들어가 다섯 갈래의 길을 헤매면서 생사를 떠나지 못할 것이요, 번뇌의 자취가 없으면 삼계의 여덟 가지 어려운 곳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량없는 행이 있지만, 그 자취가 없거니 누가 잡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1
만일 이 세상에 나지 않으려거든
나더라도 다시 유(有)를 받지 않도록 하라.
부처님은 한량없는 행이 있지만
그 자취가 없거니 누가 잡으랴?
“만일 이 세상에 나지 않으려거든, 나더라도 다시 유(有)를 받지 않도록 하라”란 무슨 뜻인가?
한 몸을 버리고는 또 한 몸을 받아서 생사를 거치는데 억천만의 몸이 나고 죽은 것이 한량이 없어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도를 이루어서 옛몸을 마쳤기 때문에 다시는 몸을 받아서 갖가지 고뇌를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나지 않으려거든
나더라도 다시 유(有)를 받지 않도록 하라.
부처님은 한량없는 행이 있지만
그 자취가 없거니 누가 잡으랴?
42
만일 그 상념들을 없애려거든
안팎의 모든 인(因)을 없애 버려라.
그 인(因)에는 색(色)의 상념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네 가지를 버리면 몸을 받지 않으리.
“만일 그 상념들을 없애려거든, 안팎의 모든 인을 없애 버려라”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상념이란 욕계의 상념ㆍ색계의 상념ㆍ무색계의 상념이니,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아주 없애서 다시는 나지 않게 하고, 또 삼계의 번뇌를 짓지 않으므로 안팎이 모두 청정하여 아무런 티끌이나 때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그 상념들을 없애려거든, 안팎의 모든 인을 없애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인(因)에는 색(色)의 상념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네 가지를 버리면 몸을 받지 않으리”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과거의 색 과거에 지은 색과 미래의 색, 미래에 지을 색, 현재의 색과 현재에 짓는 색을 관찰해서 낱낱이 분별한다. 네 가지에 색(色)이 없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네 천하를 통치하면서 그 몸에는 대인(大人)의 모양과 여러 가지 상호를 구족하지만, 수행하는 사람은 그를 보되 자기와 다르지 않게 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색이 좋다 해도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그 색이 추하다고 해서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며,
또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거나 ‘남이 옳고 내가 그르다.’라고 보지 말고,
또 옳고 그름에 있어서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라고 보지 않아서,
좋다 나쁘다는 생각이 전연 없어서 네 가지를 아주 끊고 다시는 좇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인(因)에는 색(色)의 상념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네 가지를 버리면 몸을 받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3
앞의 것도 버리고 뒤의 것도 버리고
중간 것도 버려서 유(有)를 뛰어넘고
일체를 모두 다 버린 뒤에는
다시는 생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앞의 것도 버리고 뒤의 것도 버리고, 중간 것도 버려서 유(有)를 뛰어넘고”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앞의 것이란 과거의 음(陰)ㆍ계(界)ㆍ입(入)으로 생기는 번뇌의 결박이니 그것을 버린다는 것이요, 뒤의 것이란 미래의 음ㆍ계ㆍ입으로 생기는 번뇌의 결박이니 그것을 버린다는 것이며, ‘중간 것도 버려서 유(有)를 뛰어넘고’란 현재의 음ㆍ계ㆍ입으로 생기는 번뇌의 결박을 버린다는 것이다.
“일체를 모두 다 버린 뒤에는”이란 무슨 뜻인가?
이 현재의 몸으로 허무의 도(道)를 얻음으로써 삼천대천세계의 왕이 되고 시방을 모두 관장하니, 뜻대로 자유롭고 할일을 완전히 마쳐서 다시는 태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것도 버리고 뒤의 것도 버리고, 중간 것도 버려서 유(有)를 뛰어넘고, 일체를 모두 다 버린 뒤에는 다시는 생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