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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10권
11. 택품(擇品)①[1], 견도ㆍ재(齋)ㆍ율의
비록 이미 많은 법 설명해
수많은 뜻을 결정하기는 해도
그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마땅히 다시 그 요점을 가려야 한다.
[견도, 법의 수레바퀴]
모니(牟尼)께서 설하신 견도(見道)는
빠른 일이기에 법의 수레바퀴라 말씀하셨고
혹은 유학의 팔지(八支)를
굴려서 타심(他心)에 이른다고 하셨다.
‘모니께서 설하신 견도는 빠른 일이기에 법의 수레바퀴라 말씀하셨다’라고 했는데,
두 종류의 어리석음을 없앴기 때문에 모니(牟尼)1)라 하고 적멸한 마음이 가득 채워졌기에 모니라 한다. ‘말씀하셨다’라고 한 것은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그 견해가 불어나는 까닭에 이를 견도라 한다.
지혜가 불어나고 그 지혜의 불꽃을 구하며 비품(非品)의 경지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를 도(道)라고 말하는 것이다.
‘빠르다[疾]’라고 한 것은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견도란 민첩하고 빠른 길이니, 선정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일품의 도로 단번에 구품(九品)의 번뇌를 끊는 것, 이것이 법인 까닭에 법이라고 말하며,
중생에서 벗어나며 이곳을 버리고 저곳에 이르게 되는 까닭에 수레바퀴라 말한 것이다.
즉 고제(苦諦)를 버리고 집제에 이르고 나아가 멸제를 버리고 도제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또한 수레바퀴와 비슷하기 때문에 바퀴[輪]라고 한 것이다.
마치 수레바퀴의 아랫부분이 굴러 위에 이르고 윗부분이 굴러 아래에 이르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견도의 수레바퀴[見道輪]는 아래의 인(忍)이 굴러서 위의 지(智)에 이르고 다시 굴러서 인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위아래의 뜻이 있는 까닭에 바퀴라고 설한다.
바퀴의 아래가 위에 이르고 위가 아래에 이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견도의 바퀴는 욕계를 연하고 나서는 위의 제일유[上第一有]를 연하게 되고 제일유를 연하고 난뒤 아래의 욕계를 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진제의 여러 방면을 항복시키는 까닭에 수레바퀴라 하니, 마치 전륜성왕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다.
‘혹은 유학의 팔지(八支)를 굴려서 타심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구사(瞿沙) 존자는 말하기를
“유학이 팔지를 굴려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르게 함을 전법륜(轉法輪)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바라나(波羅奈)의 선인이 머무는 곳2)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를 지닌 까닭에 이승(二乘)에 대해서 성문ㆍ벽지불이 자력으로써 법륜을 굴리며,
구린(拘隣)3) 등이 스스로 법륜도 굴리고 스스로 도를 닦아 다른 것에 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깨달음을 열게 하는 인연에 의하는 까닭에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고법인(苦法忍)이 일어나면 이미 굴린 것[轉]이지만 다만 도비지(道比智)가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 전(轉)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니, 즉 일찍이 가던 길을 버리는 일과, 일찍이 알지 못한 길을 얻는 일과, 번뇌가 다해 한맛을 얻는 일과, 단번에 여덟 가지 지(智)를 얻는 일과, 일시에 열여섯 가지 행을 닦는 일이 그것이다.
구린 등 다섯 사람과 팔만 사천의 모든 천신(天神)들이 진리를 보지만, 그들 가운데 먼저 진리를 보는 까닭에 구린을 전법륜의 인연으로 삼는 것이다.
세존 및 구린은 세속심을 일으켰으나 지신(地神)은 이를 알았고, 대력존(大力尊)에 대해 천신에 의해 들었던 바이기에 또한 용약환희하고 본당을 수호하는 까닭에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던 지신들은 소리를 높혀 크게 외치고 먼 곳에 머물고 있던 지신들은 돌아가며 이를 알렸던 것이다.
때문에 자력으로 알고 본 것이 아니다. 이는 항상 뛰어난 마음으로 뒤진 마음의 경계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이와 같이 잠깐 동안에 허공의 천신들이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외쳐서 마침내 범천에까지 이르렀으나 더 높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 높은 곳은 자기 경지의 이식(耳識)이 작용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범(梵)을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이라 부른다. 소리란 생각마다 소멸하는 것이지만 이어 가며 일어나는 까닭에 소리가 범천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전륜왕(轉輪王)이 세상에 나오면 열 가지 선한 업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고 인도한다.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은 욕계에서 보응을 받게 되므로 전륜왕이 세상에 나오는 소리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욕망을 벗어난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범천이 세존의 전법륜을 권청하는 까닭에 소리가 범천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거천(淨居天)은 위없는 도를 성취하기를 권발(勸發)하는 까닭에 소리가 정거천에까지 이르게 된다. 칭업(稱業)을 성취하는 까닭에 소리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4)
[범륜(梵輪)]
【문】범륜(梵輪)5)이란 어떤 것인가?
【답】
부처가 설한 구족한 도의
넓고 큰 것을 범륜(梵輪)이라 부른다.
제(齊)와 폭(輻)과 망(輞)이 구족되어
청정하지 못한 행을 대치한다.
모든 팔성도(八聖道)는 공통적으로 넓고 큰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이를 범륜(梵輪)이라 부른다.
그 가운데 바른 말[正語]ㆍ바른 업[正業]ㆍ바른 생활[正命]은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까닭에 제(齊)라 부른다. 제(齊)란 바퀴통을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ㆍ바른 생각[正思惟]ㆍ바른 방편[正方便]은 지계(持戒)에 의지하여 세워지며 넓은 연을 지니는 까닭에 바퀴살[輻]이라 부른다.
바른 기억[正念]ㆍ바른 집중[正定]은 정견ㆍ정사유ㆍ정방편의 바퀴살을 포섭하는 까닭에 이를 바퀴테라 부른다.
번뇌를 비범(非梵)이라 부르니, 사랑받지 못할 과보이기 때문이다. 도라는 것은 청정하지 아니한 번뇌를 대치한다. 그러므로 범륜(梵輪)이라 한 것이다.
이미 범륜은 현성의 팔지(八支)가 됨을 설명했다.
[재를 성취하는 일]
이제 재(齋)를 성취하는 일을 설명하겠다.
[재(齋)의 원래의 음은 우파바소(優波婆素)6)이다. 이하의 해석과 같다.]
이른바 우파바소(優波婆素)란
수시(受時)에 남[他]과 두 가지로 설명되는데
하룻밤ㆍ하룻낮이 채워지면
장엄ㆍ위의를 벗어난다.
‘우파(優波)’라 하는 것은 가깝다[近]라는 뜻이고,
‘바소(婆素)’라 하는 것은 머문다[住]는 뜻이다.
목숨이 다하도록 삼바라(三婆邏)7)에 다가가 머무는 까닭에 ‘가까이 머문다’고 한 것이다.
삼(三)이란 같다[等]8)는 뜻이고,
바라(婆邏)라 하는 것은 지킨다[護]9)는 뜻이다.
즉 평등하게 일체 중생을 지킨다는 것이다.
[모든 경론 가운데 율의(律儀)라 하는 것은 모두 등호(等護)라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머무는 일을 좇아 율의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 생각하기를 ‘이곳에서 받으면 저곳에서는 받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율의를 얻지 못한다.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갈라 받는 자는 율의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수(受)’라 한 것은 ‘받아 취한다’는 뜻이다. 작용으로 말미암는 까닭이니, 발심해서 얻는 것은 아니다.
‘때[時]’라고 한 것은 밝은 모습이 나올 때 받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남[他]’이라고 한 것은 타인으로부터 받는 것을 말한다. 중생을 따르기 때문이니, 비중생의 범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말로 표현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갓난아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미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바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재법(齋法)10)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이 화합하게 되는 까닭에 수(受)를 얻게 된다.
만약 계율을 범하거나 번뇌가 일어났다가도 그 허물을 볼 수 있다면 그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둘은 함께 설한다’는 것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모두를 설하는 것이다. 주는 자가 먼저 말하고 받는 자가 이어서 말한다.
만약에 주는 자가 말하지 않을 경우 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 받는 일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또 받는 자가 말하지 않을 경우 받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받는 자의 말이 없는 까닭이니, 말이 없이 작업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작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에 무작(無作)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무작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에 곧 나머지 식과 함께 생기는 공덕도 없다.
만약 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한다면 역시 받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나니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족(具足)’이라 한 것은 성스런 팔지(八支)가 성취된 것을 말한 것이다. 가령 비구가 율의(律儀)를 구족하지 않는다면 비구가 아니듯이 이 역시 그와 같다.
‘하루 낮ㆍ하룻밤’이라고 했는데, 세 번째의 한계는 여기에 해당하는 분(分)이 아닌 까닭에 두 한계만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재(齋)의 율의는 하룻밤ㆍ하루 낮이 한계가 되며 나머지 다른 율의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가 그 한계가 된다.
‘장엄ㆍ위의를 벗어난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보석이나 피복으로 장엄하는 까닭이니,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버려 위의를 받음에 머물러야 한다.
장엄으로써 방일의 족(足)을 삼는 까닭이니, 조복해서 머무는 일이 곧 불방일인 것이다.
방일이란 응당히 짓지 말아야 할 곳에서 짓는 것을 말한다. 위의(威儀)를 허무는 자는 공경 받지 못하는 까닭에 율의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황문(黃門)11)ㆍ시황문(時黃門)12)ㆍ무형(無形)13)ㆍ이형(二形)14)은 율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 하면, 탐욕이 불어나기 때문이며 뉘우치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마음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세 방면의 세계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로 다른 세계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빠르고 민첩한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종류의 청정한 인연은 수다라품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재의 종류]
【문】재(齋)에는 몇 가지가 시라지(尸羅支)이고 몇 가지가 불방일지(不放逸支)이며 몇 가지가 지지(持支)인가?
【답】
시라지[尸羅支]는 네 가지이고
불방일지(不放逸支)는 한 가지이며
나머지는 곧 지지(持支)이다.
재지(齋支)는 혜(慧)에서 말한 바이다.
오계(五戒) 가운데 앞의 네 가지가 시라지이다.
[시라(尸羅)15)란 번역하면 수습(修習)이라 하며, 또한 정순삼매(正順三昧)ㆍ청량(淸凉)ㆍ안면(安眠)이라고도 한다].
이는 성죄(性罪)를 버리는 자성계(自性戒)인 까닭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일은 곧 불방일지이며, 술을 마시는 일은 방일지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염(念)을 잃게 하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음주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불방일지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곧 지지이다’라고 한 것은 계율에 수순하는 까닭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때가 아닌데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 떠나는 것이 재(齋)이며, 나머지는 재의 가지[支]가 된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때가 아닌데 먹는 일에서 떠나는 것이 재이며 또한 재의 가지이다. 나머지는 가지이다.
예를 들면 평등한 견해는 도(道)인 동시에 도의 가지이며,
택법각지(擇法覺支)는 깨달음이면서 깨달음의 가지이듯이 이 또한 그와 같다”라고 하였다.
만약 구지(九支)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높은 잠자리ㆍ큰 침상ㆍ몸에 향수를 바르는 일ㆍ향기좋은 꽃을 멀리하는 일은 함께 하나의 구성 요소로 세워지는 까닭이다. 이는 다 함께 몸을 장엄하는 일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늙고 죽는 일이 하나의 생존의 가지로 세워지는 것과 같으니, 더불어 익어가는 까닭이다.
그 계율의 구성 또한 이와 같다.
【문】한 혀로 두 말 하고 다른 사람 험담하고 꾸며 말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성품의 죄에서 벗어나는 일인데 왜 이것은 재(齋)의 율의로 내세우지 않는가?
【답】지키기 어렵기 때문이고 항상 익히고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출가자조차 지키기 어려운 일이니, 항상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재가자가 어찌 지킬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지키기 어려운 일과 여러 위의와 불음주를 제외한 나머지 죄의 원인이 되는 것 역시 재(齋)의 구성 요소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재(齋)의 율의]
【문】이미 악계는 열로 불태워짐을 알았다. 이제 재(齋)의 율의의 전단향(栴檀香)을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율의를 구족하지 않은 우바세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양자16) 모두 그 허물을 보는가?
만약에 우바새의 율의를 구족하지 않은 우바새가 있다면 왜 사미의 율의를 구족하지 않은 사미는 없는가?
만약 없다고 한다면 왜 하나의 계만을 지키는 우바세를 설하는가?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가?
【답】
계율을 구족한 우바새와
비구의 율의는 하나이다.
그 모자라거나 줄인 내용 있기 때문에
모니께서는 일부분만 말씀하셨다.
‘계율을 구족한 우바새와 비구의 율의는 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바새의 율의를 갖춘 자를 우바새라 부르며 구족하지 못한 자를 그렇게 부루지는 않는다.
사미와 비구 역시 이와 같다”고 주장한다.
또한 “나 아무개는 불(佛)ㆍ양족존(兩足尊)께 귀의하고 법리욕존(法離欲尊)께 귀의하고 승제중존(僧諸衆尊)께 귀의하였으니, 나는 우바새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수명이 다할 때까지 중생으로서 받은 것을 버리고 귀의를 받아지녀 마음의 청정을 증지해야만 하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지는 세 번째 입으로 짓는 업으로 우바새의 율의를 얻는 것이다.
【문】이것은 살생을 떠난 사람이 입으로 짓는 계율인데 어떻게 다른 율의를 얻을 수 있는가?
【답】하나를 지키면 다른 비슷한 것들도 제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마땅히
“나는 목숨이 다하도록 중생 등을 버리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계등취 등을 취하는 까닭에 계취라고 부르듯이 그 또한 이와 같다.
다시 중생을 버린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의 중생의 본질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까닭에 지금부터 자신이 중생으로서 타고난 목숨을 버릴 때까지 받은 계율을 끝내 허물거나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17)의 율의는 중생들이 있는 곳에서 얻는데,
그 경우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부터 중생들을 죽이지 않고 또한 그들에게서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망령된 말을 하지 않겠으며, 이를 지키는 까닭에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죄의 원인 가운데 음주에서 떠나는 일을 우바새의 율의로 내세운 것이다.
음주는 일체의 방일의 족(足)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에 대해 지키는 일이 어려우니, 그런 까닭에 다른 여자와의 음행에서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니, 한 입으로 두 말 하고 남의 욕하고 꾸밈말을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욕계에 생한 성인[聖人經生]조차 짐짓 알면서도 죄를 범하였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한 가지 계율만 행하는 등의 우바새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사실 한 가지 계율만 행하는 우바새가 있다고 내세우니, 그렇다면 이것은 왜일까?
그들에게는 모자라거나 줄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모니께서는 일부분만 말씀하셨다.
즉 부처님은 지키는 계율에 빠진 조목이 있는 사람이 있는 까닭에 일부분의 계율만 지키는 우바새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계율을 갖춘 우바새가 만약 한 가지 계율만 지키고 나머지 네 가지 계율은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것을 한 가지만 행하는 자[一行]라고 부르며,
두 가지 계율만 지키고 세 가지는 지키지 아니할 경우 일부분[少分]만 지키는 자라 부른다.
나머지 경우도 이와 같다. 즉 그가 얻은 계율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말하는 것으로,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만약 어떤 사람이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이나 열 살 때에 우바새의 계를 받고 그뒤에 처를 취하고 그 여인으로써 처분(妻分)을 삼는다면 먼저 그 여인에 대해서 율의를 얻게 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만약 얻게 된다면 어떻게 그것이 계를 범한 일이 아닐 수 있는가?
만약에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일부분의 계율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답】그러한 경우 일부분의 구성 요소만 얻은 것이지 구족하여 얻은 것은 아니다. 곧, 다른 여자와의 음행에 있어서 청정하지 못함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니니, 자신의 처와 관계했을 뿐 다른 여자와 음행한 것은 아닌 것이다.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우바새가 사미계를 받았을 경우 우바새의 계를 버리지 않은 채 사미의 계를 얻게 된다. 뛰어난 쪽으로 호칭하기 때문이니, 그를 우바새라 부르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만약 그 사미가 환속(還俗)했을 때는 말하기를
“나는 우바새가 되었다. 마땅히 우바새임가 되었다고 증지(證知)해야 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를 경우 우바새의 율의을 다시 받아야 하니,
비구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18)
율의에 관한 설명은 마치고,
[율의와 비슷한 것들]
지금부터는 율의와 비슷한 것들을 설명하겠다.
두 가지 율의와 묘행과
업도와 초해탈(初解脫)과
업과 시라(尸羅) 등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이름이 있다.
바라제목차의 율의를 지을 때, 곧 그 찰나의 무작(無作)에 모두 일곱 가지 명칭이 있다.
첫째는 율의라 하고, 두 번째는 바라제목차율의라 하고, 세 번째는 묘행(妙行)이라 하고, 네 번째는 업도라 하고, 다섯 번째는 바라제목차라 하고, 여섯 번째는 업이라 하며 일곱 번째는 시라(尸羅)라 한다.
그 모든 악계를 대치하는 까닭에 율의라 부른다. 악계를 방호하고 7중(衆)19) 가운데 들어가는 까닭에 바라제목차율의라 부른다. 모든 중생들이 얻고 선한 작용인 까닭에 묘행이라 부른다. 사랑할 만한 결과를 얻고 생각하고 원하게 되는 도(道)인 까닭에 업도라 부르니, 생각하고 원함은 그 도를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초로 해탈에 수순하는 까닭에 바라제목차라 부르니,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한 마음을 좇아 얻게 되는 까닭이다. 여기서 업이란 작(作)을 말하니, 작을 일으키는 바인 까닭이다. 이것을 사(思)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바라제목차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알아야 하니, 또한 뒤의 세 가지 업도(業道)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20)
시라(尸羅)라 하는 것은 순박하고 착하다는 뜻이니, 남을 해치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뒤의 여러 무작(無作)에는 바라제목차와 업도라는 이름을 제외한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바라제목차가 제외되는 것은 앞이 아니기 때문이고 업도가 제외되는 것은 업을 일으키는 사원(思願)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율의의 여러 가지 이름을 설명했다.
[몸과 몸으로 짓는 업이 성취되고 성취되지 아니하는 경우]
이제 몸과 몸으로 짓는 업이 성취되고 성취되지 아니하는 경우를 설명하겠다.
몸의 성취이면서 업이 아닌 경우도 있고
혹은 업을 설하되 몸이 아닌 경우도 있으며
혹은 몸과 업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고
혹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몸의 성취이면서 업이 아닌 경우도 있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어떤 범부는 난태(卵胎)에 있을 때 가라라(迦羅羅)ㆍ세포ㆍ살의 단계ㆍ단단해지고 두터워짐이 전개된다. 이때는 전신(前身)의 작(作)은 이미 버려지고 이 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작(作)을 일으킬 수 없다. 거친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거친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면 능히 신업을 일으키며, 게다가 그에게는 미세한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내부로 향하는 마음과 외부로 향하는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곧 모두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분(分) 가운데서는 지극한 고통에 핍박당하는 까닭에 움직이고 자리를 바꿀 수가 없으니, 어떻게 작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만약 욕계에 태어나게 되면 율의(律儀)에 머물지 못하며 또한 불율의도 아니니, 몸이 무작(無作)에 처하여 혹은 잠자거나 혹은 미치거나 혹은 술에 취하는 자는 구하는 것도 없고 방편도 없이 작(作)의 인연을 버린다.
이것은 업품(業品)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혹은 업을 설하되 몸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성인이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이다. 그는 도공(道共)의 신업(身業)은 성취하였으나 몸의 성취는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색은 해당되는 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 몸과 업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라 한 것은 성인이 태 안에 있을 때 가라라ㆍ세포ㆍ살의 단단해짐ㆍ두터워짐을 겪는 경우, 욕계에 태어나 율의인 바라제목차ㆍ선ㆍ무루에 처하는 경우, 율의가 아닌 곳에 머무는 경우, 율의에도 머물지 않고 불율의에도 머물지 않아 몸으로 짓는 업이 있으면서 유작(有作)을 잃지 아니하는 경우, 혹은 색계에 태어날 경우이다. 이 여러 가지 몸은 색의 중생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짓는 업이란 혹은 그것을 율의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율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지은 업을 버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혹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의 범부를 말한다.
몸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니, 색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몸으로 짓는 업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니, 범부이기 때문이다.
입으로 짓는 업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문】세존께서는 네 종류의 입태(入胎)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인가?
【답】
입태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경우와
머물고 출태하는 경우
내지는 입태를 바르게 아는 경우이니
머물고 출태할 때도 또한 그러하다.
복이 적은 중생이 모태 안에 들어가게 되면 전도망상을 굴려서 전도된 알음알이를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자신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고 눈비가 내리며 몹시 춥고 어두운 곳에 들어갔으며 수많은 시끄럽고 어지러운 소리가 들리며 또는 꽃밭 사이나 숲 사이, 풀숲ㆍ꽃굴ㆍ나무 밑ㆍ담장 사이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태 안에 머물고 있을 때도 역시 전도된 생각과 전도된 알음알이를 일으키니 보는 바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태 밖으로 나올 때도 역시 전도된 생각과 전도된 알음알이를 일으키니 보는 바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복이 많은 중생은 정원과 숲ㆍ목욕할 못ㆍ전당(殿堂)ㆍ누각(樓閣)에서 자신이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밖의 일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첫 번째 입태[第一入胎]라 부른다.
두 번째 입태는 모습은 스스로 알고 전도된 생각이나 전도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아니하다가 태 안에 머물고 태 밖으로 나올 때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전도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세 번째 입태는 스스로 ‘나는 이와 같이 입태하고 이와 같이 머물고 있다’고 알고 있다가 태 밖으로 나오면서 전도된 생각을 하는 경우이다.
네 번째 입태는 스스로 ‘나는 이와 같이 태 안에 들어왔다’고 알며, 머물 때도 ‘나는 이와 같이 태 안에 머물고 있다’고 알고 태 밖으로 나올 때도 ‘나는 이와 같이 태 밖으로 나왔다’고 알게 되는 경우이다.
【문】이 여러 가지 입태하는 유형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답】
첫 번째는 부정한 업을 지은 자로
또한 지혜를 구하지 않는 자이며
중간의 둘은 각기 한 지위를 이루며
네 번째는 모두를 성취하는 자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선(善)한 업이 청정하지 못하고 또한 지혜를 구하지 않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업은 청정하나 지혜를 구하지 않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지혜는 구하지만 업이 청정하지 못한 경우이다.
네 번째는 모두를 성취한 사람의 경우다.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입태자는 모든 중생에게 해당되고 두 번째는 전륜왕(轉輪王), 세 번째는 벽지불(淪支佛) 그리고 네 번째는 여래에게 해당된다.
【문】수다원(須陀洹)에게도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경우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왜 악취(惡趣)21)에 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수다원이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그런 이치는 없다.
【답】
초과(初果)에 머무는 자는
한 종류의 부정업을 짓는데
그런데도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업이 구족되지 아니한 때문이다.
수다원에게는 비록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끊는 부정업이 있기는 하지만 견도의 단계에서 끊는 업은 없다. 상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2) 그런 까닭에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나니, 악취에 떨어질 조건이 구족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갖추어져야 움직일 수 있는데 한 쪽 바퀴가 부숴지면 감당할 바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수다원과 업의 관계도 이와 같다.
이것은 새의 두 날개에 비유해도 역시 그렇다.
어리석은 사람이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지 지혜 있는 사람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범부가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지 성인이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율을 범한 사람이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악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지 선심을 지닌 사람이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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