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아발다라보경 제3권
31.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진실하지 못한 망상은 어떻게 생기며, 어떤 법들을 진실하지 못한 망상이라고 하며, 어떤 법들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게 망상을 부리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래에게 이와 같은 뜻을 물으니, 이는 많은 이익과 많은 안락이 있고 세상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말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갖가지 뜻에 대해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계착하여 망상이 생긴다.
대혜야,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여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없다는 견해에 떨어져 외도의 견해를 증장시키니, 망상과 습기로 바깥 경계의 갖가지 뜻에 계착하여 심(心)ㆍ심수(心數)ㆍ나[我]ㆍ나의 것[我所]에서 생겼다고 망상으로 계착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갖가지 뜻에 대해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계착하여 망상이 생기며,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여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없다는 견해에 떨어져 외도의 견해를 증장시키며,
망상과 습기로 바깥 경계의 갖가지 뜻에 계착하여 심과 심수, 나와 나의 것에서 생겼다고 망상으로 계착한다면,
바깥의 온갖 사물의 모습[種種義相]은 유무(有無)의 모습[相]에 떨어진 것이니,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벗어나고 견상(見相)도 벗어나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일의(第一義)도 이와 같아서 양한분(量限分)ㆍ비유분(譬喩分)ㆍ인상분(因相分)을 벗어나야 하는데, 세존께서는 왜 한쪽의 망상은 진실하지 않은 이치의 갖가지 성품에 계착하여 생긴다고 하시고, 제일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은 망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세존의 말씀은 잘못된 인(因)으로 그릇된 의견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까?
한곳에서는 생긴다 하시고 한곳에서는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망상이 한곳에서는 생기고 한곳에서는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망상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깥 경계로 나타나는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이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는다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
대혜야, 내가 말할 것은, 나머지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기 마음의 갖가지 망상 때문에 사업(事業)이 앞에 나타나면 갖가지 망상으로 성품과 상(相)의 계착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범부가 나와 나의 것이라고 계착하는 견해를 벗어나고, 짓고 지어진다는 인연의 허물을 벗어나며, 자기 망상심(妄想心)의 현량과 몸과 마음[身心]의 엇바뀜[轉變]을 깨달아서 구경에 모든 지위와 여래의 자각 경계를 분명히 알아 다섯 가지 법의 자성사(自性事)를 보는 망상을 벗어나겠는가?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말한 것이다.
‘망상은 온갖 진실하지 않은 뜻에 계착하여 생기므로, 진실한 뜻을 알면 해탈을 얻고 온갖 망상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인(因)과 연(緣)
이것으로 세상이 생기나
망상으로 네 구(句)에 집착하여
내가 깨우쳐 준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생김이 있는 것[有生] 아니고
또한 생김이 없는 것[無生]도 아니다.
생김이 있으면서 없음[有無生]도 따르지 않고
또한 있으면서 없음을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과 연을
어찌하여 어리석게 분별하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보면
마음을 돌이켜 무아(無我)를 얻는다.
모든 성품은 생기는 것이 아니니
연(緣)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연(緣)으로 지어진 것
지어진 것은 스스로 있는 것 아니며
일[事]에서는 저절로 일이 생기지 못하니
두 가지 일이 함께 있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의 허물이 없는 까닭에
얻을 만한 성품이 있는 것 아니니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여
반연(攀緣)과 소연(所緣)을 벗어나라.
무심(無心)한 심량(心量)이기에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심량이란 자성처(自性處)이니
연(緣)과 성품, 둘을 다 벗어나
성품이 구경에 묘하고 청정한 것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세제(世諦)로써 나[我]를 시설하였으나
이것은 실다운 사체(事體)가 없나니
모든 음(陰)과 음을 시설하나
사실[事]이 없는 것도 그러하다.
네 가지 평등한 것이 있으니
모습[相]과 인성(因性)이 생기는 것
세 번째는 무아(無我) 등
네 번째는 닦음과 닦는 자.
망상과 습기가 돌고 돌아
온갖 마음이 생기고
밖으로 경계가 나타나니
이것이 세속(世俗)의 심량(心量)이다.
밖으로 나타나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저 온갖 것을 보고
신재(身財)를 세우는 걸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모든 견해를 벗어나고
생각과 생각하는 대상을 벗어나
얻음도 없고 생김도 없는 것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성품과 성품 아님을 모두 벗어나면
그것이 심해탈(心解脫)이니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여여(如如)와 공(空)의 세계
열반(涅槃)과 법계(法界)
갖가지 뜻대로 나타내는 몸[意生身]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