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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중에 일어나는 마장魔障
출가한 수행자나 세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신행 생활하는 재가불자나 수행을 하다보면 마장이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다.
수행중에 일어나는 마장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마장魔障이라는 것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마장이라고 한다. 마장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가있는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장애를 내마內魔라고하고, 그리고 외부의 영향으로 생기는 장애를 외마外魔라고한다.
자신의 심신心身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내마이던 밖의 영향으로 생기는 외마이던 모두 마음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모든 마장은 내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밑에서 선정에 들어 계실 때 갖은 유혹과 역경을 이겨내어 8만 4천 마군을 물리치고 새벽에 빛나는 별을 보고 우주의 이치를 깨우치시고 무상정등각을 이루셨다.
<능엄경>에서는 ‘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라고 하여 50가지의 수행중에 일어나는 마구니를 설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마장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중요한 몇 가지만 기술하겠다.
희마(喜魔) :기쁨이 넘쳐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마장.
비마(悲魔) :슬픔이 엄습하여 모든 것이 슬퍼 보이는 마장.
포마(怖魔)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포에 휩싸이는 마장.
병마(病魔) :정진을 하려면 이유 없이 몸이 아프거나 다치는 마장.
수마(睡魔)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 앉아서 정진하려면 잠이 쏟아지는 마장.
마장이라는 것은 목전目前에 대두擡頭 되는 현실에 끄달리어 마음이 흔들리거나 상심傷心하게 되면 마장이되는 것이고 반대로 끄달리지 않아 심적인 동요가 없으면 마장이 아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천지개벽을 해도 자신이 끄달리지 않으면 마장이 아니고, 여름에 모기 한 마리가 “왱”하고 날아가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안달하지 못하여 좌복에서 일어나 모기 한 마리를 잡으려고 요란법석을 떨면 마장이되는 것이다.
비단방석에 앉아있어도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마장이고 지옥이며,
가시방석에 앉아있어도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그것이 극락이다.
참선하면서 일어나는 마장 중에서 가장 큰 마구니는 단연코 잡념 망상이다.
잡념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 몸을 받고 있는 이상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참선을 하려면 우선 좌선을 해야 되는데 제일먼저 겪는 것이 귀에서 소리 나는 이명耳鳴이다.
처음에는 노랫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기차를 탄 것처럼 “철커덕 철커덕” 소리 나는 등 폭넓게 들리다가 정진을 하면 할수록 소리가 가늘어져 나중에는 풀 매미처럼 “찌이∽“하고 소리가 나는데 여기에 신경 쓰지 말고 정진을 계속해야 된다.
화두의심을 간절하게 들다보면 온몸의 정기精氣가 위로 올라오는데 그러다보면 자연적으로 혈류의 흐름이 평소보다 빠르게 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뇌속에는 가느다란 모세혈관이 있는데 혈액이 빠른 속도로 가느다란 모세혈관을 통과하다보니 혈류가 스쳐지나가는 소리인데 뇌혈관이 귀에 가깝기 때문에 귀에서 소리가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뇌에서 소리가 난다하여 뇌성腦聲이라고도한다.
정진하면서 이명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마음을 차분히 하여 화두의심에만 애를 써야 된다.
또한 정진에 집중하다보면 식광識光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식광이란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깜깜한 밤인데도 순식간에 눈이 번쩍하면서 주변이 대낮처럼 훤히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깜깜한 밤중에 순간적으로 천둥번개가 치면 번쩍하면서 주변이 훤하게 보이게 되는 것 과 아주 유사한 현상이다.
이러한 경계를 부처님께서는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는 “암실견물暗室見物”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야마野馬라는 것도 생기기도 하는데 정진하다보면 눈앞이 마치 땅위의 아지랑이 가 아른거리는 듯 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마치 말들이 넓은 들판을 질주하다보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애를 쓰며 정진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생리적 현상이니 일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이 수시로 일어나는바 천 번 변하고 만 번 변화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이니 공부하다가 죽는 사람 없으니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을 들어 망념妄念들어 오지 못하도록 힘을 써야 된다.
현재 세계적으로 불교가 가장 흥성興盛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이 절에 다니는 목적은 재난災難을 피해서 복福을 빌어 삼재팔난을 만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자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법의 궁극의 목표는 수행을 하여 마음을 정화淨化시켜 내마內魔이던 외마外魔이던 거기에서 파생되는 번뇌가 엄습掩襲해 오더라도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마음의 평화를 갖는데 에 있음을 알아야 된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다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되고, 별의별 마장을 다 겪게 되는데, 많은 마장 중에서도 “화내는 마음”이 가장 큰 마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예기치 않은 경계에 부딪치거나 하고자하는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성질을 참지 못하고 성내어 화를 내게 되면 모든 공덕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은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
산승은 해인사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가 마침 늦가을이라서 곧바로 추운 겨울을 해인사에서 맞이하며 부처님 법에 처음 입문하게 되었다.
지금은 행자생활이 6개월이어서 6개월만 고생하면 사미계를 받아 사미승이 되지만 그때만 해도 1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날씨도 힘들지만 전국 사찰 중에서 법도法度가 제일 세기로 유명한 곳이 해인사 행자실이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행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상행자上行者에 대한 규율이 엄했고 행자반장은 방장스님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일 년이면 행자지망생이 120여명이 넘게 해인사를 찾아오지만 사미계를 받을 때는 정작 10명 안팎의 행자들이 수계受戒할 뿐이어서 불가佛家에 인연 맺기가 쉽지는 않다.
행자지망생이 10명이라면 출가하여 스님 되는 사람은 1명이 채 되지 않는 비율이다.
물론 행자소임 보는 것이 육체적으로 참으로 힘들었다.
질긴 나일론 양말이 일주일에 한 켤레씩 떨어져 나갔다.
공양간에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열 손가락이 모두 갈라져 갈라진 틈 사이로 새까맣게 때가 꼈는데 행자생활 마치고 사미계를 받고 수개월이 지나도 살속에 있는 검은 때가 벗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장 힘든 것은 하심下心이다.
행자생활의 첫 번째 덕목이 하심이고 하심을 하지 못하면 행자생활은 할 수가 없다.
행자실의 법도는 “밥그릇 수” 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하루라도 절간에 먼저 들어와 절밥을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어른이다.
그러다보니 나이어린 행자에게 또는 동료행자에게 억지로 하심을 하다보면 속에서 “욱“! 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라오게 되는데 그때 그 성질을 견디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하산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물론 전국 팔도 각 지방에서 모여든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혈기 왕성한 젊은 장정들이 세속과는 전혀 다른 생활환경속에서 바쁜 일과를 소화하려니 자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순간적으로 “욱!“ 하는 마음, 즉, 화내는 진심瞋心이 커다란 마장이된다.
그렇기 때문에 발심發心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고자 불가에 입문한 사람은 반드시 “어떠한 어려움이나 난관에 봉착 하더라도 도를 이루기 전까지는 인욕 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불문佛門에 들어와야 된다.
화를 내어 대사大事를 그르치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모르고 자신은 결함이 없는데 전부 다른 사람이나, 또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다.
후학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산승은 체력만 허락이 된다면 지금도 행자생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하심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해인사 행자실이 법도가 세면 얼마나 세겠는가?
그곳도 모두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며 견딜만하고 훌륭한 수행처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첫 관문인 행자생활을 견디지 못한다면 스님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행자들이 속세를 떠나 출가할 때는 부모님이나 가족의 동의하에 출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 모르게 출가를 결행하는 경우도 꽤나 많다.
행자생활을 하다보면 가족이나 부모님들이 절에 갑자기 찾아와 행자를 붙잡고 울며불며 억지로 집에 데려 가려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행자는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여 행자실이 한바탕 뒤집어 지기도 한다.
특히 어머니나 누이인 여성의 경우가 찾아왔을 때는 울음부터 터뜨린다.
행자가 출가전의 집에 있을 때 의 긴 머리의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빡빡 깎은 민둥머리한 모습을 보면 불쌍하다고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럴 때 절 집안에서는, 행자를 집에 데려 가려고 찾아온 가족이나 부모를
“마구니”라고 한다.
동기야 어떠하든 행자는 큰마음을 내어 출가하여 일생에 한번 만나기 힘든 불법을 만나서 귀중한 인연을 맺고자 부처님 품에 왔는데,
뜻밖에 가족이 찾아와 불연佛緣을 끊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구니 가 끈끈한 혈육의 정情으로 위장하여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이것 또한 커다란 마장이다.
산승은 태백산 도솔암에서 많은 마장을 겪었다.
도솔암에서 처음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도반이 함께 정진하였다.
어느 날인가 두 스님이 하룻밤 묵고 오겠다며 산 넘어 있는 백련암에 갔다.
항상 세 명이 살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니 대낮인데도 마음이 허전했다.
워낙 깊은 산중이니 조용하기만 하다. 서서히 어두워져 밤이 왔다.
도솔암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독수공방獨守空房이었다.
밤늦도록 양초를 켜고 혼자 앉아 정진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대빗자루로 마당 쓰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련암에 간 스님들이 돌아와서 밤중에 마당 쓸 일은 없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용기를 내어 손전등을 들고 밖에 나와 마당을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방에 들어와 정진하는데 또 빗자루로 “싹‼ 싹‼”하며 마당 쓰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갑자기 공포심이 밀려왔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어 화두를 드니 마당 쓰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도솔암에서 나 혼자 살며 정중공부 할 때이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훤하게 뜨면 방안에 촛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날 밤이었다.
정적靜寂이 감도는 깊은 밤 갑자기 문에서 사람이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냥 투과透過한 것이다.
스르르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동微動이나마 발로 걸으며 손을 흔들며 들어오더니 방 한가운데 앉아있는 내 앞을 지나서 뒤쪽으로 가더니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는 일어나 그 사람한테 다가서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고 달빛이나마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위해서 문 쪽으로 함께 왔는데 순간적으로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사람이 사라진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밖에서 “스님! 계십니까?”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누구요!!” 하고 나도 모르게 방이 떠나갈 듯 하게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내 생전에 그렇게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날은 등잔을 켜고 밤늦도록 정진하였다.
깊은 산중에서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산중의 한밤중은 말 그대로 적막寂寞 그 자체이다.
나는 좌선할 때는 어두우나 밝으나 항상 눈을 뜨고 정진했다.
열길 우물속에 촛불하나 켜 놓은 것 것처럼 적적함 속에서 밤늦게 정진하는데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관棺 두 개가 방바닥에 나동그라지듯 떨어졌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관이 벌떡 일어서더니 동시에 관 뚜껑 이 “빡!!” 소리를 내며 열렸다.
관속에 있던 시체가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머리를 산발하고 눈 주위가 새까만 여자시체와 또 다른 여자는 입에 피를 흘리며 눈을 부릅뜨고 걸어 나왔다.
두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허우적거리며 나를 덮치려고 덤벼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설 겨를도 없이 앉은 채로 두 시체를 상대로 온힘을 써서 대항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의 선승이며 간화선의 거장巨匠 대혜종고선사가 젊었을 때 깊은 토굴에서 혼자 정진하는 중이었다.
산중의 토굴의 방문이 있기는 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방안에서 한참 정진하고 있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대혜스님에게 덤비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깜짝 놀라 멧돼지를 붙잡고 둘이 씨름하듯 대항하였는데,
가만히 보니 “멧돼지와 싸우는 게 아니라 손으로 자기 코를 움켜쥐고 혼자 몸부림치고 있었다”.란 고사古史가 있다.
도솔암에서는 혼자 살면 말 할 기회가 없다.
몇 달 몇 년이고 말할 상대가 없으면 벙어리처럼 살 수밖에 없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해 지더니 갑자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출가하기 전에도 친지들이나 동창모임이 있어서 회식자리에 동참하면 제일 싫은 것이 노래시키는 것이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노래는 부르지 않았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깊은 산중 청정한 도량에서 좌복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시작해서 속가 고모님 즐겨 부르셨던 “비내리는 호남선” “봄날은 간다” 등 갖고있는 실력을 총동원해서 반나절 동안은 노래만 불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 노래는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가까운 도반하고 두 사람이 도솔암에서 수행할 때의 일이다.
우리는 보통 밤12시 이전에는 취침에 들지 않고 정진했다.
밤중에는 주로 석유등잔이나 양초를 켜고 정진하였지만 어떤 때는 끄름이 많이 나와서 불을 끄고 정진하는 날이 많았다.
이날도 불을 켜지 않고 정진하였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이었다.
세속의 밤12시는 깊은 밤이 아닐지 모르지만 깊은 산중의 밤12시는 상당히 깊은 한 밤중이다. 깜깜한 방안에서 두 사람이 앉아 정진하지만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寂寞만이 흐를 뿐이다.
그야말로 열길 우물 속에서 정진하는 것처럼 적적寂寂한 정신만 홀로 독로獨露할뿐이다.
그런데 한참 정진하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무슨 소리인가하고 들어보니 훌쩍대며 우는 소리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옆에서 함께 정진하는 도반스님이 울고 있었다.
고요하고 깊은 산중의 밤에 더구나 깜깜한 토굴 방에서 울음소리를 처음 들으니 섬뜩한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못들은 척하고 정진을 계속하였다.
그 이튿날이었다.
우리는 공양당번을 보름에 한 번씩 교대하기로 정했는데 이때는 도반스님이 공양당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밥상을 가운데 두고 아침공양을 둘이 마주보고 하고 있는 중인데 입안의 혀에 이상한 것이 감지感知되었다.
나는 스님이 미안해 할까봐 기침하는 척하며 손에 입을 대고 이물질을 살짝 손안에 뱉어내었다.
공양하면서 살짝 보니 압핀(압정押釘)이었다.
나는 우연히 밥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거의 묵언하다 시피하며 정진에만 몰두했다.
그날 밤에도 밤늦게까지 둘이 정진했는데 한밤중에 또 훌쩍대며 우는 것이었다.
그날도 모르는척하고 정진에만 몰두 했다.
그 이튿날 아침공양을 하는데 이상한 쇳조각이 씹혔다.
스님 모르게 가만히 입안에서 꺼내어 살펴보니 또 압핀이었다.
이제는 문제가 달라진 것이다.
우연히 밥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공양을 마치고 마당에 나가 두 개의 압핀을 살펴보았다.
압핀이 두 개다 녹슬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밖의 마루문의 비닐에 박아놓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루문밖에는 여름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겨울에는 방한용으로 비닐로 막아놨는데 문에는 많은 압핀 박혀 있었는데 대부분 오래된 것이어서 녹이 많이 슬어있었다.
좌복에 앉아 정진을 하면 화두는 십만 팔천리로 도망가고, 도반스님이 밤에 훌쩍대며 우는 생각,
공양할 때 입속에서 압핀이 나온 일들 때문에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造化인지 온통 그 생각들로 머리가 꽉차있었다.
분명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아무소리 않고 정진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기만 했다.
그 스님이 성품으로 봐서는 절대로 그럴 행동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낮에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전혀 이상한 모습이 없어 보였다.
본인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보름정도는 계속 밤마다 흘쩍대며 울었고,
그 스님이 공양당번 할 동안 내내 아침 공양할 때는 계속 입안에서 압핀이 나왔지만 나의 공부경계에 관계된 것임을 직감하고 인욕하며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 덕분에 공양할 때는 밥을 천천히 먹게 되었고, 그 스님은 얼마 후에 도솔암을 떠났다.
이러한 경우는 나와 그 스님의 피차의 마장인데 나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대처를 잘했다고 사료思料된다. 그 스님의 경우는 갑자기 슬픔이 엄습해오는 비마悲魔라는 장애가 일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스님 자신도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인지認知 하지 못하는 점으로 보아 도반스님을 통해서 산승을 공부시키기위해서 불보살이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마장은 수행할 때는 그림자가 따듯이 항상 따라다닌다.
내마이던 외마이던 자연발생 할 수도 있고 불보살이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역경에 밀어 넣을 때도 있다.
그러한 선지식을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고 한다.
이럴 때는 좋은 공부거리를 만났다 생각하고 정면 돌파 해야 된다.
“마를 도道에 활용하라”는 것이다.
도솔암에 들어간 지 3년만인 1988년도 4월 달의 사건을 잊지 못한다.
하루 종일 “뱀” 때문에 시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도솔암에 입산해서 3년 동안 한 번도 뱀이 보이지 않다가 하루에 수백 마리의 뱀들이 난리를 친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때의 뱀 사건은 ‘함양 문수사 daum 카페중’ <태백산 도솔암 수행일기> “(4)뱀 사건 (5)마魔를 도에 활용하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어 보시기 바란다.
2016년도 올해 여름 문수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산승의 경우는 여름철에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밤중에 세탁을 한다.
빨래를 하면 밤새 마루에 있는 건조대에 널었다가 아침에 해가 뜨면 마당에다 내다놓는다. 내가 거처하는 주지실의 구조는 잠자는 방에서 문하나 열면 바로 세면장인데 그곳에 수돗물 받는 세숫대, 수세식 변기, 세탁기, 등 좁은 공간에 모두 함께 있다.
그날이 8월1일 밤 10시쯤으로 기억된다.
그날 밤은 날씨도 흐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내가 거처하는 방에다 빨래를 널기로 했다.
세탁을 끝내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방바닥에다 쌓아놓고 잠깐 세면장에서 일을 보고 방에 들어와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빨래가 제법 많았다.
빨래를 “툭툭!!” 털어서 옷걸이에 껴서 널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뭔가 새까맣고 긴 것이 “탁!“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뭐지!”하고 쳐다보니 새까만 뱀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큰 뱀은 아니었지만 한 밤중에 잠자는 방까지 뱀이 들어왔다는 것이 황당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가구家具밑으로 뱀이 도망가면 밤중에 난감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얼른 수건으로 뱀을 덮어씌우고 손으로 움켜잡았는데 그 와중에도 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비집고 나오더니 몸통을 돌려 나의 손등을 물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간신히 뱀을 제압하여 빈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닫아 마루에 내다 놓았다.
그리고 공양주소임을 보는 “안 보살” 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빨래 속에서 뱀이 나왔으니 보살도 세탁할 때 조심하라”고 했더니 “세탁기에는 물 주입구에 철망이 있어서 뱀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세탁기의 물 주입구를 풀어서 확인해보니 가느다란 철망이 있어서 뱀이 세탁기의 물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뱀이 어디로 들어 왔단 말인가?
뱀이 들어왔다면 물 빠지는 배수구를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인데 배수구는 원형철망으로 덮여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뱀이 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후 부터는 물을 버릴 때 이외는 덮개를 덮어놓았다.
그 이튿날 8월2일 아침이다.
문수사에서 함께 살고 있는 “법진처사”에게 어젯밤에 일어났던 얘기를 하면서 뱀을 산에 놓아주라고 부탁을 하고 방에 들어와 의자에서 앉아있었는데 베개가 있는 머리맡 이부자리 밑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새까만 뱀이었다.
머리 쪽 반은 요밑에 있고 꼬리쪽 반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살그머니 마루로 나와 방비와 쓰레받기 그리고 플라스틱 통을 갖고 방에 들어와 이부자리를 살짝 걷고 얼른 빗자루로 쓰레받기에다 뱀을 담아서 통속에 집어넣었다. 통속을 보니 어젯밤의 뱀하고 크기도 색깔도 똑같은 뱀이었다.
어젯밤에 두 마리의 뱀이 함께 방에 들어왔는데 한 마리는 빨래 속으로 들어가고 한 마리는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밤새 뱀과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것이다.
그 후 2016년 9월27일 밤 2시쯤에 있었던 일이다.
취침 중에 요의尿意가 있어 소변을 보고 방문을 닫는데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슬리퍼가 문틈에 끼어서 잘 닫히지 않는가 생각하고 살펴보니 슬리퍼는 정상적으로 잘 벗어 놓아있었다.
다시 문을 닫았는데 여전히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여 문에 달려있는 경첩이 고장 나서 그런가하고 경첩이 달린 문아랫쪽을 쳐다보니 문과 문틀 사이에 이상한 것이 끼었는데 사르르 움직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검정무늬가 있는 주황색 뱀이었다.
뱀이 세면장에 있다가 내가 방문을 열어놓고 소변보는 사이에 방에 들어오려다 문이 닫히자 문틈에 끼었던 것이다.
세면장의 배수구를 막아놓았는데 어디로 뱀이 들어 왔단 말인가!
나는 뱀을 주시하면서 어떻게 뱀을 잡을까 연구하고 있는데 뱀이 재빠르게 벽사이의 틈바구니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방문 아래쪽에 있는 문틀과 세면장 안쪽의 벽 사이에 틈이 벌어졌는데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별 희한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장면을 핸드폰의 카메라에 담아 놓았다.
뱀은 벽과 문틀의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온 모양인데 세면장과 땅속으로 깊게 연결되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벌어진 틈새가 방안에서는 잠자는 머리맡이고 보니 처음 며칠은 신경이 쓰이더만 지금은 잊어버리고 잠을 잘 잔다.
산승은 우연히 인연되어 2013년도 5월29일 날 문수사에 오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 11월부터 문수사 건물 문제로 법정法庭 다툼이 벌어졌다.
문수사를 중창한 비구니스님이 1999년도 5월 달에 문수사의 토지와 건물을 해인사에 무상증여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09년도 중창주스님이 한창 불사를 진행하던 중 병환으로 불시不時에 입적入寂하시게 되었다.
문제는 토지는 조계종단으로 등기이전을 했는데 건물에 대한 등기이전을 하지 못하고 입적하시어 속가俗家남동생이 건물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건물을 비워달라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 “법당등 건물을 불법으로 점거하여 사용하였다”며 사용료를 청구한 사건이다.
사건을 처리하려면 불가피하게 재판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수사는 경제적으로 재판할만한 능력이 없는 사찰이다.
신도는 사월초파일때와 동지때, 그리고 정초에 발걸음 하는 근처 할머니들 몇 분이다. 그마저 자식들이 시간이 없어서 차를 태워주지 못하면 절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형편이다.
나는 곧 바로 본사인 해인사에 보고하고 법률지원을 요청했지만 말사에서 발생한 일은 말사에서 처리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말사를 지원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없이 조계종 총무원의 법률지원팀에게 요청하였으나 법률적인 상식을 조언해줄 수 는 있지만 법률적인 지원 즉 재판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던지 사찰에서 일어난 일은 주지 임명장을 받은 사찰주지가 해결해야 될 의무가 있지만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방치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궁리 하는데 문뜩 머리를 스치듯 생각이 나는 게 있었다.
한참 전에 문수사에 와서 며칠 쉬었다간 젊은 처사가 있는데 창원에서 “변호사”를 한다는 것이 생각나 명함을 찾아서 연락하여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불자이면서 재가在家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참선까지 한다니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 인연으로 나는 변호사에게 많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변호사는 상대방에게 “문수사의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은 중창주스님 개인 재산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신도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으로 이루어진 도량이므로 문수사로 소유권을 이전하라”는 “소유권이전등기”를 거창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와중에 상대방이 태고종 모 사찰에게 문수사의 건물을 매각해 버렸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상대방과 태고종 사찰측은 정상적으로 거래했기 때문에 문수사의 건물을 원상복귀 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당시 법조계의 일반적인 소견이었다.
우리 측 변호사는 즉시로 상대방에게 “소유권이전등기 말소청구”를 소송을 제기했고 동시에 문수사건물을 매입한 태고종 사찰측에는 더 이상 처분 할 수 없도록 “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소송을 제기하는 등 재판이 시작됐는데 상대방이 골수 기독교 신자여서 변호사가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런 중에도 항상 웃으면서 “스님! 걱정하시지마세요!!” 하면서 나를 위로해준 변호사가 고마울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부처님의 은혜를 입어 2016년도 12월30일 어제 날짜로 모든 재판이 끝나 문수사 건물은 원상복귀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해인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해주어 사건이 해결되었다.
본사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물심양면으로 재판에 협조해주신 산청의 김태훈 불자님. 그리고 비구니스님 가족 송희정씨와,
함양의 배한수 불자님, 그리고 자원해서 나를 도와주는 문찬인 사무장, 또한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발 벗고 나서서 재판에 힘써준 이원기 변호사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2017년도 새해에는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가 구현되기를 희망하면서 병신년을 보내면서 인사에 갈음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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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화를 내는 마장 때문에 엄청 힘들었습니다지금은 성을 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화의 조건을 객관적 분석해보면 제가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왜 욱하고 뜨거운게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지 제 스스로도 이해 하기 힘들때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평소에는 화를 잘 안 내는데 한번 화를 내면 크게 내는 습관 때문인것 같습니다.
스님! 지난 한해 동안 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화내는 마음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화가 순간적으로 엄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화를 내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방에게 주는 마음에 상처가 크기 때문에 문제는 후유증이 크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화를 자주내면 습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항상 마음을 차분히 갖고 본인에 맞는 참선이나 염불 등을 수행하신다면 신경이 완화되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수사에 큰어려움이 해결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정유년은 사회질서가 원만하길 기원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스님법문을 접하게 되었고 도솔암수행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스님 항상건강 하시길 기원 합니다 ()
열심히 수행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원덕큰스님 안녕하세요 스님법문 읽을때마다 스님빙긋이웃는 모습이훤이보이는것같습니다 ...
한번뵙지는못했지만 수도암 계실때 수도암수행기 읽다가 마지막회를 못읽어서 참아쉬웠는대 ...
우여히 문수사를알개되어 마지막수행기를 읽었습니다 문수사를알개된이후 매일아침무수사카페를찿습니다 ...
감사합니다 ...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주시어 감사합니다.
정유년 새해에는 희망되고,
소망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고 신명난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식광(識光)이 마장이군요.
천둥 번개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순간 밝음에
이건 뭐지 했었고 특별히 궁금해 하지 는 않았지만
원덕스님 덕분에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원만불사 이루시는 정유년 되시길 발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늘 , 살아있는 법문을 접하게 된다는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떤일이 생겨도 찾아갈수있고 만나뵐수 있는
큰스님이 계셔서 저는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손을 모읍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마장 중에서도“화내는 마음”이 가장 큰 마장.
예기치 않은 경계에 부딪치거나 하고자하는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성질을 참지 못하고 성내어 화를 내게 되면
모든 공덕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평생을 화를 벌컥벌컥내며 뜻대로 안되면 잠시도 참지못하고
내키는대로 미친듯 자신을 학대하고 남을 괴롭히던 그 못된 성질머리.
그행위가 심신에 깊이깊이 두텁고두텁게 녹고배어 부처님정법 만나도 턱턱 가로막네.
사생결단으로 하고하고 해보고 전에 같으면 참지못할 걸 억지로 참고참고 하니
껍데기 육체는 모양없이 변하고 가슴은 미어터지고 소화는 전혀 되질 않고 그 야물던 몸이 쇠해가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_()_