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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10권
21. 각분품 ①[2]
[법을 아는 것]
이미 보살이 물러서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법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알고 법의 업을 알고
모양을 알고 다함없음을 알며
과를 얻음과 두 가지의 문과
중생을 성취하고 또한 법에 머문다.
[釋] ‘법을 안다’고 함은 이른바 다섯 가지 명(明)의 처소를 아는 것이니,
첫째는 내명(內明)이요, 둘째는 인명(因明)이요, 셋째는 성명(聲明)이요, 넷째는 의명(醫明)이요, 다섯째는 교명(巧明)이다.
이 다섯 가지의 논(論)을 아는 것을 법을 안다고 이른다.
‘법의 업을 안다’고 함은 이른바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을 아는 것이다. 이로써 업을 삼는 것이다.
내론(內論)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닦고 남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인론(因論)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뜻을 펴고 남을 굴복시킨다는 뜻이다.
성론(聲論)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좋은 음성으로써 남으로 하여금 믿어 받게 하는 것이다.
의론(醫論)을 안다는 것은 남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다.
교론(巧論)을 안다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논의 모양을 안다’고 함은 이른바 이 다섯 가지의 논을 알면 다섯 가지의 인이 있음을 얻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이 논의 모양을 아는 것이다.
첫째는 들어서 얻음이요, 둘째는 가져서 얻음이요, 셋째는 외워서 얻음이요, 넷째는 사유하여 얻음이요, 다섯째는 통달하여 얻음이다.
보살은 먼저 논에서 들음이 있어야 하고, 듣고 나서는 받아 가져야 하며, 가지고 나서는 익혀 외워야 하고, 외우고 나서는 바로 사유해야 하며, 사유하고 나서는 통달해야 한다.
‘통달한다’고 함은 이것이 공덕이고 이것이 허물의 실수이며 이것은 착한 말이고 이것은 악한 말임을 아는 것이다.
‘다함없음을 안다’고 함은 이른바 이와 같이 아는 것에서 무여열반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함없음을 아는 것이다.
‘과를 얻는다’고 함은 이른바 일체 종지를 얻는 줄 스스로 아는 것이다.
‘두 가지의 문’이라 함은
첫째는 삼매의 문이요,
둘째는 다라니(陀羅尼)의 문이다.
그것은 논을 아는 보살이 삼매의 문으로써 중생들을 성숙하게 하여 그를 따라 교화하여 섭수하기 때문이요,
다라니의 문으로써 부처님의 법을 성숙하게 하여 얻어지는 법을 따라 다 능히 가지기 때문이다.
[세간을 아는 것]
이미 보살이 법을 아는 것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세간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몸으로 알고 또한 입으로 알며
실제(實諦)로써 안다.
보살은 세간을 알기에
가장 뛰어나서 나머지는 같을 이가 없다.
[釋] 보살은 세 가지가 있어서 세간을 아는 것이니,
첫째는 몸으로 세간을 알고, 둘째는 입으로 세간을 알며, 셋째는 제(諦)로 세간을 아는 것이다.
[문] 무엇을 일러 몸으로 안다고 하며, 무엇을 일러 입으로 안다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몸으로 알면 얼굴이 펴지고
입으로 알면 먼저 말한다.
그릇을 이루기 위함 때문이니
바른 법을 따라 수행한다.
[釋] ‘얼굴이 펴진다’고 함은 이른바 온화하고 기쁘고 즐겁게 웃는 것이니, 이를 몸으로 아는 세간이라고 한다.
‘먼저 말한다’고 함은 이른바 위로하여 묻고 찬미하는 것이니, 이를 입으로 아는 세간이라고 이른다.
[문] 이렇게 알아서 무엇을 합니까?
[답] 그릇을 이루고자 함이다.
[문] 무슨 그릇을 이루려 합니까?
[답] 바른 법을 따라 수행한다고 하였으니 이 그릇을 이루려 함이다.
[문] 무엇을 일러 제(諦)로 아는 세간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두 앎으로 세간이 생겨남을 알고
두 앎으로 세간의 멸함을 알아서
그치기 위함이고 다시 얻기 위하여
제(諦)를 알아서 부지런히 수행한다.
[釋] ‘두 앎으로 세간이 생겨남을 안다’고 함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두 제를 알면 곧 세간에서 항상 생겨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니, 생겨남과 생겨나는 방편을 알기 때문이다.
‘두 앎으로 세간의 멸함을 안다’고 함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의 두 제를 알면 곧 세간이 멸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니, 멸과 멸의 방편을 알기 때문이다.
[문] 제의 세간을 알아서 다시 무엇을 하려 합니까?
[답] 그치기 위함이고 다시 얻기 위해서 제의 지혜를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치는 것은 고제와 집제이고, 얻는 것은 멸제와 도제이다.
여러 보살들이 고제와 집제를 그치기 위함이고 멸제와 도제를 얻기 위해서 여러 제를 관하여 지혜를 닦음이 구족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세간을 아는 것을 곧 세간의 업을 안다고 한다.
[한량없음을 닦아 익히는 것]
이미 보살이 세간을 아는 것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네 가지의 한량없음을 닦아 익히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능전(能詮)과 의의(義意)
요의(了義)와 또한 무언(無言)이니
마땅히 알아라, 이 네 가지를.
네 가지의 헤아리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釋] ‘능전(能詮)’이라고 함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12부(部)의 경전이니, 이는 법으로써 양(量)을 삼고 사람으로써 양을 삼는 것이 아니다.
‘의의(義意)’라 함은 이른바 글 가운데의 이유(理由)이니, 이는 뜻으로 양을 삼고 말로 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요의(了義)’라 함은 세간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요,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것이니, 이는 요의로써 양을 삼고 불요의(不了義)로써 양을 삼음이 아니다.
‘무언(無言)’이라 함은 이른바 출세간의 증지(證智)이니, 이는 지혜로써 양을 삼음이며 식(識)으로써 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문]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이 네 가지의 양을 말씀하셨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비방함과 뜻이 아님과
삿된 생각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니
이 네 가지의 일을 막기 위하여
순서대로 네 가지의 양을 말씀하셨다.
[釋] 능전의 법을 말하여 양으로 한 것은 비방해서 말하는 사람을 막은 것이요,
의의를 말하여 양으로 한 것은 비의(非義)의 문구를 막은 것이요,
요의(了義)를 말하여 양으로 한 것은 삿된 생각과 전도된 해석을 막은 것이요,
지혜를 말하여 양으로 한 것은 말할 수 있는 지혜를 막은 것이다.
[문] 이 네 가지의 양을 의지하면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믿는 마음과 안으로 생각함과
바로 들음과 더불어 증지(證智)함,
보살이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은
양을 의지하여 공덕이 그러하다.
[釋] 첫째의 양을 의지하면 믿는 마음을 무너뜨릴 수 없고,
둘째의 양을 의지하면 바른 생각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셋째의 양을 의지하면 바른 들음을 무너뜨릴 수 없고,
넷째의 양을 의지하면 세간의 지혜를 무너뜨릴 수 없다.
[걸림이 없는 해석]
이미 보살이 닦아 익히는 네 가지의 양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네 가지 걸림이 없는 해석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문(門)과 상(相)과 언(言)과 지(智)에서
통달하여 견줄 데가 없다.
이것이 곧 보살의
네 가지 걸림이 없는 해석이다.
[釋] 첫째의 것은 이른바 지문지(知門智)이니 능히 뜻 가운데 있는 이름과 문의 차별을 알기 때문이요,
둘째의 것은 이른바 지상지(知相智)이니 능히 이 뜻이 이 이름에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요,
셋째의 것은 이른바 지언지(知言智)이니 능히 다른 국토의 언음(言音)을 알기 때문이요,
넷째는 이른바 지지지(知智智)이니 능히 자기가 설법할 줄 아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알면 이것이 걸림이 없는 해석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능설(能說)과 소설(所說)과
설구(說具)를 합한 세 가지의 일은
네 가지와 두 가지와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순서대로 세 가지의 일의 인이다.
[釋] 능설과 소설과 설구, 이 세 가지의 일에 각각 인연이 있다.
능설에 네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교수지(敎授智)요, 둘째는 성숙지(成熟智)요, 셋째는 취만지(聚滿智)요, 넷째는 영각지(令覺智)이다.
소설에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뜻이다.
네 가지의 지혜가 이 두 가지에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설구에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말이요, 둘째는 지혜이다.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말을 이루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들고[擧] 법을 해석하고
알게 하고 더불어 어려움을 피한다.
이 네 가지의 걸림 없음을 건립함은
이 뜻을 씀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법을 든다’고 함은 문(門)을 쓰기 때문이다.
‘법을 해석한다’고 함은 모양을 쓰기 때문이다.
‘알게 한다’고 함은 말을 쓰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피한다’고 함은 지혜를 쓰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말한 법과 뜻은 설구(說具)로써 말과 지혜를 순서대로 네 가지의 걸림 없는 해석을 건립한 것이다.
[문] 어찌해서 걸림이 없는 해석이라 이르며, 걸림이 없는 해석에는 어떠한 업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안으로 증득하고 밖으로 깨닫기에
걸림이 없는 해석이라고 일컫는다.
능히 일체의 의심을 끊으니
이것이 곧 그의 업이다.
[釋] 이 게송의 위의 두 구절은 이름을 세웠고, 아래의 두 구절은 업을 나타내었다.
이름이라 함은
모든 보살이 처음에 출세간의 지혜로써 안으로 여러 법을 증득하여 평등한 여(如)의 해석을 얻었으며,
뒤에는 세지(世智)를 얻어서 밖으로 모든 법의 법문의 차별을 깨닫는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기에 걸림이 없는 해석이라고 이른다.
업이라 함은
다시 이 해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체 중생들의 모든 의심의 그물을 끊는 것이니, 이를 업이라고 이른다.
[두 무더기의 공덕]
이미 보살의 네 가지의 걸림이 없는 해석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두 무더기의 공덕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복과 지혜는 두 무더기가 되니
뛰어난 보는 또한 염오되지 않는다.
일체의 모든 보살의
뛰어난 모양이 다 이와 같다.
[釋] ‘복과 지혜는 두 무더기가 된다’고 함은 두 무더기는 이른바 복의 무더기와 지혜의 무더기이다.
‘뛰어난 보는 또한 염오되지 않는다’고 함은 모든 보살은 복의 무더기로 인하여 생사 가운데서 뛰어난 보를 성취하는 인을 짓고, 지혜의 무더기로 인하여 그 뛰어난 보에서 염오되지 않는 인을 짓는다. 그러기에 보살의 뛰어난 모습은 비교할 이가 없다.
두 무더기가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섭수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처음의 둘은 복의 체가 되고
여섯 번째의 것은 곧 지혜이고
나머지 셋은 두 무더기의 인이 되며
다섯 가지가 모두 지의 무더기를 이루게 된다.
[釋] ‘처음의 둘은 복의 체가 된다’고 함은 마땅히 보시와 지계의 두 바라밀이 복 무더기의 체가 됨을 알겠다.
‘여섯 번째의 것은 곧 지혜’라 함은 마땅히 지혜 바라밀이 곧 지혜 무더기의 체가 됨을 알겠다.
‘나머지의 셋은 두 무더기의 인이 된다’고 함은 마땅히 인욕 바라밀과 정진 바라밀과 선정 바라밀의 세 바라밀이 모두 두 무더기의 인이 됨을 알겠다. 그것은 함께 짓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가 또한 지혜의 무더기를 이룬다’고 함은 다시 지혜 바라밀로써 능히 회향하기 때문이요, 일체의 여러 바라밀이 다 지혜의 무더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일러 무더기라 이르며, 무엇을 일러 무더기의 업이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바로 닦음과 자주 닦음으로
착한 업을 자양(資養)하는 것을 무더기라 이르고
자기가 이익되고 더불어 남을 이롭게 하여
성취되는 것을 곧 업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의 위의 두 구절은 이름을 해석하였고, 아래의 두 구절은 업을 나타내었다.
이름이라 함은 삼바라(三婆羅)이니, 이름하여 무더기라고 이른다.
삼(三)이라 함은 바로 닦는다는 뜻이요, 바라(婆羅)라고 함은 자주 닦는다는 뜻이니, 바로 닦음과 자주 닦음으로 말미암아 착한 법이 자장(資長)함을 얻게 된다. 이 자장으로 말미암기에 무더기라고 이른다.
업이라 함은 이 무더기로 말미암아 곧 능히 자기와 남의 두 이익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 업이라고 이른다.
두 무더기의 종류의 차별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지(地)에 들어가고 무상(無相)에 들어가고
공용(功用)이 없는 데 들어가며
직(職)을 받고 아울러 구경인 것이
두 무더기의 순서대로의 인이다.
[釋] 이 가운데 종류의 차별이라 함은, 신행지(信行地)의 무더기는 지(地)에 들어가는 인이 되고, 6지(地)의 무더기는 무상(無相)에 들어가는 인이 된다.
무상이라 함은 제7지에 섭취되는 것으로서 그 상(相)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7지의 무더기는 공용이 없는 데 들어가는 인이 되고,
제8지와 제9지의 무더기는 직을 받는 데 들어가는 인이 되고,
제10지의 무더기는 구경에 들어가는 인이 되니,
구경이라 함은 부처님의 지위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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