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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 서론 (잔 그레스햄 메이천)
본서의 논의의 제목인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들은 믿음이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려질 수 없으며, 믿음이 경험에 의해서만 알려질 때, 믿음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다른 경험들로부터 믿음을 논리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단지 믿음의 능력과 매력을 파괴하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을 통해 아는 사람은, 그의 삶의 기초인 그러한 경험에 대한 심리학적 조사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러한 조사는 조사대상이 된 그것을 파괴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반론들은 단지 오늘날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경향, 즉 종교적 삶에서 지성적인 면을 경시하는 경향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그들은, 종교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그것에 대한 지적 표현은 단지 기호일 수밖에 없고, 종교적 영역에서의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삶에 관한 근본적인 일치와 조화를 이루며, 신학은 다양해도 종교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반론들은 단지 오늘날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경향, 즉 종교적 삶에서 지성적인 면을 경시하는 경향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그들은, 종교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그것에 대한 지적 표현은 단지 기호일 수밖에 없고, 종교적 영역에서의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삶에 관한 근본적인 일치와 조화를 이루며, 신학은 다양해도 종교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그러한 정신 상태는 정확한 개념 정의에 대해 적대적이다. 사실 오늘날 논쟁들 중에서 용어들의 정의를 강조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인기 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다른 것들은 그것보다 더 흔쾌히 용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종교, 기독교, 속죄, 구속, 믿음 등의 주제들에 대해 매우 장황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들이 이 용어들을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간단하게 말해 달라고 하면, 그들은 크게 화를 낸다. 그들은 정의와 같은 그런 세속적인 것에 의해 그들의 말의 거침없는 유창함이 방해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몹시 화를 낼 지도 모른다. 믿음이 지식과 반대된다고 생각하기에, 믿음에 대해 거침없는 찬사 가운데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은 분위기를 깨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세계의 이러한 반지성적 경향은 가볍게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그 경향은 현 시대의 철학적 발전 전체에 깊이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Kant)의 시대 이후, 현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영향을 받아온 신학은 그 지배적인 특성과 분명히 그것의 현대적 결과로서, 이성에 대한 경시와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문제 대해 회의적인 대답을 견지애 오고 있다. 지성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러한 공격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공격의 논리적 결과들이 심지어는 실천의 영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통탄할 만한 저성적 몰락인데, 그것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들을 취급하는 분야들을 제외한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분야들에서 나타났다. 지성이 오래동안 이론적으로 위협을 방아왔기에, 비록 이성이 실천적으로 그 기능을 멈춘다 해도 놀랄 것도 없을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리츨(Ritschl)이 그들 자신의 지성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한 세대 가량의 끈기 있는 연구들을 대신하여 신약 성경 연구의 분야에 나태한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나타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하는 것은 타당한 말이다.
오늘날의 지성적인 쇠퇴는 교회나 종교에 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때때로 지성적 쇠퇴는 엉터리 같은 교육학 이론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사실(fact)들을 배우는 노력을 경시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교육의 영역에서 사실들이(facts) 어려운 시기를 비내고 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그 책이나 강의가 포함하고 있는 바를 단순히 지성 속에 저장한다는 옛날식 개념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 년쯤 전에 나는 한 유명한 교육전문가가 동료 대학 교수들에게 어떤 조언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은 전형적인 현대적 경향의 조언이었다. 사실상 그는, 대학 교수가 가르쳐야만 한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며, 반대로 그는 학생들에게 단지 배울 기회를 제공해야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에 있어서 저항을 최소화하고 모든 힘들고 고된 수고를 피하게 하는 이 교육학 이론은 그것의 당연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이론은 현대의 교육에서 매우 통탄할 만한 쇠퇴를 초래하기 위해 젊은이의 자연적인 태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그 같은 쇠퇴가 모든 분야에서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연 과학의 분야에서는,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다. 분명히, 종교와 특히 영적인 것을 다루는 주제와 관련된 반지성주의적 경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연 과학 분야들과 그것들의 실용적 적용과 관련하여 지성에 대한 독점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결국, 심지어 그 같은 분야들에서 마저도, 그들의 독점적 주장들에 의해 유익을 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지성은 인간 정신의 고등한 관심으로부터 배제됨으로 유익을 얻기가 어렵고, 지적 쇠락이 심지어는 물질적인 영역에서 마저도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적 쇠퇴가 이미 자연 과학에까지 확장되었든, 곧 자연과학에까지 확장이 될 것이든 간에, 예를 들어 문학과 역사분야에서와 그것이 보다 분명한 언어 연구 분야와 같은 다른 분야들에서 그러한 지적 쇠퇴의 팽배는 매우 확연하다. 이러한 분야들에서의 현대 교육학의 눈에 띄는 특징은 무지의 증대이다. 교육학 이론과 무지의 증대는 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대학생은 그가 강의 시간에 무엇을 듣는가를 주의할 필요가 없고, 기억 활동은 보다 유치하고 기계적인 것이며, 그가 대학에서 실제로 해야 할 것은 그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자신의 세계를 통합하는 일이라고 배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기의 세계를 통합하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통합할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세계를 통합함에 있어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그는 질서 정연하게 사실들을 종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필요한 사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그는 정신적 소화력(이해력, digstion)을 위한 활동을 연습하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그에게는 소화시킬 음식물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흔히 말해지는 바와는 반대로, 사실상 현대의 대학생들은 사실들의 결핍으로 굶주리고 있다.
물론 우리가 진실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진실성을 장려(獎勵)하기를 바라며, 진실성에 대한 장려가 기독교의 확산에 큰 유익될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의 대학생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지나치게 진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양떼와 같이 그들의 지도자를 따르고, 그 지도자들이 말하는 적은 지식과 관련된 똑같이 진부한 구절들을 반복하고, 교수들이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통째로 삼킨다. 그리고 단지 그들이 소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종교를 능욕하는 사람들을 능욕한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용감하고 훌륭하며 독립적인 젊은이들이라고 늘 상상하면서, 똑같이 판에 박힌 일을 계속한다. 오늘날에는 초자연적 기독교로 알려져 있는 인기 없는 종교를 매도하는 것이 인기가 있지만, 물론 그것이 진실한 것은 아니다. 참된 진실성은 그 시대의 유행에 대해 저항하며, 인기 없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고, 그리스도의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한 어떤 독창적인 숙고를 하게 한다. 역사적 기독교를 믿는 우리 신자들이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격려해 주어야 할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지성의 독창성(originality)일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보수주의자들"(conservatives)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어떤 신념들을 단지 그것들이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고수하고,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에 대해서는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도리어, 우리는 진심으로 새로운 발견들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젊은이들이 현재의 지성적인 무기력을 벗어버리고, 현시대의 반지성적인 조류에 대해 생각 없이 순응하지 않고, 지성의 참된 독창성을 회복할 때에 만이, 우리의 주장이 다시 바른 권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우리는 전통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참으로 훌륭한 모든 제도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서적 기독교회를 현대적 종파들로 대체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현대 존재하는 상황들을 볼 때, 우리를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우리를 "급진주의자들"(radicals)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도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현대 존재하는 영적 상태의 단순한 지속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폭발을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유행하는 문구에 대한 현대의 무비판적인 반복으로부터 삶의 기초에 대한 어떤 진정한 검토에로 젊은이들을 일깨우기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가 어두움 속에서가 아닌 빛 속에서 번성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기독교의 부흥이 현재의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구출할 것이고, 16세기의 위해한 부흥과 같이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부흥은 인간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사역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사용하실 방법들의 하나가 지성적 자각이라고 믿는다. 현대주의(Moernism)라고 불리고 있는 퇴보적이고 반지성적인 운동, 곧 지성을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참으로 지성을 퇴화시키는 운동은 패배할 것이고, 사유(思维)는 다시 제 권리를 찾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종교 개혁은 새로운 르네상스(Renais-sance)를 동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일이 지성의 독창성이나 독립성을 억제하는 일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독창성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하며, 그것은 무지나 나태에 의해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그 주제를 다룸에 있어 독창적일 수 없을 것이다. 사실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참된 독창성에 선행된다. 현대적인 교육학 이론의 활용과 관련하여, 오늘날의 젊은이들에 의해 경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사실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인 것이다.
교육에서 사실의 우위성(優位性)을 강조할 때, 우리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생각들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즉 우리 교수들은 교단에 서고, 그리고 강의를 진행한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뿐만 아니라, 필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우리가 말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내용 전체를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시험 시간에 그 모든것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러한 제도는 온갖 독창성과 생명력을 질식시킨다는 비난을 받는다. 반면에, 현대의 교육학 전문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그는 참된 교육은 사실에 대한 암기가 아니라,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데 있다고 말한다. 공부를 단조롭고 고되게 하는 것은 지나간 시대의 일이고, 이제는 공부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self-ezpression)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난에 진리의 일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즉 교육에 있어 암기가 지나치게 중시되어 사고하는 것이 그 권리를 빼앗겼던 시대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지난날의 교육이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함에 있어서 편향적이었다면, 확실히 지금은 그 진자(振子)의 추가 한층 더 심각한 반대편의 극단의 상태로 이동해 있다. 우리가 단지 학생의 두뇌(mind)속에 강의의 내용들을 저장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고 묘사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교육 방법이 잘못 본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또 매우 요긴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으로 독립적인 사고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립적 사고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비평이나 자기 자신 만의 생각이 없이 받아들이는 학생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별로 알고 있지도 못한 것을 비평하려고 하는 학생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사고는 사고의 내용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사고의 내용은 사실이거나 혹은 사실로서 제시된 주장들이다.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는 하찮은 것, 그 자체가 생각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 사고는 그러한 하찮은 것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대의 교육학에 의해 옹호되고, 현대의 학생들에 의해 너무 잘 실천되고 있는 사고의 내용이 없는 사고의 작용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직면하여, 우리는 사실과 힘든 공부가 다시 올바른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텅 빈 머리를 가지고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무지의 증대가 세속적인 교육에 있어서 통탄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이 기독교의 영역과 성경의 영역에서는 더 심각한 일이다. 오늘날의 성경 공부반들은 흔히 흑사병이나 전염병을 피하듯이 성경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를 피한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머릿속으로 객관적으로 성경의 단순한 역사적 내용들을 안다는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때때로 담임 목사는 그 방문 설교자에게 성경 공부반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때때로 그 목사는 그 성경 공부반이 보통 어떻게 인도되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준다. 그 목사는 자기가 그 성경공부반이 매우 실용적인 모임이 되도록 인도했기에, 성경공부반을 통해 그들이 다움 주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힌트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그러한 성경공부반을 인도할 대, 나는 다음 주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힌트를 결코 주지 않는다. 그것은 힌트가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 전부가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공부반이 실제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오직 실제적인 삶 지침들만을 제공하는 성경공부반은 삶을 위해 매우 부족하게 준비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성경 공부반을 인도할 때, 나는 그들이 다른 때에는 얻지 못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적이고 역사적인 내용들을 바르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교리적인 가르침과 설교의 부재가 분명히 교회에 존재하는 현대의 통탄할 만한 무지의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력한 원인은 모든 기독교 교육 기관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육 기관은, 강단이나 학교가 아니라 - 비록 이 기관들이 중요하지만 - 기독교인의 가정(Christian family)이다. 그런데 그 기관은 그 본연의 임무의 상당 부분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중년에 이른 우리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는가? 나는 우리들 중 상당수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성경 지식을 주일학교나 어떤 다른 학교에서 얻지 못했지만, 주일 오후에 집에서 나의 어머니로부터 얻었다. 비록 나는 평범한 정신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내가 14살 때 오늘날의 신학교의 수많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기독교인 가정 출신들이다. 사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목회자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이 영어 성경의 단순한 내용들에 대해서 매우 무지한 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전적으로 학생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학생들 중의 상당수가 목사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점들은 오늘날의 목사들이 설교 속에서 가르침 대신 권면을 하고, 신학 대신 윤리를 가르쳐왔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교육기관인 기독교인 가정의 기능이 대체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사실이 교회에 존재하는 무지의 증대를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 자체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 문제를 단지 보다 멀리 후퇴시키는 것만을 해왔다. 교회의 무지는 교육기관인 기독교인 가정의 실패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설교가 교육적이고 교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주일학교들과 성경공부반들이 적용되어질 기독교에 대한 연구 없이 단지 기독교의 적용만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교회에서의 무지의 증대와 성경에 기록된 단순한 사실들에 대한 무관심의 증대 모두는 지난 백 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 그 경향에 있어 참으로 회의주의적인 - 한 큰 영적 운동에로 소급된다. 그 운동은 단지 칸트(Kant)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리츨(Ritschl)과 같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있는 평범한 남녀들에게까지도 만연된 태동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감정이나 의지를 높이면서 지성을 경시하는 것은 현대적 삶속에서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교리적 내용에 대해 어떤 것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두지도 않으며, 그 속에 일반적으로 통탄할 만한 지성적 쇠퇴가 존재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지적 쇠퇴는 특별히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견해를 견지하려고하는 사람들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반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오늘날의 종교적 문헌의 놀랄만한 특징은, 심지어 과학적 발전의 선구자로 자처하는 자들마저도, 과학적 역사적 방법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과학적 역사적 방법은, 성경 저자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약 한 세대 전에는 그러한 과학적 방법의 특징이 원리의 존엄성으로 높임을 받았고, 긴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불렸다. 그것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grammatical-historical exege-sis)이라고 불렸다. 그것의 근본적인 개념은, 현대의 학생들이 그가 말할 내용이나, 그가 성경 저자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기를 원하는 것과, 성경 저자가 실제로 말한 내용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직 후자의 것만이 해석의 주제가 된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러한 원리가 급속히 포기되고 있다. 사실, 이론상으로는 그것이 포기된 것이 아니다. 말로는(lip-service) 아직도 그것에 동의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포기되고 있다.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굳스피드(Goodspeed) 교수는 그의 신약 성경 번역에서, 중요한 문구인 "의롭게 하다"(justif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어 단어를 "똑바로 하다"(make upright)로 번역함으로 그 원리를 포기하였다. 사실 복음주의적 자유(evangelical liberty)의 기초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가 이와 같이 신약성경으로부터 제기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종교개혁 전체를 포기하고 굳스피드(Goodspeed) 교수와 함께 중세의 공로주의적 종교(merit-reli-gion)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굳스피드 교수의 번역이 종교적인 퇴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 그것이 분명하지만 - 유감스럽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론에 대한 포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바근 관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이 문제가 현대의 번역자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참된 역사가는 그 문제가 사도 바울의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의 글을 번역하는 번역자는, 만일 그가 그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번역자가 강조하고 싶은 곳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강조했던 곳을 강종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진리인 것은, 예수님께 있어서도 역시 진리이다. 현대의 저자들은 역사적 접근 방식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와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님 상을 계속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종교 문제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최근의 책들 중의 하나를 읽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발겨하게 되었다. 그 저자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죽음 이후의 존재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주장들에 대해, 어떤 역사 학도는 매우 기가 막혀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세의 삶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기호(taste)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문제이다. 따라서 그것의 답은 오직 우리가 복음서들(the Gospels)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자료들에 대한 고찰에 기초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찰의 결과는 매우 분명하다. 사실상, 천국에 관한 개념뿐만 아니라, 지옥에 관한 개념도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사복음서 모두에 나타난다. 그것은 - 옳든 그르든 간에 현대의 비평학에 의해 재구성된 - 복음서들 배후에 있다고 상상되고 있는 자료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윤리적인 가르침에 특별한 진지함을 부여한다. 그것은 어떤 비평적 과정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꾸밈없이 가득 퍼져있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러한 말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파생된 것(excrescence)이 아니라 바로 그 전체의 핵심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내세의 삶에 대한 사상을 제거하려 한다든지, 만일 이점에 있어서 여러분이 명백한 증거를 거절하려 한다면, 확실히 여러분은 해오고 있는 일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 의해서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비판적인 입장이 이제는 아주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미국인 저자들은 분명히 사실들에 대한 최소한의 음미도 없이 예수님이 그들 자신의 선입적 편견들(predilections)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세계의 이러한 반지성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지성의 수위성(首位性, primacy)을 변호하고, 특히 지식과 믿음 간에 제기된 그릇되고 파괴적인 대립을 깨뜨리는 것이 이 소책자의 최고의 목적일 것이다.
불행히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주제가 지성적이기 위해서는, 작가는 그가 대화하려고 시도하는 주제와 관련된 경험적 지식에만 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지성의 옹호자들이 극소수이기에, 지성은 그 옹호자들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옹호자들의 수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이성이 제왕의 위엄으로 여왕의 왕좌에 앉았고, 추종하는 신하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왕은 폐위되고,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찬탈자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몇 명의 비천한 추종들은 폐위된 여왕의 망명의 삶을 여전히 뒤따르고 있다. 몇몇은 용이성이 본래의 자리로 추방되고, 진리가 다시 세계를 지배할 회복의 날을 여전히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 중 가장 비천한 장에게 동정심으로 말미암아 이성이 활개 치던 때에도 그가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을 듣는 것이 허락되었다 할지라도, 이성의 추종자들은 적다, 참으로 적다.
지성에 대한 공격은 다양하고, 정교한 철학적 기초를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철학적 기초를 취급할 생각이 없다. 내가 소위 진리에 대한 상식적 견해를 둘러싸고 있는 난해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epistemology)은 수많은 흥미 있는 문제들과 몇 가지 난해한 모순(antinomy)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식론에 있어서의 모순들은 인간의 지성을 당황케 하는 다른 모순들과 같다. 그것들은 우리의 지성의 한계를 나타내지만, 그것들이 지성의 작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실용주의자의 회의주의를 믿을 생각이 없고, 진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그러면 현대의 종교적 세계 속에서, 지성이 자리를 빼앗기거나, 적어도 궁극적인 실재(reality)의 영역으로부터 쫓겨난 방식들은 무엇인가?
우선적이고 가장 분명한 것은 종교와 신학간의 구별이다. 신학은 단지 단일한 경혐의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표현법에 불과하며, 교리는 결코 영원할 것이 될 수 없고, 단순히 어떤 특정한 세대에 적합한 생각의 틀 속에 나타난 종교적 경험의 의복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신학 없이 행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학을 그 본연의 자리에 두려고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은 종교에 필수적이며, 어떠한 신학도 없는 종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어떤 독특한 신학이 된다는 것은 그 신학이 생성된 시대에 유행하는 생각의 습성에 기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최근에 여러 가지 신조들이 위대한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대신하기 위하여 생겨났다. 그 신조들은 20세기의 "사유형식"(thought-forms) 속에서 기독교를 "해석"(interpret)하고, 기독교인의 일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현대적 신앙의 공식화들이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대체하기 위해 의도된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점이 때때로 도외시 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이 같은 현대적 신조들이 역사적 신조들과 이런 저런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신조들과는 달리, 역사적 신조들은 그것의 작성자들이나 편집자들에 의해 진실하게 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신조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들이 신학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실용주의자들의 주장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신학이 영원하고 객관적인 진리가 되도록 의도되지 않고, 그것이 이 세대 속에서 신비한 경험이 옷 입혀진 단지 적합한 표호(標號)에 불과하다면, 신학 활동이란 아마도 인간과 관계된 가장 하찮은 것 중에서도 가장 무용한 것처럼 보인다.
실용주의자의 이러한 신학 활동은 분명히 과학의 진보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종류의 발전으로부터 가능한 한 배제된 것이다. 사실 과학자도 자신의 입장들을 수정한다. 때때로 하나의 가설은 사실들에 대해 더 나은 설명을 위해 만들어진 다른 가설에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오래된 가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설도 적어도 영원히 옳은 것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가설이 사실들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자리를 양보해야만 '할지도'(may) 모르나, 그것이 양보 '해야만 한다'(must)는 것을 보여 줘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비록 어떤 세대에서는 과학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아무튼 과학은 진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용주의자인 신학자의 활동은 매우 다르다. 과학자와 달리 실용주의자인 신학자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신앙 체계들마저 영구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들을 단지 어떤 특정한 세대의 사유형식 속에 나타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의 신앙 고백적 표현(symbolic expres-sion)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는 한 세대의 신학이 다른 세대의 신학과 다르게 된다는 것이 단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desirable)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는 그 같은 신학이 어떤 특정한 시대의 "사유 형식들" 속에 나타난 종교적 경험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는 최상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4세기에,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는 17세기에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신앙고백 형식들이 문자적 혹은 지성적 의미에 있어서 20세기의 진술들과 모순된다면, 당연히 20세기의 진술들에게 이제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학은 어떤 영원히 지속하는 진리의 표준에 얼마만큼 가까이 접근(approximation) 했는가의 정도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목적을 위하여 얼마만큼 봉사하고, 삶의 풍요를 증진시키는데 유익한가 또는 해로운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학적 차이에 대한 이러한 실용주의자의 태도는 단지 세대와 세대 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시대에 존재하는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도 적용된다. 몇몇 선교 사역의 옹호자들은, 선교사들이 동양인들에게 서양의 신조들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동양인의 사고가 서양인의 틀 속으로 강제로 집어넣어 질 수 없다고 한다. 도리어, 동양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동양의 토착 교회들로부터 온 다소 공식적인 신앙의 표현들을 보게 된다. 분명히, 그 같은 신앙고백 형식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서양의 온갖 풍습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기독교에 대한 신기하고 새로운 표현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그 새로운 신앙고백 형식들을 읽을 때, 불행히도 때때로 그러한 기대들은 완전히 빗나가게 된다. 때때로, 자랑했던 참신성과 독창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은, 동시대의 서구 세계의 모호한 자연주의의 가장 독창적이지 않은 반복인 것이다. 동양적 사고가 시카고의 남쪽 지역(South Side of Chicago) 사람들의 사고와 유사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대의 불가지론의 모든 평범한 표현들이 그것들을 배우는 동양의 학생들에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동양적 사고에 대한 이러한 사소한 실험들의 결과가 실용주의자의 논점을 거의 입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 한쪽에게 적합한 사유 형식들이 다른 쪽에게는 적합하지 않기에 동양적인 사고와 서구적인 구분이 매우 확연하다는 논점을 거의 입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 그 논점 자체가 완전히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이다. 그것이 널리 주장되고 있는 실용주의의 유일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용주의는 아마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끝없는 회의주의를 내포한다. 실용주의적 논리에 따르며, 두 개의 상호 모순되는 교리들이 동등하게 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자들의 생각에는, 교리는 단지 실제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의 상직적인(symbolic) 표현에 불과하고, 세대가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변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견해에 의하면 교리의 범위에 속하는 어떤 것도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