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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3권
12. 정론[3]
12.11. 초선품(初禪品)
아홉 가지 차제정[九次第定]은 네 가지 선정과 네 가지 무형선정과 생각 끊는 선정이다.
초선이라 함은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모든 욕심과 모든 악과 착하지 못한 법의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을 여의고 욕심 세계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의 느낌을 내는 초선에 들어간다”고 함과 같다.
[문] 초선의 모습만을 말하여야 한다. 무엇 때문에 모든 욕심을 여읜다고 말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비방하며 말하기를
“세간에서는 탐욕을 여읜 사람이 없다. 세상 사람은 다 다섯 가지 욕심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눈으로 물질을 보지 않거나 귀로 소리를 듣지 않거나 코로 내음을 맡지 않거나 귀로 소리를 듣지 않거나 코로 내음을 맡지 않거나 혀로 맛을 알지 않거나 몸으로 닿임을 깨닫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탐욕을 여읜다고 말한다.
탐욕이란 욕심을 말한 것이요, 물질 등이 아니다.
마치 물질 등의 모든 물건을 탐욕이라고 말하지 아니함과 같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정진하는 이에게도 물질 등이 아직 있는 데도 능히 욕심을 끊기 때문이다.
또 경전 중에서
“물질 등의 이 갈래를 욕심이라고 하지 않고 이 안의 탐심을 곧 욕심이라 한다”고 하였다.
만일 탐심을 내면 곧 모든 욕심을 구하게 되며, 욕심을 구하는 인연 때문에 탐냄과 성냄과 채찍과 몽둥이와 살해하는 악한 법이 따르게 된다.
대인경(大因經) 주에서
”욕망으로 인하여 구하는 마음 따위를 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욕심을 여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물질 등의 다섯 가지 욕심 여의는 것을 욕심 여읨이라 한다”고 한다.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읨을 다섯 가지 덮개[蓋]를 여읜다고 한다. 초선은 산란한 마음에 가깝기 때문에 거친 생각이 있다고 한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선정의 힘이 아직 성취되지 못하여 산란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에 거친 생각이 있다고 한다.
경전 중에서
“나는 거친 생각이 있고 세밀한 생각도 있는 행을 수행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산란한 마음을 거친 생각이라고 하셨는 줄 알아야 한다.
거친 생각이 점차로 세밀하여져서 마음을 껴잡되 더욱 깊게 되면 곧 세밀한 생각이라 한다.
선정이 성취됨에 따라 마음이 많이 산란하지 아니한 그 때를 세밀한 생각이라 한다.
이 세밀한 생각은 수행하는 이를 붙따라 선정의 중간까지 도달한다.
만일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여의고 기쁨을 얻는다면 여읨에서 생기는 기쁨[離生喜]이라 한다.
이 기쁨이 처음으로 몸을 이익되게 하므로 즐거움이라 한다.
이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과 기쁨을 여의고 하나의 반연 안에 머무르면 그것은 선정[禪]이라 한다.
이 선정은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에 산란해지기 때문에 몸을 바꾸는 과보를 얻지만 하와 중과 상의 차별 때문에 범중천(梵衆天)과 범보천(梵輔天)과 대범천(大梵天)이 있다.
[문] 만일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과 기쁨을 여의는 것이 초선이라 하면 다시 다섯 가닥을 가지고 초선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여읜다면 제2선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또 경전에서 말하기를
“초선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어서 편안함[猗]과 즐거움[樂]과도 다르고 기쁨[喜] 또한 다르다”고 하였다.
만일 기쁨이 곧 즐거움이라 하면 일곱 가지 각의(覺意) 중에서는 따로 편안함과 깨달음[覺]과 뜻[覺]을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
[답] 그대는 “초선에는 다섯 가닥이 없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다섯 가닥이 바로 초선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요,
초선의 근처에 이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닥이라고 한다.
[문] 만일 근처에 그 법의 수효로서 가닥이 되는 것이 있다면 초선도 다섯 가지 욕심에 가까운지라 응당 가닥이라 말해야 하리라.
[답] 다섯 가지 욕심은 가깝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 수행하는 이의 마음은 이미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초선의 차례에는 욕심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또 다섯 가지 욕심이 머물지 아니함을 초선의 가닥이 된다.
가닥은 인(因)이라 하며, 인은 곧 갈래이다.
마치 성도(聖道)의 갈래는 쌓이고 모여서 구족해지는 따위와 같은 것이니,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도 그렇다. 이 것이 초선의 인이다.
만일 수행하는 이의 선정의 마음에 반연 중에서 물러나고 도리어 선정의 모양을 취하여 마음을 반연에서 껴잡아 본래의 모양을 생각하면 그것을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은 바로 초선의 인이다.
제2선 중에서는 선정의 마음이 이미 성취한지라 이 때문에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으로써 인으로 삼지는 아니한다.
또한 2의 차례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만일 그대가 “초선은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함께 한다고 하면 그도 역시 옳지 못하다.
초선으로부터 일어나 그 다음에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내어서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에 섞기기 때문에 함께 한다는 것이니,
마치 제자와 함께 길을 걸을 적에 비록 조금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역시 함께 거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이 자리 안에서 내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마치 귀신들린 사람이 비록 병이 발작하지 아니한 때일지라도 역시 귀신 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귀신에게 홀려 있는지라 기회만 있으면 도로 발작하게 되므로 병이 들렸다고 말한다.
또 즐거운 느낌은 바로 이것이 기쁨이지만 다만 서로 다르게 말할 뿐이며,
또는 편안함으로부터 구별하여 즐거움이라 한다.
마치 경전 중에서
“몸이 편안하게 될 때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함과 같다.
[문] 만일 그렇다면 초선은 무엇 때문에 다섯 가닥이라 말하는가?
[답] 때에 따라 다섯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치 일곱 가지 각의가 시절을 만나기 때문에 열넷의 각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안에서는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몸의 편안함이 없다.
다만 마음의 즐거움 때문에 몸까지도 즐거움을 느낄 뿐이니 기쁨 또한 그와 같아서 처음부터 몸에 있음을 기쁨이라 한다.
즐거움은 기쁨을 얻을 때의 모습이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며 그 뒤에는 기쁨이라고만 말하는 것이니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따로 편안한 법이 없다. 다만 기쁨이 생길 때에 몸과 마음의 거칠고 묵직한 법이 없고 부드럽고 알맞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할 뿐이다.
마치 병은 네 가지 요소가 없어지고 병 없는 네 가지의 요소가 생기면 이 사람을 즐겁다고 말하는 것처럼 편안함도 그와 같다.
또 제거하여 없애는 가운데서도 또한 편안하다고 한다.
경전 중에서
“모든 법은 차례로 사라지는 것이니, 마치 초선에 들면 언어가 사라지고 생각 끊는 선정에까지 들어가면 모든 생각과 느낌이 사라짐과 같다”고 말함과 같다.
그러므로 편안함의 법은 따로 없다.
만일 “초선이 거친 생각이거나 세밀한 생각과 서로 응한다”고 말하면 그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 말하기를 “수행하는 이가 만일 초선에 들면 언어가 사라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니,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은 바로 언어의 원인이거늘 어떻게 언어의 인이 있으면서 언어가 사라지겠는가?
만일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그대로 있는데도 언어만이 사라졌다고 말하면 사람이 욕심 세계의 마음에 있으면서 말하지 아니할 때에도 또한 언어가 사라졌다고 하리라.
[문] 만일 초선 안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없다면 응당 거룩하게 잠잠함이라 해야 할 터인데도 부처님은 2선만을 거룩하게 잠잠함이라 말씀하셨고 초선에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초선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는 줄을 알 것이다.
[답]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에 가깝기 때문에 잠잠함이라 말씀한 것이 아니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과 서로 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았다.
또 경전 중에서
“초선에는 음성의 가시가 있기 때문에 잠잠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 초선에는 무엇 때문에 음성을 가시라 하는가?
[답] 초선은 선정에 머무르되 마음이 약한지라 마치 꽃 위의 물과 같고
제2선 등에서 선정에 머무르되 마음이 강한지라 마치 칠을 나무에 칠하는 것과 같다.
또 닿임[觸]등도 초선의 가시라 한다. 닿임은 초선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2선 등은 그렇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초선 중에서는 모든 식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며
제2선 등에서 다섯 가지 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12.12. 이선품(二禪品)
모든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없애고 안으로 깨끗한 마음 하나뿐이어서 거친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으며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이 있는 제2선에 들게 된다.
[문] 만일 제2선에서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없앤다 하면 초선에는 반드시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었고 2선과 같은 데서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3선에서는 기쁨을 없앤다고 말하여야 한다.
[답] 초선(初禪) 가운데서는 고통의 뿌리가 없어도 고통의 뿌리를 말함과 같이 제2선에서의 없앤다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 초선 중에는 고통의 뿌리가 없다하더라도 모든 식(識)은 있으며, 모든 식은 그것이 고통의 뿌리에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초선에서는 고통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답] 초선 중에 모든 식이 있기는 하지만 고통의 뿌리에 의지할 바는 아니다.
[문] 다섯 가지 식의 성품은 바로 고통의 뿌리에 의지할 바이다. 성품이 동일하기 때문에 초선에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답] 만일 그렇다면 근심의 뿌리도 의식(意識)의 성품에서 생기기 때문에 모든 곳에 다 있어야 한다.
[문] 지금 무엇 때문에 2선 중에서는 고통의 뿌리는 없어진다고 말하는가?
[답] 초선은 일정하지 않은 마음에 가깝다.
일정하지 않은 마음은 욕심 세계 매임[繫]의 모든 식을 내고 그 가운데서 고통의 뿌리를 낸다.
그러므로 초선에서는 고통이 없어진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초선은 역시 근심의 뿌리에도 가깝다. 이 근심의 뿌리 또한 제2선에서나 제3선에서 없어진다고 말해야 하리라.
[답] 욕심에 의지한 근심의 뿌리는 욕심에 의지한 기쁨에서 생기는지라 깨끗한 기쁨을 얻으면 깨끗하지 못한 기쁨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초선 중에는 근심의 뿌리가 없는 것이니, 일정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고통의 뿌리를 내기 때문이다.
초선은 산란한 마음에 가깝기 때문에 없어진다고는 하지 않는다.
또 3선에서는 고통이 없지만 또한 고락(苦樂)을 끊기 때문에 제4선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 일도 역시 그러하다.
또 수행하는 이는 초선 중에서는 선정이 아직 구족하지 못하여서 항상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의 어지러움을 받기 때문에 2선에서 모든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없앤다고 말한다.
안이 깨끗하다 함은 2선은 마음을 껴잡음이 깊기 때문에 산란은 언제나 들어갈 수 없어서 산란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안이 깨끗하다고 한다.
이 2선의 자체는 한 마음일 뿐이다.
거친 생각도 세밀한 생각도 없다는 것은 한 마음이란 말로서 마음은 하나의 도만을 수행하는지라 또한 선정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곧 안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 깊은 선정을 얻기 때문에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생기지 않은 것이 마치 초선에서 심수(心數)가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에 있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거친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다고 말한다.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이라 함은 초선은 욕심을 여의는지라 기쁨을 얻지만 이 가운데서는 선정이 성취되기 때문에 기쁨을 얻는다. 그러므로 선정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문] 초선 안에서의 기쁨과 2선에서의 기쁨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초선에서는 근심[憂]을 없앰으로써 기쁘지만 2선에서는 고통을 없애기 때문에 기쁘다.
또 초선 중에서의 기쁨은 깨끗하지 못한 기쁨과는 어긋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요,
2선 중에서의 기쁨은 깨끗한 기쁨에 어긋나기 때문에 얻어진다.
다 같이 욕망의 인연 때문에 기쁘면서도 초선의 기쁨은 연약하다.
[문] 이와 같은 이치는 샘이 있는 것인가, 샘이 없는 것인가?
[답] 모두 샘이 있는 것이다.
나라는 마음이 있으면 기쁨이 있으며,
만일 샘이 없는 마음이라면 나라는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기쁨도 없게 된다.
[문] 샘이 없다하여 기쁨이 없다는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부처님은 7각(覺) 가운데서 희각분(喜覺分)을 말씀하셨다. 각분 이것은 샘이 없음 뿐이다. 그러므로 샘 없음의 기쁨인 줄 알 것이다.
또 경전 중에서
“마음이 기쁜 사람은 몸이 편안하여지고, 몸이 편안하여지면 곧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만일 샘이 없음의 기쁨이 없다면 역시 샘이 없음의 편안함과 즐거움도 없어야 한다.
또 부처님은 여러 스님이 착한 법을 철저히 실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기쁜 마음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알아라. 샘 없음의 기쁨이 있다.
[답] 그대는 일곱 가지 각분으로 샘 없음의 기쁨으로 증명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각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샘이 있는 것과 샘이 없는 것이다.
경전 중에는
“수행하는 이는 법을 들을 때에 다섯 가지 덮개를 끊고 일곱 가지 각분을 닦는다”고 함과 같다.
또 깨달음을 무학의 지혜[無學智]라 한다. 만일 깨닫기 위하여 부정(不淨) 등의 법을 관하면 모두 각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샘이 없음의 편안함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먼저 기쁨을 낸 다음에 샘 없음을 얻는 것이니, 그것은 사실대로의 지견이다.
또 온갖 편안함은 다 기쁨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2선천 이상에는 기쁨은 없어도 편안한 것만은 역시 있는 것과 같다.
또 우리들은 지혜를 떠나서 따로 느낌의 법[受法]이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이 샘 없는 지혜는 처음부터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여 즐거움이라 한다. 그러므로 샘 없는 즐거움이 있되 다만 기쁨으로 인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 경전 중에서
“몸과 마음의 거칠고 묵직함을 없애면 편안하다고 한다”고 하였다.
샘이 없음을 얻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알맞고 편하여진다. 그러므로 샘 없는 편안함이 있다.
또 부처님은 항상 평등한 마음을 실천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도 기쁨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은 당연히 밝혀야 하리라.
또 만일 누구라도 나와 내것이라는 것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만일 아라한에게 기쁨이 있다하면 근심도 있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근심이 없다. 그러므로 기쁨도 없는 줄 알 것이다.
[문] 초선과 2선에는 기쁨은 있어도 근심은 없는 것과 같이 아라한도 그렇다.
기쁨은 있고 근심은 없다한들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답] 모든 선정 중에 근심이 있다 함은 뿌리[根]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중에서와 같다.
근심과 기쁨은 유정천(有頂天)에까지 가도록 있으며 고통과 쾌락은 몸이 있음에 따라서 4선천까지 있게 된다.
또 3선 중에 들어가면 기쁨을 여의고 평등한 마음을 행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샘이 없음의 기쁨은 없다.
만일 있다 하면 무엇 때문에 여읜다고 말할 것인가?
또 샘이 없는 마음에는 기쁨이 있지 않아야 한다. 기쁨은 모두가 붙인 이름의 망상 분별에 의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초선이나 2선에서는 샘 없는 느낌이 없으리라.
경전 중에서
“초선과 2선에서는 기쁨만이 있고 아직 즐거운 마음은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지금 기쁨조차 없다면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답] 이 기쁨과 여읨의 기쁨 등에는 샘 없는 선정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다른 경전에서 샘 없는 선정을 말씀한 것이 있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과 어떤 인연으로 초선에 들되 그 모습이나 그 인연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초선 중의 모든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식[色受想行識]은 마치 앓는 것과 같고 부스럼 같으며, 내지 나가 없다고 관찰할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질병과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아서 아프고 괴롭다는 이 네 가지는 바로 세간의 행으로서 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 경전을 끌어다 증거를 삼아도 샘 없음을 성립시키기는 불가능하다.
[답] 이 네 가지 행은 모두 고통에 대한 별명이다. 그러므로 샘이 없다[無漏]고 한다.
[문] 배우는 이에게도 샘 없는 기쁨이 없는가?
[답] 만일 도를 닦는 마음 가운데 있으면 그 때에는 기쁨이 없으나, 세속에 있으면 기쁨이 있다.
배울 것 없는 이에게는 언제나 없다.
[문] 경전 중에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써 네 가지 진리를 얻는다”고 하였거니
어찌하여 샘 없는 기쁨이 없다 하는가?
[답] 나라는 마음이 없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한다.
수행하는 이는 나 없는 마음을 얻어서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고 진실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쾌락한 것이요, 따로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경전에서는 기쁨으로써 진실한 지혜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밝혔으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12.13. 삼선품(三禪品)
기쁨을 여의고[離喜] 버림[捨]을 행하며 생각[憶念]과 개운한 지혜[安慧]로 몸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 즐거움[樂]은 성인도 “또한 버림과 생각과 즐거움을 행하는 것으로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기쁨을 여의는가?
[답] 수행하는 이가 기쁨에 떠다니게 됨을 보기 때문에 여의는 것이다.
또 이 기쁨은 망상의 분별로부터 생기는 지라 기쁨은 유동하는 모습이어서 처음부터 고통이 항상 붙따르게 된다. 이 때문에 여읜다.
또 수행하는 이는 고요히 사라짐의 3선을 얻기 때문에 2선을 버린다.
또 기쁨으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얕지만 기쁨을 여의는 데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깊다.
마치 사람이 처자(妻子)들에게 항상 기뻐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니, 기쁨이란 망상의 분별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망상의 분별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지닐 수 있으며,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러하여 기쁨이 처음 생길 때에는 즐겁게 여기다가 나중에는 싫증내어 여읜다.
[문] 사람이 더위에 시달리면 시원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듯 수행하는 이는 어느 고통에도 시달리게 되기 때문에 3선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답] 2선 안의 기쁨은 바로 유동하는 모습을 일으키어 마치 가시에 찔리는 것과 같은지라
수행하는 이는 이 기쁨에 시달림을 받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선정 중에서 즐거운 마음을 내게 된다.
[문] 더위의 고통이 있으면 시원한 것으로 쾌락을 삼다가도 만일 더위를 떠나게 되면 시원함은 쾌락이 아니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기쁨을 여읜다면 무엇 때문에 3선 중에서 오히려 즐거운 마음을 내는가?
[답] 즐거움을 내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혹은 고통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더위의 고통이 있으면 시원한 것으로 쾌락을 삼는 것과 같다.
혹은 고통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마치 원수를 여윔과 같다.
부처님이 구사미(拘舍彌)의 비구들을 여의고 떠나면서 “나는 안락하다”고 말씀함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렇다.
동요되는 생각을 여의게 되기 때문에 2선에서 즐거움을 내는 것이니, 마치 다섯 가지 욕심을 여의기 때문에 초선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버림[捨]을 행한다 함은 기쁨을 여읨으로서 마음은 고요히 사라짐을 얻는다.
수행하는 이는 먼저 기쁨 마음에 깊이 집착하여 많이 산란하였지만 이제 그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그 마음은 고요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버림을 행한다고 말한다.
생각함이 있고 개운한 지혜라 함은 기쁨의 허물 안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항상 갖추어져 있어서 기쁨이 와서 파괴하지 못하게 한다.
또 생각함이라 함은 선행을 생각함이요,
개운한 지혜라 함은 기쁨 중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함은 기쁨을 여의고서 버림을 행하는 일이니, 버림이 바로 즐거움이라. 동요와 구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은 망상의 분별로부터 생기지 아니하므로 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성인도 또한 버린다 함은 세상 사람에 따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한다.
마치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곳의 마음은 탐착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이라 하는 것과 같다.
생각이 있고 즐거움을 행한다 함은 이 사람은 버림을 아는 것이니, 기쁨의 허물을 보고 싫증을 내기 때문에 미묘한 버림을 얻는다.
또 생각함 역시 미묘한 것이니, 기쁨의 허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역시 개운한 지혜를 설명해야 할 터이나, 생각과 함께 행하기 때문에 설명하지 아니한다.
즐거움이라 함은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성인도 좋아하고 또한 버린다.
[문] 3선 중에서는 즐거움의 느낌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버림의 즐거움을 말하는가?
[답] 나의 이 논(論) 안에서는 느낌을 여의고 따로 버림의 즐거움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느끼는 바로 이것이 버림의 즐거움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제4선 중에도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을 말해야 하리니, 버림이 있기 때문이다.
[답] 나는 4선에도 즐거움을 느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만 제3선의 즐거움을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말한다.
[문] 만일 다 같이 즐거움을 느낀다 하면 어찌하여 초선과 2선에서는 기쁨이라 하고 3선에서만 즐거움이라 하는가?
[답] 생각하는 분별 때문에 기쁨이라 하고, 생각하는 분별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며, 수행하는 이가 제3선에서는 마음을 더욱 껴잡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분별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한다.
또 3선을 얻으면 고요히 사라짐은 더욱 더 깊어지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동요와 구하는 마음을 말하여 성인은 고통이라고 함과 같다. 동요란 분별을 말함이니, 그것이 곧 즐거움이다.
12.14. 사선품(四禪品)
고통과 쾌락을 끊어 없애고 먼저 근심과 기쁨을 없애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아니하여 버림과 생각이 청정[捨念淸淨]하여지면 제4선에 들게 된다.
[문] 만일 먼저 고통을 끊었다면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 말할 필요가 있으며 만일 반드시 말하려 하면 먼저 끊었다고 할 것이다.
마치 먼저 근심과 기쁨을 끊었다는 말을 함과 같다.
[답] 4선을 부동(不動)이라고 부른다. 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성취하려 하기 때문에, 네 가지 느낌이 없음을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움직임이란 발동을 말한다.
수행하는 이가 고통과 쾌락의 침해를 받으면 마음이 흔들리며, 마음이 흔들리면 탐냄과 성냄을 내기 때문에 괴로움 즐거움을 끊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제4선에서 이익을 느끼는 것이 제일 크다면 무엇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지 않는가?
[답] 이 느낌이 고요히 사라지기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고 말한다.
마음의 생각함에 따라 그것이 즐거운 줄을 알게 되면 즐거움이라고 한다.
제4선을 얻으면 제3선의 즐거움을 여의게 되기 때문에 즐겁다고 여기지 아니한다.
버림과 생각이 청정하다 함은 이 안에서는 버림이 청정한 것이니, 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3선에서는 구하는 것이 있으면서 그것을 즐겁다고 말한다.
또 이선 중에서는 생각도 청정하다. 왜냐하면 3선 가운데서는 즐거움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각이 산란하지만 제4선 안에 이르면 쾌락을 탐내는 일이 끊어지기 때문에 생각이 청정하다.
[문] 무슨 까닭에 4선에서는 개운한 지혜를 말하지 않는가?
[답] 만일 생각이 청정하다고 말하면 이미 개운한 지혜를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 법은 서로 떠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선정의 도로서 지혜의 도가 아니다.
개운한 지혜는 바로 지혜이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한다.
제3선의 마지막 부분 중에서도 역시 개운한 지혜를 말하지 않고 다만 행사(行捨)의 생각의 즐거움만 말할 뿐이고 행사의 생각과 지혜의 즐거움을 말하지 않았다.
또 이 생각은 선정을 성취하는 것이어서 만일 사람이 선정이 아직 성취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생각을 붙잡는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까닭에 특별히 말한다.
또 높은 공덕을 얻으며 낮은 공덕을 버리는 것이라 깊이 생각해 볼만한 필요도 없기 때문에 지혜를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문] 괴롭지도 아니한 느낌은 바로 무명의 갈래인지라 4선 중에서는 대부분이 지혜와 어긋나기 때문에 지혜를 말하지 않았다.
[답] 만일 그렇다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느낌은 샘 없는 것[無漏]이 되지 않아야 된다.
즐거운 느낌은 바로 탐냄의 갈래이기 때문에 역시 샘 없는 것은 없다.
[문] 3선 중에서는 자기의 경지(境地)에 틀리는 허물 때문에 개운한 지혜를 말하고 남의 경지에 틀리는 허물 때문에 생각함을 말하였으나 4선에서는 자신의 경지에 이와 같은 허물이 없기 때문에 개운한 지혜를 말하지 아니한다.
[답] 4선에서도 탐냄 등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개운한 지혜를 말해야 한다.
이 중의 탐냄의 허물은 미세하여서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설명해야 하고, 그 밖의 경전 중에서도 설명해야 하는데도 설명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나의 대답과 같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4선에서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끊어지는가?
[답] 숨은 몸과 마음에 의지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마음이 미세해질 때에는 숨을 쉬는 것도 미세하여지기 때문이다. 4선에서는 마음은 동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이 없어진다.
또 사람이 몹시 지치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산에 오를 적에는 숨 쉬는 것이 거칠다가도 쉴 때에는 숨이 미세한 것처럼 4선도 그러하여 동요하는 현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이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이가 4선천의 네 가지 요소를 얻기 때문에 몸의 모든 털구멍이 메워진다. 그러므로 숨이 없어진다”고 말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음식의 액체는 흘러 퍼져서 온몸에 가득 차게 된다.
만일 모든 털구멍이 메워졌을 때에는 작용을 할 수 없을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알아라. 4선의 마음과 힘이 숨을 없어지게 한다.
[문] 4선의 가운데는 즐거운 느낌이 없다. 이 안에 어떠한 애욕의 번뇌가 있겠는가?
경전 중에서는 “즐거운 느낌 안에서의 애욕의 번뇌”를 말하였다.
[답] 이 안에는 미세한 즐거운 느낌이 있다. 다만 거친 쾌락을 끊었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말할 뿐이나, 마치 바람이 등불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만약 밀실(密室)에다 놓아둔다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나, 그 속에도 반드시 미미한 바람은 있다.
다만 거친 바람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 4선도 그러하여 반드시 미세한 즐거움은 있으나 거친 고락을 끊었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