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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7권
변연기품 ⑦
3.4. 3제(際)에 걸쳐 12연기를 설한 이유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연유에서 3제(際)에 걸쳐 연기의 지분[支]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제와 후제와 중제에 걸친
다른 이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네.
논하여 말하겠다.
12지는 유정수(有情數)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으로, 3제(際)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愚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70)
그들이 3제에 대해 어리석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何等]로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云何]으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71) 나는 미래세에 마땅히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로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현재세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러한 나는 어떻게(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무엇)의 소유이며, 나는 당래 누구(무엇)를 소유할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경에서는 오로지 유정의 연기를 설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3제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무명과 행(전제), 생과 노사(후제), 그리고 ‘식’에서부터 ‘수’에 이르기까지(중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만약 어떤 필추(苾芻)가 온갖 연기(緣起)와 연이생(緣已生)의 법에 대해 참답고 올바른 지혜로써 능히 관찰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3제에 대해 어리석고 미혹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2)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애(愛)ㆍ취(取)ㆍ유(有)의 세 지분 역시 또한 다른 이의 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니, 이 세 지분은 다 후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73)
[그렇다면] 그는 역시 마땅히 “‘식’ 내지 ‘수’ 역시 다른 이의 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다섯 지분은 다 전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중제[의 연기]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바로 계경에 어긋나게 된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마땅히 [애ㆍ취ㆍ유의 경우만이 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는] 차별적인 이유를 시설해야 한다. 그렇지만 능히 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앞의 논설이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28권
변연기품 ⑧
3.5. 3세 양중(兩重)의 인과관계
1) 혹(惑)ㆍ업(業)ㆍ사(事)의 분별
이와 같이 3제(際)에 걸친 유정수의 연기 중에 비록 12지(支)가 있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세 가지와 두 가지를 자성으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세 가지란 혹(惑,kleśa)ㆍ업(業,karma)ㆍ사(事,vastu)를 말하고, 두 가지란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그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는 번뇌이고, 두 가지는 업이며
일곱 가지는 사(事)이나 역시 결과로도 일컬어지는데
[전ㆍ후제에서] 결과를 생략하고 아울러 원인을 생략한 것은
중제에 의해 그 두 가지를 추리할 수 있기 때문이네.
논하여 말하겠다.
전제(前際)의 원인인 무명(無明)과 후제의 원인이 되는 애(愛)와 취(取), 이와 같은 세 종류는 번뇌를 자성으로 한다. 전제의 원인인 행(行)과 후제의 원인이 되는 유(有), 이와 같은 두 종류는 업을 자성으로 한다. 그리고 전제의 식(識) 등의 5지(支)와 후제의 생ㆍ노사,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사(事)라고 이름하니, 혹과 업의 소의(所依)이기 때문이다.1)
나아가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또한 역시 결과로도 일컬어지며, 이에 준하여 볼 때 나머지 다섯 가지 역시 원인으로 일컬어지니, 번뇌와 업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중제에서는 널리 결과와 원인을 설하였으면서 후제에는 간략히 결과만을 [설하고], 전제에는 간략히 원인만을 [설한] 것인가?2)
중제는 알기 쉽기 때문에 널리 두 가지를 설한 것이지만, 전제와 후제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각기 생략하여 한 가지만을 설하였다. 즉 중제에 의해 전ㆍ후의 두 제의 [인과를] 추리하면 이미 널리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설해 보았자 [번거롭기만 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3)
어떠한 까닭에서 [후제의 원인이 되는 번뇌로서] ‘애’와 ‘취’의 두 지분을 별도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초 찰나[初念]의 애[탐]를 ‘애’라는 말로 설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상속 증광하여 치성(熾盛)하게 된 것을 ‘취’라는 말로 설정한 것이라고 [인정하니], 상속하면 경계대상을 취하는 것이 더욱 강력[堅猛]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세 지분을 [일] 찰나로 설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두 지분만이 찰나성이라고 말한 것인가?4)
이러한 과실은 없으니, 각각의 경계대상에 대한 각기 일 찰나의 [‘애’가] 화합하여 다 [찰나의 ‘애’(즉 취)]가 되기 때문이다.5) 그러나 바로 결생하려고 하는 상태는 오로지 일 찰나일 뿐이니, 어떤 하나의 소의신 중에서 다시 결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으로, 그래서 ‘생’과 ‘식’에 대해서만 유독 [일] 찰나로 설하게 된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현재는 온갖 번뇌가 존재하는 상태임에도 ‘애’ 한 가지로만 설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인가?
‘애’라고 할 경우, ‘애’의 미(味)와 과환(過患)을 알기 쉽지만, 그 밖의 다른 번뇌 중에서 이러한 상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애’는 바로 능히 후유를 초래하는 뛰어난 원인으로, 세존께서는 그것의 과환을 알게 하기 위해 [‘애’] 한 가지로만 설하였던 것이니,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대치의 도를 부지런히 추구하도록 하였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애’의 [초] 찰나와 [그것의] 상속(즉 ‘취’)이라는 두 상태의 차별로만 설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6)
[이러한 사실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의 번뇌가 처음으로 경계대상을 반연할 때를 설하여 ‘애’라고 하며, 그 후 증광(增廣)하는 상태를 설하여 ‘취’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비록 ‘업은 애를 원인으로 하며, 애는 무명을 원인으로 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실로 업의 원인은 일체의 번뇌와 통하며, 일체의 번뇌는 모두 다 무명을 원인으로 한다. 따라서 ‘애’라는 말은 온갖 혹(惑)을 전체적으로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과환(過患)을 전체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 ‘애’라는 말로써 온갖 번뇌를 설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았으니, 생을 초래하는 [힘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애’라는 말은 오로지 ‘애’ 자체를 말한 것이니, 다 [찰나]에 현행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애’를 분별함에 있어 [초] 찰나와 [그것의] 상속으로 차별하여 분별하였던 것이다”고 하였다. 비록 여기에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앞의 설이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혹ㆍ업ㆍ사의 상생(相生) 관계
만약 이러한 연기의 지분으로 오로지 열두 가지만이 존재한다면, 노사에 더 이상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치도를 닦지 않고서도 생사에 끝이 있어야 할 것이며, 무명에 더 이상 원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무명이 바로 시초이기 때문에 생사에 시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무시무종이라 한다면)] 마땅히 그 밖의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설정해야 할 것이며, 다른 연기의 지분에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무한소급[無窮]의 허물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부처님의 성교 또한 마땅히 훼손[缺減]되고 말 것이니, 응당 그와 같은 사실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그렇지가 않으니, [세존께서] 설한 연기의 이치를 아직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惑)’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사’(事)가 생겨나며
‘사’로부터 ‘사’와 ‘혹’이 생겨나니
존재 지분에 관한 이치는 오로지 이것뿐이라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존재지분[有支]의 수(즉 12가지)가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아울러 업(業)과 혹(惑)은 혹 어떤 경우에는 함께, 혹 어떤 경우에는 뒤에 생겨남을 나타내니, 이는 바로 혹이 혹을 낳을 때 업도 함께 생겨나거나 혹은 뒤에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존재의 지분을 모두 포섭하였으니, 앞에서 설한 힐난은 이미 잘 회통된 셈이다.
“혹(惑)으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애’로부터 ‘취’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혹으로부터 업이 생겨난다’고 함은 ‘취’로부터 ‘유’가 생겨나고, ‘무명’으로부터 ‘행’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업(業)으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행’으로부터 ‘식’이 생겨나고, 아울러 ‘유’로부터 ‘생’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사(事)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식’의 지분으로부터 ‘명색’이 생겨나고, 내지는 ‘촉’으로부터 ‘수’의 지분이 생겨나며, 아울러 ‘생’으로부터 ‘노사’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수’로부터 ‘애’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지분을 설정하는 이치는 오로지 이 같은 사실에 따른 것으로, 노사(즉 事)는 ‘사’와 ‘혹’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이미 성취되었으니, 노사는 바로 현재의 4지(명색ㆍ6처ㆍ촉ㆍ수)와 같기 때문이며, 아울러 무명(즉 惑)이 ‘사’와 ‘혹’의 결과라는 사실도 성취되었으니, 무명은 바로 현재의 ‘애’ ‘취’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일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7)
| 순환 단계 (게송 대응) | 상생 관계 (원인→결과) | 12연기 지분의 구체적 적용 예시 | 설명 |
| ① 혹(惑)→혹(惑) | 미혹이 미혹을 낳음 | • 애(愛)→취(取) | 번뇌(애착)가 더 깊은 번뇌(집착)를 불러일으킴 |
| ② 혹(惑)→업(業) | 미혹이 업을 낳음 | • 무명(無明)→행(行) • 취(取)→유(有) | 미혹에 바탕을 두어 업(행위·존재의 잠재력)을 지음 |
| ③ 업(業)→사(事) | 업이 과보(현상)를 낳음 | • 행(行)→식(識) • 유(有)→생(生) | 지어진 업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의 결과(사, 5온의 현상)가 나타남 |
| ④ 사(事)→사(事) | 과보가 또 다른 과보를 낳음 | • 식→명색→수 • 생(生)→노사(老死) | 과보로 받은 몸과 마음 안에서 감각과 현상들이 전개됨 |
| ⑤ 사(事)→혹(惑) | 과보가 다시 미혹을 낳음 | • 수(受)→애(愛) | 감각(고·락 등)을 겪으면서 다시 새로운 번뇌(갈애)가 일어남 |
그래서 경에서도 “이와 같이 순대고온(純大苦蘊)이 집기(集起)하였다”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는 바로 전후의 2제(際)는 서로를 발현(發顯)시킨다는 의미이다.8)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노사와 무명은 결과를 갖지 않고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유종(有終) 유시(有始)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는 결정코 인과를 포섭한다는 뜻이 두루 담겨있어 더 이상 [연기의] 지분을 설정하여 무한소급의 허물을 성취하는 일이 없으며, 부처님께서 두루 설하신 인과를 유실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성교를 훼손하는 과실도 없는 것이다.
(1) ‘노사’의 결과와 ‘무명’의 원인에 관한 상좌와 경주설 비판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또 다른 계경에서는 ‘비리작의(非理作意)가 무명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으며,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고도 하였다. 나아가 비리작의는 촉(觸)의 순간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이 연(緣)이 되어 우치[癡]에서 생겨나는 염탁(染濁)의 작의(作意)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염탁작의)은 수(受)의 단계에서 반드시 무명을 인기한다. 그래서 또 다른 경에서는 ‘무명촉에 의해 생겨난 온갖 수를 연으로 하여 애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촉의 순간에 존재하는 비리작의는 ‘수’와 함께 전전(展轉)하며, 무명의 연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명에는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과실이 없으며, 또한 역시 [그것의 원인을 제시하기 위해]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세울 필요도 없다. 또한 그에 따라 끊임없이 연기의 지분을 세워나가야 하는 무한소급의 과실도 없으니, 비리작의는 우치(즉 무명)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안과 색이 연이 되어 우치에서 생겨나는 염탁의 작의를 낳는다’고 설한 바와 같다.”9)
그 밖의 다른 경에서 비록 이와 같은 진실한 말씀(비리작의에 의해 무명이 생겨나고,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을 설하고 있을지라도 이 경(『대연기경』) 중에서 설해진 내용에 대해서도 마땅히 다시 설해보아야 할 것이다.10)
만약 이치[理, 즉 正理]에 의해서도 [입증되기] 때문에 [더 이상] 논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성취될 수 있다고 한다면,11) 일체의 [연기] 지분에 대해서도 모두 마땅히 [경문을 인용하여] 논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치상으로 그럴 수 있기에 경문(經文)에서는 다만 간략히 나타내었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 경이 요의경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니, 이 경문은 이치를 모두 드러내지 않은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며, 지자(智者)는 무릇 존재하는 온갖 이치를 모두 드러내지 않은 경문을 비요의경(非了義經)으로 판별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이치상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였으니, 이 경문을 언급[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경문은] 바로 [연기] 지분의 명칭이 수승한 것에 따라 설정된 것임을 입증한다. 바야흐로 이 경(『대연기경』)에서는 비록 ‘6처를 연하여 촉이 있다’고 말하고 있을지라도, 상좌 역시 계경에서 “안(眼)과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과 염탁의 작의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식을 연으로 하여 작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즉 비록 6처를 연하여 역시 식 등을 낳을지라도, 이 경에서는 다만 ‘6처를 연하여 촉이 있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촉의 연은 오로지 6처만이 아니다. 다만 6처의 단계에서는 6처가 가장 강성하고, 촉의 단계에서는 촉이 가장 수승하니, [계경에서는]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말한 것일 뿐으로,12) 그 밖의 다른 지분에 대해서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노사와 무명의 결과와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3)
“경에서 ‘노사에 결과가 있고 무명에 원인이 있다’고 별도로 설하지 않았다고 해서 생사[의 연기]에 끝이 있고[有終] 시작이 있다[有始]고 한다면,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경의 뜻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앞에서 설한 이치가 원만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경에서는 다만 교화될 자의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고자 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 즉 교화될 자들은 오로지 ‘유정은 어떠한 방식[云何]으로 3세에 걸쳐 연속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떠한 방식으로] 전세로부터 금세에 태어날 수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금세로부터 다시 능히 후세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이 같은 의심을 낳기 때문에 여래는 다만 그들의 의심을 제거해 주기 위해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12지의 연기를 설하였던 것이니, 말하자면 그것은 ‘전제와 후제와 중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14)”
여기서 [그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보건대, 경주는 진실로 비바사(毘婆沙)의 종의를 어기고 배반하고자 하여 자신이 애써 지은 것으로서 [다른 이의] 의심과 힐난에 대해 참답게 해석해 보아야 할 이른바 ‘혹(惑)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난다’는 등의 본송을 버리고서 ‘[경에서] 말한바는 능히 다른 이의 힐난(즉 有終有始의 과실이 있다는 힐난)을 면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해석을 자세히 살펴 보건대 힐난을 면할 수 없으니, 비록 3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연기의 교설을 설하였다고 할지라도 ‘노사에 결과가 있고 무명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하지 않았다. [무명] 이전의 원인과 [노사] 이후의 결과가 서로 연속한다는 뜻을 알지 못하였다면, 교화될 모든 이들이 능히 전ㆍ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이미 제거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교화될 유정들은 중간(즉 현생)의 온갖 단계(‘식’ 내지 ‘유’)에 대해서도 무명과 노사의 경우처럼 원인과 결과가 다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의 단(斷)ㆍ상(常)의 2견을 서로 교차하여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어찌 과거세[前世]로부터 현재세[今世]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 것이며, 아울러 현재세로부터 미래세[後世]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것인가?
경에서는 이미 ‘노사와 무명에 결과가 있고 원인이 있어 연속하여 단절됨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교화될 이들은 결정코 그 밖의 중간의 지분 역시 무명과 노사의 경우처럼 원인과 결과가 다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그런즉 연기의 교설은 다른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데, 어찌 3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경주는] 힐난한 바에 대해 능히 달통하지 못하였으며, 애석하게도 자신이 애써 지은 본송마저 버렸던 것이다.
[노사의 결과와 무명의 원인에 관한] 힐난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3.6. 연기법과 연이생법(緣已生法)
세존께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연기법(緣起法)과 연이생법(緣已生法)에 대해 설하리라”고 하였다.15)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먼저 본론(本論)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일체의 유위[법]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말하기를 “무엇이 이미 생겨난 법[已生法]인가? 말하자면 과거ㆍ현재[법]이다”고 하였다.16) 즉 이러한 ‘이미 생겨난 법’은 필시 마땅히 연(緣)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오로지 과거ㆍ현재[법]을 연이생법이라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연기[법]은 또한 역시 미래에도 존재한다고 해야 하니, 미래에 머무는 법이 바로 일어나는 법[起法]이기 때문이다.
어찌 본론에서는 역시 이 같이 말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일체의 유위[법]을 역시 연이생법이라 이름한다”고.17)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연에 의해 이미 생겨난 온[緣已生蘊]은 과거와 현재의 일체 유위[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생겨난 것이 아닌 법을 설하여 ‘이미 생겨난 것[已生]’이라고 하는 것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을뿐더러 이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다시 말해 일체 유위법을 연이생법이라고 할 경우)] 미래법도 역시 ‘일어난 것[起]’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유위상과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이치로 인해 앞에서 이미 “이는 바로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에 연기[법]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래법은 ‘이미 생겨난 것’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마치 현재와 미래의 법을 ‘이미 소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이는 바로 ‘소멸하는 법[滅法]’이기 때문에 역시 ‘소멸하는 것[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래 존재할 것[當有]이라는 뜻에 근거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未已生法]에 대해서도 역시 ‘이미 생겨난 것[已生]’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래서 세간에서는 ‘끈이나 밧줄을 만든다’ ‘반지를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며, 외도의 논[外論]에서도 역시 ‘불에 대해 제사를 지냄으로써 남자를 추구하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18)
이는 성교와 정리에 위배되니, 설한 바와 같다고 한다면, 이미 소멸한 것이 아닌 법을 어떻게 현재ㆍ미래법이나 무위법이라 말한다고 하겠는가?19) 만약 미래[법]의 경우 미래[當]에 근거하여 ‘이미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미래와 현재[법]의 경우도 마땅히 [미래에 근거하여] ‘이미 소멸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ㆍ미래법과 같은 것은 바로 ‘소멸하는 법[滅法]’이기 때문에 다만 ‘소멸하는 것[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이미 소멸한 것[已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미래법도 바로 ‘일어날 법[起法]’이기 때문에 다만 ‘일어나는 것[起]’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이미 생겨난 것[已生]’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이와 같다고 할 때 비로소 명목상 이론(즉 正理)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불생법(不生法)의 경우도 그러한 [이치]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그것은 필시 당래(미래) 생겨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미래에 근거하여 역시 ‘이미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그는 이치가 궁하여 세속의 예(끈이나 밧줄)를 인용하여 입증하고자 하였지만, 성교와 정리상의 논거가 있어야 그러한 뜻도 성취될 수 있거늘 어찌 세속의 말로써 현성(賢聖)의 법을 논증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존자 망만(望滿)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법 중에는 연기이면서 연이생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미래법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아라한의 최후심의 상태에서의 과거ㆍ현재의 제법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그 밖의 과거ㆍ현재의 제법이다. 제4구는 말하자면 온갖 무위법이다.”20)
만약 미래법이 연이생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계경에서 설한 바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계경에서는] “무엇을 연이생법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무명과 행 내지 생과 노사이다”고 설하고 있는데,21) 생과 노사는 이미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경에서는 그것을 연이생법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계경에 위배되지 않으니, 바야흐로 마땅히 살펴 알아야 한다. [12연기의] 일체 존재의 지분은 다 유위이기 때문에 각각의 지분은 결정코 3세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무명과 행, 생과 노사가 어떻게 현재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생신(生身)이 전전(展轉)하는 이치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현재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래세의 두 지분(생ㆍ노사)의 생신에 근거하여 현재의 애ㆍ취ㆍ유를 무명과 행이라는 말로 설할 수 있으며, 과거세의 두 지분(무명ㆍ행)의 생신에 근거하여 현재의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를] 생과 노사라는 말로 설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의 네 지분은 모두 다 현재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다.22)
나아가 저 존자(망만)는 다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만약 무명ㆍ행의 두 지분이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밖의 나머지 열 가지 지분은 미래세에 존재하여 여덟 가지 지분(‘식’ 내지 ‘유’)은 무간에 응당 생겨나야 할 것이고, 두 가지 지분(생과 노사)은 세 번째로 응당 생겨나야 한다. 또한 만약 생ㆍ노사의 두 지분이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밖의 나머지 열 가지 지분은 과거세에 존재하여 여덟 가지 지분은 무간에 이미 소멸하였어야 할 것이고, 두 가지 지분(무명과 행)은 세 번째로 이미 소멸하였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12연기의 존재지분은 모두 현재세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생과 노사에 대해서도 역시 ‘이미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따라 [미래법을 연이생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경에 위배되는 과실은 없으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의 법]은 ‘이미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존자가 말한 취지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만약 원인에 따라 이미 일어난 것이면, ‘연이생[법]’이라 이름하지만, 만약 그 밖의 다른 법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이면, ‘연기[법]’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무위법의 경우는 연기[법]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원인으로서의 특성[因相]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으로서의 특성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고 함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무위의 제법이 존재하여 일어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고도 역시 말할 수 없다. 또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생겨나거나 소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그 자체로서 항상 존재하는 것[常有]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무위법은 능히 소연이 될 수 있을뿐더러 [결과가 생겨나는데] 장애하는 일이 없이 머물러 유위법에 대해 능작인(能作因)이 될 수 있을지라도23) 유위법에 대한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힘이 없어 원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여하였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부처님께서도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다 무상하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무명을 연기라 이름하고, 행을 연이생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여 생을 연기라 이름하고, 노사를 연이생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경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니, 계경 중에서는 무명 등을 다 연기와 연이생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명은 오로지 연기라고 이름할 뿐이고, 최후의 노사는 오로지 연이생이라 이름할 뿐이며, 중간의 10지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즉 노사의 단계에서는 결정코 온갖 혹을 낳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노사는 오로지 연이생이라고 이름할 뿐이며, 무명은 결정코 능히 제행(諸行)을 일으키니, 그래서 무명의 단계는 오로지 연기라고 이름할 뿐이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여러 대법자(對法者)는 이와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전제의 두 지분을 설하여 연기라고 이름하니, 이 두 지분을 원인으로서의 존재[因性]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제의 두 단계를 연이생이라 이름하며, 중제의 여덟 지분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설은 다 같이 경설에 따른 것이 아니니, 경에서는 [연기의] 모든 지분은 다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말(연기와 연이생)의 결정적인 뜻을 게송으로 말하면 [이와 같다].
[계경의] 뜻을 바로 설할 것 같으면, 이(12지) 중에서
원인으로서의 상태가 연기이고, 결과로서의 상태가 연이생이라네.
논하여 말하겠다.
[열두 가지의] 온갖 지분[支] 중에서 원인으로서의 상태[因分]를 설하여 ‘연기’라고 이름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을 연(緣)으로 하여 능히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연기를 설하였기 때문이며,24) 이러한 연기의 뜻은 다만 ‘연’이라는 말로써 성립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무엇을 연기라고 한 것인가? 말하자면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아울러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는 것이니, 바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설한 다음 다시 “이러한 [지분] 중의 법성(法性) 내지는 최후의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바로 연기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지분] 중의 법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공능을 갖는 것을 모두 법성이라 이름하였다. 요컨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인과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되는 것이면서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곧 이와 같은 ‘성(性)’이라는 말은 ‘능히 낳는다[能生]’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로지 유위법의 존재[性]만이 이러한 법성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 비록 이 계경 중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존재[因性]를 연기라 이름한다’고 바로 현시하지 않았을지라도 ‘……을 연(緣)하여’라는 말로써 연기의 뜻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원인으로서의 존재가 연기라는 명칭을 획득한 것임을 알아야 하니, ‘연’이라는 말은 다만 ‘능히 드러낸다[能顯]’는 뜻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원인은 능히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연’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아라한의 최후의 심ㆍ심소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이니, 더 이상 드러내어야 할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뜻에 의해 연기라고 하는 말은 결정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설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의 『승의공경(勝義空經)』중에서 “여기서 법가(法假)란, 이를테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음을 말한다”고 설하였으니, 승의(勝義)가 아니기 때문에 ‘가(假)’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이는 바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된다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25)
[열두 가지의] 온갖 지분 중에서 결과로서의 상태[果分]를 설하여 ‘연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 연(緣)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결과란 바로 제법이 성취된 것[成辦]을 말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미 생겨난 법[已生法]은 이러한 뜻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열반의 성취[成辦]도 이미 생겨난 것을 [증]득(證得)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이미 생겨났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결과(즉 이계과)라고 말하는 것이다.26) 혹은 다시 이를 연기의 갈래[門]로 설할 경우, 열반에 대해서는 그러한 논란이 허용되지 않으니,27)―만약 유위법으로서 결과의 뜻이 결정적인 것이라면 이는 바로 이것(즉 연기)에 의해 밝혀진다―예컨대 사문과(沙門果)가 그러하다.
즉 과거ㆍ현재의 온갖 법으로서 결과의 뜻이 결정적인 것을 ‘연이생’이라고 말하지만, 법이 미래에 존재하여 결과의 뜻이 결정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간략히 말하면, 바로 법을 일으키는 존재[性]를 ‘연기’라고 이름하지만, 과거ㆍ현재의 제법은 ‘연이생’이라 이름하니, 결과의 뜻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상태를 ‘연기’라고 이름하였다면, 결정적으로 결과가 되는 것을 ‘연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여기서 원인을 ‘연기’라고 말한 것은 능히 연이 되어 온갖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여기서 결과[果法]를 ‘연이생’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ㆍ현재의 법은 연을 떠나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지분]은 두 가지 뜻(연기와 연이생)을 함께 성취하니, 모든 지분은 다 원인과 결과로서의 성질[因果性]을 갖기 때문이다. 비록 원인과 결과로서의 성질이 실체(實體,즉 법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뜻으로 설정하는 것이 상식에 벗어나지 않으니[非不極成], 보는 관점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28) 이를테면 이것을 보고서 ‘연이생’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를 또한 ‘연기’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이는 비유컨대 원인과 결과나 아버지와 아들 등의 명칭(관계)과도 같다.29)
그런데 이러한 계경의 설에는 은밀한 뜻[密意]이 있지만,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은밀한 뜻을 설하는 일이 없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계경의 은밀한 뜻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생사에는 시작이 없으나 끝은 있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나타내어 이러한 두 가지 문구(즉 연기와 연이생)를 설하였던 것이다. 즉 연기를 말한 것은, 생사의 유전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때로부터 돌고 돌아 중단됨이 없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니, 그래서 순역(順逆)의 온갖 지분이 서로를 낳는다고 설한 것이다. 연이생을 말한 것은, 생사가 만약 대치(對治)를 획득할 경우 끝내 그것을 다하는 시기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니, 이를테면 만약 연(緣)이 있으면 후유는 다시 상속하여 일어날 것이지만, 그 같은 연을 결여할 경우 후유는 더 이상 상속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 이에 따라 경에서는 “괴로움의 끝에 이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에서는 연기를 설하여 ‘이는 바로 가유[假, 즉 法假]이니, [다만] 인과의 상속(相屬)으로, 자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연이생을 설하여 ‘그것의 [법]체는 바로 실유[實]이니, 이는 바로 항아리의 소의(즉 진흙)와 마찬가지로 그것(연기)의 소의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비달마에서는 두 가지 모두를 실유라고 설하니, 원인과 결과의 두 법체는 다같이 실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바사(毘婆沙)의 종의는 계경에서 설한 연기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밝혔다. 경주(經主)는 ‘이는 경[설]에 어긋난다’고 말하였지만,30) 이를 살펴보면 그[師]가 아직 비바사사(毘婆沙師)를 계승하여 품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아직 비바사의 교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혹은 비록 비바사의 글들을 열람하였을지라도 그릇된 집착이 마음을 덮고 있어 정리(正理)를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 유여사의 무위연기(無爲緣起)설 비판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기는 바로 무위법이니, 계경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 걸사(乞士,즉 비구)에게 ‘이와 같은 연기는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이가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혹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든 이와 같은 연기의 법성(法性)은 상주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31)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설할 경우, 이치상으로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이러한 뜻에서 ‘이와 같은 연기는 별도의 지은이[作者]가 없기 때문에 무위라고 설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혹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든 ‘행’ 등은 항상 무명 등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다른 법(예컨대 자재신과 같은 단일한 원인)을 반연하거나, 혹은 또한 어떠한 연도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뿐더러 이와 같은 [연기의] 법성(法性)은 부처님께서 지은 것도 아니며, 다른 이가 지은 것도 아니기에 [경에서는] 그것을 ‘상주하는 것[常]’이라고 설하였던 것으로, 여기에 어떠한 의심도 있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함은 이치상으로도 필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택멸(擇滅) 등의 경우처럼 ‘연기’라고 이름하는 별도의 법을 설하여 이것이 바로 응연(凝然)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무엇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緣起]’을 설하여 ‘그 자체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유여사)가 주장한 무위연기(無爲緣起)는 무명 등[의 지분]과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무명 등[의 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그것(무명 등)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취한 것[攬]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세 가지 주장은 모두 다 이치에 맞지 않으니, [연기가 무명 등과 다른 것이라고 할 경우] 자성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며, [바로 무명 등이라고 할 경우] 무상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32) [그것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마땅히 실유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말한 그대로 경의 뜻을 취할 경우,33) 4대종도 역시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즉 세존께서는 “바로 이러한 4대종을 차라리 변이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지언정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경에서는 그것의 유위상(有爲相)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경의] 이치나 취지를 관찰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4대종을] 바로 무위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든 혹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든 이러한 지(地)ㆍ수(水) 등[의 자성]은 항상 견고성ㆍ습윤성 등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이것들을 다 상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인가?34) 즉 그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은 [상주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연기가 무위라는 주장)는 다만 거친 마음[麤心]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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